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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59화 (159/200)

159화 진격

요새를 무너뜨리기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

뛰어난 공성 병기? 압도적인 마법사의 숫자?

물론 그것들도 공성전의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으나.

가장 훌륭한 방법은.

“전하께서 성안으로 들어가셨다! 진격! 모두 진격하라!”

바로 안에서부터 문을 열어젖히는 것.

황태자가 마르세 관문 안에 떨어져 내린 순간.

이후 홍익이 그를 따라 요새 내부의 병사들에게 검을 겨눈 순간.

전황이 뒤바뀌었다.

눈앞에서 몰려오는 병력은 그 유명한 북부와 동북부의 정예들.

오랜 시간 몬스터, 반란 세력과 전투를 벌여 온 공성전의 베테랑.

실전 같은 훈련이 중요하다고는 하나 결국 치열한 실전만 못하다.

그들이 내뿜는 살기와 압박감을 견디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부담감.

특히 수도 근처, 중부 지역에서부터 억지로 요새까지 내몰린 영주들의 병사들은.

“히이이익-!”

“뭐야! 저 병신 어디로 뛰어가는 거야!”

“주, 죽기 싫어! 죽기 싫다고!”

완전히 겁에 질려 버렸다.

그럴 만도 했다.

평생 이런 살기 어린 전쟁을 겪어 본 적 없었다.

북부와 동북부가 거친 삭풍을 막아 주는 동안 그들은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삶을 살아왔다.

물론 영주의 폭정과 착취라는 크나큰 어려움이 있었으나.

오히려 그 때문에라도 더욱 싸우기 싫었다.

왜 저 돼지 같은 자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하는가.

왜 내 부모와 누이, 형제를 굶어 죽게 만든 자를 위해 무기를 들어야 하는가.

두려움과 반감이 뒤섞인 병사들의 사기가 땅 깊은 줄 모르고 떨어졌다.

심지어.

“뭐? 지금 황태자 전하께서 성문에 내려섰다고!”

“이, 이런 그럼 얼른 기사단을 보내서 막아! 어쩌라고 여기까지 와서 보고하고 있어!”

“자, 잠깐. 우리 기사단은 안 돼. 들인 돈이 얼마인데. 다른 기사단부터 보내!”

영주들마저도 우왕좌왕, 혼비백산하여 온갖 추태를 떨었다.

평소 황태자의 악명과 북부 정예들의 전투력을 잘 아는 자들은 이미 포기한 듯 도망갈 생각이 가득하였고.

나머지들은 지금껏 사냥과 향락에만 빠져 있었는지 제대로 된 대처 하나 하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다들 정신 차리시오! 지금 요새가 함락되게 생겼다지 않소!”

그나마 요새를 지키던 책임자들이 그들에게 조금만 기분 나쁜 소리를 해대면.

저들의 신분을 내세워 버럭버럭 화를 냈다.

그야말로 엉망.

“차라리 없는 게 나았을 텐데.”

관문 책임자가 오히려 내부부터 좀 먹어가는 미련한 자들의 행태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 또한 북부와 동북부의 강함은 잘 알았다.

숫자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숫자가 아무리 많아도 이런 오합지졸로는 질 수밖에 없다.

저기 비쩍 곯은 몸으로 창을 들고선 바들바들 떠는 어린 청년을 보라.

못 먹어 허옇게 핀 버짐과 흐릿한 눈동자, 툭 튀어나온 광대까지.

저런 병사가 어찌 지금 몰려오는 베테랑들을 상대하겠는가.

처참하게 죽을 거다.

차라리 기존 요새 병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다수의 마법사와 기사들을 증원해 주었다면 전투가 한결 편했으리라.

왜 굳이 이런 불필요한 병력을 꾸역꾸역 요새가 들어찰 정도로 집어넣었는지도 의문.

갑자기 뒤바뀐 명령은 혼란을 더했을 뿐.

거기다 심지어.

“황태자! 황태자가 정문에 등장했습니다!”

“이런 제기랄! 기사단은!”

“그것이- 홍익 기사단이 앞을 막아섰습니다만-.”

불길한 말에 다급히 쳐다본 정문 방향.

붉은 갑옷을 몸에 두른 기사들이 어째서인지 황태자에게 등을 내보이며 앞에 선 요새 병사들을 공격했다.

혼란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황궁 기사단이 요새를 배신하고 황태자에게 붙었다!

병사들의 불안은 정점을 찍었고.

“설마, 버리는 패로 이용당한 건 아니겠지.”

“으으, 으으으-! 기사단! 마법사! 옆에 와서 날 지켜라!”

방금까지 기세등등하던 영주들은 벌써 꼬리를 말았다.

졌다.

관문 책임자가 직감했다.

이 싸움은 시작하기 전부터 진 거다.

황태자가 직접 성안으로 뛰어든 이상 이길 수 없다.

그가 더러운 몸뚱이를 지키기 위해 바들바들 떨어 대는 귀족들이 꼴 보기 싫어 눈을 돌렸고.

이내 정문 한가운데.

“퍽 많이도 모였군.”

붉게 웃는 황태자가 보였다.

등을 돌린 홍익이 어느새 주변 공간을 싹 밀어낸 상태.

피와 살기가 끈적하게 흐르는 가운데.

“너희들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지.”

예상하지 못한 단어를 입에 올렸다.

무엇을 제안하려 하는가.

어찌 된 일인지 분명 잡아야 하는 반역도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그의 말만을 기다리는 기이한 상황.

그만큼 황태자가 뿜어내는 기세와 고결함은 상식을 벗어났다.

태어난 순간부터 고귀함을 쥐고 태어나면 저러할까.

그가 주변에 선 자들을 오시하며 입에 올린 제안은.

“살고 싶은 자들은 투항하라. 굳이 불쌍한 자들의 피를 보고 싶지 않다.”

자비.

황당한 일이다.

그를 따르는 병력은 아직 성벽 너머에 있으며 홍익이 황태자 쪽에 붙었다 해도 다른 기사단은 얼마든지 있다.

반역의 주체는 황태자.

그를 죽이거나 잡기만 하면 싸움은 끝난다.

그런데 지금.

“죽기 싫으면 무기를 버려라. 그게 내가 너희들에게 하는 마지막 제안이다.”

홀로 수만에 달하는 병력을 앞에 두고도 자비를 베풀겠다 호언장담하고 있다.

놀람을 넘어 황당할 지경.

지휘관이 홀로 적진에 쳐들어와 죽이지 않을 테니 투항하라 하면 뭐라 할까.

보통은 미친놈이라 하지 않을까.

당장 잡아 와라, 당장 죽여 버리라 소리치지 않을까.

그런데.

“…….”

마르세 관문 안에는 기묘한 침묵만이 감돌았다.

요새를 이끄는 이들도 기사들도 영주들도 병사들도.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황태자의 패악스러움을 익히 알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가 이룬 업적들을 알아서이기도 했다.

북부의 구원자, 서부의 빛나는 별, 남부의 재해.

모두가 단 한 명, 황태자를 수식하는 호칭들.

제국의 중심이자 사방의 정보가 모두 모여드는 중부엔 이미 황태자가 이룩한 일들이 전설처럼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가장 폭군에 가까운 이, 그러면서도 제국의 구원자.

함께할 수 없는 반대되는 단어이지만 둘 모두가 너무나 잘 어울리는 모순에 가까운 존재.

하나 폭군이든, 구원자든.

그가 품은 강력한 힘만큼은 진짜.

그의 기세에 눌린 자들이 아무 말 못 하고 침을 꿀떡꿀떡 넘길 때.

“전하-!”

어디선가 높다란 외침이 들렸다.

고요했던 요새가 그곳을 주목했다.

바로 관문 너머 형성된 거대 도시 한복판.

검은 옷을 입은 자들이 급히 뛰어나온 골목.

피범벅이 된 사내 하나가 멀리 떨어진 황태자를 간절히 보며.

“성안에 악마가-!”

말을 끝맺기도 전, 날카로운 가시 하나가 특무대원의 가슴팍을 뚫으며 솟아 나왔고.

그의 어깨너머로 비죽비죽한 이빨을 빛내는 악마가 고개를 내밀었다.

입가에 걸린 잔혹한 미소.

특무대원의 몸이 말라가더니 파스스 가루가 되어 흩어졌고.

이를 삼킨 악마가 핏줄을 꿈틀거리며 몸을 더욱 불렸다.

놈이 킁킁- 냄새를 맡길 잠시.

- 크르륵, 참으로 깊고 달콤한 두려움이로구나.

입을 더욱 찢어 올렸다.

놈이 바란 풍경.

인간들의 두려움과 피.

힘의 원천이 이곳에 가득했다.

병사들의 두려움이 담긴 눈길을 받은 악마의 몸이 점차 굵게 부풀어 올랐고.

곧 도시 곳곳에서 일어난 악마들이 오만한 머리를 치켜들며 인간들을 비웃었다.

앞에는 황태자 세력, 뒤에는 악마를 둔 관문 병사들의 얼굴에 두려움을 넘어 절망이 끼었고.

악마들이 이를 양식 삼아 몸을 더욱 부풀렸다.

그때.

“관음증 환자냐? 뭘 남들이 본다고 그렇게 몸을 부풀려? 징그럽게.”

깨끗한 불향과 더불어 조롱을 담은 목소리가 악마의 귓가를 울렸다.

왜인지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져나가는 기분.

대체 무엇이 이리 강대한 힘과 적의를 품었단 말인가.

악마가 뒤에서 이글이글 타오르는 무언가를 느끼며 찬찬히 고개를 돌리자.

마주한 건.

쩌엉!

거대한 망치.

한 줄기 빛이 되어 쏘아진 황태자가 어느덧 놈의 뒤에 나타났고.

거대한 망치를 휘두른 순간, 공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악마가 일직선으로 날았다.

거대한 대로, 아무도 없는 길을 날아 도착한 곳은.

마르세 관문.

악마의 붉은 몸뚱이가 아직 굳게 닫힌 성문에 거세게 틀어박혔고.

그대로 핏물이 되어 흩어졌다.

살아생전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살벌했던 이빨 자랑도 못 해 보고 죽어 버린 악마.

다른 놈들이라고 딱히 다르지 않았다.

기사들이나 마법사들이 나설 것도 없었다.

황태자가 번쩍하면 쩌엉 소리가 울렸고, 고개를 돌려 보면 어느새 악마는 핏물이 된 뒤.

흉험한 기세를 자랑했던 놈들이 어느새 겁을 먹고 쪼그라들어 도망쳐 보려 했으나.

황태자의 눈을 피하지 못했다.

망치로 하나하나, 정성 들여 놈들의 몸뚱어리를 깨부수는 그의 얼굴에.

“으흐, 으흐흐흐-.”

광기와 즐거움이 가득 차올랐다.

정말 순수하게 악마 사냥을 즐기는 얼굴.

그저 못을 박듯 망치를 휘두를 때마다 처참하게 짓이겨지는 악마들의 끊어지는 비명만이 관문 안에 가득했고.

이내.

- 잠깐! 잠깐! 떠나겠다! 여길 떠나겠으니 살려-.

“네가 떠날 곳은 지옥밖에 없다.”

쩌억!

목숨을 구걸하는 마지막 악마까지 깔끔하게 뭉개 죽인 황태자가 핏방울 튄 얼굴을 들어.

“후우- 잠깐 소란이 있었군. 하던 말을 계속해 볼까.”

태연하게 아까 했던 대화를 이어 나가려 했다.

깨끗한 얼굴을 적신 피만 아니라면 방금 일어난 참극이 꿈이라 생각될 정도.

순간 관문 안에 있던 모두가 아찔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다잡았다.

광기가 절절히 느껴졌다.

그가 방금까지 악마를 쳐 죽였던 망치를 어깨에 메며 물어 왔다.

“자, 그래서 대답은? 투항할 거냐. 아니면-.”

전부 죽을 테냐.

자비 또는 전멸.

주르륵, 망치를 타고 흐르는 악마였던 무엇인가.

선택의 기로에 놓인 그들이 선택한 것은 결국.

“성문을 열어라.”

생존.

성문을 담당한 병사들이 검을 놓고는 마르세 관문을 열어 버렸고.

영주들에게 끌려온 병사들도 제 무기를 손에서 놓아 버렸다.

몇몇 황실 소속 기사와 마법사가 항전해 보려 했으나.

“한 명이라도 반항하면 모두 죽여라. 기사단이든 마법사단이든.”

“명을 받듭니다.”

어느새 홍익 기사단과 더불어 특무대 요원들이 자리한 상태.

열린 관문 안으로 북부 발자크 백작과 더불어 병력들이 줄지어 입성했다.

무혈입성.

하나 들어서는 북부 기사들과 병사들은 고개를 높이 들지 않았다.

요새를 지키던 병사들에게 예를 표하듯 깃발을 내리고 묵묵히 들어설 뿐.

평화의 자세.

곧 백작이 그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고개를 숙이지 마라. 결국은 제국을 지키기 위함이다. 너희들 또한 제국의 병사, 우리와 같은 처지이니 너희들의 용기와 결단이 또 한 번 제국을 지킨 것이다. 관문의 병사들이여. 너희는 너희의 일을 다했다.”

마르세 관문은 수도를 지키는 방패.

어찌 보면 전력을 낭비하지 않은 그들의 결심이 제국을 지키는 길이라는 말에 그들이 잠시나마 표정을 회복했다.

백작이 그리 그들을 위로하곤 다시 황태자를 바라보았고.

주변에 선 이들이 웃음을 참았다.

앞서 발자크가 착한 심문관의 역할을 맡기로 했던 바.

물론 나쁜 심문관은.

“맞다. 끌려온 병사들에겐 죄가 없지. 하지만. 죄 없는 병사들을 끌고 온 돼지 새끼들에겐 죄가 있지.”

황태자.

자비를 베풀어 살려 준다더니 갑자기 바뀐 말에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졌고.

“거기 기름기 번지르르한 돼지 새끼들. 내려와라. 머리를 잘라 주마.”

특히 중부 영주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이후 일 처리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황태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자리에 모여 있는 영주들이 벌인 착취와 제국법 위반 사항들을 줄줄이 읊은 뒤.

“잘라.”

짧은 명령에.

우수수, 영주들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누구도 분노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억지로 끌려온 병사들의 눈엔 오히려 기쁨이 담겨 있었고.

어차피 충성심 따위 허울에 불과했던 기사들은 눈길을 피할 뿐.

“다음, 놈들 옆에 붙어서 고혈을 같이 빨아먹었던 기사들의 목록이다.”

황태자는 결심한 듯 지금껏 비리와 악행을 일삼았던 자들을 모조리 죽였다.

뜻은 명확했다.

무고한 이들의 피는 최소로, 죄 있는 자들의 피는 최대로.

악 있는 자들의 피로 심판을 대신하리니.

곧 마르세 관문에 그들의 목을 내걸었다.

아래에는 죄명을 상세히 적은 공문과 함께.

이후 억지로 끌려 나온 영지민들을 제 일터로 보내며 한 약속 한 가지.

“가서 평안해라. 내가 통치하는 동안은 욕심 많은 돼지들이 너희 머리 위에 앉을 일이 없을 것이다.”

영주들의 폭정을 두고 보지 않겠다는 발언.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돌아가는 모두가 비록 패잔병이었으나 얼굴엔 밝은 웃음이 가득하였다.

전하께서는 역시나 강했고 생각보다 패악스럽지 않았다.

마르세 관문에서 벌어진 일이 서부, 남부에서도 똑같이 일어났다.

수도 페르마.

“반역도들이 마르세 관문을 넘어 수도로 향하고 있단 소식입니다-!”

“현재 남부에 엘프들이 나타나 평야를 가로지르고 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명을 받은 영주들이 모조리 암살을 당했다 합니다.”

“남부 플라워 밸리의 학자들과 학생들 또한 황태자 지지 선언문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습니다.”

“서부, 서부에서 대규모 병력들이 짓쳐오고 있나이다! 서부 영주들이 연합하여 막아 보았으나 한계라는 급보입니다!”

“하늘에서 밝은 빛이 한 번 번쩍이면 수십에서 수백에 달하는 적들이 나타나니. 성벽이 소용없고 성문이 무색하다 합니다!”

연이은 패배 소식이 전해졌다.

마르세는 무혈입성, 사방에서도 큰 피해 없이 진군 중.

심지어.

“동북부 공작성이 동남부 초입에 등장! 갑자기 솟아난 장벽이 동남부를 가두었단 급보입니다!”

지원을 기대했던 동남부 율리우스 공작가 또한 하르델 공작가에 발목을 잡힌 상태.

순식간에 불안감이 차올랐다.

그들 또한 들어 알고 있다.

황태자는 단순히 황성으로 향하는 것만 목표로 하지 않았다.

오는 길에 걸리는 돌부리를 모조리 부수고 있다.

지금껏 죽어 가는 제국에 빌붙어 썩은 살을 탐욕스럽게 삼키던 구더기들을 모조리 죽이고 있다.

즉 그는 이번 싸움을 핑계로 평소 제국을 좀먹던 자 전부를 죽이려는 속셈.

광인다운 행보.

절대 질 수 없다.

지는 순간 죽을 테니까, 가진 걸 모조리 잃을 테니까.

속절없이 계속되는 패배 소식에 머릿수만 많고 무능한 신하들이 덧없는 논의를 하는 동안.

끼이이익-!

갑작스레 알현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황후마마 납시오-!”

현 강철성 권력의 정점, 황후의 등장을 알렸다.

신하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은 가운데.

그녀와 함께 등장한 것은 서부 영주들을 규합하여 수도를 점령한 1황자 데카론 아이로니아.

갑작스런 등장에 다들 고개를 숙인 채 눈치만을 볼 때.

“폐하.”

황후가 이지를 잃은 부군의 옆에 섰다.

황제는 황좌에 앉아 사리 분별없이 숨만 씩씩 내쉬는 중.

“패악스러운 황태자가 여기에 오고 있습니다. 당신이 기다리던 아이가 온다는군요. 기쁘십니까. 마지막으로 기회를 드리죠. 어디 있습니까.”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고.

이에 황제는 작은 조소를 띄웠을 뿐.

황후의 얼굴이 사납게 일변하길 잠깐.

방금의 무감정함을 회복한 그녀가 뒤돌아.

“그대들은 제국의 신하들이지요.”

알현실 가득한 신하들을 내려다보았고.

마치 가축을 보는 듯한 소름 끼치는 눈동자에 그들이 고개를 더욱 숙였다.

경멸 어린 눈동자 너머 새까맣게 타오르는 악의.

“하면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의미심장한 말에 자리에 있던 신하 중 하나가 힐끔 눈을 들어 올린 순간.

“허어억-!”

자신이 본 것을 믿지 못하고 기함하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황후의 얼굴에 가득 돋아난 핏줄, 등을 뚫고 나온 새빨간 촉수들.

황자는 등에 거대한 피막 날개를 펼친 채 쭈욱 찢어진 입으로 웃고 있었다.

분명 저것들은 소문으로만 들었던.

“아, 아, 악ㅁ-!”

악마.

말을 끝내기도 전 알현실에 새까만 악의가 들어찼고.

강철성을 넘어 수도 페르마 전체가 물들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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