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진짜 강철 가짜 강철
데카론 아이로니아.
첫 번째 황자이자 황태자 위에 가장 가까웠던 사내.
일신의 무력만으로도 다른 황손들을 압도하며 더 나아가 동남부와 황후의 지원을 등에 업은 자.
강인하고 거센 철사자란 이명 뒤에 권력이라는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르던 그였다.
제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 싶으면 모두가 그를 찾아 대었고.
항상 선봉에 서서 승리를 이끌었다.
그가 이끄는 철사자 기사단은 언제나 명예로운 자리에 섰고 승승장구했다.
누구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데카론 아이로니아, 1황자야말로 황제가 될 이.
당연한 사실이라 생각했다.
어쩌면 자만했을지도 모르겠다.
자신보다 뛰어난 이는 없다고, 당연히 이 제국을 물려받을 것이라고.
그런데 어느 순간.
“뭐? 북부에 나 대신 누가 간다고?”
“저, 황후 마마께서 아르한 황자를 보내겠다 하셨나이다.”
“아르한, 아르한- 몇 번째였지, 그 발칙한 녀석이.”
몇 번째 황손인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경쟁자라 하기도 뭣한 녀석이 신경을 거슬렀다.
처음엔 그저 고약한 상황이라며 넘겼다.
망나니라 불리며 황실의 명예만을 실추시키던 녀석을 북부에 보낼 때까지만 해도.
놈이 북부를 제대로 다룰 수 있을 리 없다 생각했다.
당연히 거기서도 패악을 부릴 것이고 오히려 이를 이용해 북부의 반역을 부추길 수도 있겠지.
하면 그때 자신이 나서 북부의 반역이든 몬스터들의 준동이든 다 막아 내면 될 일이다.
오히려 즐겁기까지 했다.
“아하하- 다들 검을 잘 벼려 두도록. 곧 우리가 나설 일이 생길 거다.”
“들었지? 다들 준비해 놔. 우리가 수습해야 할 일들이 많을 테니까.”
“북벽 기사단의 실력이 그리 좋다던데 한번 보죠.”
데카론뿐만 아니라 그를 따르는 철사자 기사단도 자신만만했다.
북부에서 벌어질 사건을 기다리던 때.
들려온 건 의외의 소식이었다.
“반역? 아르한 황자가?”
“폐하께서 녀석에게 북부를 이끌 전권을 주셨다고?”
“모닥불이 폭발해? 북부 병력이 다시 진격을 시작했어?”
그것도 연이어서.
미친 황자가 전대 백작을 대동하고 반역 소동을 벌였다는 것부터 황당하건만.
어전에서 욕을 지껄였단 이야기, 폐하가 거기에 동의했단 말에 데카론이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북부에서 들려온 승전보에 데카론과 철사자 기사단은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어 버렸다.
죽으라 보낸 자리에서 승리를 일궈 버렸으니 할 말도 없다.
감히 놈 같은 망나니가 쥐기에는 너무나도 큰 행운.
다음번엔 다르리라.
황후께선 다시 놈을 서부라는 척박한 사막으로 보내었고.
또 다른 동생을 보내어 상잔을 벌이도록 안배했다.
지난번 북부를 방치했던 것을 이유 삼아 이번엔 황후의 말을 따르는 자들까지 같이 파견했다.
어떻게서든 망치기 위해.
마음에 일말의 불안감이 일었으나 지난번과 같은 행운은 없으리라 믿었다.
항상 그래 왔듯 정적은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그가 누릴 영광은 자신의 것이 되리라.
그러나.
“서부 사막에 내리던 비가 그쳤습니다.”
“이런 제기랄!”
기적이 또 벌어졌다.
서부에 준동한 악마들을 멸했고 심지어 부족들을 통합하여 세력을 꾸렸단 이야기에 분노가 치솟았다.
왜 내가 누릴 영광을 놈이 훔쳐 간단 말인가!
뿐만 아니라.
“전하! 지금 서부에 폭격이-!”
자신을 놀리기라도 하듯 쏟아져 내리는 폭격과 이를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굴리는 멍청한 영주들의 꼴에 살기가 치밀 정도.
결심했다.
“영주들은 모든 병력을 모아라.”
이대로 있다간 당하리라.
“미리 경고하건대 너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할 거다.”
그의 스산한 경고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 서부 영주들이 저들의 남은 돈을 짜내어 병력을 규합하기 시작.
수도 주변에 점차 못 보던 군세가 모여들었으나 누구도 감히 이를 지적하지 못했다.
수도에 흉흉한 분위기가 매일같이 팽배한 가운데.
망나니, 인간말종이라 불리던 놈이 황태자 자리를 꿰찼다.
황태자 임명식에 가지 않았다.
자리에서 놈을 마주하면 어떤 짓을 할지 몰라서.
그렇게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에 섰던 데카론은 뒤로 밀려났고 어디서 굴러먹던 놈인지도 모를 경쟁자로 보지도 않던 아르한이 황태자가 되었다.
이후 행보는 극과 극을 달렸다.
데카론은 칩거하여 치욕의 시간을 보내었고.
황태자가 된 아르한은 그야말로 승승장구했다.
남부, 플라워 밸리와 스프링 필드에서 벌어졌던 전투와 승리.
엘프들이 사는 원시림의 변화.
이후 동북부와 북부의 연합까지.
모든 것이 자신이 누려야 할 영광이었는데.
“네놈이 빼앗았다! 감히! 감히! 인간말종에 쓰레기에 불과했던 네놈이!”
황태자를 마주한 데카론의 입에서 격노가 터져 나왔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살기와 분노가 삼엄했다.
철사자라는 별명답게 회색빛 마나가 갈기처럼 몸을 휘감았고.
몸을 넘어 검까지 날카로운 마나가 치달았다.
검의 극의에 다다른 소드마스터들만이 해낼 수 있는 신기.
그 또한 그동안 논 게 아니다.
치욕을 감내하며 스스로를 갈고닦았고 마침내 벽을 허물었다.
“너는 오늘 여기서 죽는다. 허락되지 않은 자리를 탐낸 벌이라 생각하거라.”
그가 으르렁거리듯 황태자를 겁박하며 기세를 뿜어내었고.
높은 곳에 위치한 데카론의 검이 황태자의 검을 짓눌렀다.
산봉우리가 떨어지듯 거센 검격에 악의에 물든 수도 성벽이 요동치며 짓눌렸다.
단 일격이라 생각하기 힘든 신위.
그러나 이를 앞에 둔 황태자는.
“지랄하네.”
그저 비웃음을 얼굴에 띄웠을 뿐.
철사자 데카론의 장기는 중검(重劍).
그의 무거운 검을 이리 정면에서 받아 내고도 멀쩡할 이는 몇 없다.
잠깐의 허세인가?
“누가 네게 황제 자리를 허락한다더냐. 폐하께서? 아니면 그 빌어먹을 네 어미가?”
“어디서 감히!”
데카론이 분노하여 다시금 황태자를 짓뭉개려 했으나.
“누가 네게 제국의 천명을 맡겼냐 물었다! 답해라! 수도에 가득 악마들을 풀어 놓은 자가 어딜 감히 제국의 운명을 쥐겠다 지껄여!”
황태자의 분노가 불꽃처럼 터져 나왔다.
동시에 황태자가 쥔 기형검이 기묘한 소리를 내며 점점 데카론의 검을 밀어 올렸다.
데카론이 산과 같이 묵직했고 사자와 같이 용맹했다면.
“제국의 자존심마저 팔아먹은 놈이 어디서 자리를 논해!”
황태자는 그야말로 뜨거운 불.
분노와 광기가 가득한 광염.
이내 황태자의 검과 데카론의 검이 팽팽한 높이까지 도달했고.
“악마의 힘을 빌리기로 작정한 순간부터 넌 졌어.”
“웃기는 소리!”
황태자의 선언에 1황자가 코웃음을 치며 성벽까지 베어 낼 기세로 밀어붙였다.
끄드드득, 황태자의 신형이 뒤로 밀리기 시작.
놈이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자.
“좋냐? 고작 이거 이기고 좋아?”
황태자가 더욱 거세게 형을 비웃었고.
“이 건방진 새끼가!”
데카론이 질척하게 귓가를 울리는 비웃음을 떼어 내듯 황태자를 멀리 날려 보냈다.
공기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수도 페르마 한복판으로 날아간 황태자가 건물 외벽에 검을 박아 넣으며 우뚝 멈추곤.
“고작 이거야? 힘 좀 내봐. 이 빌어먹을 새끼야.”
짙게 웃으며 온몸에서 불을 피워 내었다.
푸르른 녹염과 붉은 적염이 악의를 잡아먹으며 번져 나갔다.
온 수도를 태워 버릴 듯.
순식간에 그리고 맹렬하게.
뜨거운 온도를 따라 공기가 역류했고.
불과 악의를 발아래 둔 황태자가 흩날리는 백금발 사이, 형형한 눈으로 미련한 황자를 꾸짖었다.
“수도의 사람들을 제물로 바친 결과가 고작 이 정도냐!”
제국민들을 제물로 바쳐 얻은 힘이 고작 이 정도냐고.
더욱 힘을 내보라는 재촉에 데카론이 얼굴을 찌푸리는 사이.
퍼엉-! 불을 뿜어낸 자리, 사라진 황태자가 어느새 황자의 뒤에 떠올랐다.
우악스럽게 휘두른 브레이커.
마나로 몸을 감싸 이를 받아 낸 데카론이 이번엔 역으로 날아갔고.
황태자가 황금빛 빛줄기가 되어 그를 앞질렀다.
그대로.
망치를 휘둘러 날아가는 데카론을 아래로 때려 박는 순간.
놈도 검을 휘둘러 대항해 보았으나 역부족.
콰르르릉!
벼락 터지는 소리와 함께 데카론이 바닥에 처박혔고.
일렁이는 땅이 터져 오르며 충격파를 발산했다.
수도의 한 구역에서 시작된 전투.
“진격하라!”
“막… 아라……!”
황태자가 뿜어 낸 번개를 신호탄 삼아 황태자의 세력이 수도 페르마로 진격.
악마들과 오염되어 버린 수도 방위군이 앞을 가로막았다.
살라스가 거센 철로 놈들을 밀어냈고.
안드레가 선봉에 서자 폭풍이 휘몰아쳤다.
발자크 백작과 바이올렛이 북부 기사들을 이끌고 악마들을 베어 냈다.
뿐만 아니었다.
블러디가 신비를 이용하여 적들을 옭아맸고 엘프들이 원시림을 타넘듯 덩굴 사이를 활보하며 적들을 찌르는 동안.
특무대와 정보부가 그들을 보조하며 잔여 병력을 무참히 분쇄하는 중.
“불어라!”
이엘의 외침에 다시금 북소리가 수도 페르마 주위를 울렸고.
홍련의 주인과 제사장들의 춤사위를 따라 짙은 오색 염료가 앞을 가로막은 악의를 스멀스멀 밀어내니.
염료가 닿은 구역에선 오염된 자들과 악마들이 힘을 쓰지 못했고.
사이에 몸을 숨긴 사막 전사들이 모래를 유영하듯 염료 속에서 곡도를 휘둘렀다.
터지는 피와 악의, 분노.
짓쳐 드는 황태자 세력의 압력이 만만치 않았다.
그들이 강한 이유도 있겠으나.
“너, 그 불을 어디서 얻은 거냐.”
바로 황태자가 뿜어내는 저 붉고 푸른 불.
저 빌어먹을 불이 지금 수도를 감싼 악의를 정화하고 있다.
데카론의 물음에.
황태자는 그저 치솟는 분노로 답했다.
브레이커를 떨치자 사방으로 퍼져 나간 검 조각들이 불을 이었고.
거대한 그물망으로 변하여 데카론을 휘감았다.
그가 회색빛 검기를 내뿜어 불을 베어 내려 했으나.
꺼지지 않는 불이 오히려 그를 칭칭 감았다.
이에 황태자가 다시금 망치를 내리쳤고.
다시금 벼락과 불이 파도처럼 일어나 데카론을 뒤덮었다.
중검과 망치가 부딪칠 때마다 주변 땅이 퍽퍽 패였으며.
스치는 힘에 건물 일부가 뚝뚝 떨어져 나갔다.
결국 중검과 망치의 힘겨루기는.
퍼억.
망치의 승리로 끝났다.
황태자가 휘두른 진생철퇴가 데카론의 어깨를 때린 순간.
그의 몸이 한쪽으로 허물어졌고.
짙은 불이 짓눌린 부위를 서서히 태워 들어갔다.
메케하게 피어나는 살 타는 냄새와 연기 사이, 살기 가득한 눈빛을 나누는 형제.
“왜, 잃어버린 불을 보니 반갑나? 후회되고 막 그러지? 이럴 줄 알았으면 내 쪽에 붙을걸 하고 말이야.”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네놈이 뿜어내는 불마저 내가 빼앗으면 그뿐이다.”
“악마에게 먹힌 그 지저분한 몸으로? 너야말로 웃기는 소리 하지 마라. 너 따위가 가질 신비가 아니다.”
“큭큭큭- 오만하구나. 그래 네놈은 원래 패악스럽고 오만한 놈이었지.”
잠시 황태자를 비웃던 데카론이.
“너만이 신비를 갖고 있을 거라 생각지 마라.”
기울어졌던 몸을 바로 세웠다.
분명 악마도 뭉개 버렸던 진생철퇴에 맞았건만 그의 어깨는 멀쩡한 상태.
거기서부터 시작한 기운이 곧 온몸을 타고 번져 나갔고.
데카론의 몸이 회색 강철빛으로 물들더니.
갈기처럼 타오르던 기운에도 전염되어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었다.
철사자(鐵獅子).
데카론을 이르는 호칭이기도 한 이름대로.
촤르륵.
신비를 함빡 머금은 몸과 오러가 철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위협적으로 비죽거렸다.
황가는 불의 신비를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으나.
철의 신비는 아직 잃지 않았다.
그것마저도 희미해져 모든 황손이 이어받지는 못하나.
살라스가 금속 마법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듯.
1황자 데카론은 몸을 철과 같이 변화시키는 신비를 갖고 태어났다.
이후 고련을 통해 신비를 마나에까지 전이시켰고.
비로소 철사자란 이명에 맞는 기품을 갖추었다.
그가 새파란 물빛 눈동자에 살기를 듬뿍 담아 으르렁거렸다.
“불은 너에게 있을지 몰라도 강철은 나에게 있다.”
그의 말대로였다.
황태자의 망치질에도 부서지지 않는 몸은 강철.
심지어 그의 마나마저도 신비를 가득 머금어 날카롭게 날을 세웠고.
그 모습이 웅장하여 악의가 가득한 땅에서도 고귀함을 뿜어냈다.
황제에 가장 가까웠던 자다운 면모.
이번엔 자신의 차례라는 듯 검을 휘둘러 황태자를 압박했다.
처음 내디딘 발에 땅이 우그러졌고.
그가 내뻗은 검에 공간이 일그러졌다.
신비를 품은 마나가 주변을 휘감더니 가시밭이 되어 사방을 차단.
천천히 내뻗는 검에 담긴 거력에 악의마저 올올이 찢겨 나가 본래 땅이 드러날 정도.
철사자 첫 번째 발톱 – 참(斬).
철사자 첫 번째 걸음 – 억(抑).
보법과 검법의 합일로 상대를 억누르고 옭아매어 베어 내는 한 수.
중검의 묘리를 실은 살상기.
역시나 황태자는 억눌린 몸을 어찌하지 못했다.
불은 아름답고 치명적이지만 가벼운 법.
무겁고 단단한 철 앞에선 결국 스러지게 되어 있다.
위에서부터 내리 닥친 철사자의 검이 황태자의 쇄골에 도달하였고.
그대로 몸을 잘라 내려는 순간.
카앙!
철사자의 검이 가로막혔다.
딱히 무언가로 막은 건 아니었다.
그저 황태자의 몸을 자르지 못했다.
데카론이 더욱 힘을 주어 황태자의 몸을 가르려 했으나.
지금껏 가로막은 모든 걸 잘라 내 왔던 검이 움직이지 않는다.
놈의 눈에 깃든 당황을 바라보며 황태자가.
“왜 너만 강철의 신비를 품었다 생각하는 거냐. 오만하기 그지없구나.”
역으로 데카론의 검을 몸으로 받아 내곤.
“좋아 그럼 누가 가짜 강철이고 누가 진짜 강철인지 비교해 볼까.”
사방으로 퍼뜨렸던 브레이커를 불러들였다.
진생철퇴는 등 뒤에 기대 둔 채.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힘을 다해 브레이커를 데카론에게 휘둘렀다.
드워프들이 기껏 심어 준 기능도 해방하지 않은 채 처음 모습 그대로 순수하게.
키이이익!
철사자의 몸을 긁었다.
날에 가득한 이빨이 고속으로 회전을 시작함과 동시에.
데카론이 감싼 갈기를 파고 들어가는 브레이커.
뜻은 명확했다.
잔재주 없이 누구의 몸이 더 단단한가 부딪혀 보자.
가장 원시적이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
방어는 없다.
오직 공격.
서로의 몸을 향해 검을 휘둘러 먼저 깨지는 강철이 가짜.
황태자의 도발을 이해한 데카론이 마주 중검을 휘둘렀고.
둘의 검이 서로 마주치는 일 없이 상대의 몸만을 탐욕스럽게 갉아먹었다.
황태자가 휘두르는 검은 날카로운 소리를.
데카론이 휘두르는 검은 묵직한 소리를 냈다.
두 소리가 뒤섞여 주변을 가득 메웠고.
둘의 날 선 공방 속 충격파가 주변 몇십 미터에 달하는 범위까지 몰아쳤다.
악의와 불이 밀려나 둥근 막을 형성할 정도.
그 속에서 황태자와 철사자가 서로의 몸을 끝없이 물어뜯었고.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 드러난 결과는.
“너의 것이 가짜로구나.”
명확히 갈렸다.
비죽 웃는 황태자의 육신엔 상처 한 점 없이 깨끗했으나.
철사자가 그리 자랑하던 갈기는 모두 부서져 듬성듬성했고 몸엔 자잘한 상처들이 가득했다.
특히 마지막 일격, 가슴팍을 가로지른 깊은 상흔이 유독 참혹했다.
딛고 선 자리엔 질척한 피가 웅덩이져 있었고.
몰아쉬는 숨엔 패배가 가득했다.
철사자가 품은 신비는 가짜.
황태자가 품은 강철이 진짜.
이길 수 없다.
힘의 논리에서 참패했다.
데카론이 고개를 떨구길 잠시.
발밑에 차오르는 악의를 바라보았다.
머릿속 울리는 속삭임.
힘을 원하는가.
앞에 있는 자를 이길 수 없다.
나를 받아들여라.
모든 걸 맡기고 잠들어라, 깨면 승리를 맛보리라.
이대로 모든 것을 잃을 수는 없다.
붉게 흘린 피를 침범하는 검은 악의에 그가 몸을 맡겼고.
우두두둑-.
데카론의 몸이 급격히 부풀기 시작했다.
발끝부터 치민 검은 핏줄이 금세 그의 몸을 지나 얼굴까지 치밀었다.
기괴하게 비틀린 몸으로.
“그르르- 난, 황제가, 될 거다-.”
황좌를 갈구했고.
“측은하구나.”
황태자가 동정 어린 말과는 별개로.
브레이커에 빛을 담아 쏘아 내려는 순간.
데카론의 신형이 더욱 부풀었다.
발아래, 악의와 하나가 된 듯 가득한 핏줄.
악의를 탐욕스럽게 삼키던 그의 몸이 물경 10m가량 커졌을 때.
“다시, 다시- 다시 부딪치자! 이젠 나의 강철이 진짜다-!”
그가 다시 승부를 해 보자 소리쳤으나.
“내가 왜?”
이렇게 조지기 좋은 먹잇감을 두고.
황태자는 빛살이 되어 쏘아졌다.
한 대도 맞지 않고 신나게 때릴 생각에 신난 듯.
얼굴 가득 비열한 미소를 지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