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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63화 (163/200)

163화 핏줄

황후가 뿜어낸 악의에 휩쓸린 건 비단 자리에 있던 탐욕스런 대신들뿐만이 아니었다.

그저 강철성을 섬기는 무고한 시종들과 시녀들, 서기관들을 비롯하여 잡일을 하는 고용인들까지 전부.

가장 먼저 그녀가 뿜어낸 악의를 뒤집어썼고.

그건.

“아버지……?”

“무슨 일이니 부소장아. 여기선 소장님이라 부르라 했잖냐. 칠칠치 못하기는.”

“아니, 그게 아니라요. 아버지.”

“어허, 인석이 전하께서 그리 가르치시든?”

“창밖 좀 보세요.”

“이놈아 창밖 볼 시간에 당장 앞에 쌓인 서류부터 더 살펴봐라. 당장 제국을 위해 처리해야 할 일이 한가득-.”

“아니! 좀 보시라고요!”

아들의 다급한 목소리에 그제야 아버지가 서류에 처박다시피 한 고개를 들고선.

“저건 뭐냐?”

창밖을 보며 멍한 목소리를 내었다.

쓰고 있는 돋보기가 문제인가 하여 벗어 보았으나.

강철성을 휘감는 검은 연기는 시력과는 상관없다는 듯 여전히 꾸무럭대며 크기를 불려 나갔다.

점차 황태자 궁 근처, 기획실까지 치밀어 드는 악의를 바라보던 아들이.

“아, 아버지 도망치세요!”

아버지의 등을 떠밀었으나.

“어디로! 너는 어쩌고!”

반대로 아버지가 아들의 손을 잡고선 놓지 않았다.

그런 아버지의 답답함에.

“어서요! 시간 없어요!”

아들이 버럭 소리를 질러 보았으나.

“너 두고 어딜 가란 말이야! 이놈아! 내 아들 두고 아버지가 어딜 도망가!”

아버지가 노쇠한 몸으로 온 힘을 다해 소리쳤다.

“너야말로 도망쳐라! 가서 아이들이랑 부인을 구해야지! 엄마도! 네가 나보다 힘도 세고 살날도 많으니 가서 가족들을 구해!”

차라리 죽어도 자신이 죽을 테니 가서 가족들이라도 돌보라는 아버지의 간절한 외침.

둘의 의지는 참으로 고결했으나.

“이미 늦었어요.”

“그래, 그런 것 같구나.”

창문 앞까지 몰아친 악의를 피할 방도가 없음을 깨달았고.

“마누라, 마누라. 당신이라도 무사해야 할 텐데.”

“여보, 애들아.”

두 아버지는 악의에 먹히는 무기력한 순간까지도 제 부인과 아이들을 떠올렸다.

자신들은 괜찮다.

소중한 이들만이라도 기적적으로 피할 수 있다면.

그들만이라도 무사할 수 있다면 참으로 좋으련만.

마지막 순간, 간절한 기도를 끝으로.

거센 악의가 창문을 부수고 들이닥쳤고.

그들을 집어삼켰다.

이후 긴 꿈을 꾸었다.

악몽이었다.

아니, 현실인가?

마음속에 품었던 두려움이 현실이 되어 들이닥쳤다.

아니, 품었던 두려움보다 더욱 크고 압도적으로 둘을 짓눌렀다.

비명을 지르고 고함을 쳐봐도 그들을 구해 줄 사람은 없었고.

악의 속으로 한없이 침잠했다.

소중한 이들의 죽음, 고통, 상실이 계속하여 반복되었다.

몇 번이고 되풀이된 이야기, 조금은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아비 된 입장으로 마주하는 무기력한 비극은 매번 새로운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악의 속에서 허우적거린 지 얼마나 지났을까.

뜨거운 감촉이 몸을 감쌌고 이젠 비명마저 메말라 버린 몸을 되살렸다.

여전히 고통이 몸과 마음을 쥐어짰으나 차오르는 활기와 몸을 감싼 악의가 옅어지며 조금은 숨통이 트인 듯했다.

그러나.

끄으으으-

여보, 애들아.

분명 옅어졌어야 할 악의가 갑자기 밀려들더니 그들을 죽이려는 듯 더욱 옥죄어 왔다.

두려움과 분노를 뱉어 내라는 다급한 재촉.

죽든지 말든지 가진 걸 모두 빨아들이겠다는 탐욕.

콰장창!

그때 건물 한구석이 무너진다 싶더니.

화아악-! 말갛게 번진 빛이 그들을 감싼 악의를 소멸시켰고.

더 나아가 따스한 불이 몸을 감싸 안았다.

대체 무슨 일인가.

아버지와 아들, 황태자 직속 국정 연구소의 소장과 부소장을 맡은 부자가 악몽에서 깨어 찬찬히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깨끗한 백금발, 몸을 휘감은 불과 드넓은 등.

익숙한 뒷모습.

“전하-?”

“어째서?”

그들이 모시는 황태자 전하.

전하께서 여기 강림하신 걸 보니.

이건 또 다른 악몽인 걸까?

“시키실 일이 많이 남았습니까?”

“더는 못 합니다. 더는 못 해요. 이미 처리한 서류가 산더미란 말입니다.”

이젠 가족을 괴롭히는 거론 지겨워 자신들을 서류 지옥에 가두려는 모양.

그들이 아직 잠이 덜 깬 아이들처럼 칭얼대는 사이.

“정신이 좀 드나? 고생들이 많았나 보군.”

황태자의 목소리가 그들의 정신을 일깨웠고.

“…정말 전하이십니까?”

“전하. 지금 궁에 이상한 안개가-.”

그제야 이게 악몽이 아닌 현실임을 알아챈 둘이 급히 상황을 보고하려 했으나.

“알고 있다. 안 그래도 그걸 해결하러 온 참이야.”

이미 황태자는 모든 걸 아는 모양.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그의 어깨너머로.

- 죽여 버리겠어요- 죽여 버리겠어요- 죽여 버리겠어- 죽여서 살을 씹어 먹어야겠어요!

벌떡 일어나는 재해와도 같은 무엇인가를 보며 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치밀고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진액을 줄줄 흘리는 갑피와 인간의 얼굴 가죽을 엮어 만든 드레스가 펄럭이며 솟아올랐고.

활짝 편 얼굴 수많은 공허가 꿈틀거리더니.

콰르르르- 검은 악의를 뭉쳐 쏘아 냈다.

황태자가 망치와 검을 들어 이를 막아 내며.

“알프레드!”

시종장을 불러서는.

“이들을 대피시켜라. 아직 잠들어 있는 이들을 옮겨!”

둘을 비롯하여 무고하게 악의의 먹잇감이 된 이들을 구하라 명했고.

곧.

“승리하소서.”

뒤에서 신기루처럼 솟아난 알프레드가 두 부자를 어깨에 걸쳐 메곤 사라졌다.

건물 안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황태자가 몸을 피했고.

나름 위용을 자랑하던 건물이 순식간에 녹아 사라졌다.

황태자가 달리는 길을 따라 쏘아지는 검은 진액.

뒤따라 녹아드는 자리.

황후는 오직 황태자의 죽음을 바랐다.

황태자가 아들의 머리를 바닥에 던지고 망치로 으깬 순간.

이지를 잃은 황후가 힘을 다해 달려들기 시작.

“조금 늦게 머리통을 으깰 것을 그랬나.”

황태자가 황후, 이젠 황후였던 악마의 공격을 피해 달리며 살짝 후회했다.

일단 분노가 치밀어 저지르긴 했는데 저렇게 발작할 줄이야.

말로라도 조금 시간을 끌었다면 더 편히 사람들을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덕분에 지금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는 중.

황태자가 황후의 시선을 끄는 사이, 알프레드를 비롯한 정보부, 안드레와 청익이 성안에 있는 고용인들을 구하는 중.

그중에서도 두 부자의 안전이 계속 신경 쓰였기에 와 봤는데.

무사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뛰어다녔을까.

- 네놈!

황후가 이대로는 방법이 없다 느꼈는지.

드레스 자락을 넓게 펼치자.

인피로 이루어진 자락이 무어라 속삭였고.

우르르르, 강철성이 그들의 말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본래 강철성은 황제의 의지만을 따르는 법.

현재 황제는 이미 의지를 잃어 강철성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

한데 지금 황후가 몸에 두른 인피로 만든 드레스 자락이 강철성을 움직이고 있다.

스멀스멀 밀려드는 불길한 가정.

“그거, 설마 전대 황제들을 기워 만들었나.”

확신에 가까운 물음.

황후는 답 없이 불길하게 웃어 댈 뿐이었으나.

“빌어먹을.”

웃음 속에 담긴 긍정을 못 느낄 리가 없다.

황태자의 얼굴이 살벌하게 일그러졌다.

역대 황제의 시체를 빼돌려 인피와 남은 의념을 채취하여 만든 드레스.

황후의 죄만이 아닌 동남부가 저질러 온 죄악.

이를 두고 볼 정도로 썩어 빠진 제국의 처지가 기가 막힐 노릇.

- 황제의 시체뿐만이 아니란다. 많은 황손의 피부가 여기에 얽혀 있지. 그들의 원념, 피까지. 이 강철성을 움직이고자 한 가엾은 이들이.

“네가 감히 건드릴 육신들이 아니다.”

- 감히? 감히라는 범위는 누가 정하는 것일까? 오만한 네가? 아니면 황제가? 그럴 리가. 황제라는 직위는 결국 승리자의 것. 너 또한 그렇게 굴지 않았니. 이 제국이 걸어온 길이 그러지 아니했니.

“…….”

- 승리의 이면엔 비겁과 추악함, 무정함과 잔혹이 숨어 있단다. 누가 더 악했냐 못 했냐는 차이일 뿐. 승리란 그런 것이지. 권력이란 그런 것이야.

그리 말하는 황후의 목소리에 비웃음이 짙게 어렸고.

이젠 과거의 영광과 승리, 패배마저 잊은 전대 황제들과 황손들이 비통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순간 황태자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단상.

영림, 얼굴을 잃은 귀신들.

그중엔 분명 황손들이 섞여 있었지.

얼굴을 잃어 가면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구나.

그들의 사정을 이해하게 된 것과 별개로.

자신의 뜻을 따르라, 강철성이여 움직여 앞의 적을 멸하라.

속삭임은 계속되었고 과거 주인이었던 자들의 부름에 성이 반응했다.

강철성은 제국 최후의 보루.

황제의 뜻을 따라 적을 함정에 빠뜨리는 최후의 전선이 곧 황태자의 주변을 삼엄하게 감쌌다.

몰려드는 검은 건물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의 퇴로를 차단.

달리는 아래에는 함정을 앞길에는 둔덕을 만들어 냈다.

그 와중에도 황태자는 꾸역꾸역 불과 빛을 뿜어내면서 황후를 피해 달아나는 중.

“웃기지 마라, 승리하기 위해 벌였던 비겁함을 승리의 본모습이라 칭하지 마. 그냥 너희가 나약했던 거고 비겁했던 것뿐이다.”

- 너 또한 비겁하게 도망치고 있지 않으냐.

“지랄, 이건 전략적 움직임이라는 거다. 추악한 괴물아. 남의 시체나 누덕누덕 기워 입은 너 따위에게 들을 말이 아니야.”

- 인정하기 싫은 거겠지.

“인정하기 싫은 건 너지. 모두가 너처럼 승리를 위해 추악함을 뒤집어쓰진 않는다는 사실을.”

- …….

“왜? 할 말이 없나? 보니까 입 구멍이 많던데 반박할 말이 없나 보구나. 징그럽게 생겨서는.”

물론 와중에도 입을 쉬지 않았고.

황후의 궤변에 모욕으로 받아치며 끝없이 그녀의 주변을 휘돌았다.

잡힐 듯 말 듯, 때로는 검을 휘둘러 불과 번개를 날려 대었으나 그뿐.

- 이기는 게 정의란다. 과정은 겉치레일 뿐이지. 특별히 너의 얼굴 가죽을 벗겨 내어 드레스 자락 아래에 붙여 줄게. 그리하면 제국의 영광을 오래 볼 수 있을 거야.

“웃기는 소리. 거기 널브러진 아들 대가리나 가져다 붙여. 아, 으깨져서 그것마저 못 하려나?”

황태자의 비아냥에 황후가 더욱 그를 몰아치려는 순간.

“전하! 모두 치웠습니다!”

저 멀리 안드레의 보고가 들려왔고.

터억.

황태자가 지금껏 달리던 걸음을 멈추곤 황후를 마주했다.

타오르는 눈동자 아래에 깊이 깃든 분노가 매서웠다.

지금껏 도망친 이유는 무고한 이들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황후의 눈을 끄는 사이 안드레와 알프레드가 구할 이들을 선별하여 움직였고.

비로소.

“마음껏 날뛰셔도 됩니다!”

다른 이들의 목숨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보고에.

“후우- 남을 신경 쓴다는 일은 참 귀찮은 짓이야. 안 그래 황후?”

황태자가 남몰래 감춰 왔던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렸다.

“성미 안 맞는 짓을 하려다 보니 이거 배로 힘들군. 모두 죽이는 게 취미이자 특기인 인간이 남을 살리겠다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는 꼴이라니.”

- 의연을 가장하지 말아요. 황태자. 당신은 이미 구석에 몰렸고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선 도망 다닌 것뿐이니.

“정말 그렇게 생각하나?”

- 강철성이 나의 뜻에 따라 움직이는 이상 당신은 날 이길 수 없어.

둘이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올무가 조여오듯 강철성 전체가 황태자의 퇴로를 막아 나갔다.

황후 또한 황태자의 노골적인 뜻을 모르지 않았다.

그저 두었을 뿐이지.

그가 자신의 의도를 관철하기 위한 만용을 부리는 사이.

황후는 제 나름대로 수를 준비했다.

하늘 위에서 바라보는 강철성의 형상은 주문진, 그 사이를 흐르는 검은 악의는 의식을 위한 피.

황후는 모든 것의 중심.

황태자는 제물.

그녀가 양팔을 위로 떨치자.

흐르던 악의가 반구형으로 강철성을 뒤덮기 시작.

바깥 수도를 감싼 악의마저도 일제히 황성을 향해 내달렸다.

눈꺼풀을 닫듯, 하늘을 덮어 가는 악의와.

끝없이 파멸을 속닥이는 드레스 자락.

강철성이 신음하며 몸을 뒤트는 사이.

황태자를 바라보는 황후의 얼굴에 짙은 황홀감이 피어났다.

- 다른 것들은 모두 버려도 네 녀석만은 잡아먹으리라. 내 발아래에서 울부짖는 꼴을 보아야겠어.

그 말을 끝으로 하늘이 닫혔다.

악의만이 존재하는 공간.

햇볕마저 들지 않는 완전한 어둠.

황후가 인피로 이루어진 드레스를 펄럭이며 달려들었다.

여긴 완전히 그녀의 공간이니 어떤 힘도 관여할 수 없다.

이 자리에서 저 건방진 놈의 사지를 뜯고 가죽을 벗겨 입으리라.

그리하면 밖에서 항전을 펼치는 저 버러지들도 의지를 잃겠지.

황태자는 실수했다.

혼자 남는 것이 아닌 앞서 백작을 비롯하여 강자들을 먼저 보냈어야지.

- 네 오만이 결국 너를 죽음에 빠뜨리는구나.

모든 제국민들이 말라 죽고 나서 더는 먹을 게 없을 때 나타났어야 했다.

그러면 일말의 가능성이 있었으리라.

하지만 황태자는 어설픈 자비심으로 남들을 희생시키기보다는 본인이 남기를 택했다.

- 남들은 하지 못하는 일을 해내겠다는 그 오만. 황제는 가장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는 이. 네가 죽으면 모두가 죽는다는 사실도 몰랐느냐? 어설퍼.

결국 황태자라는 구심점을 잃은 그의 세력은 무너지리라.

황후가 황태자를 비웃으며 막 그의 사지를 찢으려는 때.

오히려 숙인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입가에 피어난 건 새하얀 미소.

어둠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백금발.

진홍색 눈동자 안에 깃든 불씨가 눈을 넘어 온몸을 타고 흘렀고.

까만 악의 안에서 유일한 불꽃이 환히 빛을 뿜어냈다.

그의 손에 들린 건 브레이커, 모든 걸 여는 열쇠.

“날 만났으면 도망쳤어야지. 그게 네 오판이고 오만이다. 이만 끝내자.”

황태자가 황후의 손이 그의 몸에 닿기 직전 브레이커를 강철성 한복판에 깊이 찔러 넣었다.

손목을 뒤틀자 울리는 자물쇠 풀리는 소리.

이어 황태자를 중심으로 강철성의 바닥에 커다란 금이 생겨났고.

황후가 이루어 놓은 진이 뒤흔들리며 거칠게 요동쳤다.

황태자가 열쇠를 돌리려는 반대 방향으로 휘돌며 이를 거부하는 중.

막 하늘을 덮은 악의가 무너져 내리기 직전.

황후가 황태자의 어깨를 잡아챘고.

이루어지는 힘겨루기.

황후는 잡은 어깨를 찢으려 했고 황태자는 열쇠를 돌리려 애썼다.

타오르는 불과 악의가 서로의 몸을 탐했다.

갈라진 틈새로 브레이커를 타고 침투한 적염과 초적염 광염, 녹염, 청염 다섯 가지 불이 용암이 되어 튀어 올랐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팽팽한 힘겨루기 속.

강철의 신비를 얻은 황태자의 어깨가 점점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왔고.

이를 따라 황후가 일으킨 공간 또한 무너져 갔다.

어느 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할 때.

“그만…….”

아주 미약한 목소리 한 줄기가 울렸다.

분명 금방이라도 스러질 듯 가늘었으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빛이 태양처럼 빛나듯 귓가에 선명했다.

악의만이 가득한 세상, 누가 목소리를 낸 것일까.

바로 아직 홀로 남은 황좌 위, 사경을 헤매던 황제.

“…아들아-.”

아버지가 드디어 아들의 존재를 인식했고.

“왔구나….”

가는 목소리로 황태자를 불렀다.

- 당신 어떻게!

황후의 얼굴엔 불안감이 황태자의 얼굴엔.

“그리 기다리시던 황태자 아르한이 왔습니다. 그나저나 너무 오래 주무시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를 향한 반가움이 교차했다.

잠시 멍한 눈으로 둘을 바라보던 황제가.

“그래… 너무 오래 잠들었어…….”

흐린 목소리로 아들의 인사를 받아넘기곤.

“멈추어라.”

작지만 확고한 뜻을 담아 강철성에 명하니.

황후의 뜻을 따라 움직이던 강철성이 그대로 숨을 죽였다.

팽팽하던 힘의 균형이.

“그거면 충분합니다.”

철컥-!

단번에 무너진 순간.

- 당신-! 어째서 이렇게까지! 내가 당신을 위해 모든 걸 해 왔는데!

“황후… 난 더 이상 그대의 꼭두각시가 아니야…….”

황제의 선언에 이어.

하늘을 감쌌던 악의가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부스러지는 악의, 공허한 분노, 황제의 굳건한 선언이 다시금.

“난 제국의 황제이며, 제국을 위하는 자이며, 악을 멸하는 건국제의 후손일세.”

황후의 마음을 잘라 냈다.

이어.

푸욱.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

황태자의 검이 진짜로 황후의 심장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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