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66화 (166/200)

166화 다시 폭우

싸움은 끝났다.

먹구름이 개고 쨍한 하늘이 얼굴을 드러내듯.

황후의 목이 떨어진 순간, 수도 페르마를 잠식했던 검은 악의 또한 사라졌다.

하지만 비 온 뒤 질척한 진흙탕이 남아 사람들의 바짓단을 더럽히듯.

“키에에에-.”

수도 곳곳, 흙탕물처럼 마르지 않은 악의와 그 속에 숨어든 악마들이 남아 있었고.

하얀 가면, 흰 검을 든 기사들이 거리를 활보하며 녀석들을 도륙했다.

나름 커다란 덩치와 더불어 날카로운 이빨을 자랑하였으나.

신철목을 다듬어 만든 백검에 닿으면 살이 후두둑 허물어졌고.

악마들을 물리친 기사들이 하얀 검을 악의에 꽂자.

백검을 타고 오른 까만 선 몇이 가면으로 흘러 들어갔다.

하얀 가면 위 검은 선으로 그린 악귀 얼굴이 떠오르길 잠시.

그들이 내뿜는 그림자가 커짐과 동시에 뭉쳐 있던 악의가 사라졌다.

이런 정화 작업이 수도 곳곳에서 이루어지는 중.

그뿐만 아니라.

“이봐! 여기 이쪽으로!”

“사람이다! 포션 좀 가져와.”

“정신이 들어요? 이봐요!”

기력이 쇠하여 쓰러진 사람들을 구하는 손길이 분주했다.

악의에 휩싸여 부정적인 감정들을 착취당한 이들이 몽롱한 얼굴로 들이치는 햇빛과 구조대를 바라보며.

“저… 살아 있는 건가요?”

삶을 확인했고.

“네,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그를 부축하는 병사의 말에.

“아아, 전하께서, 전하께서 오셨군요. 다행이다. 다행이야.”

악몽에 지친 자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끔찍했다.

속 가장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두려움에 갇혀 죽을 줄로만 알았는데.

전하께서 우리를 구하셨구나.

광장에 나온 이들이 감격했다.

그들이라고 왜 모를까.

황태자가 제국을 위해 한 일들을.

얼마나 많은 이를 구원했는지를.

이번엔 드디어 그들 차례.

황태자가 도래했고 수도를 구원했다.

비록 와중에 숨을 거둔 자들도 있었으나.

아직 많은 이가 수도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고.

웅성이는 그들 앞.

황태자가 여전히 맑은 백금발을 휘날리며 등장했다.

평소 패악스럽고 광기가 넘쳐나던 진홍색 눈동자가 지금만큼은 온기를 담았다.

자식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

“다들 눈을 감아라. 잠시 뜨거울 것이다.”

그가 아직 완전히 기력을 회복하지 못한 그들을 배려했고.

곧 푸르른 녹염이 번져 나가 그들의 마른 몸에 활기를 심어 주었다.

갈라졌던 마음이 채워지듯, 메마른 정신이 깨어났고.

그들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본래라면 기력이 다한 마음과 정신에 평생 괴로워하며 남은 생을 살아 갔어야 하겠으나.

황태자가 품은 생명은 그 후유증마저 지워 냈다.

놀라운 일.

그렇게 그들을 치유하는 중에.

“전하!”

“아아, 수도가 깨끗해졌구나.”

“돕겠습니다!”

때마침 남부에서부터 올라온 학자들과 아카데미 학생들이 도착.

비록 전투에 능하진 못하더라도 남을 치유하고 무너진 잔해를 옮길 수 있었기에 팔을 걷어붙이고 사람들을 돌보려 할 때.

“아니, 너희들이 할 일은 따로 있다.”

황태자가 그들을 만류했다.

그들은 지금 건물과 사람들을 살리는 게 아닌.

“강철성으로 들어가 황제 폐하를 알현하도록. 제국 곳곳에서 너희의 소임을 다해라.”

제국을 살리기 위해 손을 보태야 할 때.

강철성으로 쏟아져 들어가는 그들을 보며.

“으음, 욕을 어지간히 하시나 본데.”

황태자가 귀를 후볐다.

왜인지, 황제가 자신의 욕을 한가득 하고 있을 것만 같아서.

* * *

황태자의 생각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막 몰려오는 이들을 보며 황제가 속으로 욕을 뇌까렸으나.

“폐하! 제국을 위해 일하게 하소서!”

“일하게 하소서!”

제국을 위해 일하겠단 이들을 보며 어찌 불만을 입밖으로 낼까.

가장 어려울 때 발 벗고 달려와 준 이들이다.

그리고 지금 순간에도.

“내 부족함이 많았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따라 주겠는가.”

“폐하께서 보지 못하는 곳은 저희가 돌보면 될 일! 폐하께선 뜻을 공고히 하소서!”

“폐하 과거의 일을 바꾸어 나가는 것이 참회의 올바른 모습인 줄 아뢰옵나이다!”

“옥새를 빼앗기고 주변 대신들의 간악한 혀가 폐하를 흔들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이번에야말로 폐하의 뜻을 펼치소서.”

그들은 황제를 향해 충성심을 보였다.

진실을 보는 황제의 눈에 그들의 말이 파스텔톤 빛으로 밝게 번져 나갔다.

벅차오르는 감정.

매일같이 어둑한 어전에서 들었던 말은 안 된다는 이야기뿐.

옳은 말을 해도 틀린 말을 해도 욕심에 눈이 멀어 버린 대신들은 제 밥그릇을 위해, 반대를 위한 반대에 힘썼다.

그러나 지금 몰려온 이들은.

“폐하! 뜻을 펼치옵소서-!”

이제 다시 시작할 때라며 고개를 조아렸다.

아직 기회가 남았노라, 잘못된 걸 바로잡을 기회가 남았노라고, 부족한 부분은 저들이 메꾸겠노라 외치는 목소리가 얼마나 기꺼운지.

그때부터였다.

유약하다는 평가만이 전부였던 황제가.

“좋다. 자리에 선 이들은 들으라. 지난 시간 커다란 싸움으로 제국의 곳곳이 황폐하니 그대들을 보내서 빈 자리를 채우고 내 눈과 손을 대신하여 제국민들을 돌보게 하리라.”

제 뜻을 펴기 시작한 게.

이전 답답했던 묵색을 벗어 버리고 은빛으로 탈바꿈한 강철성.

지붕조차 올리지 않은 광활한 공터에 가득 들어찬 지식인들과 황제의 대담이 이어졌다.

치열한 대화.

그러나 누구도 서로의 뜻을 비하하지 않았고, 반대를 위한 반대가 아닌 실리를 위한 토론을 이어 갔다.

화려한 장식 따위 필요 없다.

머리를 가릴 지붕?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건 제국을 올바로 이끌 정확한 이성과 판단.

하루하루 이어지는 회의와 더불어 점차 맑게 개어 가는 시야에 황제가 없던 힘까지 내었다.

나아지고 있구나.

이런 보람과 충만함은 처음이었다.

올바른 결정을 할 때마다 잃어버린 눈 대신 시야를 가득 채운 신비의 변화가 상서로웠고.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합치와 논의가 즐거웠다.

그의 얼굴에 진심으로 미소가 피어났다.

그렇게.

“모두 들으라! 지금 자리에서 정한 일들과 맡은 자리에 최선을 다하여 제국을 이끌도록!”

유약하다던 황제 아우구스 아이로니아가 답지 않게 우렁찬 목소리로 모두에게 제국을 위하라 소리쳤고.

“그대들이 제국을 돌본 만큼 나 또한 그대들을 돌보겠노라!”

충의를 바치는 자들에게 은혜를 내리겠노라 장담했다.

고개를 숙이는 이들의 얼굴에 놀라움과 경의가 깃들었다.

비로소 무력했던 꼭두각시가 진짜 황제가 된 순간이었다.

눈앞에 펼쳐진 새하얀 강철성과 점차 번져 나가는 보드라운 물감들이 제국의 영광을 닮아 흡족했다.

* * *

으음, 얼핏 들리는 목소리로 미루어 보건데 폐하께선 의외로 일이 체질에 맞는 모양.

벌써 며칠 간 밥도 잠도 줄여 가며 학자들을 붙잡고 입씨름을 하고 계시다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

“무슨 저리 할 말들이 많은 걸까. 안 따르면 머리통을 깨부수면 그만인데.”

“…말이 안통한다 머리통을 깨부수면 남아나는 자들이 없지 않겠습니까.”

“으음, 보통은 한둘 깨면 나머지는 말이 통하더군. 시간과 체력을 아낄 수 있는 효율적인 방법이지.”

“확실히 효율이 높긴 하겠네요.”

“폐하께서 요청하시면 언제든 출동하겠다고 전해 드려.”

“알겠습니다.”

“진짜 전하게?”

“전하의 명이시라면요.”

알프레드의 진지한 얼굴이 농담과 진담을 구별하기 어려웠다.

눈가에 살짝 진 주름을 보아하니 웃음을 참는 모양.

어쭈, 요즘들어 황실 생활이 편해졌다 보다.

“명령이니까 꼭 전해. 내가 한 말 그대로.”

“…농담이었습니다.”

“명령이 농담이야?”

“송구합니다.”

“황실 생활 편해졌어 아주. 이거 규율부터 다시 잡아야겠구만.”

“암철단 기강 제대로 잡겠습니다.”

“괜히 애들 건드리지 마. 애들 일해야하니까.”

“명 받들겠습니다.”

그렇게 둘이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깨끗하게 닦인 강철성 한복판을 걸으려니 감회가 새로웠다.

티끌 하나 없는 매끈한 은빛 도로.

흔들릴 리 없는 표면 위로 푸른 하늘이 잔잔히 흘렀다.

얼핏 하늘을 걷는 것 같기도 한 기분.

자박자박 발아래 밟히는 구름이 그림자에 가리워지는 모양새에 눈길이 흘렀다.

강철성 본연의 모습이 생각보다 아름다웠다.

“아름답군. 칙칙했던 전보다 훨씬 나아.”

절로 생각이 입밖으로 나올 만큼.

솔직히 전에는 너무 어두웠지.

황가 핏줄들이 다 한 자락씩 광기를 품고 있었던 이유가, 어쩌면 그런 어둑한 공간에서 생활한 탓 아닐까.

건국제가 들었으면 호통을 칠 만한 일이었으나.

뭐 딱히 틀린 생각은 아닌 듯싶었다.

덩달아 본래 강철성을 물들이고 있던 색.

[여섯 번째 심장 암염이 기존 신비 그림자와 암화를 흡수하는 중입니다]

아직도 심장 어림에서 휘돌고 있는 여섯 번째 심장의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얼마나 크기가 거대한지 처음 옥새를 잡고 빨아들이는 동안 온몸이 심장이 된 듯 펄떡였지.

원래라면 흡수하는 데 며칠은 걸렸을 테지만.

의외의 조력이 있었다.

이전 영림에서 얻은 그림자와 사막에서 이루어 낸 암화.

이미 두 어둑한 신비를 담고 있던 몸이 빠른 속도로 암염을 빨아들였고.

쉬이 적응을 마쳤다.

지금은 세 가지 신비를 합하여 새로운 어둠을 빚어내는 중.

꿈틀거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어떤 모습으로 변화할지 궁금증이 일었다.

그렇게 얼핏 비치는 풍경과 위를 걷는 내 모습을 바라보며 걷다가.

깨달았다.

지금 이어 가는 헛헛한 생각들이 당장 마주할 현실을 피하고 싶어서라는 걸.

“도착했습니다.”

알프레드의 말에 아래로 떨군 고개를 들어 올리자.

하늘을 찌를 듯 선 탑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엔 묵색이었던, 지금은 은백색의 탑.

전생엔 동생이 갇혀 있었고 지금은 황녀 세린느가 갇혀 있는 탑.

어머니와 오라비를 죽인 원수가 직접 행차했으니.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겠다.

“들어가지.”

탑안으로 발을 들이밀기 직전.

“전하. 굳이 직접 마주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알프레드가 슬며시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

“저에게 맡기소서.”

차라리 자신이 마지막을 살피겠다는 뜻.

마주해야 할 현실을 피하고 샛길을 택하라는 말에.

“알프레드, 선 넘지 마라.”

“송구합니다.”

대번에 얼굴을 굳혔고 알프레드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농담이 아니었다.

충성심 깊은 건 좋지만 주군이 결정할 일에 간섭하는 건 선을 넘는 행위.

심지어 그것이 자신이 마주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더욱.

나라를 이끌 자는 항상 유의해야 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말이 조언인지 소음인지.

설사 충신이라도 때로 소음을 내기도 하는 법.

지금이 그러했다.

별다른 말없이 탑을 올랐다.

무감정한 발걸음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고.

점차 나의 감정도 고저없는 발걸음처럼 잔잔히 가라앉았다.

끼이익.

탑의 꼭대기 층, 문을 열 때쯤에는 방금의 흔들림이 거짓이었다는 듯 색 없는 얼굴이 되었고.

안으로 들어선 순간.

“…….”

잠시 멈추었다.

하이얀 방, 작게 뚫린 창문.

병적으로 백색 일색인 가운데.

낡은 커튼이 일렁였고.

역시나 낡은 탁자 위.

어색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찻잔과 이를 그러 쥔 햐안 손.

반듯이 편 허리와, 낡았으나 깨끗하게 관리된 물건들에서 억지로 귀태를 붙잡으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그러나 손톱 끝에 껴 있는 피 찌꺼기가 숨기지 못한 고통을 보여 주었고.

바싹 마른 어깨에 어린 슬픔까진 지우지 못했다.

잠깐 차를 들이켠…….

“이번엔 또 무엇을 빼앗으러 왔니.”

세린느가 감은 눈으로 물었다.

닫힌 눈꺼풀 사이에 끼어 있는 피딱지.

과거 아름답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었고.

지방이 걷힌 얼굴 깊은 시름이 주름이 되어 패였다.

억지로나마 황녀로서의 품위를 지켜왔는가.

“세린느.”

내가 들어도 차가운, 고저 없는 목소리에 세린느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마른 몸 때문에 드레스 자락이 과장되이 부스럭거렸다.

“앉아도 되겠나.”

“언젠 물어봤어?”

“그렇군. 맞는 말이다.”

애써 태연을 가장하는 세린느의 장단에 맞추어 나 또한 자연스레 앞에 앉았다.

흘러들어오는 바람에 휘날린 커튼이 나와 세린느 사이를 가렸다 내려갔고.

문득… 전생, 같은 자리에 앉아 있던 동생의 얼굴이 커튼 뒤에서 나타났다.

“오라버니. 왜 절 버렸어요?”

상처 가득한 얼굴, 처절한 표정으로 되뇌었던 질문.

글쎄, 네 미친 오라비 새끼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나는 모르지.

대답을 얼마나 속으로 되뇌었던가.

평생 작은 창문으로 세상을 보았던 어린 아이.

운명은 뒤바뀌었고.

다시 한번 바람을 실은 커튼이 올랐다 내려가자.

마법사가 요술이라도 부린 듯 자리에 나타난 세린느.

잠깐의 환상 또는 회상 끝.

“모두 죽었니.”

흘러나온 쓸쓸한 질문에.

“그래, 모두 죽였다.”

담담히 답했다.

세린느가 이미 감은 눈에 꾹 힘을 주었고.

음푹 들어간 눈꺼풀이 절망을 깊이 드리웠다.

입을 움직거리던 그녀가 마른 미소를 짓고는.

“잘됐네.”

허무를 뱉었다.

달그락 찻잔 소리, 바스락 드레스 소리와 더불어 우물거리는 혀와 입술의 마른 질척임.

차를 마셔 입을 젹셔 보았으나 쉬이 말을 꺼낼 수 없는 듯했다.

그렇겠지.

그녀가 이대로는 스스로 납득이 되지 않았는지.

“눈을 빼앗겼어. 둘에게.”

나름의 이유를 밝혔다.

미처 삼키지 못한 찻물이 입가를 타고 흘렀으나 그까짓 것에 팔릴 정신이 없는 모양.

“악마에게 바쳤지. 난 반대했거든. 아무리 그래도 악마에게 제국을 넘기는 건 아니라고. 그랬더니 눈을 빼 가더라고. 참 못된 인간들이야. 죽어 마땅했어.”

“그리곤 여기에 이리 가둬 둔 거 있지? 어이가 없어서… 원래 그랬어. 날 딸 취급, 동생 취급 하지도 않았지. 그저 권력에만 미쳐서. 네가 그랬지? 주위에 있는 게 네 사람 같냐고… 정확하더라, 나름.”

“내가 서 있던 곳은 사람의 시체를 쌓아 둔 둔덕이었고 난 그들 중 하나가 되길 거부했지. 이왕이면 둘 다 고통스럽게 죽었으면 싶었는데 어떻게 죽였는지 말 좀 해 줄래?”

“너 같은 망나니도 이런 악한 짓은 하지 않았는데. 참, 제국이 어찌되려 이랬는지. 폐하는? 아버지께선 멀쩡하시니? 그 빌어먹을 것들에게 해를 입지 않으셨어야 할 텐데.”

끝없이 말을 토해 내는 입가에서 이젠 찻물이 아닌 핏물이 배어 나왔다.

혀와 입을 피가 날 정도로 씹어 대면서도.

피딱지가 앉은 눈에서 피눈물을 흘려 대면서도.

세린느는 의연을 가장했다.

그녀의 하얀 드레스와 탁자 위에 씹어삼키지 못한 고통이 붉게 번졌다.

잠시 창밖에 보이는 말간 하늘을 보았다.

참 빌어먹게 깨끗하구나.

커튼 사이로 빼꼼빼꼼 밀려든 햇빛이 세린느의 붉은 입술과 떨어지는 피를 강조했다.

대비가 선명해 눈이 아팠다.

한없이 이어지는 말을 끊으며.

“너에게 선택권을 주려 한다.”

본래 하려던 말을 입에 올렸다.

밖에 비치는 하늘처럼 말간 목소리.

맑디맑아서 감정 하나 담겨있지 않은, 투명한 목소리에 세린느가 흠칫 몸을 떨고는.

“…선택권?”

갈라진 목소리로 되물어왔다.

“동남부, 탑, 안가. 세 가지 중 하나를 택해라. 목숨을 보전해 주지.”

“동남부엔… 안 올 생각이야?”

“갈 거다.”

“결국은 똑같이 죽겠구나. 탑과 안가는… 식물과 같은 삶이겠지. 내가 할 만한 일은 없어?”

“없다. 세린느. 난 네 적이다. 잊지 마라.”

“…적에게 마지막 자비를 쥐어 주는 거구나. 어머니와 오라비도 베풀지 않은 자비를.”

“자비일지 가혹한 형벌일지는 두고 봐야겠지.”

“그들이 날 왜 살려 두었는지 알아? 혈육의 절망이 가장 큰 힘이라서야. 너는 내 절망이 필요하진 않니?”

“필요 없다. 선택은?”

강요된 선택에.

그녀가 마침내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입을 쩍 벌려 가며.

서글프고 추레했다.

차가운 현실을 이제야 인지한 모양.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아름답고 고귀했던 황족이 아니다.

어떤 선택을 한다 해도 동남부에선 악마의 제물이 될 것이고, 탑에선 평생 외로운 세월을 보내게 될 것이며, 안가에 간다 해도 그리 다르진 않겠지.

과거의 영광을 잃은 채 외딴 섬처럼 홀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속에서 살아가야 하리라.

오히려 과거의 빛났던 순간들이 환상통이 되어 괴로움을 더하겠지.

“싫어! 싫어어어어! 싫어어어어!”

이를 깨달은 그녀가 떼를 쓰듯 고개를 저었고.

흩뿌려지는 피눈물을 바라보다.

“내일 다시 오지.”

자리에 일어나 탑을 나섰다.

나가는 문, 말라 버린 찻잔에 차 대신 눈물과 피를 담으며 몸을 떠는 황녀를 두고.

좁은 방 흔들리는 하얀 커튼만이 음산하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 * *

황태자가 탑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꾸웅-!

커다란 덩어리가 단단한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더불어 진동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생명이 부서지는 감촉.

아르한이 걷던 걸음 그대로 멈춰 질끈 눈을 감았다.

결국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구나.

“존중하겠다. 끝까지 황녀로 남았구나. 철없던 시절을 지나 마지막만큼은 고귀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마지막까지 황족이고 싶어 한 황녀의 삶을 애도하는 사이.

작은 조각구름 몇 개가 해를 가렸고.

얼굴에 피 대신 부서진 햇빛 몇 조각이 질척하게 흘러내렸다.

뜨거우면서 차가웠다.

그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왔고.

다시 뜬 눈에 담긴 건 후회도 죄책감도 아닌 잔잔한 분노.

“동남부로 가야겠다. 마무리를 지어야지.”

맑은 날은 잠깐이었다는 듯 제국 전역에 다시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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