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동남부로
요상한 날씨였다.
하늘은 맑아 구름마저 별로 없는데 쏟아지는 비가 거셌다.
보통이라면 잠깐 소나기로 그칠 만한 비건만 어인 일인지 폭우가 계속되었고.
강철성에도 연일 맑은 폭우가 쏟아졌다.
쏴아아아- 은백색 매끈한 도로와 건물 위로 빗방울이 부서졌다.
단단한 질감 위로 부스러지는 물방울들이 햇빛을 산란시켰고.
무지갯빛 물보라가 강철성을 은은히 휘감았다.
사이를 돌아다니는 새로운 얼굴들이 펼쳐진 광경을 보며 감탄하길 잠시.
급한 일을 맡았음을 떠올리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품에 안은 서류가 젖을까 전전긍긍 뛰어가는 모양새.
한 젊은 학자가 서부 영주 개편 사항과 이전 군사 목적으로 닦아 두었던 보급로를 확장하여 무역로로 활용하자는 계획 관련 서류들이 젖을까 품에 안은 채 종종걸음을 하며.
“아휴, 이렇게 비가 많이 와서야.”
등을 굽혀 보호할 때.
머리 위로 쏟아지던 비가 우뚝 그쳤다.
드디어 날이 개었나 시선을 위로 올리자.
“굳이 이러고 돌아다니나. 황가에서 움직이는 차가 있을 텐데.”
길쭉한 다리, 넓은 가슴팍과 더불어 깨끗한 백금발이 시야를 어지럽혔고.
더불어 날렵한 턱선과 우뚝한 콧날이 자리 잡은 얼굴이 보였다.
진홍색 눈동자가 의아함을 담은 채 그를 바라보는 중.
황태자 전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머리 위로 드리운 우산이 시끄럽게 비를 막아 내는 동안.
신하 된 도리로 황태자를 향해 고개를 숙인 자를 향하여.
“자, 가져가라.”
고귀한 황손이 직접 제 손에 쥔 우산을 그에게 넘겨주곤.
“알프레드, 이왕이면 차들 타고 다니라 해. 숫자가 모자라면 로이스 가문에 연락하고.”
뒤에 선 시종장에게 그들의 편의를 봐주라 명령.
시종장이 황태자의 명령을 받들겠노라 한 사이.
“고생하도록.”
그냥 자리를 떠나갔다.
우산은 신하의 손에 그대로 둔 채로.
생각 없이 이를 받아들었던 젊은이가 화들짝 놀라며.
“전하! 저는 괜찮으니 우산을 쓰소서. 옥체가 상할까 걱정이옵니다! 저는 이대로 괜찮습니다!”
떠나가는 전하는 불러보았으나.
“옥체라, 제국을 위하는 이의 몸은 다 옥체이니 자네 몸이나 신경 써. 괜히 서류 젖어서 일 처리 늦어지는 게 역모고 반역이야.”
황태자는 그저 상쾌하게 웃어넘길 뿐.
그런 그를 멍하니 바라보는 신하를 향해.
“전하께서 하사하셨다 생각하시고 편히 길 가십시오. 진심이실 겝니다.”
나이 든 시종장이 괜찮노라 확인까지 해 주곤 같이 떠나갔다.
폭우마저도 가릴 수 없는 고귀한 걸음을 바라보던 그가.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대대로 전하겠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하해와 같은 마음에 감격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손에 쥔 황금과 자개로 꾸민 황태자 전용 우산을 가문의 가보로 남기리라 그리 결심했다.
넘겨준 우산이 비싸서가 아닌.
자신의 체면보다 제국의 일을 먼저 생각하시는 태자 전하의 뜻이 귀했기에.
자신을 비롯하여 앞으로 제국을 섬길 아이들에게 이러한 마음을 대대로 물려주어야겠다고 그리 생각한 그가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입가에 띈 미소에 감동이 어렸다.
* * *
“고작 우산 하나로 사람 하나를 얻었으니 싸게 먹힌 셈이군.”
꽤 값비싼 우산이긴 했으나 단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내가 그에게 쥐여 준 우산은 고작 금덩이 몇 개의 값어치.
[대상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행정, 수완, 개혁이 어려 있습니다. 운명들이 올바른 토대 위에서 크게 자라납니다. 시간의 운명 속 값진 결과를 예측합니다]
[새로운 운명 충성심이 대상의 운명을 더욱 풍족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가 지닌 운명은 황금 무더기보다 값졌고 귀했다.
고작 우산 하나로 그의 운명을 샀으니 결코 손해 보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한참이나 싸게 먹힌 셈.
그가 이룰 일들과 손에 쥔 서류들이 서부에서 이룰 이득을 생각하니 절로 콧노래가 나올 정도.
어찌 아까우랴.
향후 십 년, 백 년은 금을 토해 낼 광산을 얻었는데.
내딛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마침 강철성 곳곳을 돌아다니는 신하들을 보자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금덩이들이 굴러다니는구나.”
크흐흐흐, 입가에 번지는 못된 웃음.
복도 곳곳에 걸어 다니는 이들의 얼굴이 황금이요, 발걸음이 보석이다.
그들이 변화시킬 제국의 운명과 속에 품은 올바른 뜻들이 어떤 진미보다도 즐거이 내 마음을 충족시켰다.
이들은 알까.
자신들이 존경과 충성을 담아 바라보는 황태자 전하가 속으론 그들을 금광 보듯이 한다는 걸.
지나가던 한 신하가 품 가득 들고 가던 서류를 와르르 쏟았고.
그중 하나가 툭 황태자의 발끝에 닿았다.
“히이익! 죄, 죄송합니다!”
그가 허옇게 질린 얼굴로 목숨을 구걸하려는 순간.
“괜찮아, 괜찮아. 어서 일어나도록. 이 귀한 손에 누가 이리 서류를 많이 들렸단 말이야. 이봐, 고용인들도 함께 서류를 옮기도록 해. 안 되면 수레라도 끌고 와 도와.”
괜찮다며 그를 다독였다.
본래라면 화가 치밀어 올랐겠으나.
빛나는 다이아몬드가 잘못을 뉘우치겠다는데.
“그리 당황하지 말고. 어서. 찬찬히 걸어. 다칠라.”
어찌 질책할까.
혹시 허리라도 다칠까 대신 내가 허리를 숙여 서류를 주섬주섬 모아 그의 손에 넘겨주었다.
앞으로 날 대신하여 많은 일을 해야 하는데 암, 건강해야지.
멍한 표정을 짓는 신하의 등을 툭툭 두들겨 주고는 다시금 기분 좋은 발걸음을 옮겼다.
이전 강철성을 돌아다닐 때면 오물 밭을 돌아다니듯 고약한 냄새와 더불어 지저분한 운명이 질척였는데.
지금 강철성은 그야말로 보물창고.
어찌 화가 나겠는가.
그렇게 기분 좋은 표정으로 도착한 알현실.
“황태자 전하 납시오-.”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아하하하, 하하하- 하하하핫!”
절로 웃음이 터졌다.
문을 염과 동시에 가득 늘어선 신하들에게서 눈이 아릴 정도로 눈부신 운명들이 피어났으니까.
이게 진정 보물창고이며 진수성찬이지.
그들이 뿜어내는 바른 기운이 어떤 고급 음식이나 와인보다 향기로웠고.
그들의 눈과 얼굴이 발산하는 제국을 위한 충정이 광맥처럼 빛을 발했다.
아아, 좋구나.
아주 좋다.
심지어 나를 바라보는 눈길에 두려움 한 점 없다.
잘못이 없으니까.
이제 알겠다.
과거 대신들이 나를 보며 뿜어냈던 두려움이 불쾌했던 이유.
잘못하고 거짓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지레 겁을 먹고 뿜어낸 냄새였구나.
이들은 당당하니 그저 말간 얼굴을 들어 정중함을 표했을 뿐.
그럼에도 화가 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손이라도 들어 인사나 해 줄까 싶을 때.
“크흠, 뭐냐. 왜 그런 웃음이야. 이번엔 누굴 죽이려고.”
황좌에 앉아 있던 황제가 미간을 찌푸리며 불안에 떨었다.
아마 저 미친 녀석이 왜 저리 기분이 좋나 싶을 거다.
“왜 기분이 좋아. 괜히 광증이 돋은 게야? 미친 녀석이 기분이 좋을 땐 좋은 일이 아닌데.”
아, 진짜 입 밖으로 꺼내는구나?
황제는 이제 더는 참지 않는 인생을 살기로 했는지.
“이번엔 어딜 박살 낼 참이냐. 계획이나 들어보자. 당해도 알고 당해야지.”
속에 담은 이야기를 솔직히 내뱉었다.
말은 저리했으나.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하늘은 맑으나 먹구름이 짙게 낀 방향이 보이실 테지요.”
황제 또한 신비를 얻은 몸.
멀리 내다보는 눈은 이미 맑은 하늘 저편 짙게 먹구름이 낀 방향을 확인했을 터.
태연한 물음에.
“그래, 동남부에 어둑한 색이 끼어 있구나. 그곳으로 가려 하느냐.”
황제가 자신이 본 것을 알려주었다.
아직 해결해야 할 운명이 남았다.
“제국이 맑아졌으나 동남부 가득 낀 구름을 걷지 못하면 폭우가 계속될 겁니다. 비를 걷기 위한 걸음이니 너무 개의치 마세요.”
“아비가 되어 어찌 개의치 않겠느냐.”
“아뇨 개의치 마세요. 황가 병력만 조금 나누어 주시면 됩니다.”
“…일로 와 봐라.”
황제의 손짓에 옆으로 다가가자.
“언제까지 피해 다닐 수 있을 거라 생각하냐. 이놈아. 아비 죽겠다. 살려 놓고 또 죽이려 드는 게야?”
아버지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아비가 여기서 저 학자들과 머리통 터지게 제국 미래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동안, 너 혼자 깨고 부수고 재미 다 보시겠다? 그 담에는. 제국 대충 안정화되면 슬쩍 돌아와서 탱자탱자 놀 계획이로구나.”
어떻게 알았지.
“와-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 속으로만 생각한다는 걸 입 밖으로 꺼냈네.
“이 고얀 놈아!”
결국 황제가 참지 못하고 와락 내 멱살을 움켜쥐었고.
“아니, 솔직히 재밌으시잖아요.”
“이놈아 재밌긴 뭘 재밌어. 그렇게 재미있으면 네 녀석이 여기 있어라. 내가 가서 싸울 테니!”
“싸움 못 하시지 않습니까.”
“오냐- 오늘 아비가 아들을 징치해야 할 날이로구나! 주먹맛 좀 봐야 정신을 차리지!”
폐하가 주먹을 번쩍 치켜들자.
“폐하! 폐하 고정하소서!”
“전하! 왜 굳이 자극하고 그러십니까!”
주변 기사들과 신하들이 다급히 올라와 둘을 뜯어말렸다.
와중에도 황제는 저 고얀 놈이 날 혹사시킨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물론 난 뻔뻔한 태도로 각자 맡은 일을 하는데 혹사가 어디 있냐며 맞받아쳤다.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싸움은 내가 잘하니까.
싸움은 내가, 행정은 아버지가.
그야말로 완벽한 분업이지 않은가.
* * *
“어, 어어-.”
펜을 든 서기관이 갑자기 벌어진 한 바탕 활극을 어찌 적어야 할지 몰라 어물쩍거렸다.
방금까진 멋들어지게 황제 폐하의 지혜로운 판단과 신하들의 제국을 위한 충정을 휘갈겨 놓았는데.
황태자 전하가 등장하자마자 멱살 잡고 싸웠다고 어떻게 적는단 말인가.
그때.
“아들이 걱정되어 아버지가 격노하신 모습이죠.”
슬며시 옆에 다가온 알프레드가 해답을 내려주었다.
“서로가 위험한 장소에 가겠노라고. 가장 험한 일을 맡아 제국을 지키겠노라 다투는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 이 늙은이의 눈에는 그리 보이는군요. 참으로 감동스런 장면입니다만-.”
서기관의 눈에도 그리 보이지요?
말은 질문이었으나 외눈에 담긴 기세는 해답이라기보단 강요, 강요라기보단 협박에 가까웠다.
서기관이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곤 그리 적는 동안.
“큼, 크흠. 그러니까 이왕이면 병력을 많이 데려가라는 말이다. 제발 좀 같이 싸우고. 매번 가장 앞에서 혼자 싸운다며.”
“그야 저랑 합 맞춰서 싸울 만한 실력자가 없어서요.”
“인석아 꼭 비등해야만 같이 싸우냐. 이왕이면 안전한 게 좋단 말이지.”
폐하의 멋쩍은 말에.
“알겠습니다. 이번엔 그리해 볼게요.”
황태자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번에 그런다고 하니 할 말이 없어진 상황.
아버지가 할 말이 없어 입을 우물거리길 잠시.
“이왕이면 병력도 넉넉히 데려가. 조금 말고. 동남부에 갈 생각이라면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거다.”
이번엔 병사의 규모를 걸고넘어졌다.
방금 조금 데려가겠단 말이 신경 쓰였던 모양.
이왕이면 안전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나온 참견.
물론.
“수도 방위군도 공백 상태고 영지들도 안정화 중이라 병력을 많이 데려가면 그만큼 위험부담이 커질 겁니다. 남은 병력은 제국 안정화를 위해 사용하세요.”
“아니, 더 데려가라니까.”
“그냥 저 따라오겠다는 병력 조금과 기사단 몇, 신규 편성된 마법사단 정도면 됩니다.”
“그거로 모자라. 더 데려가. 명령이야.”
“제국을 위한 결정입니다. 윤허해 주십시오.”
“이 녀석아 아비 말 좀 들어라!”
황태자의 고집에 황제가 다시 얼굴을 붉히려 할 때.
“폐하.”
아르한이 갑자기 목소리를 깔며 진지하게 황제를 불렀고.
“…갑자기 왜 목소리를 깔아.”
“하늘을 열어 보세요.”
뜬금없는 말에 아비가 순순히 알현실의 천장을 열자.
하늘에 보인 건 폭우가 아닌.
은빛 거체를 자랑하는 플라잉 해머호.
“저건… 뭐냐……?”
“뭐로 보이십니까?”
“모르겠다. 저거 대체 뭐야?”
황제의 신비가 그리는 모습은, 그저 거대한 망치가 하늘에 둥둥 떠 있는 풍경.
망치가 하늘을 가린 충격적인 그림에 그가 멍하니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잠깐- 진짜 그리 단출하게 갈 생각이냐! 출정식도 없이?”
황태자가 한 줄기 빛으로 화하여 플라잉 해머호로 쏘아졌고.
“절 애타게 기다리는 거북이 하나가 있어서 말입니다. 이미 병력은 충분합니다.”
마지막 남긴 말이 알현실을 휘감았다.
이윽고 플라잉 해머호가 짙은 오색 연기를 뿜어내며 알현실을 지나 강철성 바깥으로 향하자.
후두두둑 비행선이 사라진 자리에 폭우가 들이쳤다.
혹여 폐하에 옥체가 비에 젖을까 기사들이 미리 챙긴 우산으로 가리려 할 때.
“두어라.”
황제가 우산을 거부하곤.
“시원하구나.”
쏟아지는 빗줄기와 햇빛을 온몸으로 맞이했다.
축축이 젖어 드는 머리와 옷가지.
“아들이 폭 우속으로 가는데 어찌 아비 홀로 비를 피하겠느냐.”
이 많은 이가 함께 비를 맞고 있건만 어찌 홀로 고귀함을 뽐내겠는가.
황제의 신비가 거대한 망치가 짙은 먹구름을 찢으며 나아가는 그림을 그렸다.
그 끝, 망치가 부서질지 악마의 골통이 부서질지 두고 보아야 할 일.
다만.
“무사히 싸움이 끝나도록. 안전히 돌아오길 바라마.”
멀리 떠나가는 아들과 그를 따르는 이들이 무사하길 기도할 뿐.
황제가 작은 기도를 올렸고.
말간 하늘,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던 신하들도 덩달아 기도를 올렸다.
제국의 미래가 온전하기를.
* * *
동부도 마찬가지로 하늘은 푸르르건만 쏟아지는 폭우가 어색한 가운데.
꾸르릉-!
유일하게 새까만 먹구름을 우산처럼 쓰고 있는 지역이 있었다.
동남부.
행정의 중심이 수도라면 권력의 중심은 동남부라고까지 불리우던.
제국 제일의 영지엔 짙은 어둠만이 가득할 뿐.
오히려 가장 끔찍한 땅이 되어 버렸다.
황태자가 수도에 나타난 이래 서부와 북부, 중부, 남부가 새로운 피를 수혈받아 화려하게 피어날 준비를 하는 시기이건만.
어둑하게 낀 안개와 거리를 돌아다니는 악마들이 창궐한 땅.
유일하게 악마에게 먹힌 땅이 되어 버린 곳.
철컥, 철컥, 철컥.
먹구름을 닮은 어둑한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이 질척이는 거리를 행군했다.
“흐으윽!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마침 집안 깊은 곳에 숨어 있던 사람이 병사들을 보고 뛰쳐나와 도움을 요청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악마들의 먹이가 되었다.
도망친 이들은 숲에서 죽지 않았을까.
그래도 영지를 지키는 기사들이니 도움을 요청하면 구해 주지 않을까 하여 뛰쳐나왔으나.
무지한 실수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애탄 부름에도 그들의 고요한 행군은 계속되었고.
“아아, 제발, 제발 살려 주세요-.”
어느새 주변에 몰려든 악마들이 코를 바짝 붙이곤 그녀가 뿜어내는 두려움을 만끽했다.
길게 이어지는 비명.
뭉개지는 진흙과 더불어 악마들이 널브러진 인간의 시체를 희롱하는 골목.
하나 그들은 악마를 향해 검을 겨누지 않았다.
그 뒤 악마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손에는 인간의 심장을 든 채.
머리 위 먹구름보다 빽빽하게 몰려든 악마들이 몰려가는 곳은.
드높은 장성.
치열한 전쟁이 이어지는 곳.
명암의 경계선을 따라 세워진 장성 위.
먹구름이 하늘을 덮으려는 듯 악마들이 장성을 넘으려 했고.
해가 구름을 밀어내는 듯 병사들이 이를 막아 냈다.
몰아치는 악마가 아슬아슬 장성을 넘어 범람하려 할 때면.
번쩍!
치열한 마나가 거센 빛을 뿌리며 악마들을 소멸시켰고.
싸움은 잠시 소강상태.
그러다 다시금 치열한 전투를 이어 갔다.
과거 서부에서 보았던 흑해가 성을 침범하려던 모양새와 닮았다.
저 멀리서부터 몰려든 검은 파도가 높이 솟아올라 다시금 장성을 넘으려 하는 순간.
“못 지나간다-!”
늙수그레한 목소리가 울리더니 높이 솟았던 검은 파도가 멈추었고.
늙은 마법사,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꾸우욱, 악마로 이루어진 바다를 홀로 막아 내는 중.
점점 기울기가 공작을 향해 넘어지는 때.
“플라잉 해머호다!”
마침 황태자의 등장을 알리는 목소리가 전선을 울렸다.
이윽고 한 줄기 빛이 떨어진 자리, 등장한 건 황태자.
인간들은 희망에 찬 눈으로, 악마들은 번들거리는 살기로 그를 맞이했다.
쏟아지기 직전인 악마들을 본 그가.
“그 얇은 팔뚝으로 고생이 많아.”
공작을 향해 가벼운 인사를 건넸고.
“…좀 보지만 말고… 도와, 주십, 시오.”
거의 바닥에 눕기 직전까지 기울어진 공작이 핏발선 이마로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얼마든지.”
황태자가 브레이커를 뽑아서는.
철컥.
장성을 덮은 시온과 그림자를 열자.
갈라진 틈새로 터져 나오는 찬란한 빛에 모두가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