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창끝이 되어
먼 해역, 바다를 타고 돌아다니며 도적질을 일삼는 해적들이 서로의 배를 부딪쳐 싸운다 들었다.
흔히들 선상 전투라 부른다지.
거친 바다,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 배와 배가 부딪치고 난 뒤, 끼이익 비명을 질러 대는 갑판.
줄을 걸어 호기롭게 적의 배에 올라타 휘두르는 칼.
도망갈 곳은 없다.
갑판 너머엔 망망대해밖에 없으니.
죽여야만 살 수 있는 극한의 투기장.
때로 철모르는 문학가는 이러한 갑판을 낭만 넘치는 싸움터로 묘사했으나.
그건 제가 싸우지 않아서 그럴 수 있었던 것.
실제로는 비명과 고함, 피와 내장이 난무하는.
처절한 죽음을 파도로 씻어 내리는 비정한 전쟁터일 뿐.
그러한 선상 전투가 땅 위에서 펼쳐지려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성상(城上) 전투라 해야 할까.
진정한 의미의 공성전.
인간과 성의 싸움이 아닌 진짜 성과 성이 부딪치는 전투.
첫 시작은.
꽈아앙-!
머리 깊숙한 곳까지 울리는 거대한 충돌음.
이어지는 충격이 발바닥을 타고 올라와 내장을 뒤틀듯 몰아쳤다.
악에 물든 동남부 율리시스 공작성과 하르델 공작가의 새로운 비원 수정 장성이 충돌하는 순간.
파스스, 비말이 피어오르듯 빛과 어둠이 산란했다.
첫 충격의 여파가 가시기도 전.
율리시스 성이 뒤로 물러나 2차 충돌을 준비.
사일러스 공작이 손을 급히 휘둘러 장성을 휘었고.
밀려드는 공작성을 부드러이 받았다.
“웃기지 마라-! 움직이는 성은 우리 하르델이 원조다! 어디서 공성전으로 덤벼들어!”
본래 움직이는 성의 주인이었던 사일러스 하르델이 입가에 사나운 미소를 띄워 올렸다.
100년 넘는 세월 동안 움직이는 성을 이끌었던 자신 앞에서 감히 이따위 공성전을 벌이다니.
율리시스 공작가의 만용이 우스울 지경.
그가 양팔을 크게 휘돌리며 주문과 동시에 강력한 마나를 뿜어내자.
장성이 변화하여 율리시스 성을 둘둘 감아 버렸다.
꽈드득-
장성이 거대한 구렁이가 되어 적의 몸을 뭉갤 듯 조여들었고.
“마법사들! 폭격하라!”
공작의 우렁찬 명령에 장성 곳곳에 선 마법사들이 마법을 빗줄기처럼 쏟아 냈다.
순식간에 집중포화가 율리시스 성을 덮었고.
피어나는 색색의 마나 앞에서 짙은 어둠이 힘을 잃어 갔다.
뼈를 부수듯 공작성의 외벽에 굵은 금이 생겨났다.
성 간 힘겨루기는 확실히 하르델 공작가의 승리.
지난 시간 쌓아 놓은 경험을 증명하듯 손쉽게 외벽을 무너뜨리려던 때.
갈라진 공작성 외벽.
새까만 갑옷을 차려입은 기사들이 등장.
기사들의 도열 사이로.
마찬가지로 새까만 갑옷을 차려입은 자가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다.
분명 여전히 장성이 주변을 휘감은 상태는 같건만.
단 한 명의 등장으로 캑캑거리던 전황에 숨통이 트였다.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는 시선.
이를 마주한 사일러스 공작이.
“…드디어 나왔군.”
상대의 정체를 단번에 파악했다.
아니, 자리에 선 자들 모두가 본능적으로 느꼈다.
바로 율리우스 공작가 가주 베르베로스 율리우스.
제국제일검, 철혈의 공작이라 불리는 초인.
그가 장성 위에 등장했고.
그를 따라 올라온 마법사가.
“터져라. 퍼져라.”
간단한 수인과 함께 완성된 주문을 개방하자.
빠지지직.
찢어지는 소리가 울리더니 새까만 전류가 공작성을 휘감았다.
콰르릉, 콰릉, 터지는 흑뢰가 장성을 마구 때리며 위협했다.
장성에서 피어난 마나와 찬란한 기류가 이를 막아 주었으나 이전처럼 공작성을 압박하진 못하는 모양새.
과거 백뢰라 불렸던 공작가의 장남.
그가 뿜어낸 흑뢰와 더불어 일으킨 먹구름이 곧 거센 비를 흩뿌렸다.
축축하게 젖어 가는 시야 속.
“반갑군 사일러스. 직접 나오다니 놀라운 일이야.”
“베르베로스. 네가 이길 가망은 없어. 포기해라.”
“그냥 포기하고 죽으란 말인가? 재미없는 소리를 하는군.”
“공작가를 위함이 아니라, 네가 품은 악의 때문에 희생당할 제국민들을 위해 하는 말이다.”
“흐음, 그들을 살려 주길 바라나? 그렇다면 네 목을 내놔 그럼 살려 주지. 몇 남지도 않았겠지만.”
“네 목을 따는 게 더 빠르겠군.”
두 공작, 제국의 두 초인이 살벌한 인사를 나누었다.
부딪히는 둘의 기운만으로도 공기 중에 강렬한 스파크가 일어날 정도.
그러다 문득.
“황태자도 행차하셨군. 하긴 당연한 일인가.”
공작이 황태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모든 일의 원인.
공작가의 오랜 대계를 망친 장본인이자 원수.
황태자 아르한이 공작을 보고 처음 꺼낸 말은.
“이런, 딸자식과 손자의 목을 가져온다는 게 깜빡했구만. 아쉽게 됐어. 그래도 성벽 앞에 같이 널어 줄 테니 너무 섭섭해하진 말라고.”
상스러운 모욕.
그러나 공작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 더 일찍 만났다면 내 직접 태자의 목을 땄을 텐데 아쉽군. 이리 늦게 만난 게 아쉬워.”
“지랄. 그럴 거면 그 낡은 무릎을 움직여서라도 날 찾아왔어야지. 이제 와서 그딴 말을 지껄이면 뭐해.”
“맞는 말이군. 이제 와 하는 후회는 무의미하겠지.”
“그래, 그러니까 죽을 때도 후회 같은 거 하지 마. 역겨운 감정에 동의해 줄 생각 없으니까.”
“도발을 썩 잘하는군. 죽음 앞에선 어찌 반응할지 재밌겠어.”
“궁금해? 궁금하면 덤벼.”
황태자의 오만한 비웃음에도 공작은 꿈쩍하지 않았다.
확실히 지금까지 만났던 상대들과 달랐고.
“걱정 마라. 널 기다리는 분께서 만족할 만한 죽음을 내려 주실 테니.”
자신 말고도 황태자를 기다리는 이가 있음을 알렸다.
물론 아르한의 얼굴엔 여전한 조소와 오만함이 감돌았으나.
형형한 눈빛에 어린 살기가 그 또한 분노했음을 보여 주었다.
개새끼, 자식 욕해도 안 흔들리는 매정한 새끼, 악마 같은 새끼.
아, 이미 악마한테 영혼을 팔았지.
황태자가 작은 깨달음을 얻은 답례를 하기 위해 다리를 굽혔다.
몸을 휘감았던 불이 아래로 깔렸고.
곧 튀어 나갈 듯 바짓단이 파르륵 울어댔다.
손에 든 브레이커가 먹이를 바라듯 덩달아 으르렁대는 순간.
“가장 깊은 성에서 기다리고 있지.”
공작과 장남의 신형이 어둠에 휩싸였다.
흐려지는 꼴을 보아하니 도망치려는 모양.
“어딜 도망가!”
황태자가 거센 목소리를 토해 냄과 동시에 발로 땅을 박찼고.
하늘에 기다란 불기둥 하나가 자라남과 동시에 그가 공작의 앞에 등장.
“감히.”
백뢰라 불리던 장남이 황태자를 가로막기 위해 번개를 뿜어냈으나.
촘촘히 뻗어 나간 흑뢰 사이.
신형은 이미 지나간 후.
빛이 번쩍인다 싶더니.
놈이 뻗은 무례한 오른팔이 허공을 날았다.
“잔챙인 비켜.”
그 와중에도 황태자의 눈은 오직 공작을 향해 있었다.
여기서 싸움을 강요하여 전력을 깎아 먹어야 한다.
깊은 곳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놈의 능력이 강해질 테니 불리한 전장.
굳이 적의 의도대로 해 줄 필요가 없다는 판단.
장남의 팔을 베어 냈음에도 꿈쩍도 안 하는 무정한 아비의 눈을 바라보며, 목을 향해 브레이커를 휘둘렀다.
벤다는 일념이 곧게 나아갔고.
공작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찰나.
그들이 어둠 속에 완전히 녹아들었다.
브레이커의 이빨이 허무하게 어둠만을 찢어 낸 후.
황태자가 뚱한 표정으로 검을 확인.
작게 맺힌 검붉은 핏방울을 보며 입술을 비죽 끌어올렸다.
“이래도 안 덤벼들어? 독한 놈이네. 이런 자제심을 갖고선 왜 악마한테 홀랑 넘어간 거야? 빌어먹을 새끼.”
브레이커를 휘둘러 잠깐 일어났던 아쉬움을 핏방울과 함께 털어 냈다.
이왕에 여기서 끝장을 보면 좋았겠으나.
놈은 자기가 불리한 전장에서 싸울 생각이 없는 모양.
그뿐만 아니라.
“사, 살려 주세요.”
“제발, 제발 살려 줘요.”
악의에 둘러싸여 있는 성 주변.
성 외벽에 솟아난 건 아직 살아 있는 영지민들.
이들을 인질로 삼아 장성의 개입을 막으려는 모양.
악의에 파묻혀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발견한 공작이 다급히 마나를 거두었고.
공작성을 부술 듯 조이던 장성이 뒤로 물러났다.
의도는 명백했다.
공성전 같은 쓸데없는 짓 그만두고 당장 성안으로 들어오라는 뜻.
* * *
[장소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운명 악의, 죽음, 비명, 괴로움, 대적자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당신과 함께하는 많은 이의 운명이 위태로움에 처할 것입니다]
[시간의 운명을 예측합니다. 혼돈과 위험이 승리와 생명을 가리웁니다]
안에서 속살거리는 악한 운명들이 제법 매서웠다.
놈들이 파놓은 함정.
무엇을 준비했을까.
보이는 운명으로 보아 환상과 매혹, 분란과 배신을 심어 두었구나.
현재의 운명을 시간 위에 올려 굴려 보았고.
비극적인 운명들이 눈앞을 수놓았다.
승리까지 가기 위해 희생될 많은 생명과 그들의 운명이.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피할 수 없는 역사적 흐름.
지금, 제국을 바로 세우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순간.
악마가 가득한 길 위 갈림길에 놓았다.
속이 답답해 고개를 돌리자.
반으로 나뉜 하늘, 한쪽에선 먹구름과 쏟아지는 폭우를 뱉어 냈고 한쪽엔 쨍한 햇빛이 비쳤다.
놓여 있는 길과 같은 풍경.
공작의 질문이기도 했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단 말을 하고 싶었던 건가.”
강요된 희생 앞에서 누굴 버릴 것인가.
가까운 신하들? 아니면 여기 죄 없는 약한 이들.
어느 쪽을 선택하든 공작이 이기는 문답.
눈을 들어 현재를 너머를 보았고.
운명을 읽는 눈이 당장 떠오르는 운명을 넘어 선택과 행동에 따른 결과를 따라 바삐 움직였다.
그릇된 결과를 마주하면 시간을 되돌려 가며 파고들 운명의 틈새를 찾았다.
머리가 뜨끈해질 때쯤에야.
어떤 길로 걸어가든 희생이 불가피하다는 걸 파악.
입가에 사나운 미소를 띄워 올렸다.
하긴 이 정도 자신감도 없이 감히 나를 안까지 끌어들이려 하진 않았겠지.
싸움에서 피를 피할 순 없는 법.
그렇다면 간단한 이야기.
“내가 흘리겠다.”
개변 점수와 신비 점수를 투자하여 운명을 뒤틀자.
거대한 변화에 바람이 일었고 구름이 찢어졌다 뭉치기를 반복.
쨍했던 햇빛이 조각나듯 부스러졌다.
잡음이 번지듯 이지러지는 변화가 잠깐.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이 제 모습을 회복했다.
이어 몸을 짓누르는 운명들.
누군가 짊어졌어야 할 죽음, 누군가 짊어졌어야 할 패배, 누군가 짊어졌어야 할 깊은 상처들이 무거워 순간 무릎이 휘청였다.
빌어먹게 무겁다.
모든 운명을 짊어지진 못해도 최소한 가장 끔찍한 것들은 거두려 했다.
그것만으로도 몸이 견디기 힘들 정도.
미련한 선택이었을까.
그저 승리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비정하게 내버렸어야 할까.
잠깐의 후회.
이를 털어 내곤 흔들리는 무릎과 꺾이는 허리를 바로잡았다.
그리곤 목을 뻣뻣하게 세워 턱을 치켜들었다.
의도된 오만.
무엇도 내 의지와 몸을 흔들지 못하며 심장에 타오르는 불을 흐트러뜨리지 못한다.
내가 선택한 시련은 결국 몸을 단단하게 만들고 불을 키워 갈 모루와 풀무.
거친 두들김과 거센 바람은 좋은 재료.
그래, 결국 이겨 나가야 할 길이다.
그리 생각하며 걸으려니.
“함께하겠나이다.”
어느새 옆에 다가온 발자크가 같이 발을 내디뎠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뒤로 물러나.”
“싫습니다.”
“뭐?”
“같이 설 겁니다.”
“그러다 죽어. 아비에 이어 아들까지 죽이는 과오를 저지르게 할 셈인가?”
“죽지 않습니다.”
“죽는다니까. 아니 최소한 불구는 될 거야.”
“안 됩니다.”
“자네 미쳤어?”
“미쳤습니다.”
“뭐?”
“네, 저 미쳤습니다. 언제까지 전하 혼자 짐을 지게 둘 거라 보셨습니까. 혼자 가지 마십시오. 전 전하를 따르기로 한 기사입니다. 아버지의 검을 익힌 이유가 혼자 만족하기 위해서라 생각하십니까? 어림도 없는 이야기죠. 절대 혼자 보내지 않습니다. 꽃 무더기에 덮여 울던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아니, 백작. 잠깐. 잠깐만.”
“그때 말씀하셨죠. 미안하다고. 미안하면 끝입니까? 이번에도 다치고 돌아오셔서 미안하다 하시려고요? 어림도 없습니다. 무조건 따라갑니다. 죽지도 않고 불구가 될 생각도 없습니다. 전하를 지킬 겁니다. 아버지보다 나아질 겁니다. 살아남을 겁니다. 끝까지 살아남아 전하께서 이루실 제국을 보고야 말 겁니다. 아버지와 노병들을 대신해서요.”
“그만.”
“같이 가도 됩니까? 솔직히 전하께서도 말도 없이 광증 부린 것 여러 번이지 않습니까. 한 번쯤 허락해 주십시오.”
“알았어. 빌어먹을. 이거 어리광부리는 애도 아니고. 말렸다간 온종일 잔소리를 해대겠구만.”
“한 번쯤은 해 보고 싶었습니다.”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백작이 밝게 웃었다.
뭐가 저리 즐거운 건지.
기껏 거두었던 운명이 그에게 다시 스며드는 중이건만.
그래도 다행이라면 내가 그의 운명을 나누어진 덕에, 그가 나의 운명을 나누어진 덕에 새로운 가능성이 싹텄다.
그런데 옆에 따라붙은 건 발자크뿐만이 아니었다.
“저도 같이 갑니다! 전하! 이 평민을 데려가소서! 지난 시간 동안 전하를 모셔온 충정과 더불어-.”
“닥쳐라 평민. 잔소리는 한 명으로 충분해.”
“넵.”
“전하 저도요! 솔도 가겠어요!”
“아버지 가시는 데 딸이 빠질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삼대를 책임지세요.”
“맞아, 어딜 전하 혼자 가려고? 이번엔 어림도 없어.”
“블러디 말이 맞아요. 흑해는 혼자 건너셨지만 이번엔 같이 가겠어요.”
“뭘 혼자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거의 고장 난 기계처럼 마법을 써 댔다고.”
안드레, 솔, 바이올렛, 블러디, 이엘, 살라스를 비롯하여.
“으음, 백뢰와는 한 번 겨루어 보고 싶었지요. 허락해 주십시오.”
“가장 커다란 전력을 놀리시진 않겠지요. 전하.”
달런과 공작까지.
돌아본 시선, 나를 따르는 이들이 가득했다.
지금껏 내가 이끌었던 또는 구해 주었던 이들.
그들 사이.
“전하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전하께서 이루신 업적입니다. 당연히 저도 같이 가겠나이다.”
알프레드가 보람찬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화를 내도 모자라건만.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은 왜일까.
“어? 기분 좋으신 거죠? 지금 웃으시는 거 맞죠?”
“것 봐요. 꼭 좋으시면서 저리 심통을 부리신다니까요.”
안드레와 솔이 킥킥거리는 게 싫어.
“안 웃어.”
억지를 부려 보았으나.
“에이, 입꼬리가 씰룩대시는 걸요? 제 눈은 못 속입니다. 전하를 모셔온 게 얼마인데요.”
“맞아요. 전하께서도 좀 솔직해질 필요가 있으셔요. 이제 저희도 든든하게 뒤를 받쳐드릴 수 있다고요.”
이미 들킨 모양.
하여.
“닥쳐, 평민, 가로등.”
“넵.”
“눼.”
둘의 입을 막아 버리곤.
다시금 제가 질 운명들을 빼앗아 간 이들을 돌아보았다.
등 뒤의 짐이 아직도 무겁건만 마음이 가벼워짐은 왜일까.
그래, 홀로 걸어온 시간이 꽤 길었다.
짙은 먹구름 넘어 비치는 태양이 모두의 머릿결을 따스하게 쓰다듬었다.
신의 축복도 위대한 기적도 없다.
우리의 힘.
나와 나를 따르는 이들의 힘만으로 뚫으리라 각오했고.
“가자. 성 깊은 곳까지 일직선으로 뚫는다.”
직접 창끝이 되리라 결심.
뒤를 받치는 창대들과 함께 검은 진창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의지와 운명이 예정된 비극을 깊게 찌르며 파고들었고.
찬란한 빛을 품고선 새까만 성을 가로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