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율리우스
동북부에 움직이는 성과 공작, 그를 따르는 수정 마법사단이 유명하듯.
동남부에도 철혈의 공작 베르베로스를 따르는 가고일 기사단이 유명했고.
더 나아가 장남을 따르는 전뢰 마법사단의 위명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뿐인가 동남부, 한 지역의 패자를 넘어 제국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공작가에서 한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모여든 기사들의 실력 또한 출중했다.
진정 출세를 원한다면 황실 기사단이 아닌 동남부 기사단에 들어가라.
아카데미 기사 학부, 제국을 떠도는 방랑 기사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말.
출세를 위한다면, 또는 자신이 진짜 재능이 넘친다면 동남부에서 두각을 드러내 보라.
황실 기사단보다 더 치열하고 어려운 자리.
그만큼 동남부의 저력은 만만치 않았고.
심지어 악마의 힘을 받아들여 더욱 강해졌다.
황태자와 그의 세력이 많은 전투를 겪어 왔으나.
“먼저 가십시오!”
이번만큼 험로를 만난 적은 처음이었다.
처음 낙오는 블러디와 엘프들.
낙오라기보단 사방에서 몰려드는 악마들과 정예들을 막아 내기 위해 내린 결정.
대열의 선두.
황태자가 치열하게 길을 뚫어 내는 와중에도 몰려드는 악마들이 사방에서 압박해 왔고.
이대로는 도달하기도 전에 대열이 무너지겠다 판단하여 내린 결정.
황태자도 별달리 말리진 않았다.
다만.
“가져가라. 도움이 될 거다.”
블러디에겐 진생철퇴의 손잡이, 과거 세계수의 일부를 떼어 주었고.
홍련의 족장이자 전생 황후였던 이엘에겐.
“일곱 별의 주인이 허락하니, 별빛이여 홍련의 족장을 지켜라.”
이전 사막에서 품었던 일곱 성의 열쇠. 일곱 개의 별을 띄워 주었다.
블러디의 손에 들린 세계수의 파편이 꾸물꾸물 자라나기 시작했고 일곱 별빛이 이엘의 주변을 떠돌며 수호했다.
그들을 휘감으려던 끔찍한 운명들이 접근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이것으로 되었다.
이후부턴 그들이 직접 운명을 개척해야 하리라.
떠나가는 황태자의 뒷모습만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엘과 블러디가.
“전부터 느낀 거지만 전하께서 멋지긴 해요.”
“이런 상황에서 할 말이야?”
“딱히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블러디는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뭐, 없진 않지만- 지금 말할 분위기가 아니니까.”
“그거 알아요? 위기 때야말로 전하께선 가장 멋진 모습으로 등장하시죠. 벌써 기대되네요.”
“뭐 그렇긴 하더라.”
“맞죠? 제 말 맞죠? 뭐예요, 사실 속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던 거예요? 의외로 부끄럼쟁이였네요.”
“뭐야. 이엘 정신 차려.”
블러디의 황당하단 얼굴을 보며 이엘이 배시시 웃곤.
“아마 마음이 많이 아프실 거야. 의외로 마음이 여리고 외로운 분.”
이전 남부 갈대밭에서 보았던 황태자의 슬픈 얼굴을 기억했다.
그가 자신을 불렀던 호칭도.
하여 결심했다.
“끝까지 옆에서 돌봐 드려야겠죠. 본인은 아니라 하시겠지만.”
황태자를 돌보기로 남을 돌보느라 바쁠 그를 위로하기로.
문득 마음속에 숨겨 두었던 소망을 뱉었고.
“그러기 위해선 살아 나가야겠지? 긴장해. 쉽지 않을 것 같으니.”
블러디가 잠깐 웃고는 신비를 한껏 끌어올렸다.
남부의 엘프들과 서부의 전사들이, 미약한 별빛과 한 떨기 장미를 향해 탐욕스럽게 달려드는 검은 먹구름을 맞이했다.
* * *
자라나는 철과 이를 짓누르는 흑뢰가 치열하게 영역을 주장했다.
철 뒤에는 살라스, 흑뢰 뒤에는 공작가의 첫째가 섰다.
이후 제국 마법계를 이끌 거라 평가받던 두 신성의 대결.
살라스가 뿜어내는 마나와 이룬 주문이 단단하게 뭉쳐 들어 앞을 가로막았으나.
쿠르릉!
이를 때리는 상대의 마나와 주문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뇌전이 까만 이빨을 들이밀 때마다 철이 뭉텅뭉텅 잘려 나갔고.
살라스가 급히 이를 보완했으나.
거센 벼락이 철의 가운데를 파고들기 시작.
강철의 중심부를 새빨갛게 물들이며 전진했다.
찰흙을 가르듯 무너지는 마법을 바라보며.
“이런 비열한 놈. 악마의 힘까지 흡수하는 건 반칙이잖아!”
상대의 비열함을 비난해 봤으나.
“부러우면 너도 악마의 힘을 받아들이던가.”
답답한 대답이 들려올 뿐.
거센 흑뢰가 결국 쇠를 무너뜨리기 직전.
파파파파팡-!
수십에 달하는 저써클 마법이 놈의 주위를 휩쓸었다.
손을 뿌리자 높이 솟아나는 전뢰벽.
쏟아지는 원소 마법들.
본래라면 당연히 힘없이 뭉그러졌어야 할 저써클 마법이지만.
그 숫자가 수백에 달한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솟아난 벽 틈새, 완전히 메꾸지 못한 빈틈으로 작은 불덩이 하나가 쏘옥 머리를 들이밀었고.
순식간에 덩치를 부풀렸다.
번식하듯 늘어나는 작은 불꽃들이 적을 휩쓸기 직전.
한 줄기 흑뢰로 화한 상대가 자리를 벗어난 직후.
“이런 율리우스 공작가의 핏줄은 도망치는 것이 특기인가 보오.”
반대편에서 달런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에선 마법이 빗발치는 중.
공작성을 얼마 남기지 않고선 황실 마법사단이 따로 떨어져 나와 전뢰 마법사단을 마주했고.
서로의 마나와 주문을 견주었다.
공성 무기에 준하는 화력들이 실드 위를 때렸고.
번쩍이는 빛과 몰아치는 마나 폭풍에 쏟아지는 빗줄기가 역류했다.
백뢰, 이제는 흑뢰라 불러야 할 공작가의 장남이자 전뢰 마법사단의 수장.
레아스 율리우스가 검은 피를 토해 냈다.
“계속 싸울 수 있겠소? 슬슬 괴사하는 것 같소만.”
살라스와 달런을 상대로 나름대로 분투를 펼쳤으나 역부족.
전황이 불리했다.
어찌 된 일인지 분명 5써클의 벽을 넘지 못했던 늙은 마법사는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화력을 뽐내었고.
벌컥, 벌컥, 벌컥.
“크으, 다시 시작해 볼까.”
빌어먹을 황자는 어디서 난 건지 모를 오색 물약을 들이켜 마나를 끝없이 뿜어냈다.
사막 오색 염료를 정제하여 만든 마나 회복제.
지난번 흑해를 건너는 중에 검은 비를 마셔 가며 뿜어낸 무한한 마나에 심취했던 살라스가 연구 끝에 만들어 낸 비장의 물약.
이를 위해 심장에 어린 써클의 구조까지 개량했다.
마나 연소기와 같은 역할을 하는 주문을 따라, 염료를 마나로 치환한 써클이 심장의 고동을 따라 거세게 요동쳤고.
곧 손끝 발끝까지 뜨뜻한 기운이 퍼져 나갔다.
이렇게라면 하루 종일이라도 싸울 수 있다.
아니, 며칠이라도 거뜬하다.
살라스의 입가에 떠오른 득의양양한 표정에 반해.
둘에게 한참이나 시달린 레아스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러나 다시 까만 번개를 담담히 뿜어낼 뿐.
살라스와 달런이 이번만큼은 그의 숨통을 끊기 위해 마주 마나를 삼엄하게 펼칠 때.
“끄아아악-!”
문득 레아스가 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지금껏 달구어진 철에 뭉그러지고 얼음에 얼고, 불로 지져도 인상 한 번 찡그린 적 없던 적이 내지른 고함.
그러나 살라스와 달런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분명 입은 고통을 뱉어 내고 있으나 반대로 그가 뿜어내는 마나가 더욱 살벌해졌다.
아마 아직껏 보인 적 없는 악마의 힘을 본격적으로 선보이려는 모양.
점점 주변을 잠식해 가는 마나에.
“안 되겠군. 전투 마법사단! 뒤로 물러나라! 물러나 진열을 재정비해라!”
달런이 다급히 재정비 명령을 내렸다.
이제부터가 진짜 전투다.
마법사들이 잔여 마나로 실드를 전개하며 뒤로 물러나려다.
“다들 멈춰! 단장님-! 살라스 전하!”
솔의 다급한 외침에 발걸음을 멈췄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그녀가 펼친 새까만 그림자 사이.
이미 죽은 마법사 하나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키는 모습.
덩달아 죽어 널브러졌던 마법사들이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변화는 순식간이었다.
익사한 시체가 며칠 물에 불은 모습처럼 놈들의 몸이 퉁퉁 부풀었고.
“막아욧!”
비극을 예견한 솔이 다급히 그림자를 펼쳐 일대를 덮었다.
이어지는 살 터지는 소리.
뼈와 핏방울, 살점이 무기가 되어 사방 무작위로 번져 나갔고.
엉뚱하게도 동료들을 휩쓸었다.
연이어 번지는 폭발.
전염병이 돌 듯 터지는 육신과 마나.
솔의 그림자와 더불어 다급히 펼쳐 낸 실드가 이를 막아 내려 애썼다.
솔이 울컥울컥 찢어지려는 그림자를 억지로 잡아 세우는 사이.
폭발이 끝났다.
마지막 자폭이었는가.
하나.
“다들 긴장 놓지 마라.”
살라스의 날 선 목소리가 그들의 정신을 다잡았다.
그가 보는 방향.
달런과 살라스 사이.
원래 하나였어야 할 레아스의 신형이.
“뭐냐. 자아분열이라도 한 거야?”
둘이 되었다.
하나는 새까맣게 물들었고 하나는 하얗게 반질거리는 형태.
둘의 마나가 얽히더니 각자 흑뢰와 백뢰를 몸에 둘렀다.
“고민했지. 어떻게 해야 흑뢰와.”
“백뢰를 같이 쓸 수 있을지.”
“차라리 나누자 생각했어. 그래서 몸을 나누기로 했지.”
“그런데 말이지. 그랬더니 깨달음이 있더라고.”
둘의 말이 번갈아 울리길 잠시.
“꼭 둘이어야만 하나?”
“왜 여럿이면 안 되지?”
“수십이 뿜어내는 전뢰.”
“그게 진짜 전뢰 마법사단이지 않을까.”
곳곳 흩어졌던 육신과 마나가 각자의 모양새로 뭉쳐 들더니 백뢰와 흑뢰의 모습을 이루었다.
제물을 바쳐 얻은 수십의 육신이 몸에 각자 전뢰를 두르자.
찢어지는 소리와 더불어 일어난 정전기에 자리에 있던 마법사들의 머리카락이 부스스 떠올랐다.
강하다.
피부에 와닿는 짜릿거리는 살기.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압도당할 정도.
살라스와 더불어 달런도 긴장했다.
하나를 상대로도 쉬이 우위를 점하지 못했는데.
이대로 괜찮을까.
어느새 자리를 잡은 적들은 고민할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 서로 뿜어낸 마나를 주고받기 시작.
곧 흑백의 전류가 거미줄처럼 촘촘히 주변을 잠식했다.
“달런. 아직 힘 다 안 썼지?”
“전하께서는 여유가 남으셨습니까?”
“나야 아직 반도 안 냈지.”
“전 반의반도 안 냈습니다.”
“난 반의반의 반.”
달런과 살라스가 농담으로라도 치미는 불안감을 억누르려 했으나.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까지 제어하진 못했다.
제기랄, 이래서야 믿고 맡겨 준 녀석에게 체면이 살지 않는다.
이왕이면 모두를 살려 가고 싶었는데.
살라스가 이를 물며 자신의 동생 황태자와 멀리 남부에서 고생하고 있을 장인들과 마법사들을 떠올렸고.
달런은.
“다들 가십시오. 해 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희생을 각오했다.
과거 알리굴에게 보았던 환상을 재현하려는 속셈.
그의 몸 주변, 불, 얼음, 바람, 번개, 흙으로 이루어진 나비들이 화려하게 피어올랐다.
한계를 벗어난 연산과 마나 운용에 흰자위 가득 핏줄이 번졌고.
픽, 붉은 핏물이 시야를 어지럽혔으나 집중을 놓지 않았다.
살라스 또한 웃기지 말라는 듯 입에 병을 꽂아 넣은 채 철을 일으켰고.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는 순간.
“이건 비장의 수로 남겨 놓으라 하셨는데. 그게 지금인가 보네요.”
익숙하지만 스산한 목소리가 현장의 공기를 단번에 멈추었다.
앞에 있는 적보다 더욱 섬찟한 공허가 담긴 목소리.
분명 익숙하건만.
고개를 돌린 자리엔.
“모두 전력을 다해야 할 겁니다. 반의반의 반이든. 그것의 반이든. 남은 전부를요.”
새까만 제사장 가면을 쓴 솔.
그리고 주변에 둥둥 떠다니는 나머지 네 가면.
각 얼굴에 그려진 황자, 기사, 수녀, 공작.
각각 적, 청, 백, 황으로 물든 가면이 일제히 솔이 쓴 새까만 가면에 흡수되었고.
곧 오색이 뒤섞인 가면 위, 악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 떨어져 나오기 전 황태자가 솔에게 건네 준 가면들.
“저 멍청한 놈들이 죽기를 각오하면 그때 꺼내라. 그때가 위기다.”
어쩌면 이런 상황을 예측이라도 하신 건지.
예언에 가까울 정도로 둘의 마음을 꿰뚫어 본 황태자 전하의 말.
솔이 오색 악귀가 되어 흑백뢰를 향해 능력을 뽐냈고.
살라스와 달런이 제 전력을 뿜어냈다.
성 주변, 일대가 온갖 마법으로 가득 차올랐다.
* * *
[대상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블러디와 이엘의 운명에 끼어들었던 패배와 조롱, 불구가 물러가고 승리와 온전함이 주위에 머뭅니다]
[살라스, 달런, 솔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패배와 죽음이 짙은 마나에 흐려집니다. 그들 사이에 새로운 운명 승리와 무사가 깃듭니다]
[싸우는 이들이 극복해 낸 운명을 포식합니다. 개변 점수와 신비 점수를 획득합니다!]
[당신이 등에 진 비극적 운명들에 점수를 투자하여 분쇄합니다. 모두의 운명이 조금 더 가벼워집니다]
조금은 가벼워진 무게에 그나마 안도했다.
수많은 운명,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이들이 내놓은 결과를 이용하여, 또 다른 비극적 운명들을 분쇄하는 중.
여전히 먹구름이 짙게 드리운 하늘.
쏟아지는 빗줄기가 무수한 빗금이 되어 앞을 가로막았다.
더는 들어가지 말라는 듯.
이 정도면 되었다는 듯.
그토록 무거운 운명들을 지고 어딜 들어가려 하는 거냐 호통이라도 치듯.
하지만 쏟아지는 빗금 중 어느 하나도 내 몸에 닿지 못했다.
몸에 두른 불이 내리치는 비를 산산이 부수었고 증발시켰다.
온 세상이 물과 악의를 머금고 축 늘어졌으나 나만은 성말랐고 치미는 분노가 뜨거웠다.
태우고 싶다, 부수고 싶다.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참을 수 없다.
건국제가 했던 말을 기억한다.
먹음직스러운 위기가 아니냐.
그래 맞는 말이다.
가장 위험한 자리에 가는 중이지만 어째서인지 발걸음이 가벼웠다.
가장 깊은 곳, 위험을 가장한 달콤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빌어먹을 인생.
즐거움이 분노로 변했다.
전생엔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이번 생도 글렀구나.
큭큭,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누구일까 날 이리 괴롭히는 것이.
신? 인간? 악마? 어쩌면 모두일지도, 아니면 모두 아닐지도.
나는 그저 세상 거대한 흐름에 끼어 죽지 않으려 애쓰는 작은 부품인가.
전생엔 가짜 부품, 지금은 조금 더 고귀한 부품.
싸움을 앞두고 자아 성찰이라니.
콧김을 뿜어 젖은 땅에서 올라오는 비린내와 더불어 뇌를 후벼 파는 얄궂은 감상을 털어 냈다.
부품이면 어떠한가.
“그 부품 하나가 세상의 흐름을 바꾼다면 그건 이미 부품이 아니지. 안 그래?”
공작.
공작성 입구, 새까만 갑옷을 차려입은 가고일 기사단과 더불어 서 있는 베르베로스 공작이 보였다.
내가 빗줄기를 증발시키고 있다면.
그들은 그저 단단함으로 빗금을 부수었다.
공작이 무감정한 얼굴로 나를 맞이했고.
“비켜. 들어가야겠다.”
공작마저 밖으로 내몰곤 성안에서 편안히 이 상황을 즐길 놈을 만나고자 했다.
단단한 가슴팍 너머 보이는 공작성 안에서 사그락사그락 끼쳐 오는 악의.
분명 쏟아지는 비가 주변에 흥건했건만 메마른 땅에 선 기분.
혀를 짓씹으며 쩍 말라 버린 입을 적시는 동안.
“청익, 홍익 준비.”
“북벽 기사단 검을 들라.”
안드레, 발자크 백작이 공작을 둘러쌌고.
뒤를 따르던 기사들이 넓게 퍼져 가고일 기사단 앞에 섰다.
연회에서 제 춤 파트너를 찾듯 서로를 마주한 이들의 눈이 교차하며 호적수를 찾아다녔다.
다만 검과 피, 죽음이 난무하는 연회이리라.
잠시 뒤를 보았다.
눈꺼풀을 때리는 빗줄기마저도 가리지 못하는 살기와 의지가 모두의 눈에서 엿보였다.
좋다.
그들에게 별달리 무언가를 맡기지 않았다.
그저.
“뒤를 맡기지.”
내 믿음을 전했을 뿐.
안드레와 백작이 동시에 우묵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이 젖은 머릿결을 휙 털어내곤 검을 뽑았다.
뒤따라 뽑히는 검광들이 시렸다.
그대로 공작을 지나쳐 걸었고 내가 공작성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날카로운 검명이 울려 퍼졌다.
역대 공작의 초상을 지나 도착한 공작성 가장 깊은 곳.
홀로 기대어 앉아 있는 자는.
“정말 녀석과 똑같은 불을 지녔구나.”
가장 입구에 붙어 있던 초상과 똑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일러스 공작이 패인 주름에 고인 빗물을 쓸어내며.
“율리우스…….”
공작가의 성을 입에 올렸다.
“해방자이며 가장 위대한 기사, 드래곤 슬레이어이며 대악마의 뿔을 자른 전사. 그리고-.”
건국제의 친우, 율리우스.
율리우스가의 시조이자 건국제와 더불어 제국 건국 공신이라는 삼 영웅 중 하나의 이름을 확인하듯 읊조렸다.
이에.
“맞다. 내가 그 율리우스다.”
오래전 영광을 누렸던 영웅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여러 색의 번개를 뿜어내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