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생사결
쏟아지는 빗금들 사이로 새하얀 곡선이 내달렸다.
유려한 굴곡이 직선을 끊어 내며 도달한 곳은 어느 까만 갑옷을 입은 기사의 목전.
그가 얇은 실선을 피하려 고개를 뒤로 젖힌 순간.
이번엔 옆구리 쪽에서 거친 폭풍이 자라났다.
작디작은 바람부터 시작한 폭풍이 눈 깜짝할 사이에 크기를 불려 나갔고.
막 실선이 기사의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간 순간.
어느새 크기를 키운 폭풍이 그를 삼키려 했다.
상대가 고개를 젖힌 그대로 검을 찔러 넣었고.
검 끝이 거친 바람 속에 숨은 안드레의 얼굴을 정확히 노리고 짓쳐 들었다.
얼굴을 가를 듯 따갑게 치미는 살기.
그가 발을 교차하여 몸을 옆으로 옮겨 다시 옆구리를 노렸으나.
마치 뱀이 휘어지듯 교묘하게 비틀어진 검이 따라붙었다.
손목을 틀어 일으킨 변화.
결국.
“쳇.”
안드레가 공격을 거두며 이를 쳐내자 몰아치려던 폭풍이 산들바람이 되어 흩어졌다.
휘감기며 올라오는 검이 손목을 노리는 사이.
백작이 발걸음을 크게 내디디며 다시 검의를 발산.
이번엔 수직으로 검을 휘둘러 빗방울에 몸을 감춘 채 접근했으나.
작은 파동을 눈치챈 상대가 몸을 휘돌려 이를 피하곤.
자리에서 수 바퀴를 돌며 실타래를 역으로 뿜어내듯 날카로운 마나를 사방에 뿌려 폭풍과 검기를 지워 냈다.
그리고 이번엔 철혈의 공작, 베르베로스가 실타래 속에서 뛰쳐나왔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자세를 바닥에 낮게 깔아 접근한 그가 안드레의 다리를 베어 내려 했다.
눈으로 확인한 뒤에는 이미 늦었다.
안드레가 이를 악무는 순간.
어디선가 날아온 철갑옷이 그의 다리를 감쌌고.
카앙-!
살 갈라지는 소리 대신 날카로운 충격이 느껴지길 잠깐.
이어 불꽃을 튀기며 올라간 검이 안드레의 옆구리를 찌르기 전.
“어딜!”
안드레가 몰아친 폭풍이 자리를 휩쓸었다.
백작의 검격이 날아들었으나 베르베로스가 펄쩍펄쩍 제비를 돌아 이를 모두 피했다.
“다리는.”
“괜찮습니다.”
백작의 물음에 안드레가 식은땀을 빗속에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다.
강하구나.
동시에 떠오른 생각.
여러 번 부딪친 결과 내린 결론.
베르베로스 율리우스, 그는 분명 제국제일검이 맞다.
발자크는 내심 아버지가 그보다 더 뛰어나지 않을까 믿었다.
하나 아니었다.
벽을 넘고 신비를 얻었음에도 압도하지 못했고.
안드레의 조력이 있었음에도 때때로 손해를 본 건 둘.
심지어 그 또한 소드마스터이며, 전하로부터 하사받은 오른팔을 처음부터 사용하지 않았던가.
교차하는 둘의 거친 숨결.
공작이 평온한 얼굴로 옅게 흩어지는 입김을 바라보길 잠깐.
“좀 아쉬운걸.”
툭 불만을 내뱉었다.
“루카르도 있었다면 더 좋은 승부가 되었을 텐데.”
그러며 살며시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이 얄미웠다.
가장 자존심 상하는 것은 바로 저 태도.
마치 아랫것들을 상대한다는 여유로움.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직감.
“이봐, 저놈 저거 왜 저렇게 재수가 없는 거야?”
옆에 둥둥 떠다니는 투구의 말대로.
적재적소에 끼어든 무명 기사의 보호가 없었다면 벌써 져도 몇 번을 졌을 거다.
놈의 검이 몸에 닿기 직전 주변을 돌던 무명 기사의 갑옷이 백작과 안드레의 몸을 감쌌고.
간신히 큰 부상을 면했다.
쏴아아아-
쏟아지는 빗줄기가 체온을 뺏어가서일까.
피어나는 입김과 더불어 피부가 차가웠다.
앞의 공작은 지치지 않는 듯싶다.
빗방울을 튕겨 내는 까만 갑옷이 너무나 단단해 보여 잘라 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어둑한 풍경 사이 안드레의 눈빛이 껌뻑껌뻑 빛을 잃어 가려는 찰나.
“정신 차려라.”
백작이 굳건한 목소리로 그의 정신을 추슬렀다.
“명심해라. 우리가 놈을 이기지 못하면 여기 모두가 죽는다. 믿고 맡긴 전하께 죄를 짓는 거야.”
전하께 죄를 짓는다는 말에 안드레가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내리치는 비.
하얀 가면을 쓰고 백검을 휘두르는 청익 기사단.
거기에 섞여 있는 홍익, 북벽 기사단까지.
이에 맞서는 회색 갑옷을 입은 공작을 따르는 기사들.
가고일이라는 이름에 맞게 단단하며 사나웠다.
피어나는 피와 열기가 금세 비에 씻겨 내려갔다.
고함과 비명은 없다.
혹독한 훈련과 거친 싸움을 반복해 온 기사들의 전투인 만큼 그 힘마저 검에 실어 휘둘렀다.
갑옷 깨지는 소리와 살 가르는 소리만이 울렸고.
그마저도 폭우 소리에 잠겨 질척였다.
흐르는 비를 그대로 두는 발자크 백작의 무감정한 얼굴이 석상과 같았다.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만이 적의 약점을 찾아 돌아다니는 중.
소름이 돋아올랐다.
실시간으로 스러지는 생명과 이를 위해 분주히 몸을 놀리는 기사들.
피부가 간지러워졌다.
무겁다, 갑옷도, 내리치는 비도, 죽어가는 기사들이 짐 지우는 원한도.
두렵다, 전하의 실망이, 위기에 처할 다른 이들이, 책임을 다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가 힘겨워하는 미래 중 제 죽음은 없다는 것.
“그건 두렵지 않아.”
말을 뱉어 내는 안드레의 입김이 유독 짙었다.
그리곤.
철컹, 철컹.
제 몸에 씌워 둔 갑옷을 벗어 버렸다.
묵직한 철이 후두둑 떨어졌고.
탈피한 안드레가 가벼운 옷차림으로 전장 한복판에 섰다.
“뭐 하는 거야. 미친 녀석아 죽고 싶어?”
“그럴지도 모르죠.”
“뭐? 죽고 싶다고?”
“아니지. 죽고 싶다기보다는-.”
그가 눈을 모아 피어나는 뜨거운 입김을 바라보길 잠시.
“죽어도 좋다는 마음입니다. 그저 그뿐이에요.”
평소 품어 왔던 결심을 다시금 입에 올렸다.
죽어도 좋다.
제 목숨은 중요치 않다.
전하께서 고아들의 죽음에 피눈물을 흘리셨을 때 그리 결심했다.
죽으리라, 전하의 영광을 위해 죽으리라.
주군께서 바른 자리에 서신다면 더욱 많은 아이를, 더욱 많은 고아를 돌보아 주시겠지.
절대적인 믿음.
어쩌면 신앙에 근접했을지도 모를 순수하며 맑은 신뢰.
성기사의 그것과 비견될 만한 충성심이 안드레를 이끌었고.
“죽어도 좋습니다. 대신 승리는 꼭 챙겨 가야겠습니다.”
그가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검을 들어 올렸다.
물론 무명 기사는 그런 안드레에게 잔소리와 욕을 퍼부었으나.
“타당하군. 무명, 자네가 안드레를 잘 보호해 주면 될 뿐 아닌가.”
백작의 밝은 목소리에 말문이 막혔는지 이어지던 잔소리마저 뚝 끊겼다.
“날 보호해 줄 필요 없어. 안드레를 보호해. 난 절대 죽지 않으니까.”
다만 발자크가 마음에 품은 뜻은 안드레와 정반대.
“절대 여기서 죽지 않아. 끝까지, 전하께서 이루실 제국을 꼭 봐야만 하거든. 아버지와 노병들의 희생이 어린 제국을 말이야. 더 나아가 이를 지켜보고 그들에게 전해야 하니, 절대 죽지 않는다.”
아버지의 마지막.
그를 뛰어넘겠단 결심.
더 나아가 제국의 영광을 지켜보겠단 욕심.
생을 포기할 생각 따위 없다.
오히려.
“그러니 날 보호하지 마라. 난 죽지 않는다.”
살기 위해 죽음에 바투 다가서야만 했다.
안드레와 발자크의 바짝 날 섰던 동공이 멍하니 풀어졌다.
푹푹 뿜어져 나오는 입김이 더웠다.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얼굴들.
죽기 직전 부리는 만용일까.
하나 공작이 방금까지 부리던 여유를 버리곤.
“이제야 좀 재밌어지겠군.”
비로소 호적수를 만났다는 듯 미소 지었다.
벽을 넘으려 하고 있다.
아마 지금 기회가 아니라면 둘의 합공을 이겨 내지 못하리라.
죽거나 이기거나.
상대의 잠재력이 폭발하는 이 순간, 가장 즐거운 전투를 벌이지 않겠는가.
곧 세 기사가 날 선 죽음 위에서 검무를 추려 하기 직전.
공작성이 무너졌고.
율리우스가 등장했다.
이어진 어둠이 그들의 눈을 덮었고.
모두가 그곳을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할 때.
세 기사만은 저들의 싸움에 집중했다.
세상 아무것도 없다는 듯.
오직 상대의 목숨을 끊기 위해.
암염이 동남부를 완전히 물들이기 직전.
미약하게 남은 무대의 불빛 아래.
꺼질 듯 흐릿한 실루엣 셋이 선명한 살기로 서로를 노렸고.
암전과 동시에 검기가 치열하게 휘몰아쳤다.
* * *
불은 닿는 것들을 사른다.
앞에 놓인 것이 무엇이든 태우고 소멸시켜 버린다.
그것이 불의 속성이며 태생.
마나로 이룬 마법도 형태가 불이라면 반드시 그러하다.
폭발하거나, 진득하게 눌어붙거나, 때론 다양한 형태를 취하더라도.
결국 파괴가 불의 본질.
다만 황태자가 품은 신비는 달랐다.
광염은 빛이 되어 번졌고 청염은 번개처럼 갈라졌으며 심지어 녹염은 모양새는 불이나 다른 이들을 살리는 생명력을 품었다.
궤를 벗어난 불의 형태와 능력.
그런데 이번 뿜어낸 여섯 번째 불 암염(暗炎)은 그중에서도 조금 더 특별했다.
물감이 세상을 물들이듯, 퍼져 나가는 까만 불.
적염은 쏟아지는 비를 모조리 증발시킬 정도로 뜨거웠다면.
암염은 빗방울을 타고 번져 나갈 만큼 차가웠다.
사일러스 공작이 생전 처음 보는 불에 잠시 넋을 놓았다.
황태자의 거대한 망치가 지나간 자리.
무너진 잔해가 휑하니 속을 비추는 광경, 까만 불이 속살거리며 번져 나가는 광경이라니.
마법으로 이를 따라 할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단순히 수정 마법을 주로 다루기 때문이 아니다.
그간 쌓아 온 방대한 마법 지식과 이를 엮어온 지혜가 단번에 알려 주었다.
저건 세상의 법칙을 벗어난 무언가라고.
그 세상의 법칙을 벗어난 무언가가 차근차근 공작성을 넘어 빗줄기를 타고 올라 하늘에 닿았고.
화아악-
기름 부은 장작에 불이 번지듯 순식간에 하늘을 삼켜 버렸다.
방금까지도 어둑했던 땅에 이젠 완전히 암흑이 드리웠다.
너무나 어두워 지금 딛고 선 바닥이 제대로 된 것인지 헷갈릴 정도.
아스라이 들려오는 검 부딪히는 소리와 여전한 빗소리가 아직 현실임을 알려 주는 척도.
먹먹한 세상 속에서.
‘전하? 전하!’
사일러스 공작이 목소리를 높여 보았으나 황태자는 묵묵부답.
설마 율리우스와 싸우고 있는가.
짙은 암염으로 인해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미약한 기척이 느껴져 그곳으로 향했다.
다행이라면 마나를 펼쳐 방향과 앞을 가로막은 장애물들을 감지할 수 있다는 것 정도.
하나 이외에는 불가능했다.
수정을 짜올리려 치면 까만 불꽃이 수정마저 먹어 치우려 했으니까.
이렇게 무기력한 상황은 어릴 적 이후, 마나를 제 몸처럼 다루기 시작한 이후 처음이었다.
더군다나 먹먹한 오감이 더욱 공포를 부추겼다.
더듬더듬 마나로 바른 방향을 찾아가길 퍽 오래.
갑작스레 목덜미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이렇게 넓었던가? 공작성이.
지금 꽤 오래 걸었는데 걸리는 벽이 없다.
그저 황태자의 망치가 주변을 다 부수었기 때문인가?
아니, 부서진 구조는 이미 파악해 두었다.
대마법사는 그저 운으로 딴 자리가 아니다.
철저한 훈련과 이성으로 이룬 경지.
황태자가 암염을 뿜어내기 전, 부서진 천장의 작은 형태마저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가 자신의 동선을 기억 속 도면과 맞추어 본 결과.
분명 벽에 부딪혔어야만 했고 쏟아지는 비에 몸이 축축이 젖어 들어야 했건만.
피부를 적시는 이 감각은 가짜.
“비가 아니군.”
인식함과 동시에 축축했던 몸이 메말랐다.
귓가에 울리던 빗소리도 칼 부딪치는 소리도 사라진 공간.
하여 더욱 이상스러웠다.
마법사의 이성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현실과의 괴리를 파악하자 변했다.
인식과 의식에 영향을 받는 공간인가.
만일 그렇다면 지금 떨어진 거리가 거짓이라 생각한다면 어떨까.
작은 의문이 그의 이성을 움직였고.
새까만 공간이 답했다.
멀게 느껴지던 기척이 순식간에 앞에 다가왔다.
그러나 웃지 못했다.
“아-”
사일러스 공작이 순간 억눌린 감탄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의 눈에 보이는 것은 단순히 새까만 공간이 아닌.
“흐음, 네가 몇 가주더냐?”
흐르는 갈색 머릿결, 현기를 담은 눈동자, 튀지 않는 색임에도 이를 특별하게 보이게 만들 정도로 아름답고 품격 있는 외모.
치렁치렁 과하게 온몸을 휘감은 값비싼 보석들도 흠집 내기 어려울 정도.
아는 얼굴이다.
이전 부순 수정 기둥 중 하나.
가장 두껍고 가장 먼저 생겨났다던.
초대 가주의 얼굴.
“데미 하르델…….”
공작이 저도 모르게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먼 선조이자 하르델 공작가의 가주이며 최초의 대마법사이자 인간의 해방자, 건국제의 친우, 마법사 중 마법사라 불리우는 영웅의 이름을 불렀다.
자신의 근원이자 꿈.
그리고 먼 후손의 목소리를 들은 위대한 영웅은.
“뭐어? 데미 하르데에엘? 내가 네 친구니?”
대번에 고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곤 덥석.
노인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야야야-.”
“요 못난 것아. 고작 집 안에서 놀고먹으라고 내가 그리 고생한 줄 알어?”
“잠깐만요. 잠깐!”
“잠깐은 반말이고 욘석아. 그리고 누가 그렇게 수정 기둥을 소중히 하라 했어. 원래 다음 가주가 나타나면 바로 부수라 했는데!”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뭐? 지금 말대답하는 거야? 지금 시조한테 말대답하는 거야? 요, 요, 요 못된 눈 좀 봐!”
“아니, 잠깐만요. 초대 가주님! 잠깐만 귀 좀 놔주세요.”
“풀어 봐 그리 잘났으면 네가 직접!”
귀가 찢어질 듯 당겨 왔다.
짤랑짤랑 손목에 가득한 보석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 댔다
순간 사일러스가 마나를 뿜으려다가.
그래, 이건 가짜다.
마음을 달리 먹었다.
의지와 이성으로 통제되는 세상.
마음먹기에 따라 고통도 달라지는 법.
아, 달다 달아, 초대 가주님의 훈계가 참으로 달다.
그리 헛생각을 하자 점차 줄어드는 고통.
답을 찾아낸 그가 싱긋 미소 지을 때.
꽈아악-
손아귀에 전달되는 힘이 한층 강해지자 다시 밀려드는 고통.
이번엔 진짜 귀가 찢어질 것 같다.
“아아악-!”
천하의 대마법사이자 제국 공작 중 하나인 사일러스가 경망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그만큼 아팠다.
이상할 정도로.
미칠 듯 아팠다.
이 정도면 귀를 당기는 게 아니라 뇌를 당긴다 해도 믿을 정도로…….
뇌?
사일러스의 사고가 다시 한번 크게 튀었다.
귀를 당기는 고통이 아니구나.
초대 가주는 세상에 존재치 않는 이.
간섭할 수 있는 영역은 의식.
그렇다면 지금 그녀는 공작의 의식을 꼬집고 있는 것이리라.
왜?
아픔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사일러스 공작이 생각을 이어 나갔다.
마법사의 집중력은 때로 고통을 넘어서서 새로운 지평을 보여 주기도 한다.
공작의 사고가 넓어짐과 동시에 지금껏 쌓아 올린 마법 체계 한구석을 자꾸 자극하는 이질적인 마나.
자신이 이루어 놓은 체계 일부를 강하게 쥐어 질책하는 형상.
지금의 꼴과 같지 않은가.
그제야.
“아주 맹물은 아니로구나.”
초대 가주 데미 하르델이 미소 지었다.
“어디 이겨 내 보아라. 그러면 알려 주마.”
승부를 제안했다.
무엇을 알려 준다는 것일까.
상관없다.
궁금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정도였던 마법사의 경지가.
자신이 도달한 높이가 어느 정도에 달했는지도.
기사에게만 승부욕이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 마법사는 과거라는 더욱 지독한 열병에 시달렸다.
남겨 놓은 서적과 흔적을 보며 느껴지는 격차에 몸을 떤 게 얼마이던가.
비로소 높이를 견주어 볼 때.
공작의 눈이 번쩍번쩍 의지를 뿜어내었고.
이어 데미의 눈에서도 투명한 광망이 흘렀다.
두 대마법사의 주도권 싸움.
마법 하나 만들어 내지 않았지만 치열한 다툼에 세상을 잠식한 암염마저 일렁일 정도.
이면에서 벌어지는 초인들의 싸움.
마침내.
파앙, 작은 폭음과 더불어 일어난 파문.
데미의 매끈한 손가락이 공작의 귀에서 떨어져 나온 결과.
“가르침 감사합니다.”
“가르침이랄 것도 없는 걸 뭘. 내 핏줄이라면 이 정도는 해 주어야지.”
그녀의 말에 공작이 겸손히 미소 지었다.
자신은 전력을 다한 반면, 초대는 전력을 다하지 않았음을 안다.
그래도 확실한 건.
“기준을 통과했으니 선물을 주어야겠지.”
그녀의 기대를 만족시켰다는 점.
데미가 치렁한 보석처럼 반짝이는 미소를 짓고는 와락.
자신의 후손을 껴안았다.
공작은 그저 가만히 이를 두었다.
공고히 쌓아 올린 마법 체계를 감싸는 따스한 마나가 느껴졌다.
“과연 율리우스 저 개새끼만 카이론을 따라 하려 노력했을까?”
“……!”
“수정을 통과한 빛은 분화되지. 수많은 색을 띠어. 우리의 심장은 단단한 수정이지만 마나를 투과하여 수많은 색과 새로운 세상을 자아낼 수 있음을 느끼고 있지 않았니.”
“느꼈습니다.”
“그래, 굳건히 세운 의지가 수정의 각도를 조절하는 손잡이. 비로소 투명하기만 했던 우리 또한 색을 얻으리라.”
깨달음을 속삭이는 데미의 눈에 어린 투명한 광망이 수많은 빛을 머금었다.
이어서 몸 가득 달아 둔 보석들이 차르르륵 떨어 대며 번뜩이기 시작.
점차 마나가 달아오르더니 공작의 마법 체계에 새로운 수식을 새겨 넣었다.
선조가 먼 후손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부탁 하나를 남겼다.
“가서 미쳐 버린 친우,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버린 개새끼를 혼내 주렴. 위대한 선조의 부탁이란다.”
“마지막을 지켜보겠습니다.”
고맙구나.
이를 마지막으로 데미가 까맣게 물들어 흩어졌고.
여전한 암염 속.
들어 올리는 공작의 눈이 빨갛게, 노랗게, 파랗게, 푸르게 빛나기 시작하며 어둑한 불을 걷어 내었다.
개안을 이룬 그의 시야에 보인 건.
“허억, 허억, 허억.”
숨을 몰아쉬는 등판, 낭자한 피, 더럽혀진 백금발.
그리고.
황태자의 손에 들린 율리우스의 잘린 머리.
축, 혀를 늘어뜨린 채 죽은 척하던 놈이.
“어? 왔네? 데미를 만났구나!”
공작을 보곤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