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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73화 (173/200)

173화 절망을 닮은 불

[암염 속 깊은 그림자가 꿈틀댑니다. 이전 갖고 있던 신비 그림자, 암화가 암염에 흡수됩니다. 암염의 색이 더욱 짙어집니다]

[암염에 담긴 불이 너무나도 커 당신의 운명을 벗어나려 합니다]

암염, 어둑한 불꽃이 이전 품었던 영림의 그림자와 암화를 잡아먹고 심장에 자리 잡은 뒤.

녀석은 끈적거리며 심장 주변을 휘돌았다.

지금껏 얻어 온 불들과는 성질이 달랐다.

맑게 타오르는 앞선 다섯 불과 달리.

암염은 마치 사냥감을 기다리는 맹수와 같이 자세를 낮춘 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움직였다.

앞선 다섯 불이 내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면 암염은 자아를 가진 듯 독립적인 움직임을 보이려 했고.

그런 이유로 지금껏 풀어놓지 않았다.

지난 건국제가 이야기했듯 아직 암염을 통제할 만한 경지가 아닐 수도 있었으니까.

청염을 얻으며 신체 재구성을 하지 않았다면 처음 접촉한 순간 물들어 버렸을 터.

이를 피한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으나 완전히 다루지는 못할 것 같아 억눌러 왔던 힘.

그러나 율리우스를 만나 놈의 번개와 부딪친 순간.

암염을 풀지 않고선 승부가 나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떠오르는 운명을 읽어서가 아니라 본능적으로 알았다.

건국제의 불을 어설프게 따라 했으나 안에 담긴 세월이 너무 두터웠다.

이게 바로 건국제의 옆에 섰다던 영웅의 저력이리라.

아직 모든 힘을 개방하지 않았을 때 승부를 내야 한다.

결심한 순간.

때를 만난 암염이 맹수처럼 심장 밖으로 뛰쳐나왔고.

순식간에 세상을 검게 물들였다.

심지어 내 시야마저 잠식할 정도로

화륵, 작게 피워 낸 불.

여전한 암흑, 몸을 감싼 적염에 암염이 슬며시 뒤로 물러났다.

찰박찰박 적염마저 물들이고 싶어 하나 적염이 이를 뿌리치는 중.

감각을 확장시켜 보았으나 느껴지는 건 후두둑 쏟아져 내리는 어둠뿐.

다른 공간임을 짐작했다.

운명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공작은 어디에 있는가, 율리우스는.

둘 또한 암염에 휩쓸려 의식 깊은 곳에 잠겨 있을지도.

굳이 걷지 않았다.

여기가 의식 속이라면 내가 걷기 전에 공간이 알아서 움직일 테니까.

다만 움직임을 보기 위해 불을 더욱 강하게 피워 올리려니.

무언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은은하게 흐르는 살기.

율리우스인가.

잠시 브레이커와 망치를 놓고선 활을 들어 올렸고.

광염을 뽑아 살을 걸었다.

촉과 깃에는 청염을 뭉쳐 쏘아 내니.

공기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날아간 빛살이 신호처럼 날았고.

여전한 어둠 가운데 이를 피하는 무엇인가.

따악, 손가락을 튕기자.

뭉쳐 놓았던 청염이 폭발하며 사방에 날카로운 번개를 뻗어 냈다.

푸른 거미줄이 촘촘히 수놓인 자리.

얼핏 보이는 상대의 실루엣.

넓은 어깨와 긴 머리, 비열한 눈웃음.

율리우스.

놈도 나를 노리는지.

콰릉! 번개가 터졌고 앞에 도달했다.

망치를 들어 날아오는 놈을 쳐내려 했고.

진생철퇴와 놈의 몸이 닿는 순간.

철벅, 까만 불꽃이 물감처럼 뭉그러지며 철퇴를 물들였다.

“빌어먹을 장난 그만 치십쇼.”

이를 털어내며 불만을 토해 내자.

“으음, 재미없냐?”

어느새 뭉그러졌던 암염이 뭉쳐 드러난 것은 건국제 카이론.

그가 멋쩍은 얼굴로 내 앞에 섰다.

“아까는 그렇게 화를 내더니 지금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드십니까?”

“글쎄, 놈에세 화가 난 것과 별개로 너한테 이를 풀면 안 되지. 화를 전가하는 것밖에 더 되겠냐.”

“뭐라고요?”

“그렇지 않냐. 상대에게 화가 났다고 다른 이에게 이를 전가하면 그건 군주로서 맞지 않은 일이다.”

건국제가 오랜만에 선조다운 위엄을 보였다고 생각하며 턱을 치켜드는 모습에.

“너 누구야.”

브레이커로 답했다.

“누구야 너. 이 새끼야, 너 율리우스지? 뒈졌어. 빌어먹을 자식이.”

“자, 잠깐! 나 네 선조다! 카이론 아이로니아! 심장에 어린 불의 주인!”

“지랄 마. 우리 선조께서 그런 멋진 말을 할 리가 없지. 내가 하루 이틀 본 줄 알아?”

“아니, 미친 녀석아! 진짜라니까.”

“안 믿어.”

“믿어!”

“싫어.”

그렇게 몇 번 검을 휘두르고 나서야.

“그래! 존나 열받는다! 열받는다고! 사실 지랄하고 싶은 걸 억지로 참고 있는 중이다. 저 개같은 놈을 죽여 달라고 하고 싶은데, 또 마음이 빌어먹게 아프단 말이다!”

건국제가 비로소 제 마음을 터놓았다.

“제기랄 좀 모른 척 받아 주면 안 되냐?”

“제가 왜요? 화나는 거 억지로 감추면 뭐가 해결됩니까?”

“어, 그건 맞지.”

“것봐요. 안 어울리는 짓하니까 얼굴이 그렇게 벌겋죠.”

“그건 너 때문이 아닐까.”

“그건 그렇고 이 끈적이는 까만 불. 뭐 어쩌라고 이렇게 만들어 놨습니까? 처음입니다. 신비를 얻고도 곤란한 경우는.”

“뭐? 다시 말해 봐.”

“신비를 얻고도 어떻게 써야 할지 감이 안 오는 경우가 처음이라고요.”

“그래? 처음이야? 오호라 그럼 매우 궁금하겠네. 막 부탁하고 싶겠네. 응? 그렇지?”

“보자보자 하니까 이 새끼가 진짜-.”

“알려 줄게, 알려 주면 되잖냐. 뭘 그렇게까지 화를 내고 그러냐.”

욕 처먹기 직전까지 갔던 건국제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고.

저지를 뻔했던 패륜을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반쯤 저지르긴 했지만 어쨌든 마침표를 찍진 않았으니까.

그가 잠시 손을 휘둘러 끈적이는 불을 쥐곤.

“이건 내 깊은 절망이다. 모든 싸움이 끝난 뒤, 영광스런 자리에 올라섰지만 가장 나약했다.”

의외의 말을 꺼냈다.

손안에 몽글몽글 뭉쳐 타오르는 암염을 보는 건국제의 눈이 평소와 다르게 어둑하게 물들어 갔다.

“구하지 못한 이들, 죽여야만 했던 이들, 고통을 받았던 이들, 스스로를 희생했던 이들의 절망이기도 하며. 곧 너의 절망이기도 하지.”

건국제가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았고.

나 또한 그의 눈빛을 바라보며 조금씩 침잠했다.

가장 빛나는 영광 뒤엔 무엇이 도사리는가.

율리우스를 통해 보았다.

영웅은, 초인은 완벽하지 않다.

그저 조금 더 강하고 조금 더 고결했을 뿐.

인간을 해방시켰던 해방자마저 제 욕심에 매몰되어 멸망을 갈구하고 있지 않은가.

결국은 불완전한 인간.

그건 건국제 카이론도 마찬가지이며.

나 또한 마찬가지.

“넘쳐 나는 절망을 주체하지 못했다. 뿜어내는 불이 밝고 아름다워질수록 속에 맺힌 진물이 고여 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새까맣게 썩어 마음을 좀먹기 시작하더군.”

시대를 뒤바꾼 초인의 씁쓸한 자기 고백.

인간을 향한 억압과 부당한 노예질을 끊어 낸, 새로운 문명을 이루어 낸 그마저도 마음속 모여드는 절망을 어찌하지 못했다.

건국제의 눈동자에 비친 나의 얼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인간이었던 거지. 그래 인간이라 어쩔 수 없었던 거였어.”

그가 당시를 회상하듯 쓸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때로 밀려드는 후회와 가슴을 메웠던 절망을 어찌할 수 없었노라고.

적의 파상 공세는 막아 내도 속에서 썩어 가는 마음의 병을 막아 낼 수 없었다고.

그래서.

“이를 모아 불로 만들었지. 지독하게 끈적이고 까만 불을.”

탄생한 것이 암염.

초인의 절망과 후회를 뭉쳐 만든 아픔의 결정체.

다만 피어나는 의문 한 가지.

“무엇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단순히 자기 치유를 위해 만든 겁니까.”

이 불은 그저 마음을 물들인 절망을 뱉어 내기 위해 만들어 낸 것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뭐라고 해야 할까. 아픔마저 힘으로 만들어 낸, 영웅적이며 신화적인 결과라 봐야겠지.”

아릿한 고백은 잠깐, 건국제가 금세 평소의 얼굴을 되찾았고.

“깨달음은 가장 어둑한 곳에서 피어나는 법, 불은 어둠 속에서 가장 빛나는 법, 환상은 깊은 절망에서 피어나는 법이다. 보아라 이 까만 세상을. 모두의 절망이 깃든 자리를.”

전승이 이어졌다.

암염에 담겨 있던 건국제의 의념이 본격적으로 작동하기 시작.

“절망을 뱉어 내라. 부끄러울 것도, 아쉬울 것도 없다.”

그의 인도를 따라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아픔과 상처를 꿀럭꿀럭 뱉어 냈다.

처음엔 거부하려 했으나 어차피 이곳은 의식 세계.

결국 나 또한 조심해야 하는 것이기에 허락하였고.

뿜어낸 어둠이 주변을 휘감았다.

참으로 많았다.

외로움, 아픔, 절망, 열등감, 시기, 질투, 미움, 후회 등.

얼핏 보이는 전생, 황제의 대역으로 살아야 함을 알았을 때.

망해 가는 제국과 홀로 선 모습.

무기력한 가짜 황제의 마지막.

북부의 검과 노병들의 죽음.

그리고 지금 여기까지.

걸음걸음 밴 아픔이 많았다.

“많구나.”

건국제도 놀랄 정도.

다만 어린 기억까지는 볼 수 없는지 전생에 대해 묻진 않았다.

분명 주변을 가득 메울 정도로 많았으나 세상이 어둡기에 금방 섞여 들어갔고.

그렇게 눅눅한 암염의 일부가 되었다.

단번에 알았다.

아, 아픔을 먹고 자라는 불이라니.

이전처럼 무작정 태우지도, 증발시키지도 않는다.

그런 깨달음을 알았는지.

“그래, 맞다. 나이가 들어서야 알았지. 아픔 또한 삶의 일부라는 것을. 평생 투쟁과 분쇄만을 알았던 초인이 인간적인 약함을 인정한 순간이었다.”

건국제가 대수롭지 않다는 미소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 모습이 소탈하여 덩달아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강철은 시련을 이겨 내려 단단해졌고, 불은 악을 살라먹기 위해 거세게 타올랐다.

끝없는 싸움, 꺾이지 않고 모든 걸 부수어 왔으나 골병이 들어 버린 속.

제 스스로 인간이길 버렸던 영웅은 제 나약함을 인정했고.

“그리고 이 불은 그 나약함의 고백이자 유한함을 받아들인 영웅의 추락이며-.”

또 다른 비상의 시작이지.

나약함을 인정한 순간, 한 가지밖에 몰랐던 바보 같았던 건국제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어둑한 불은 그 자체로는 그저 눈을 가리울 뿐이지만 그만큼 환상을 이루어 내며 불을 가장 밝게 빛나게 해 준다.”

“무대라는 뜻이군요.”

“정확해. 역시 선조를 닮아 똑똑하구나.”

“이제 설명은 충분하니 보여 주십시오.”

“이미 보았지 않느냐.”

“네?”

“쌓인 절망으로 상대의 빛을 끄고 네 빛만을 환히 밝히는 세상이라는 걸.”

“……!”

아픔 속에서 제 불을 더욱 밝게 태우는 법을 깨달았고.

상대의 눈을 가리는 법마저 배웠다.

“가라, 가서 저 미련한 친우, 아니 이젠 악마의 주구가 되어 버린 타락한 영웅을 죽여라. 이 어둑한 불이라면 놈이 따라한 번개를 충분히 눅눅히 녹여 낼 수 있을 것이다.”

시야가 걷힌 후 마주한 율리우스.

건국제의 말대로였다.

그의 눈에 담긴 어둑한 광기.

모두의 절망이 녹아든 암염 속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몸을 바들바들 떨던 율리우스가.

“카아악!”

지금껏 지었던 얄미운 미소를 잃어 버리곤 다급히 덤벼들었다.

무언가 쫓기듯 휘두르는 검과 다급한 번개.

분명 같은 색의 불로는 이를 어찌하지 못했으나.

“떨어져! 떨어지라고!”

질척한 암염은 번개에마저 눅눅하게 들러붙었다.

성마르고 날카로운 색색의 번개 위로 질척이는 암염의 질감이 상반되었고.

율리우스의 번개가 암염에 휩싸여 갈 길을 잊었다.

“어때, 넌 가지지 못한 색이.”

“카이론이 알려 준 거군. 맞지?”

“자기 대신 미쳐 버린 친구를 좀 죽여 달라더군.”

“친구라면 제 목을 내놓을 줄 알아야지. 카이론 그놈은 너무 눈치가 없어.”

“지랄.”

암염으로 우위를 점했건만 역시 영웅 자리는 내기로 따낸 것이 아니라는 듯 치열했다.

서로를 죽이기 위한 수가 난무했고 놈의 검이 날카로워 강철의 신비를 갈라 낼 정도.

핏, 검이 스칠 때마다 피어나는 불꽃과 핏물.

아마 암염이 없었다면 목이 잘리는 건 내 쪽이 아니었을까.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네 녀석, 대체 무슨 술수를 부린 거야!”

율리우스의 주변을 휘감은 암염이 더욱 그를 옥죄어 갔다.

분명 번개를 거세개 뿜어내어 막고 있건만.

깊은 수심 속으로 들어가듯 그의 몸이 점점 둔해졌고, 반면에 내 감각은 점점 날카로워지니.

처음엔 살을 내줄 수밖에 없었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고, 차차 반격을 시작.

격차가 벌어졌다.

이제 피어나는 것은 내 피 대신 놈의 피.

“웃기지 마라! 분명 이 어둑한 불은 본 적이 없다. 대체 어디서 난 거냐! 카이론은 친우인 나에게도 이런 불을 보여 준 적 없었어!”

점차 암염에 먹혀들어 가며 남기는 단말마.

“이 불이 카이론이 이룬 것이라면! 그렇다면 나 또한 이룰 수 있다! 나 또한 해낼 수 있어! 이 불을 나의 것이 될 거다!”

광기에 가득 찬 영웅의 외침.

놈은 모르는 거다.

“이 불은 대상을 가리지 않아.”

지금 뿜어낸 암염은 대상을 엄밀히 구분하지 않는다.

세상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불.

세상 모든 사람의 절망을 담아 놓은 불.

놈과 나를 구분하는 결정적 차이는.

“너는 스스로의 절망을 외면했고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뿐이야.”

율리우스는 제 나약함을 인정하지 않았고.

나는 내 속에 깃든 나약함을 인정했다는 점.

나약함을 인정한 자는 절망 속에서 더 빛날 것이며 끝까지 거부한 자는 그 속에서 허망하게 스러지리라.

건국제가 제국을 이루고 정점에 이른 순간 깨달은 절망.

어쩌면 심장의 품은 불들은 그의 인생을 닮았다.

타오르는 불로 구속된 처지를 벗었고, 터지는 분노로 세상을 몰아내었으며, 빛으로 화하여 대룩을 질타했고, 푸르른 생명으로 사람들을 구원하고, 내리치는 천벌이 되어 적들을 뭉갰다.

그리고 이번엔 정점에 올라 마주한 마음의 병을 형상화했다.

나 또한 겪었고 겪고 있는 병.

나는 까만 배경 속에서 활활 타올랐고 율리우스는 점차 빛을 잃어 갔다.

하여 이를 알려 주어 놈을 유혹했다.

이 가득한 절망을 받아들이라고, 이를 인정하고 무거운 짐을 나누어 지자고.

이내 브레이커가 놈의 목에 닿았고.

떨어진 머리를 잡아 올리는 순간.

“전하!”

공작이 등장.

“어? 왔네?”

율리우스가 방금까지 짓던 당황했던 표정이 거짓이라는 듯 활짝 웃었다.

“이제야 죽일 녀석들이 다 모였어.”

“죽을 건 너다.”

놈의 헛소리가 지겨워 머리통을 적염으로 감싸는 순간.

율리우스가 적염을 빨아들이더니 더 나아가 내가 뿜어낸 불들을 일제히 마시기 시작.

놈의 몸 또한 피대신 새까만 어둠을 삼켜 대었다.

즉, 암염을 흡수했다.

내 의도대로.

유혹에 넘어왔다는 것도 모르고 놈이 웃음을 터뜨렸다.

* * *

“큭큭, 이봐 황태자. 순진하구나. 정말 좌절 하나 못 받아들여 이 지경이 되었다 생각하는 거냐? 첫 영웅이?”

율리우스가 목에서 피를 찍찍 내뿜으며 웃었다.

새끼, 공기도 없이 어떻게 웃는 거야?

황태자의 작은 읊조림을 무시한 그가.

“넌 모른다. 진짜 절망이 무엇인지. 진짜 박탈감이 무엇인지. 데미, 이 미련한 년아. 카이론, 이 개새끼야. 데미, 네년은 평생 이루지 못할 사랑에 끙끙 앓았지. 난 고작 공작위라는 너절한 지위와 작은 땅 하나 받았을 뿐이야. 그게 내 노고에 대한 보답이라고? 이 X발! 넌 제국의 황제가 된 주제에 나에겐 그거 먹고 떨어지라는 거냐!”

점점 울부짖듯 분노를 표했다.

그의 눈에 검은 광기가 번들거렸다.

“사랑으로 감내하겠다고? 지랄 마. 너에겐 이루지 못할 비참한 사랑이라도 있었지, 나에겐 뭐가 남았나. 우정? X같은 소리 집어치워. 같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는데 왜 너만 홀로 영광을 누리는 거냐. 이 욕심 많은 새끼야. 카이론, 대답해! 그렇게 세상에 관심없는 척하던 새끼가 왜 모든 걸 가졌어! 이 X발놈아!”

그가 오랜 세월 뱉어 내지 못했던 진심을 토악질해 댔고.

“이럴까 봐.”

건국제가 황태자의 입을 빌려 답했다.

“이럴까 봐. 네놈이 욕심을 부려 모두를 멸망으로 이끌까 봐. 데미도 동의했다. 영광을 혼자 누렸다고? 솔직히 말하지. 넌 영광을 누리면 악마가 될 놈이었어. 처음엔 죽이려 했지. 하지만 데미가 말리더군. 그래도 친우라고. 하여 살려 두었다. 널. 하지만 지금에 와선 좀 후회가 되는군.”

“…….”

이제야 알게 된 진실에 율리우스가 흐느꼈다.

아니 웃었다.

흐느끼듯 웃었다.

그리곤.

“그래, 맞는 말이야. 이렇게 되어 버렸지.”

스스로의 악함을 인정하며.

“너는 절망에 졌지만 난 절망을 삼키고 더 나아가 내 힘으로 만들려 한다. 이 어둑한 불꽃은 이를 위한 제물이 될 것이며, 너와 데미의 후손은 너희를 대신해 죽을 것이다.”

몸을 부풀리기 시작.

황태자의 손에 들려 있던 머리가 흩어져 암염속으로 녹아들었고.

어둠을 마셔 대던 몸이 부풀다 못해 터져 피와 내장을 흩뿌렸다.

이어 암염을 닮은 새까만 전류가 피어나니.

“아아, 좋구나. 덕분에 암뢰를 얻었어. 고맙다 미련한 친우의 후손이여.”

검은 피막 날개 네 장을 활짝 펼치고 머리엔 세 개의 뿔을 단 영웅.

아니, 악마.

율리우스가 세로로 갈라진 눈동자를 감추며 희게 미소 지었다.

비죽한 이와 긴 혀 사이로 꺼먼 절망이 뚝뚝 흘러내렸고.

땅에 닿을 듯 기다란 팔엔 손 대신 칼과 번개가 주렁주렁 달린 모습.

“이제 네가 만들어 준 공간이 내 터전이자. 힘이다.”

악마가 된 율리우스가 황태자를 보며 비열하게 웃었다.

암염을 빼앗겼으니 헤쳐 나갈 방법이 사라졌다.

그때.

“뭐해 공작? 선조한테 뭐 받아온 거 없어?”

황태자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고.

공작이 빙그레 웃으며.

“물론 있습니다. 전해 달라더군요. 사랑을 안 받아 줬다고 이런 멍청한 짓을 저지를 줄 몰랐다고요. 이래서 너 대신 카이론을 마음에 품었다고.”

어쩌면 가장 자존심 상하는 말에 율리우스가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그러니 이만 죽어 달랍니다. 추하게 굴지 말고.”

공작이 색색의 수정을 펼쳤고.

그 위를 황태자의 불이 내달렸다.

“아주 합당한 말씀이야.”

둘의 얼굴에 같은 미소가 번져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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