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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82화 (182/200)

182화 착각

신성 교단의 심판의 종류는 두 가지.

첫째로는 개인의 믿음을 달아보는 시험.

높이 쌓인 재단 위, 믿음을 달아볼 자가 올라가고 나면.

장작 무더기에 불을 붙인 뒤 지켜본다.

불이 사그라들거나 그의 생이 사그라들 때까지.

잔혹하며 비이성적 행위.

그들은 지금껏 그게 믿음의 증명이라 믿었다.

그가 옳다면 어떤 뜨거운 불 속에서도 신성께서 지켜 주시리라.

어떤 이는 본래 사제도 성기사도 아니었건만 심판대에 올라 신성을 만나고 사제로서 살아가기도 했다.

실제로 과거 한 성자는 심판대에 올라 죽기 직전 신성의 목소리를 들었고.

놀라운 신성력으로 불을 모두 이겨 내다 못해 타들어 간 몸마저 되살리기까지 했다는 기록.

하나 그는 자신의 추함을 고치기보다 이를 믿음의 증거로 삼아 평생 아픈 이들을 찾아다니며 치유했다는 놀라운 신앙.

심지어 어떤 이들을 스스로를 심판대에 달아 믿음을 시험하기도 했으니 신성 왕국에선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신성이시여!”

“살리소서! 우리를 구하소서!”

“악한 자가 당신의 이름을 빌어 우리를 심판하려 하니, 신성이시어 바라옵건대 우리를 구원하사 당신의 위대함을 드러내소서!”

“신성을 위하여 죽으리니, 신성을 위하여 죽으리니! 저 악한 자를 심판하사 당신의 정의로움을 드러내소서!”

황태자가 청한 심판은 두 번째 종류.

서로의 믿음을 비교하는 심판.

뜻이 다른 둘이 올라 타오르는 불 속에서 저들의 신성을 비교하는 시간.

다만 황태자는 성왕을 비롯한 고위 사제 모두를 심판대에 올렸고.

이제부터 모두가 신성 앞에서 제 믿음을 증명해야 했다.

그에게 공격을 가하기도 어려웠다.

본디 신성 심판에선 물리적 공격이나 마법은 금물.

오직 타오르는 불 속, 서로의 순수한 신성력만을 겨루는 시험.

사실 몸을 감싸는 불이 너무나도 뜨거웠고 맹렬하여 함부로 움직이기도 어려웠다.

제 목숨을 볼모로 삼아 벌이는 심판이라니.

믿음 약한 사제 하나가.

“으아아악!”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재로 화하여 사그라들었고.

이를 바라보던 이들의 얼굴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단순히 주변을 감싼 뜨거운 불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건 단순한 심판이 아닌 전쟁이다.

만일 여기서 황태자보다 먼저 죽으면 자신은 신성에게 버림받은 자가 되며 믿음 없는 자가 된다.

실상이 어떻든.

그야말로 가장 모욕적이며 끔찍한 일.

평생 신성에게 기도 한 번 드린 적 없는 저자에겐 질 수 없다.

자리에 선 고위 성직자들과 성기사단장들이 이를 악물곤 신성력을 뿜어내었고.

추기경들이 그를 죽일 듯 노려보아도.

“뭐해? 이 정도로는 옷자락도 상하질 않겠는데. 기도 좀 더 해 봐. 이래서야 재미가 없잖아?”

황태자는 여유로운 태도로 일관할 뿐.

이글거리는 불 속, 백금발을 휘날리며 선 황태자는 정말 신성의 대리자와도 같았다.

발아래에서 부스러지는 흑단목들, 더불어 새까만 정복, 유독 하얀 얼굴과 이글거리는 진홍색 눈동자.

불을 따라 일렁이는 짙은 음영이 익숙한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았다.

다만 검고, 하얗고, 붉을 따름.

한 고위 성직자가 참지 못하고 손가락을 들어.

“감히! 심판을 장난으로 취급하지 말아라! 이는 신성한 의식이며 악을 심판하는 위대한 일이다! 네놈같이 신성을 믿지도 않는 자가 비웃을 일이 아니야!”

“뭔 소리야. 그냥 나무 위에 사람 올려놓고 불 지르는 것뿐이잖냐. 바비큐도 이렇게 무식하게 굽지 않아. 그냥 죽일 명분이 없어 이따위 유치한 짓을 저지르는 것 아니었나?”

“가, 감히-!”

막 화를 내려던 성직자의 신성력이 감정을 못 이기고 흐트러졌고.

먹잇감을 찾은 불이 맹렬히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떻게서든 마음을 잡고 기도하려 했으나 불이 그의 옷자락에 옮겨붙은 뒤에는 늦었다.

비명도, 기도도 아닌 소리를 웅얼거리던 성직자가 까만 재가 되어 누운 뒤.

“아직도 진짜 불경을 저지르는 자가 누구인지 모르나 보군.”

황태자의 목소리가 기도를 중얼거리던 사제들의 귀에 꽂혔다.

외면하려 했으나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마음 깊은 곳에 파고드는 진실.

그가 한구석을 손으로 가리키며.

“보아라. 저자는 믿음이 거대하기에 저리 불 속에서도 멀쩡한가.”

믿음을 물었다.

자리에 선 건 시종과 시녀들.

참으로 신비하게도 그들 또한 불에 둘러싸였으나 실오라기 하나 상하지 않았다.

기도를 하는 것도 아닌 그저 빨랫감을 들고선 걷던 죄 없는 이들.

본래라면 비명을 지르며 죽어 갔어야 할 이들.

그러나 지금 보이는 표정은 성직자들보다 평온한 상태.

그러고 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람이 타 죽는 마당에 어찌하여 화이트 캐슬은 멀쩡하단 말인가.

저 멀리 두려움으로 자신들을 바라보고 있는 보잘것없는 하인들과 견습 사제들은 왜 심판받지 않는가.

“지금 신성께서 내리신 불은 죄악의 무게에 따라 뜨겁게 타오른다. 잘 들어라. 너희의 죄가 무엇인지 떠올리고, 죽어가며 참회해라. 그게 신성께서 내게 맡기신 심판이다.”

황태자가 그들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너희들의 죄가 무겁기 때문.

신성이 깊은 만큼 이 자리까지 올라오기까지 많은 죄악을 저질렀고, 지금 그 값을 치르는 것이라는 말.

몇몇 고위 성직자의 얼굴이 구겨졌다.

자신이 지은 죄를 떠올렸음일까, 아니면 황태자의 말이 고까워서일까.

물론 그들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좋다. 그렇다면 너 또한 죄악을 감당해라. 남에게 심판받으라 떠들어 대지만 말고 너도 심판대 앞에서 믿음을 증명하라.”

가장 거센 신성력을 뿜어내던 추기경 하나가 황태자에게도 심판을 받으란 말을 던지곤.

자신의 가진 신성력을 모두 태워 하얀 불을 일으켰다.

번져나가는 신성한 불이 황태자가 피워 낸 불 사이로 섞여 들어갔고.

이내 그의 몸을 탐하려 했다.

상대의 도발을.

“좋아, 해보자는 거지?”

황태자는 피하지 않았다.

자신의 불을 더욱 거세게 피워 추기경의 하얀 불을 막아 낸 채 서로의 믿음을 재었다.

추기경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짐을 보고 다른 추기경들과 고위 사제들, 성기사단장들이 기도와 믿음을 더했다.

칼도 피도, 마법도 돌아다니지 않았으나.

오직 믿음으로 서로의 생명을 탐하는 중.

이 풍경을 뭐라 해야 할까.

그저 누군가의 생명이 다하길 기다려야 하는가.

황태자는 홀로였고 그에 맞선 성직자들은 수백.

저울의 균형이 맞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건 누군가 연소하기까지 겨루는 지루한 싸움.

역시나 평생 기도와 신앙을 쌓아 온 성직자들의 하얀 불이 황태자의 불꽃을 밀어내고선 화이트 캐슬을 잡아먹으려 했고.

“자, 잠깐만!”

황태자가 뿜어낸 불꽃에는 상하지 않았던 고용인들과 견습 사제들이 고통에 떨기 시작했다.

그들이 뿜어낸 불은 황태자의 것과 달리 대상을 구분하지 않았다.

닿는 모든 것을 죽이려는 듯 열기만을 더해 갈 뿐.

그때 황태자의 몸에서 이번엔 누런빛이 번졌고.

그들을 안전하게 감쌌다.

그를 죽이기 위해 눈에 핏발까지 세워가며 기도를 외치는 사제들은 몰랐으나.

“이상해요.”

아이의 눈에는 보였다.

유리엘이 유리구슬을 박아 넣은 듯 불길과 광기를 그대로 비추는 눈동자로 답했다.

“오라버니는 죽이겠다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살리려 하네요. 저분들은 사람을 살리고 악을 심판하겠다 했는데, 죄 없는 이들을 죽이려 해요. 믿음이란… 그런 건가요? 무엇이 옳은 건가요.”

아이의 말간 물음에 성녀의 입이 꽉 막혔다.

그녀 또한 고민하고 있던 질문.

저들의 믿음이 정말 처음의 그것과 같다 할 수 있을까?

정말 옳은 방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처음으로 페르페투아의 눈동자가 떨려왔다.

자신의 이름을 들었을 때보다 더욱.

완전한 드래곤은 이러한 불완전함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눈앞에 보이는 광경까지 부정할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거기다 운명으로 엮인 아이의 의문이 자신의 마음속에 파문처럼 일었기에 더욱 잘 느껴졌다.

무언가 잘못되었구나.

잘못되어도 단단히 잘못되었구나 깨달았다.

자신은 나누어 주었어도 남의 마음을 나누어 받아 본 적 없기에 몰랐다.

더군다나 아이의 순수한 시선이기에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다.

문득 유리엘의 어깨를 감싸 쥔 성녀가 물끄러미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아하하- 고작 이 정도인가? 기도 좀 더 해 봐. 혹시 알아? 신성께서 벼락이라도 내려주실지. 이거 간지러워서 견디기가 어려운걸. 아, 알았다. 간지럼 태워 죽이려는 속셈이구나. 아주 무서운 심판이로군. 역시 신성 왕국다워.”

여전히 오만하고 패악스러운 말을 일삼았으나.

정말 저 모습이 진실일까?

아니 아이는 그렇지 않다 알려 주었다.

단순히 오라비라 그런 것이 아니다.

진실로 황태자는 지금 죄 없는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분투하고 있다.

지금 보이는 여유는 위장.

손끝이 쩍쩍 갈라지는 것을 보아하니 꽤 힘에 부치는 모양.

자신이 진 죄를 감당하는 것이 아닌, 남을 구하기 위한 고결.

반면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았던, 평생 신성을 위해 살겠단 고결을 떠들어 대는 성직자들은 어떠한가.

그들의 눈에 선 핏발이, 용서 하나, 자비 하나 없는 얼굴이 악했다.

누가 진짜 신성을 위하는가.

누구의 불이 더욱 성스러운가.

황태자가 뿜어낸 붉은 불은 어떤 백화보다도 고결했고 신성스러웠다.

색이 중요한 것이 아닌 품은 뜻이 중요한 것.

신성의 심판자가 맞구나.

결국 성녀가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황태자의 모욕에 흔들리는 그들의 믿음이 너무나도 얄팍했고, 끝까지 살기를 품어 내는 그들의 진실이 너무나도 흉악해서.

심판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정말 신성의 도움이라도 있었던 걸까.

성녀가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린 순간.

신성도 고개를 돌렸는지.

황태자의 불이 더욱 거세게 타올랐고 반면 성직자들의 신성력은 금세 소진되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구하면 얻으리란 말씀처럼 무한히 그들의 몸을 채우던 신성력이 이리 금방 고갈되다니.

“으, 으아아악!”

“허억, 허어억. 신성이시여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우리를, 우리를 돌보소서, 우리를-.”

고위 사제들부터 하나씩 뜨거운 불에 휩싸여 타죽었고.

이내 성기사단장들과 추기경들의 신성력도 다했다.

고온에 살이 눌어붙을까 갑옷마저 벗어 던지고 신성을 부르짖는 기사들과.

반쯤 녹아내린 얼굴로 믿음을 외치는 추기경들의 모습이 추했다.

그리고 그때야.

“오만하구나. 황태자. 성녀 그대는 진정 끝까지 신성을 부르짖는 이들을 외면할 참인가.”

성왕이 움직였다.

지금껏 제 몸을 감싸 보호하던 그가 품은 신성력을 넓게 펼쳐 모두를 보우했고.

비로소 그들이 뜨거움에서 벗어나 안정을 되찾았다.

사제들이 녹아 버린 몸으로 꿈틀거리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일별한 성왕이.

“제국의 황태자. 너는 무엇을 위해 여기 발걸음했느냐. 진정 신성 왕국을 멸하기 위해?”

“이미 망해 가고 있는 왕국을 더 망하게 해서 뭐 하게?”

“설마 성국을 살리기 위해서라고 하진 않겠지.”

“맞아. 성국을 살리고 더 나아가 제국을 살리고, 마지막으론 내가 살려 하는 짓이다.”

황당한 대답.

지금 그는 이 패악 전부가 성국을 살리고 더 나아가 제국을 위한 일이라 말하고 있다.

성왕이 웃음을 터뜨리자 황태자의 얼굴이 구겨졌다.

“왜 웃고 지랄이지? 진짠데.”

“그걸 믿으라고?”

“그럼 성왕이라는 작자가 악마를 섬긴다는 사실은? 그건 믿을 수 있겠나?”

황태자의 뜬금없는 질문에 성왕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모욕을 받아서일까 진실을 들켜서일까.

자리에 선 성왕이 주먹을 쥔 손을 움직거리며 황태자와 성녀를 번갈아 보길 잠깐.

푸흐, 허탈한 웃음을 터뜨리곤.

“그래 어차피 모두 죽을 것이니 딱히 문제 될 것도 없겠군. 그래 이 정도면 됐어. 신성께서도 기뻐하시겠지.”

끄덕이던 고개를 치켜올린 순간.

눈 안에 비치는 자색이 섬찟했다.

이내 쥐었던 주먹을 펼치자 문지방에 찧은 듯 보랏빛으로 물든 손톱이 유독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황태자와 성녀가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

“난 진짜 신성을 보았다. 이 간악한 거짓 성녀야. 그분께선 말씀하셨느니라. 성녀가 신성을 가두고 제멋대로 자신의 아이들을 휘두르려 한다고. 화이트 캐슬이 바로 신성을 억압하는 봉인이라 하셨지. 그러시며 나에게 대항할 힘을 주셨나니. 이 흑단은 그분께 올릴 재단. 성녀의 피로 모든 걸 부수고 진짜 신성을 강림시키리라.”

놈이 알 수 없는 말을 뱉어 댔다.

그럴수록 입술 또한 손톱과 같은 색으로 물들어 갔고.

짙은 핏줄이 꿈틀꿈틀 얼굴 위로 불거졌다.

심상치 않다.

방금까지 성왕의 등장에 승리를 확신하던 성직자들 또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고.

어찌해 보기도 전.

연보랏빛 불꽃이 그들을 휘감았다.

비명은 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도 깨닫지 못한 듯 고위 사제들과 추기경, 성기사단장들이 일제히 불꽃 안으로 빨려 들어간 뒤.

마지막, 그나마 가장 멀쩡한 모습을 유지하던 사제 하나가 손을 뻗어.

“성녀시여-.”

페르페투아를 부른 게 전부.

허무한 마지막.

그들이 품었던 작은 순결들과 커다란 탐욕들이 이내 성왕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가 만족스런 한숨을 토해 내곤.

“모든 것은 신성의 은혜. 베풀어 주신 삶과 축복 또한 모두 신성의 것이니. 이제 갚을 때가 도래했다. 너희는 그동안 쌓은 믿음을 내놓거라.”

연보라색 불을 사방으로 펼쳤다.

주변에 선 이들을 제물로 삼으려는 의도.

아니, 화이트 캐슬을 비롯하여 수도 세인트, 더 나아가 성국에 존재하는 모든 이를 신성에게 제물로 바쳐 힘을 얻으려는 욕망.

놈의 불이 황태자와 성직자들이 뿜어낸 불들을 집어삼켜 가며 번져 나갔고.

이내 화이트 캐슬 전체를 휘감았다.

곧 늘어날 힘에 입을 쭉 찢으며 웃던 놈이.

“왜?”

고개를 갸웃했다.

왜, 힘이 들어오지 않지? 그들이 품은 신성이 내 것인데 왜 아무런 변화도 없지?

곧 이유를 깨달았다.

아무도 없다.

사제들도 고용인들도 아무도.

이 넓은 화이트 캐슬엔 방금 그가 잡아먹은 탐욕스러운 성직자들이 전부.

어느새?

성녀를 바라보려던 그가 고개를 휙 틀어 황태자를 보곤.

“네놈이구나!”

일의 원흉을 지목했다.

“이제 알았냐? 악마 새끼야.”

이에 황태자가 당당히 고개를 비틀며 성왕이 했던 것처럼 입술을 쭉 찢어 웃었다.

비죽 올라간 입꼬리에서 붉고, 푸르고, 퍼렇고, 검은 불들이 연이어 튀어 올랐다.

이를 갈 때마다 튀기는 불꽃이 선연했다.

악마보다 더 악마 같은 꼴로 상대를 비웃던 황태자가.

“더 해 봐, 어디까지 가나 보게. 아니 그 꼴을 꼭 봐야 할 녀석이 있거든.”

얼마든지 날뛰어 보라는 듯 성왕에게 시간을 주었고.

이대로 죽을 순 없었던 놈이 이번엔 아래에 깔린 흑단을 녹이기 시작.

연보라색 불꽃 속 새까만 악의가 어리더니.

이내 화이트 캐슬 전체가 검게 변화했다.

신성 왕국의 상징인 백색성이 타락했다.

벽면 가득한 성화와 스테인드글라스가 녹아 사라졌다.

성자와 성녀들의 희생과 고난이 무의미해졌다.

지금껏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성직자가 쌓아 온 기도와 희생이 제물이 되어 그의 힘을 점점 부풀려 주었고.

그럴수록 불의 색이 점점 진해졌다.

이젠 성왕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치 악마화가 진행된 놈이 기괴하게 뒤틀린 몸을 젖히며 웃었다.

신성의 위대함에 취해, 이런 힘이라면 황태자와 성녀는 물론 제국마저 멸할 수 있다.

신성의 대리자는 바로 자신!

아니.

“내가 곧 신성이다!”

그가 불경한 말을 입에 담음과 동시에.

핏- 작게 바람 빠지는 소리가 울리더니 모든 불이 사라졌다.

마치 신성이 거두어 버린 듯.

성왕이 아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멍한 얼굴을 할 때.

“꺼억-.”

어디선가 호쾌한 트림 소리에 이어.

배를 두드리는 황태자.

불길함이 엄습했고.

“덕분에 잘 먹었다. 값은-.”

그의 말이 끝나기 전, 작은 빛살이 번쩍인다 싶더니.

하늘과 땅이 번갈아 휘돌았고.

철퍽, 떨어진 머리, 기울어진 시야 사이로.

“네 머리로 대신하마.”

황태자의 비웃음이 연보랏빛으로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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