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84화 (184/200)

184화 선언

[장소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무의미한 자비, 대가 없는 믿음이 거두어집니다. 썩은 운명이 사그라들고 새로운 운명이 싹틉니다]

[시간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올바름, 정결이 작게 깃듭니다. 유리엘의 운명 성녀가 이를 키웁니다]

[페르페투아의 운명 중 성녀가 유리엘에게로 옮겨 갑니다. 새롭게 깃든 운명 공감과 불완전이 위대한 존재의 운명을 초월로 이끕니다!]

플라잉 해머호에 올라 보는 풍경 속 떠오르는 운명들.

곳곳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빠르게 사그라들고 피어나는 운명이, 봄철 피고 지는 꽃과 같았다.

드워프들이 백색 신철목을 깎아 새롭게 단장한 실내, 엘프들의 조력이 있었는지 조형된 상태에서 피어난 푸른 나뭇잎들이 싱그러운 향기를 내뿜었고.

언제 갖다 놓았는지 마나로 돌아가는 오르골과 차갑게 식힌 샴페인이 퍽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얄팍한 잔에 따라 입에 가져다 대자.

자잘한 기포와 더불어 상큼한 향이 입안을 맴돌았다.

고급품인 모양.

그리 만족하고 있을 때.

“헤에-.”

“…….”

“샴페인 맛있겠네요.”

“…….”

“우와, 정말 기포가 올라오네요. 바이올렛의 말이 맞았어요. 짜릿한 맛일까요?”

옆에서 침을 흘리기 직전인 솔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아니지, 저걸 중얼거림이라고 할 수 있나?

사람 분위기 잡고 술 마시는데 옆에서 왜 이리 떠들어 대는지.

거의 눈으로 병을 태워 버릴 듯 보기에.

“뭐 어쩌라고.”

퉁명스레 물으니.

“한 번도 못 먹어 봐서 그런데요. 한 잔만 주시면 안 될까요?”

손가락을 꿈지럭대며 멋쩍게 웃었다.

그래도 부끄러움이 뭔지는 아는 모양.

솔뿐만 아니라 자리에 있던 안드레도 비슷한 표정.

바이올렛은 그나마 귀족답게 참고 있지만 힐끔힐끔 샴페인 라벨을 살피는 게 입맛이 동하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자네들과 술 한잔 마신 적 없었군.”

지금껏 내 뒤를 따르는 이들에게 술 한 잔 하사한 적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치열하게 달리기만 했을 뿐.

그들 또한 칼날 위를 달리는 내 뒤를 따랐을 뿐.

돌아보니 잔이 여럿이라 그들에게 하나씩을 쥐여 주곤.

쪼로록-

직접 술을 하사했다.

차오르는 황금빛 액체를 따라 퍼지는 꽃과 과실 향.

잔을 든 채 어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표정이 웃겼다.

뭘 저리들 놀라는지.

큼, 크흠.

목을 가다듬곤.

“그간 고생이 많았다. 조금만 더 하면-.”

그들의 노고와 희생을 짧게나마 기리려는 순간.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안드레가 잔을 놓고선 다급히 바닥에 납작 엎드린 것을 시작으로.

“통촉하여 주소서 전하! 죄송합니다! 욕심을 부렸습니다.”

“저은하- 죄가 있다면 벌하여 주시옵고 다만 저희를 버리지 마옵소서!”

“전하 어떤 실수였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바이올렛과 달런 마법사단장, 알프레드.

심지어.

“너, 너 왜 그러는 건데? 또? 왜 나한테까지 난리야?”

질린 표정으로 발악하는 살라스까지.

그들의 반응을 보며 눈을 꿈뻑거리려니.

흑, 흐흑.

서글픈 울음과 더불어.

“죄, 죄송해요. 일부러 그랬던 건 아닌데. 제 잘못이니까 다른 사람들은 용서해 주세요. 전하.”

솔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참회했다.

자기가 괜히 쓸데없는 소리를 하여 다른 이들까지 곤란에 빠트렸다 생각한 모양.

그런 상황에서도 샴페인은 먹고 싶은지 양손에 꾹 쥔 모양새.

황당한 상황에 나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새어 나왔고.

그제야 잔마저 내려놓은 솔이 다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아무래도 패악스럽고 미친 인간이 갑자기 친절해지자 다들 놀란 모양.

친절을 베풀려 하여도 이 모양이니.

“다들 나가.”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올 수가 없다.

한 명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다른 이들은 벌벌 떠는 중에 어찌 너희들의 노고를 위로하려 했노라고 말하겠는가.

이마를 짚으며 떨어진 축객령에.

눈치를 보던 이들이 슬금슬금 뒤로 빠지기 시작.

“잔 갖고 나가. 그냥 나가. 아무 말 하지 말고 나가.”

그래도 샴페인은 가져가란 말에 안드레가 옆에 세워 놓은 잔을 소중히 들어 품에 들곤 종종걸음으로 나갔고.

그 뒤를 따르는 이들의 손에도 마찬가지.

맨 마지막.

“왜 안 나가? 벌 받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는 솔을 보며 물으니.

“그, 병에 든 거 다 드실 건가요?”

“가지고 꺼져.”

“가, 감사히 먹겠습니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로 넙죽 고개를 숙인 그녀가 황급히 나간 자리.

하아, 절로 터지는 탄식.

“내가 어쩌다 저런 것들과-.”

문득 사일러스 공작과 발자크 백작이 그리웠다.

그래도 두 늙은이는 담이 작진 않았는데.

아마 웃으며 고맙다고 같이 술잔을 나누지 않았을까?

“…아무래도 어렵겠지?”

그들 또한 저들의 반응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리란 예감.

그런 와중에도 입에서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이 더욱 황당했다.

그냥 이게 익숙했다.

서로 얼굴에 금칠해 가면서 네가 뛰어나서 잘했니, 네가 있는 덕분에 지금까지 버텼니, 간지러운 말을 하기엔 이미 걸어온 험로가 길었다.

어깨를 대고 의지한 시간이 길었다.

별다른 치하는 필요 없다.

그들에게 나는 주군이니 그저 따를 뿐.

그런 마음이었겠지.

신하 된 도리로 주군의 감사를 감당할 수 없어 부린 장난기 어린 투정.

술김에 창피한 말을 할 뻔했다.

그들의 고생을 기리는 말은 나중 멸망을 완전히 막아 내고 나서.

황제가 되어 그들에게 합당한 자리를 내리며 해도 충분하리라.

그리 생각하며 잔에 담긴 샴페인을 모두 들이켜곤.

발걸음을 옮겼다.

개인 집무실보다 더욱 깊은 곳에 따로 마련된 공간.

내 마나에만 반응하는 장치에 마나를 불어넣자 열리는 문.

안에 마련된 생활 공간.

“태자 왔어요?”

제국의 황비, 어머니가 일어섰다.

“유리엘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요?”

얼굴을 보자마자 다급히 어린 동생을 찾으시기에.

“괜찮습니다. 성녀와 함께 처리할 일이 많다면서 조금 더 있다 오겠다고 하더군요.”

드래곤과 함께 성국 살리기에 여념 없는 동생의 골똘한 얼굴을 떠올렸다.

분홍빛 볼을 우물거리며 고민하는 얼굴이 귀여웠지.

미간에 주름이 질까 조금 고민되었으나 지금 시기만 넘기면 큰 문제 없을 테니.

그래도 다음에 넌지시 언급해 주어야겠다 생각할 때.

“태자?”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생각보다 잘 적응하던 모습이 떠올라서요.”

“그런가요?”

“네, 워낙 똘똘하고 마음이 고우니 금세 안정을 이룰 겁니다.”

“태자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요.”

그리 말하는 어머니의 얼굴 어딘가가 쓸쓸했다.

유리엘은 아직 어린아이.

이번 성국으로 향하는 길, 내내 걱정을 숨기지 못했고.

내가 직접 성왕을 상대할 때에는 아예 창밖도 보시지 못했다던가.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승리 소식을 들은 황비는 홀로 한숨을 삼켰다 했다.

어린 딸이, 지금껏 험한 길만 걸어온 아들이 걱정되셨겠지.

처음엔 그저 부담스럽고 어색했는데 이제야 조금은 그녀의 마음을 알겠다.

나 또한 유리엘이 험한 꼴을 볼까 봐 이리 직접 달려와 싸웠으니까.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믿어요.”

그리 어머니와의 짧은 대화를 끝내곤.

“앞에 있는 망종- 아니 그자가 서신을 보낸 자입니까?”

입에서 나오는 험한 말을 가려가며 자리한 사내를 마주 보았다.

푸른 기를 머금은 까만 머리를 빗어넘긴 곱상한 인상의 사내.

생긴 건 어디 글공부나 하는 샌님같이 생겼으나, 마음에 품은 뜻이 단단한지 나를 마주하고도 눈빛에 흔들림이 없었다.

첫인상은 합격.

겁을 집어먹었다거나 공격적으로 보았다면 머리통부터 깨주려 했을 텐데.

물론 어머니 없는 곳에서.

떠오르는 운명 또한.

[대상의 운명을 확인합니다. 지고의 재능, 억울한 유배, 빼앗긴 계승, 악의가 본래 운명 현왕을 가리웠습니다]

[운명 정의, 신념, 배려가 빛을 잃고 사그라듭니다. 치열함과 분노, 염세가 깃듭니다]

썩 나쁘지 않았다.

꺾이려는 의지가 좀 아쉬웠으나 그거야 상황이 나아지면 돌아오겠지.

악의에 오염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네가 나에게 편지를 보냈나.”

다른 방법을 찾기보다 도움을 요청한 것만으로도 죽이지 않을 이유 정돈되었다.

보이는 기색과 달리 긴장한 듯 목을 일렁이던 상대.

“마도 왕국의 1왕자 페티스 메이고가 제국의 황태자께 인사 올립니다.”

마도 왕국의 1왕자이자.

“어머니의 조카니까. 대충 사촌인가?”

나에겐 사촌-.

“나이는 제가 좀 더 많은 듯싶은데.”

“뭐 형 취급 받고 싶어?”

“그건 아니고…….”

“맞는 거 같은데? 말이 짧다? 황태자한테?”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나이가 아니라 힘이 중요한 거야. 알지? 꼬우면 더 강해져서 와.”

“…….”

그냥 사촌.

당연하단 듯 뱉는 힘의 논리에 그의 얼굴이 멍해졌다.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곤 믿기 어려운 모양.

어머니는 익숙한 듯,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얼굴.

많이 강해지셨구나.

약간 보람찬 기분이 들어 고개를 끄덕이곤.

“그래, 레이건. 그놈이 문제겠지. 어느 정도나 먹혔어. 왕가 전체가 먹혀들어 갔나.”

정확히 상대가 겪고 있을 고충을 짚었다.

페티스가 단번에 의미를 깨닫곤.

“왕가 대부분이 먹혀들어 간 상태로 마탑을 등에 업어 순식간에 세력을 확장했다더군요.”

“다더군요?”

“당시에 왕가에서 임무를 맡아 외부에 나가 있을 때였던지라.”

“일부러 내보냈군.”

“제가 있었다면 그렇게 호락호락 먹히진 않았을 겁니다. 최소한-.”

“죽었을 거다.”

말을 가로채어 붙인 끝맺음에 녀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왜, 아닐 거 같아? 내가 말한 건 널 살리기 위해 내보냈단 소리인데. 설마 잘못 알아들었나?”

“…그럴 리가.”

“그게 맞아.”

“아니, 그럴 리가 없어.”

“현실을 부정하는군.”

“그럴 리가 없어!”

버럭 터지는 고함.

“내심 알고 있었군. 그렇지?”

번지는 미소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현실을 외면해서야 될 일도 안 되는 법.

페티스, 저 불운한 왕자는 알아야만 했다.

왕국에 있는 자들이 그를 살린 이유.

지금껏 한 번 찾지 않았던 어머니의 안부를 물은 이유.

“자존심도 버리고 살길을 도모하란 뜻이다. 왕국의 미래를 짊어지고선.”

그 또한 이길 수 없으니까.

외부의 세력을 이끌고 와서라도 왕국을 구해주길.

그나마 가장 현명하고 능력 있는 왕자를 살린 거다.

그가 거기 있었다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전생에도 결국 악마에게 먹혔으니까.

“어째서, 어째서. 그럴 정도로 6황자, 그의 능력이 뛰어나단 말인가.”

“아니, 녀석의 능력이 뛰어나선 아니지. 그랬다면 나에게 황태자 자리를 빼앗겼겠나.”

“그럼? 대체 왜 나를 살려 가면서까지 황태자 당신과 왕가에서도 잊혀진 분을 찾으란 했단 말인가. 대체 6황자 말고 누가 있기에.”

“악마.”

지금껏 상대해 온 악마들은 우습게 만들 놈이 잠들어 있기 때문.

놈이 6황자의 뒤에 있는 한 누구도 이기지 못할 터.

뛰어난 재능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악마? 악마가 황자를 돕는다?”

“정확히는 이용하는 거겠지. 놈이 있는 한 네가 어떤 몸부림을 쳐도 결국 죽었을 거다. 마도 왕국을 비롯하여 왕국 연합 모두가 덤벼들어도.”

“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무슨 대악마라도 깨어났단 말인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에 페티스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했고.

무언가를 짐작한 듯 몸을 덜덜 떨었다.

그야 그럴 만도 했지.

대악마는 생각도 못 했을 테니.

그중에서도 마도 왕국에서 유명한 대악마라면.

“마왕의 대적자, 인간 사냥꾼. 드래곤의 원수-.”

“길게 말하지 말고 짧게 말해.”

“바알.”

대악마 바알.

고대 악마 알리굴과 군단장 보티스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강대한 악마.

제국이 다양한 원인과 재앙에 무너졌다면 왕국 연합은 대악마 하나로 인해 멸망했다.

정확히는 악마의 주구가 되었다.

악룡이 되어 버린 페르페투아를 선두로 바알에게 홀린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이 악마 마법사단을 자처.

바알이 강림시킨 제 군단장들과 고위악마들이 이룬 군세가 대륙을 휩쓸었던 때.

희망은 얼굴을 감추었고 오직 절망만이 자태를 뽐냈다.

그저 죽음을 기다리는 삶.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

대륙 전체에 감도는 절망이 놈에겐 새로운 힘이 되었고.

그렇게 대륙을 삼켰다.

“그래, 대악마 바알. 놈이 마도 왕국에 도사리는 위협이지. 답해 봐. 너희는 그 먼 과거 인간의 몸으로 바알을 봉인했다던 마왕이 될 수 있는가.”

먼 옛날, 대악마에 대항하여 나온 신화적인 초인.

이름도 없이 인간의 몸으로 마왕(魔王)이라 불린 자.

건국제가 인간의 해방을 위해 깃발을 높이 들었다면.

성녀가 선의와 자비로 신성을 대신하여 교단을 이루었다면.

그는 끝없는 탐구와 살의를 바탕으로 악마들을 잡아 죽였다.

오직 그것 하나만을 목표로 했다.

혹자는 그가 악마에게 가족을 잃었다 또는 악마에게 농간을 당했다는 둥 여러 이유를 붙였으나.

결과적으로 그는 대악마 바알을 봉인하는 데 성공했고.

그의 유산을 바탕으로 마도 왕국이 세워졌다.

어찌 보면 마법의 시조이자 궁극.

건국제와 대륙을 질타했다던 데미 하르델 또한 마왕이 남긴 지혜의 파편들을 찾아다녔다지.

하나.

“…불가능한 이야기로군요.”

현세에 그런 초인은 존재치 않는다.

존재할 이유도 없었고 존재해서도 안 됐다.

보았지 않은가, 율리우스를.

과거의 초인은 과거에 남아야 하는 법.

아쉽게도 시대는 새로운 초인을 허락지 않았고 결국 멸망으로 막을 내렸다.

대악마의 발호는 현실.

아마 기나긴 어둠이 끝나고 처음 무대에 등장할 주인공은 따로 마련되어 있겠지.

그때까지 기다릴 수도, 기다릴 생각도 없었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야겠지.”

* * *

“어떻게 말입니까.”

페티스의 물음에 의심이 가득했다.

대악마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마음이 크게 꺾인 모양.

“마도 왕국의 시초라던 마왕도 결국 봉인을 대가로 생을 마감했는데. 대악마를 어떻게 물리치며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왕국의 후손들만이 아는 진실.

마왕은 대악마 바알을 봉인하는 대가로 제 생명을 바쳤다.

위대했던 마왕마저도 죽이는 데 실패했고 봉인했던 게 전부.

황태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왕가의 선택도 이해가 간다.

미래를 맡긴 거다.

대륙 깊은 곳에 숨어 마왕과 같은 후손이 태어날 때까지 버티고 살아가라는 안배.

갑작스럽게 어깨가 무거워지고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십 년? 백 년? 천 년?

그만큼 기다리면 초인이 나올까?

그때까지 대악마의 눈을 피해 숨어 살 수 있을까?

눈앞이 컴컴해질 정도의 압박감.

바알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이럴진대 마주할 수나 있을까.

황태자의 말은 그저 허세다.

점점 그의 고개가 처질 때.

“고개를 드세요. 왕자.”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어깨를 감쌌고.

뿌옇게 흐려진 시야, 해사한 얼굴이 그를 위로했다.

왕비, 엘리자베스.

마도 왕국에서 제국으로 팔아 버린 왕족.

분노를 토해도 모자랄 판에 그녀는 자신을 여기까지 이끌어 주었고 황태자와의 만남까지 주선해 주었다.

은인과 다름없는 분이지만 지금만큼은 외면하고 싶었다.

그러나.

“보세요. 절망도 허장성세도 아니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얼굴을 붙잡았다.

오랜 시간 치욕을 감내하고 어려움을 감내해 온 어머니의 단단함이 그의 시선을 이끌었고.

그 끝에는 황태자, 여전히 살벌한 미소를 지은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어쩐지 아까보다 더욱 찢어진 입가에 군침이 도는 듯한 얼굴.

왜? 대체 어떻게 신화 속 대악마의 이름을 듣고도 저자는 저리 사나운 얼굴을 유지할 수 있단 말인가?

의문은 곧 풀렸다.

“마왕이 없다면 마왕이 되면 되고, 초인이 없다면 초인이 되면 될 일이며, 대악마가 강하다면 그에 대항할 존재를 부리면 될 일이지.”

초인이 될 것이며 대악마를 상대할 존재를 부리겠단 말.

대체 누가?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걸까.

곧 그의 몸에서 찬란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들어 본 적 있다, 제국의 가장 큰 힘.

건국제의 불.

이를 온몸에 두른 황태자가.

“바로 내가. 내가 초인이 될 것이며 마왕도 이루지 못한 위업을 이루겠다.”

스스로가 초인이 될 것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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