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85화 (185/200)

185화 구원을 목적으로 (1)

붉고, 노랗고, 푸르며, 파랗다 못해 검다.

황태자가 두른 불을 보며 페티스가 경악을 삼켰다.

비행선에서 내려다보았다.

신성 왕국의 왕성을 휘감았던 불꽃을.

성왕과 추기경, 성기사단장 수백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것만으로도 놀라웠건만 지금 그가 보이는 신위는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났다.

“단번에 모두를 죽일 수 있었구나!”

성국을 상대로 벌인 싸움은 전력이 아니었구나.

몸에 두른 불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황태자도 그의 경악을 인정하듯 침묵할 뿐.

참으로 놀라운 그림이었다.

어린 시절 성국에서도 유명한 신전 몇 곳에 가 본 적 있으나 어떤 스테인드글라스도 저만큼 신성하지 못했다.

이지러지는 불꽃과 그 안에서 짙은 미소를 짓는 황태자.

번뜩이는 눈동자와 더불어 깨끗한 백금발이 불을 반사해 내며 각각의 색을 머금는 광경.

타오르는 불꽃 속, 어둑한 살기가 숨 막히게 치밀어 올랐고.

그가 미소 사이 검은 불꽃을 뚝뚝 떨어뜨리며.

“결국은 부딪혀야 할 일이다. 겁먹지 마라. 추하다. 일국을 이끌 자라면 미리 고개를 숙이지 마라. 잘리고 나서 숙여도 늦지 않아.”

지독한 말을 내뱉었다.

죽어 목이 잘리기 전까진 고개를 숙이지 말라는 말, 마음을 꺾지 말라는 말.

자고로 일국을 이끄는 자는 그래야 하는 법.

끝까지 오만을 가장하고 승리를 궁구하며 때론 가망 없어 보이는 자리까지 나아가야 하는 법.

그게 고귀한 혈통을 이어받은 이들의 의무.

황태자는 그걸 말하고자 했고.

왕자는 이를 알아들었다.

마도 왕국의 기대와 더불어 대악마 바알이라는 이름에 짓눌렸다.

마음을 꺾고 도망치고자 했으나.

“끝까지 싸워 지키고 쟁취해야지.”

황태자는 달랐다.

나라를 이끄는 자는 저래야 하는 법이구나.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모두를 구하겠단 마음을 굳건히 하는 것.

이윽고 페티스 1왕자가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숙이지 말라 했으나. 난 고개를 숙여야겠습니다.”

그리곤 제 결심을 내뱉었다.

절망에 빠졌던 이유는 자신이 이길 수 없음을 알아서였다.

원대한 꿈을 품었다 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에겐 해결 방법이 없다.

대신 모든 방법을 강구하리라 뜻을 품었고.

그중엔.

“제발, 마도 왕국을 구해 주십시오. 제국의 구원자시여. 대악마 바알에게서 우리를 구해 주소서-!”

어떠한 굴욕도 감내하리란 의지도 함께였다.

제국이든 누구든 개의치 않았다.

하물며 상대가 길바닥 허름한 거지더라도 그가 왕국을 구할 자라면 기꺼이 고개를 숙이리라.

황태자는 고개를 숙이지 말라 했으나 그건 적에게 그러지 말란 뜻.

왕국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제가 왕이 되면 마도 왕국의 썩은 부분을 도려 내고!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기회를! 구원을! 생명을!”

다른 이의 손을 구하고 그의 뜻을 따르겠다.

황비에게 들었다.

지금껏 황태자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어떤 일들을 이루었는지.

폭군이나 다름없다던 그의 행보가 놀라웠고 한편으론 믿기 어려웠다.

내심 어머니의 말이니 각색과 착각이 좀 섞여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나 지금은 그 말이 모두 진실임을 믿었다.

아니 진실이길 간절히 바랐다.

“나라를 바로 세울 왕이 될 테니! 당신과 같은 길은 아니더라도 내 나름의 길을 닦을 테니 이번만! 이번만! 도와주십시오!”

고개를 박은 채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 결심을 주절거렸다.

바른 나라를 세우겠노라고 제국을 적대하기보다 왕국민들을 위한 왕이 되겠노라고.

이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노라고.

간절히 외치던 그의 어깨에 닿은 커다란 손.

타오르나 뜨겁지 않다.

오히려 따뜻하게 그의 몸을 받쳐 주는 든든한 온기.

고개를 들어보니.

여전히 색색으로 타오르고 살벌한 미소를 지은 황태자.

다만 아까완 달리 눈빛만큼은 가라앉아있다.

“고개 숙이지 말라니까.”

그가 뱉은 말이 의외였다.

숙이지 말라니, 자신은 진정 결심을 했건만 왜?

차오르는 의문 속.

“진정 나라를 위하는 왕이라면 당당히 요구해도 된다. 국가를 살리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그러니 고개를 들고 말하라. 한 나라의 왕이 될 자로서 무엇을 이룰 것이고 무엇을 원하는지.”

“……!”

불을 보았을 때보다 더욱 거대한 충격이 그의 머리를 울렸다.

나라를 위한 왕이라면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된다.

뜻을 밝혀라 그리하면.

“얼마든지 도와줄 테니.”

살려 주겠다.

대국을 이끄는 자는 제 나라뿐 아니라 진정 대륙을 위하는가.

이게 그릇의 차이.

페티스, 마도 왕국의 1왕자는 실감했다.

제국이란 거대한 나라를 이끄는 황태자와 자신 사이 벌어진 크나큰 간극을.

전부인 줄 알았던 세상은 우물에 불과했구나.

대의를 위하여 소소한 감정과 이익 따위 개의치 않는 자.

대악마라는 이름에도 굽히지 않는 신념.

그러면서도 현실적인 방안을 생각하는-.

문득 의문 하나가 피어났다.

스스로 초월에 이르겠단 말은 알겠다.

보니 믿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런데 분명.

“대항할 존재가 또 있단 말입니까?”

황태자는 자신을 비롯하여 대악마를 상대할 또 다른 존재가 있음을 언급했다.

북부의 백작? 아니면 최근 모습을 드러냈다던 동북부 공작인가?

그들 모두일 수도 있겠구나.

그러나 황태자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이름.

“마왕의 대적자, 인간 사냥꾼. 드래곤의 원수 또 뭐가 있었지?”

“어 뭐 엘프 학살자, 거인보다 커다란 악마랑 또.”

“쓸데없는 말들만 잔뜩 붙여 놨군. 그러니까 놈이 부활했지.”

아까 페티스가 언급한 바알을 수식하는 말들.

그런데 그거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엘프와 거인들은 악마의 적수가 아니었고 마왕은 이미 역사가 되었다, 그나마 남은 건.

“드래곤?”

페티스의 의문에.

“그래, 드래곤, 그것도 초월에 다가가고 있는 드래곤이라면 놈도 쉬이 날뛰지 못하겠지.”

황태자가 믿을 수 없는 답을 내놓았다.

드래곤? 그것도 초월에 다가가는 중이라니.

알 수 없는 말을 끝으로 황태자가 몸을 감싼 불을 거두었고.

“그러니 너무 겁내지 말고 쉬어라. 마도 왕국에 도착하면 할 일이 많을 테니까.”

평온한 기색으로 마도 왕국, 적의 아가리로 향할 것을 표명했다.

“먼저 아가리를 봉쇄해야겠지.”

비행선이 향하는 방향, 마도 왕국 너머 가라앉는 석양이 얼굴에 붉게 번졌고.

눈가에 맺힌 연보랏빛 불꽃이 일렁이며 곧 만날 멸망의 마지막 조각을 기대했다.

* * *

황태자의 말은 사실이었다.

“제국 동북부에서부터 장성이 밀려들고 있습니다!”

“북부와 동북부, 수도 병력이 이미 국경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껏 국경 수비대는 뭘 했어? 상황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알리지 않은 거야?”

“이미 모두 점령당했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연락 거점들이 모두 무너졌고, 알 수 없는 비행체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입니다.”

마도 왕국 국경을 시작으로 홀연히 나타난 제국 중앙정보처가 수비대를 제압.

이후 소리 소문 없이 병력들을 순식간에 결집, 마도 왕국을 비롯하여 상업연합국가와 다른 중소 국가의 국경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신성 왕국에 벌어진 사건에 눈이 쏠린 사이 일어난 일.

각국의 연결로를 틀어쥔 채 서서히 숨통을 조여 오는 제국군.

본래라면 각 왕국의 길목을 지나야 하기에 당연히 들켰을 작전이지만.

“하, 하늘을 나는 고래가 나타났습니다! 제국의 신병기가 도달했습니다!”

공중권을 장악당한 이상 육로와 요새가 무용지물이었으며.

때론 어디서 침투했는지 모를, 귀신처럼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 요원들이 암살과 교란을 펼쳤다.

그야말로 왕국 연합 전체가 혼란에 빠져들어 갔다.

본래 제국은 제 커다란 덩치도 감당하지 못해 사분오열했던 터.

하여 제대로 힘을 발휘한 지 오래되었고, 왕국들은 그러한 제국의 모습만을 기억했다.

하나 지금 황태자라는 유례없는 초인 아래 뭉친 제국의 무력은 차원이 달랐다.

그제야 깨달았다.

제국이 지금껏 우리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 천운이었구나.

내분과 쇠락의 길을 걸은 게 우리에게 허락된 가장 큰 방벽이었구나.

전면전을 시작한 것도 아니건만 왕국 연합이 모래성 무너지듯 무너졌고.

뒤늦게나마 반격하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고립된 왕국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까.

대신 그들을 뭉치게 만들어 준 것은.

“뭐야? 너희들은 대체 뭐냐?”

- 그분의 뜻이다. 따르라. 너희의 삶을 바쳐라. 그리하면 영광을 누리리니.

바로 악마.

각 왕국 수뇌부에 잠입해 있던 악마들이 고립된 이들을 유혹했고.

곧 대륙 동부 전역에 악마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하늘이 눈을 감은 듯 태양이 뜨지 않았고 한없이 긴긴밤이 대륙 동부를 덮었다.

이내 검은 비가 쏟아졌다.

다른 색은 하나도 섞이지 않은 새까만 하늘.

달도 별도 두려워 자취를 감춘 자리.

더럽게 고인 웅덩이 속에서 악마들이 태어나 손을 뻗었다.

주린 악마들이 금세 왕국 끝자락부터 전역을 좀먹기 시작했고.

놈들이 손뼉을 치며 피와 살, 죽음과 두려움을 추수하여 살을 찌웠다.

악마들이 추는 춤과 부르는 노래.

희망을 모욕하고 생명을 조롱하는 몸짓.

고결한 맹세를 지키지 못한 기사들이 눈을 부릅뜬 채 진창에 파묻혔고.

마법사들이 쌓은 이지와 마나가 두려움에 먹혀 힘을 잃었으며.

모아 둔 금과 소중히 품은 보석들이 소용없었다.

인간의 연한 살과 달큰한 피, 삶에 대한 갈망과 죽음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악마들의 즐거운 한 끼일 뿐.

존엄이 무너졌고 육신이 길가 곳곳에 널브러진 자리.

특히 마도 왕국엔 강대한 악마들이 많이도 등장했다.

대악마 바알의 본거지기 때문이리라.

그중에서도 마도 왕국 외각, 한 시골 마을.

본래라면 고즈넉한 분위기를 뽐냈어야 할 마을엔 새까만 빗금만이 가득했다.

길가엔 진창과 더불어 선지피가 둥둥 떠다닐 뿐.

그중에서도 반쯤 무너져 내린 집 한편.

“…….”

사내 하나가 눈을 부릅뜬 채 뜯어 먹히고 있다.

이미 생명이 빠져나간 듯 텅 빈 얼굴에 떨어지는 질척한 비.

손에 들린 괭이가 덜렁덜렁 흔들리는 중에도 이를 잡은 손아귀 힘만은 풀리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 그리 꽉 쥐었는가.

턱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아비는 원래 일용할 양식을 위해 땅과 투쟁해야 했건만 오늘만은 가족을 위해 괭이를 치켜들었다.

하나 땅을 다루고 씨를 뿌리는 법은 알아도 악마를 상대하는 법은 몰랐고.

참으로 처참하고 불쌍한 최후를 맞이했다.

한 입, 한 입 뜯어 먹힐 때마다 부릅뜬 눈동자에 남아 있던 분노, 걱정, 두려움이 희미해져 갔다.

그때.

“흐으읍-.”

어디선가 들린 흐느낌이 악마들의 식사를 방해했다.

아니, 그들을 더욱 흥분케 했다.

시체에 매달려 탐욕스럽게 아가리를 놀리던 놈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추곤.

뒤틀린 얼굴을 들어 좁은 집안을 쏘아보기 시작했다.

인간, 신선한 인간이 있다.

“크르르르-.”

“크르룩! 크룩!”

입가에 늘어진 내장을 질겅거리던 중.

어느 한 놈이 여러 마디 기다란 손가락을 들어 올리자 사위가 고요해졌다.

얼굴에 뚫린 수십 개의 구멍을 벌름거리던 놈이 어딘가로 천천히 기어가는 동안.

무너진 지붕 사이로 쏟아지는 비와 움직이는 악마의 발소리만이 찰박찰박 울렸다.

옆으로 고개를 꺾은 아비의 텅 빈 동공을 타고 흐르는 비가 검은 눈물이 되어 흘렀고.

이내 주방 구석, 작게 마련된 피신처.

본래 도적들이 오면 내년 뿌릴 씨앗만은 숨기기 위해 만들어진 창고에.

“쉬잇. 쉬이이.”

눈물과 땟국물이 얼룩진 어미가 아이를 품에 꾸욱 안은 채 바람 빠진 소리를 내고 있었다.

못 먹어 빈약하게 마른 어미의 가슴에 안긴 어린아이는 이미 반쯤 정신을 잃은 상태.

그녀 또한 이미 정신이 나갔지만 동물적 본능에 가까운 모성애로 아이를 보호하려 했다.

아리고 연약한 모자 앞에 일그러진 그림자가 슬며시 드리웠다.

“크르르.”

그들이 풍기는 두려움을 한껏 들이켠 악마가 몸을 떨었다.

당장 죽이고 살을 취할 수도 있었지만 인간이 뿜어내는 격렬한 감정은 악마들에겐 참을 수 없는 쾌락.

좁은 집안, 가득 들어찬 악마들이 일제히 몸을 떨며 검은 액체를 분출했다.

잠깐의 오르가즘.

두려움과 짧은 교미를 끝낸 악마가 가녀린 모자를 향해 뒤틀린 손톱을 뻗으려 할 때.

“멈춰, 이 개X끼들아.”

짙은 살기를 담은 욕설 한 줄기가 떨어져 내렸고.

올려다 본 무너진 지붕 사이로.

너저분한 욕설과는 정반대되는 깨끗한 백금발을 자랑하는 사내가 나타났다.

얼굴에 가득한 분노가 살벌했고 갈아 대는 잇새로 불꽃과 더불어 살기가 피어났다.

순간 악마들이 고개를 갸웃했다.

인간을 닮은 악마인가?

그리 생각할 정도로 상대가 풍기는 살기가 짙었고.

자신들의 감각을 속이고 다가올 만한 존재를 떠올리기 어려웠다.

감히 누가 악마들 앞에 당당히 서는가.

감히 누가 악마들을 깔아 보겠는가.

우리는 대악마 바알! 대륙의 재앙을 섬기는 악마들이거늘!

악마들이 곧 사나운 울음을 토해 내며 지붕 위에 위태롭게 선 사내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자.

“그래, 그래야 악마답지.”

사내 또한 덩달아 더욱 사나운 미소로 놈들을 마주하며.

거대한 망치를 불쑥 뽑아들었다.

그리곤 내리는 비와 함께 아래로 들이닥치니.

빗물을 먹어 퉁퉁 부은 나무 바닥을 묵직한 망치가 부수는 순간.

찬란한 불꽃이 피어났다.

색색의 불꽃이 각각의 의지를 담아 터졌고.

세상을 덮은 검은 빗물도 추악한 악마도 모두 형태를 잃고 뭉그러졌다.

타닥, 타닥.

불이 꺼지고 남은 자리.

다시 쏟아져 내리는 검은 빗물이 역한 수증기를 뿜어내며 증발했고.

그사이, 단번에 악마들을 죽인 사내.

황태자가 여전히 꺼지지 않는 뜨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기절한 아이와 어미를 품에 안아 밖으로 나오자.

“나오셨습니까.”

어느새 마을 가득 선 기사들.

신철목으로 만들어낸 하얀 갑옷과 더불어 하얀 가면을 착용한 모습.

성국의 성기사들보다 더욱 팔라딘다운 이들이.

검은 빗물 사이에서도 고결을 잃지 않은 채 따르는 전하를 맞이했다.

더불어 마을 전역에서 죽음을 즐기던 악마들이 빼꼼 얼굴을 드러내는 광경.

이를 잠시 바라보던 황태자가.

“모조리 쓸어버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전부.”

명령을 내리자.

기사들이 백검을 뽑아들어.

“명령을 받듭니다.”

“악마들을 멸하라!”

“기사단! 악마들을 죽여라!”

하얀 빛줄기가 되어 쏟아지는 검은 빗줄기와 더불어 악마들을 찢어발겼다.

밀려든 제국군이 각 왕국에 가득한 악마 사냥을 시작했다.

점령이 아닌 구원을 목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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