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자색
드래곤과 악마가 벌이는 싸움이 점점 격해졌다.
성력을 가득 실은 브레스와 발톱이 바알의 뒤틀린 육신을 찢어발겼다.
그때마다 지독한 악의가 뭉텅이로 떨어져 타올랐다.
사제들이 감격하며 더욱 기도를 외쳐 대었고 페르페투아의 유려한 육신을 덮은 하얀 비늘들이 성스러운 빛을 내뿜었다.
그럴수록 드래곤의 위세가 더해졌고 대악마 바알이 속절없이 밀렸다.
페르페투아가 하늘을 활공하여 먹구름 속으로 몸을 숨기더니 기척을 감쪽같이 지우는 신기를 부리자.
- 네년! 언제까지 깔짝깔짝 신경만 건드릴 셈이야!
바알이 분노한 듯 목을 털어 대며 소리 질렀다.
대답 없는 페르페투아를 찾기 위해 꾸드드득, 뒤틀린 육신이 한껏 부풀며 거센 힘을 꿀렁꿀렁 그러모았고.
이내 모은 힘이 축 늘어진 촉수가 가득한 배로부터 뼈가 흉측하게 튀어나온 가슴과 이리저리 꺾여 있는 목을 지나 마지막 이빨과 가시가 튀어나온 턱주가리에 도착.
푸화하학!
악의로 빚어 낸 브레스가 하늘을 유린했다.
불과 먹구름, 번개가 뒤섞여 혼란을 자아내는 풍경을 새까만 악의가 점령했고.
유황불이 번지듯 어둑한 진보라색 불꽃이 혼란을 장작 삼아 타올랐다.
“저, 저건!”
화이트 캐슬, 황태자가 벌인 대심판을 보았던 사제가 경악성을 뱉었다.
성왕이 뿜어냈던 것이 신성력과 뒤섞여 옅은 보라색이었다면 지금 바알이 뿜어내는 것은 악의를 머금어 더욱 진해진 색.
같은 불이다.
“아아, 아아아! 신성이시여!”
뭐라 해야 할까, 이 비통함을 무어라 표해야 할까.
진정 신성 왕국을 이끄는 성왕이라는 자가 악마의 불을 갖고 모두를 겁박하려 했단 말인가!
얼굴을 물들이는 짙은 자줏빛이 다시금 절망을 드리울 때.
놈의 바로 머리 위.
아직도 검보랏빛 브레스를 뿜어내는 놈의 위쪽의 하늘이 막이 열리듯 흩어졌고.
나타난 것은 강렬한 햇빛과 더불어 빛나는 페르페투아.
순간 산란하는 빛에 악마가 지닌 수십의 붉은 눈알이 숫자가 무색하게 기능을 잃었다.
바알이 위기감을 느끼곤 머리를 들어 브레스의 방향을 틀었으나.
페르페투아가 날개를 접은 채 쏘아지듯 추락하며 이를 아슬아슬하게 피해 낸 뒤.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신장의 백색 창이 되어 그대로 바알을 향해 몸을 부딪쳤다.
동시에 활짝 펼치는 날개.
거센 저항이 폭풍이 되어 휘몰아침과 동시에 놈의 등을 거칠게 움켜잡았다.
육중한 무게와 더불어 날카로운 발톱이 놈의 몸통을 헤집었고.
몰아치는 바람결에 중심을 잃은 바알이 기우뚱 내려앉았다.
- 감히! 어딜 올라타는 것이야!
격노한 바알의 몸이 꿈틀대더니 머리통이 하나 더 자라나기 시작.
이젠 쌍두룡이 된 놈이 머리를 뒤틀어 페르페투아를 노려보려는 때.
페르페투아가 새하얀 입을 끌어올려 씨익 미소 지었다.
드래곤이 지금껏 침묵한 이유가 있었다.
입안에 담은 혼신의 일격.
놈이 자신의 브레스를 마구 뿜어내는 동안, 그녀는 먹구름 높은 곳에 숨어 숨결을 압축하고 또 압축하길 반복.
마침내 한계에 달했음을 느끼곤 내려온 것.
앞발로 벌어진 상처를 쫘악 찢어 낸 뒤.
그대로 입안에 담아둔 백화를 쏘아 냈다.
- 크아아악-!
고통에 소리 지르는 바알의 목소리마저 묻힐 정도의 불.
새하얀 의지와 신성이 담긴 페르페투아의 일격.
놈의 몸을 꿰뚫은 거센 빛이 쭈욱 아래로 향했고, 이내 양손을 활짝 벌려 벌어진 몸을 찢기 시작.
거센 저항이 느껴졌으나 개의치 않았다.
반으로 찢어지는 중에도 바알이 아가리를 벌려 세인트 드래곤의 몸을 물어 댔으나 신성과 비늘이 침범을 막아 주었고.
강화된 근육이 크게 부풀며 저항하는 악마의 육신을 마침내 반으로 갈라 버렸다.
입에서 터져 나오는 포효.
그녀를 따라.
“우와아아악! 신성께서 우리를 보우하신다!”
“성녀께서 승리하시리라!”
사제들과 성기사들의 외침이 거셌다.
어둑한 불 사이 휑하니 뚫린 구멍으로 치드는 햇빛.
이를 등진 채 하얗게 빛나는 드래곤은 양손에 갈라진 적의 육신을 들고 있으니.
이야말로 전설의 재림이며 신화의 일부 아닌가!
모두가 마침내 승리했노라고 즐거이 외칠 때.
- 크크큭. 잠깐의 환상은 달콤했나?
뚝, 조롱 어린 목소리가 그들의 환호를 끊어 냈다.
승리를 확신하던 이들의 동공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확장되었다.
분명 반으로 갈라져 죽었어야 할 바알의 몸이 이젠.
- 내가 먹은 드래곤의 심장이 몇 개였더라- 다섯? 그래 그 정도였지. 홀로 나머지 넷을 상대할 수 있겠나? 성녀?
또 다른 흉측한 드래곤으로 재탄생했다.
페르페투아 주변을 도는 두 드래곤.
하나는 넉 장의 날개로 위세를 과시했고, 하나는 다리가 여럿.
한눈에 보아도 명백했다.
페르페투아의 몸을 묶고선 그대로 찢어 내리라.
휘도는 놈들 사이.
페르페투아가 침묵하며 둘을 쏘아보았다.
비록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있으나 오르내리는 가슴팍이 방금 일격에 많은 힘을 쏟았음을 알게 했다.
이대로라면 당한다.
하나.
- 신성이시여.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장면은 패배도 제 죽음도 아닌.
과거 무수히 보았던 장면.
죽을 것이 분명한 위기 앞에서도 약한 자들을 지키기 위해 물러나지 않았던 이들.
그들은 항상.
“신성을 위하여.”
신앙 고백을 남기고선 당당히 죽음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자신의 차례로구나.
그리 확신한 페르페투아가 잠시 아래에서 기도를 올리는 사제들과 성기사들을 굽어보았다.
저들을 지켜야지.
더 나아가 지금껏 진정한 희생을 각오하고 싸워 왔던 제국군과 더불어 홀로 백금발 머릿결을 휘날리는 황태자와 멀리 신성 왕국에서 자신을 기다릴 유리엘까지 한눈에 담았다.
이 고결한 이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 신성을 위하여…….
죽으리라.
그리 각오했고, 빈틈을 포착한 악마들이 막 달려드는 순간.
“전 군단 강림! 전투 준비!”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림과 동시에.
진보라색 불을 흩으며 등장한 건.
플라잉 해머호를 필두로 한 십수 대의 비행선 군단.
드래곤과는 달리 인공적인 유려함을 뽐내며 등장한 비행선들이 오색 연기를 뿜으며 하늘을 점유했고.
곧 바알을 향해 마법과 탄알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전 군단! 악마를 향해 집중포화!”
확성기를 통해 울리는 살라스의 목소리.
그가 이끄는 비행군단이 전투 기동을 선보이며 바알의 주의를 흐트러뜨린 사이.
“이봐! 드래곤! 뭐 하는 거야! 움직여! 솔! 비행선으로 올라와라! 아직 여력이 남은 마법사들은 공격에 합류하도록! 안드레! 맡겨 놓고 뭐 하는 거야? 같이 안 싸워? 아래에서 도와!”
순식간에 전황을 정리했다.
그제야 지금껏 이지를 벗어난 존재들의 싸움에 멈추어 있던 전쟁터가 다시 활력을 되찾았다.
이미 놈은 본신을 드러내기 위해 모든 악의를 흡수한 후.
아래에 남은 악마가 얼마 남지 않았다.
솔이 플라잉 해머호에 탑승함과 동시에 날카로운 그림자를 뻗어 바알의 날개를 공략했고.
안드레는 아래에서 폭풍을 뿜어내어 놈의 비행을 방해했다.
외에도 비행선들은 추락을 두려워하지 않는지 몸통을 부딪쳐 가며 바알을 공격.
몰아치는 마법과 신비들이 대악마의 행동을 막아섰다.
명백히 페르페투아를 지키려는 모양새.
그렇게 잠시간의 시간을 번 사이.
한 번에 쏟아부었던 체력을 조금은 회복한 세인트 드래곤이 다시 전쟁에 참여.
역사에 길이 남을 공중전이 벌어졌다.
바알의 몸이 어느새 넷으로 불어났다.
페르페투아에게 찢겨 죽은 드래곤 말고도 지금껏 잡아먹은 드래곤의 몸을 모두 소환하여 전투를 벌였다.
너덜너덜해진 비행선이 추락하면서도 악착같이 바알을 공격했다.
막 땅에 떨어지기 전 환한 빛이 몸체를 감쌌고 사라져 버린 비행선.
승무원들의 안전을 걱정한 하란의 묘기.
비행군단과 페르페투아가 분투했으나 전황이 불리했다.
숫자보다는 질이 중요하다.
비행선이라는 신무기까지 동원해보 았으나.
제국의 가장 큰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사일러스 공작과 발자크 백작이 자리에 없는 지금.
황태자마저 침묵하고 있는 상황에서 승기를 잡기란 불가능.
이윽고 연이어 떨어지는 비행선에.
“그게 얼마짜리인데! 이 빌어먹을 새끼야!”
살라스의 분노가 이어졌고, 그가 뿜어낸 강철 마법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바알을 꿰뚫었다.
이성을 잃었는지 플라잉 해머호가 바알이 만들어 낸 드래곤 중 하나에 온몸으로 부딪혔다.
쩌엉-.
거센 울림이 퍼져 나옴과 동시에.
크르르르-!
일시적으로 바알의 몸이 흩어졌다 뭉쳤다 하며 고통을 토해 냈다.
“그래! 이거야!”
생각해 보니 플라잉 해머호는 이전 거대한 진생철퇴를 녹여 만든 비행선.
본래 파사의 힘의 담긴 진생철퇴의 속성을 그대로 갖고 있으니.
“돌진!”
악마에게 가장 효과적인 공격이리라.
물론 내구도가 문제이긴 했으나.
지난번 드워프들이 신철목으로 뼈대를 바꾼 데다가 살라스가 강철 마법을 더해 즉석에서 강도를 보강했으니 그리 쉬이 망가지진 않을 터.
추가로.
- 사제들 비행선에 축복 마법을 더하세요!
페르페투아의 외침에 사제들이 플라잉 해머호에 축성 마법을 쏟아붓자.
일시적으로 교단 성물에 가까운 상태가 되었다.
이제 남은 건 전력을 다한 충돌.
바알의 몸에 부딪칠 때마다 신성과 파사를 담은 울림이 놈의 구성을 헐겁게 만들었고.
그때마다 페르페투아의 백화가 하늘을 내달렸다.
나름의 선전.
그러나.
- 크흐흐흐-! 크흐흐흐.
악마의 웃음이 점점 불길하게 퍼져 나가더니.
놈의 몸 위로 한 사내의 형상이 솟아올랐다.
“……!”
- ……!
플라잉 해머호에 올라 싸우던 살라스와 솔도 막 백화를 뿜어내려던 페르페투아도 멈칫하게 만든 형상은 바로.
“흐으읍- 후우- 이런 기분인가. 세상을 가졌다는 기분이 말이야.”
황태자 아르한의 형상.
휘날리는 백금발, 오만을 담은 붉은 눈동자, 광기 어린 표정 모두가 그와 똑 닮았다.
그렇게 황태자의 형상을 훔친 대악마 바알이 세상을 잠시 굽어보았다.
“곧 내 아래에 있을 세상이 이렇게 너저분해서야 안 될 일이지.”
심지어 매끄러운 중저음마저 같다.
놈의 말에 반응하듯 네 마리 드래곤이 울음을 토해 내자.
마도 왕국은 물론, 대륙 동부를 점거했던 악의가 일제히 들끓었다.
새로운 주인의 탄생을 찬양이라도 하듯, 방금까진 제국군의 거센 공격에 힘을 잃었던 악마들과 악의가 빗발쳤다.
뒤틀린 드래곤의 형상 위에 올라탄, 황태자의 형상을 취한 바알이 직접 악의를 빚어내어 브레이커와 진생철퇴를 만들어 냈다.
기형검에 박힌 것은 드래곤의 가시, 철퇴의 겉을 감싼 것은 악의로 빚은 비늘.
어그러진 모양새가 악을 상징하는 것 같아 섬찟한 가운데.
“으음- 이렇게 사용하였던가.”
놈이 태연하게 브레이커를 몇 번 휘두르자.
이내 붉은 불이 검 사이를 내달리며 위협적인 소리를 내기 시작.
황태자가 적염과 초적염으로 브레이커를 사용하는 방식.
이어서 드래곤의 몸 위로 망치를 몇 번 두들겨 보니 푸른 번개가 내달렸고, 녹색 불이 찢어진 드래곤의 날개를 수복했다.
녹염과 청염.
몸을 굽히자.
전신에 황금빛 광휘가 맴돌았고.
그대로 쏘아져 나가 비행선을 꿰뚫었다.
광염.
하란이 비행선을 안전히 복귀시키려는 순간.
놈이 다시 빛살이 되어 비행선을 산산이 부수려 했고.
이를 플라잉 해머호로 막으려 하자.
새까만 불이 최초의 비행선을 감쌌다.
암염.
심지어 하늘엔 놈이 뿜어낸 마지막 불 자색염까지.
“마침내 모두 모았구나. 초월은 나의 것이다.”
황태자의 불을 모조리 획득한 바알이 모두를 조롱하듯 밝게 웃었다.
자색염이 가득한 하늘 아래, 그가 휘두르는 브레이커가 적염과 초적염을 머금은 채 비행선을 부수었고, 광염이 되어 움직이는 자리 거센 청염과 암염이 페르페투아를 농락하는 중.
이대로라면 진다.
승기를 잡으려는 듯 점점 거세지는 악의와 악마들의 난동.
“돌격-!”
살라스가 용맹하게 외쳤으나 플라잉 해머호의 선체 또한 한계.
어떤 싸움에서도 굳건함을 자랑했던 형태가 찌그러지고 갈라진 모습.
그러나 포기할 수 없다.
남은 비행군단과 플라잉 해머호, 페르페투아가 처절한 싸움을 각오하는 동안.
* * *
아까 바알이 내 살을 씹어 삼킨 순간.
[당신이 품은 운명들이 대악마 바알에게로 흘러 들어갑니다. 승리와 영광이 적의 몸에 깃듭니다!]
지금껏 이루어 낸 운명이 빠져나가는 감각이 공허했다.
영광이란 게 이리 쉽게 사라지는 것이었던가.
허탈함도 잠시.
바알이 머금은 불을 보았다.
지금까지 모은 건국제의 불을 모두 복제한 모습.
심지어 형태까지 훔친 놈의 꼬라지를 보니 분노가 치솟았다.
가짜가 진짜가 되어 가는 중.
놈이 휘두르는 브레이커와 철퇴, 불들이 익숙했다.
처음엔 어색하기 그지없었건만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모든 운명을 빨아 먹힐 터.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침착해라. 당장의 분노보다는 승리를 생각해.”
귓가에 울리는 건국제의 말대로였다.
당장 놈에게 달려가 화를 푸는 것보다도 이미 획득했다던 마지막 불 자색염을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
모든 심장을 획득하는 순간, 놈을 마음껏 두드릴 수 있으리라.
그리 생각하며 더욱 깊은 내면으로 침잠했다.
“자색염은 단순한 불이 아니다. 그냥 힘이 아니다. 암염을 생각해 보아라. 거기엔 무엇이 담겨 있었는지. 또한 네가 암염을 얻는 과정에서 무엇을 이루었는지.”
성왕에게서 자색염의 일부분을 빼앗았다.
하여 바알을 만나면 쉬이 놈이 훔친 불을 빼앗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오산이었다.
어찌 된 일인지 바알을 마주하자 성왕에게서 빼앗은 자색염이 오히려 다른 불을 가로막았고.
전투를 방해했다.
바알의 농간인가.
자색염을 완전히 흡수하였으니 진정한 주인에게 돌아가려 하는가.
그리 생각했으나.
“암염이 그러했듯, 자색염은 너도 대악마의 것도 아니다. 결국은 본인이 이루어 내야 하는 거야.”
건국제의 말은 달랐다.
자신의 뜻을 담지 못한 불은 어차피 남의 것.
소유욕을 부려 보았자 소용없다.
암염을 얻었던 때도 그러했지.
속에 품은 절망을 모조리 풀어냈을 때야 내 것이 되었다.
그렇다면.
“자색염엔 무엇이 담겼습니까.”
마지막 심장, 초월로 이르는 열쇠인 자색염엔 무엇이 담겼는가.
이에 건국제는 답했다.
“인생.”
심장에 인생을 담았다고.
탄생부터 죽음의 순간까지 그가 이루었던 생 전부를 담았노라고.
처음 분노를 품었을 때부터 제국을 이루기까지, 이후 절망과 마지막 인생을 정리하는 순간 전부가 신비였노라.
그리 답했다.
“네가 얻은 불 전부가 네 인생이다. 떠올려 보아라. 네가 이뤘던 일들을, 이룰 일들을.”
그의 속삭임을 따라 지금껏 걸어왔던 길을 복기했다.
분노와 살의가 가득했던 처음.
영광의 시작이었던 승리.
희생에 눈물짓고 그들의 생을 바랐던 밤.
갇힌 세상 넘어 새로운 힘을 손에 넣었던 순간.
절망을 고백하고 스스로의 상처를 극복했던 싸움.
되돌아보니 인생의 과정들이 곧 불을 닮았구나.
그저 건국제의 불을 가져왔다 생각했으나… 이제 보니.
“나의 불이며 인생이다.”
직접 이루어 낸 신비.
그래, 그만한 업적이 없다면 결국 품은 불은 모두 허상.
사그라들고 마는 것이니 지금껏 심장을 감싼 불은 내 업을 먹고 자라왔고 거세게 타올랐다.
문득 대악마 바알이 휘감은 불을 보았다.
방금까지 치솟던 분노가 가라앉았다.
“거짓이구나.”
놈의 불은 가짜.
그저 형태를 빌린 것에 불과했고.
“이것이 진짜.”
심장에 흐르는 불이 진짜임이 느껴졌다.
제 인생을 태워 얻은 불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
이윽고 도달한 내면 끝.
“담긴 인생을 그러모은 것이 바로 자색. 석양이 가라앉아 밤이 다가오기 직전의 색이다.”
겪어 온 과정과 앞으로 이룰 시간이 흘러가며 수많은 색을 드리웠고.
마침내 자색을 잡아내었다.
악마가 빼앗은 건국제의 자색은 필요 없다.
이미 안에 들어있다는 말을 이해했다.
지금껏 이룬 모든 것이 마지막 심장의 기초.
여섯 불에 담긴 색을 추출하여 이루어 낸 마지막 심장이 고리를 이루었고.
번쩍, 눈을 떠 검을 휘두르자.
하늘에 가득하던 악의가 갈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