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192화 (192/200)

192화 혈통

전투가 한창인 하늘과 땅.

악의와 악마가 쏟아지는 풍경 속.

“진영을 지켜라! 황태자 전하를 지켜!”

거렌을 비롯한 성기사단이 몰려드는 악마를 베어 냈다.

그들의 외침에 제국군 또한 무너진 왕성 주위로 몰려들었다.

“전하! 전하께서는!”

안드레의 다급한 물음.

아까 대악마 바알을 상대로 분투하시는 모습을 보았다.

전하의 불을 빼앗은 놈의 웃음이 스산했다.

전하께서는 무사하신가.

달려가던 안드레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악마의 준동과 더불어 무너진 왕성 가운데.

기우뚱 기울어진 지붕 위, 브레이커에 기댄 황태자의 신형이 보였다.

가슴팍에서 흘러나오는 피와 창백한 안색이 심상치 않았으나.

“아아, 다행입니다-.”

어째서인지 그의 입에선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눈을 감은 채 버티고 선 전하의 모습 어디에서 다행을 찾은 걸까.

성기사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목숨을 바쳐 버티겠나이다.”

안드레의 결심은 확고했다.

전하께서 살아 계시다면 분명 해답을 제시해 주시리라.

섬기는 자로서 할 일은 하나뿐.

“전하를 보호해라! 전하께서 깨어나실 때까지 어떻게 해서든 버텨!”

그때까지 시간을 버는 것.

황당한 일이었다.

지금 그들이 바라 마지않는 전하께서는 방금까지 악마에게 밀려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그를 또다시 싸움에 내몰겠다고?

거렌의 얼굴에 분노가 피어났다.

아무리 자신의 주군이 아니라도 황태자는 고결함을 보여 주었고 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가 죽지 않는 불사신은 아니다.

“너무들 하는군! 저기 서 있는 황태자께서 지금 멀쩡해 보이시는가!”

“응? 으응? 당신 누군데?”

“성기사단장 거렌이다! 아무리 그래도 상처 입은 주군을 피신시키지는 못할망정 깨어나면 무언갈 해 줄 거라니, 말이 심하지 않은가!”

거렌의 분노를 이해 못 하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안드레가.

“그럼 누굴 믿지?”

생각지도 못한 물음을 던졌다.

“그야-.”

“이봐, 성기사. 보아라. 지금 지붕 위에 계시는 전하께서 진정 힘을 잃으신 것으로 보이나? 부상에 헐떡이며 자리에서 간신히 버티고 계신 것 같은가?”

“…….”

안드레의 시선을 따라 황태자를 바라보았다.

흩날리는 백금발과 창백한 안색, 붉게 번진 피가 퇴폐적인 아름다움을 뽐내긴 했으나 사실이 달라지진 않는다.

황태자는 다쳤고 지쳤다.

지금 벌어지는 전투에 끼어들지 못할 만큼.

눈을 감고 버티고 있는 게 전부일 만큼.

거렌이 제 생각을 입에 담기 전.

“전하께선 다시 한번 탈피를 준비하고 계신 거다.”

안드레의 목소리가 먼저였다.

돌아본 자리, 묘한 광기를 담은 기사의 눈이 번들거렸다.

“항상 그러셨지, 잠깐의 움츠림은 도약을 위한 발판이라고. 지금이 바로 그 순간. 우린 전하를 믿고 지킨다. 그것이 신하 된 도리.”

안드레만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

주변에 선 제국군 모두가 같은 마음.

얼굴에 어린 기이한 열망이 거렌의 얼굴을 따끔따끔 찔러 왔다.

본 적 있다.

신앙을 고백하는 사제나 성기사의 얼굴과 퍽 닮았다.

이들에게 황태자는 그 정도의 존재인가.

그런 그의 생각에 답이라도 하듯.

“전하께선 항상 증명하셨다. 어떤 위기 앞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이겨 내셨다. 우린 악마가 내뿜는 잠깐의 강대함보다 지금껏 보아 온 전하의 처절함과 고결함, 극기를 믿겠다. 목숨을 걸고.”

안드레의 날카로운 결심이 거렌의 마음을 울렸다.

그들에겐 황태자가 신앙이구나.

우리가 신성을 믿는다면 이들은 지금껏 제국을 이끈 황태자를 믿는구나.

어찌 미워할까.

“좋다, 같이 기다리지. 악마를 맞이하며, 우리 또한 신성을 기다리며.”

성기사들이 제국군의 신앙을 인정했고 그들이 같은 전선에서 황태자를 지키기 위해 검을 뽑았다.

“전하를 위하여.”

안드레가 아직까지 브레이커에 기대 있는 전하를 아린 눈으로 바라보며 검을 굳게 잡았다.

분명 일어나시리라.

북부로 향하던 기차.

싸움이 끝나고 태양이 떠올랐던 때에도 저리 서 계셨다.

너덜너덜한 철마가 흐린 연기를 뿜으며 광야를 달리던 때에.

흩어진 악마들의 재 가루 속 하얀 눈을 맞으시던 모습.

북부 꽃 무더기 안에서 눈물을 흘리시던 때.

이후 행해진 에스키모 토벌과 서부의 검은 빗속을 내달렸던 시간들.

전하께선 항상 이겨 내셨다.

앞에 어떤 장애물이 있건, 어떤 위협이 있건.

이번에도 마찬가지.

제국군 모두가 황태자의 각성과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때를 기다릴 뿐.

지금은 깊은 밤.

새벽은 오리라.

언제나 그러했듯 어둠을 살라 먹고 태양이 뜨리라.

눈부신 순간을 위해 가장 어두운 밤을 지나는 중.

그리 견디길 얼마였을까.

- 드래곤, 네 심장을 내놓아라!

신성을 몸에 두른 채 잘 버티던 페르페투아가 위기에 몰렸고.

양 날개에 바알이 이루어 낸 뒤틀린 드래곤의 아가리가 엄습했다.

- 끄아아아-.

- 나를 찢었듯 나도 널 찢어먹어야겠다!

성녀가 힘을 다해 버텨 보았으나 터져 나오는 피가 심상치 않았고.

플라잉 해머호는 황태자로 현신한 대악마 바알이 내뿜은 불에 유린당하는 중.

점차 자욱한 밤이 그들을 덮어 갔다.

하나 모두가 희망을 놓지 않았다.

새벽이 오리라.

반드시 어둠을 깨고 초월이 떠오르리라.

얼굴에 튄 악의와 검에 들러붙는 악마들을 가르면서 간절히 견뎠다.

믿음이 있으니 흔들리지 않는다.

두렵지 않다.

본래 두려움과 절망은 미지에서 나오는 법.

하나 미래를 확신하는 이들의 마음은 무너지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신앙의 힘 아닐까.

그리고 마침내.

각성은 새벽처럼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처음 시작은 고동 소리부터.

둥- 둥- 둥- 둥-!

전장을 울리는 북소리.

시작은 낮고 느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격해지는 울림.

이를 따라 손끝에서 타타탁 튀어 오르는 불씨.

이윽고 황태자의 분노를 담은 적염이 브레이커를 감쌌고.

터지는 광기가 초적염이 되어 명멸했다.

승리와 영광이 광염으로, 치유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녹염으로 화했다.

적을 부수고 무거운 짐을 지겠단 결심이 청염이 되어 찢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었으며.

마침내 전생의 절망을 극복한 암염이 치열하게 위세를 확장했다.

타오르는 여섯 불꽃 틈새로.

드디어.

자그마한 보랏빛 불이 피어났다.

연약해 보이는 불 한 자락엔 무엇을 담았는가.

황혼의 끝자락, 이루어 낸 일들과 이루어 낼 일들에 대한 소고(小故).

황태자의 삶.

가짜였던 시절 보았던 마지막 노을 사이, 몰려오는 악마와 힘없이 스러져야만 했던 마지막.

이번엔 다르리라는 결심과 이를 이루어 내고야 말리라는 집착.

같은 노을, 다른 풍경을 보기 위하여 걸어온 지난 세월과 걸어갈 미래를 모두 담았다.

건국제가 그러했듯이.

“암염은 밤이자 절망, 자색염은 가라앉는 노을이자 깊은 밤을 깨고 터오르는 새벽이기도 하지.”

결국 자색염은 다시 밝은 적염이 되고, 적염은 터지는 초적염이 될 것이며, 터지는 불은 정점에 이르러 환한 빛, 광염이 되고 빛을 빨아들인 세상은 녹염처럼 푸르러질 것이다.

더 나아가 밝은 날이 지나고 흐린 날 청염이 울부짖고 마침내 다시 절망, 암염이 내리면 자색이 가득할 것이고 이를 극복하고 새롭게 탄생할 세상 또한 자색이리라.

순환.

그러했다.

건국제의 일곱 심장은 개인의 인생, 나아가 인류, 더 멀리 세상의 이치를 품었구나.

황태자는 무한히 반복되는 인생과 세상을 관조했다.

부스러졌다 다시 태어나길 반복했다.

찰나의 순간, 영원을 보았고.

자색염이 점차 크기를 키워 나갔다.

스스로 잉태한 신비가 점차 심장에 어리며 고리를 형성하기 시작.

무수한 죽음과 탄생 가운데, 의지와 자아를 잃지 않았고.

마침내 마지막 심장이 온전히 자리 잡은 순간.

번쩍 눈을 떴다.

주인이 깨어나자 마구 날뛰던 불이 잠잠해졌다.

몸에 어리는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색이 아름다웠다.

황태자의 백금발을 물들인 불이 찬찬히 타오르며 이지러지는 사이.

그가 칠색 가득한 눈동자로 하늘을 살폈다.

어둑하게 끼어 있는 보라색 불꽃.

“가짜로구나.”

그저 뜨거움만을 품고 있는 불은 허상일 뿐.

천천히 브레이커를 들어 올리자 일곱 불이 타올랐다.

키이이잉- 울리는 공명음이 심상치 않다.

점점 고주파 영역으로 향하기 시작.

사람들의 귓가에 들리지 않는 소리가.

- 응?

악마와 드래곤의 귓가에 맹렬히 울렸다.

날카롭게 벼려진 소음이 그들의 주의를 돌린 사이.

브레이커 끝까지 일곱 불이 치밀었고.

황태자가 검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그가 휘두른 검로를 따라 흩뿌려진 무지개.

물감을 뿌린 듯 진하게 남은 불꽃이 허공에 남아 화려함을 자랑했다.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린 사이.

“눈, 하나, 깜짝 않는다-.”

거렌만은 앞을 본 채 눈을 부릅떴다.

온몸에 치닫는 전율,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

지금 보는 광경이 진정 현실인지 믿기 어려웠다.

그러니까 황태자가 그어 내린 검격과 같은 모양새로.

“세상이 갈라져도-.”

시야 전체가 양분된 모양.

어둑하게 타오르던 자색염이 가득한 하늘과 악의와 악마가 빽빽한 땅 위로 번지듯 피어나는 선 하나.

그 선 가운데 위치한 바알이 이룬 드래곤의 몸이 쩌억 갈라졌다.

일격.

단 일격에 페르페투아를 몰아붙이던 뒤틀린 드래곤 하나가 죽었다.

떨어지는 육체가 허무하게 흩어지는 사이.

- 으음, 이런 느낌인가?

황태자는 천천히 제 손을 휘감은 불을 살피곤.

- 이렇게?

이번엔 횡으로 검을 휘두르자.

세상이 한 번 더 갈라지더니, 두 번째 드래곤이 갈라졌다.

두 번의 검격에 드래곤 두 마리가 죽었다.

페르페투아도 바알도 주변에 선 제국군과 성기사도, 세상마저 침묵했다.

그만큼 황태자가 뿜어내는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드래곤과 대악마마저 숨죽일 정도로.

- 아니지, 좀 어색하군.

하지만 황태자는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검을 한 번 더 휘둘러 다시 한번 세상을 쪼갰고.

이번엔 바알의 드래곤이 간신히 죽음을 면했다.

- 이 빌어먹을 놈이!

바알의 분노에.

- 아, 눈치챘어?

황태자가 살가운 미소를 띠어 보였다.

최대한 적의 전력을 깎아 먹으려 했는데 아쉽다는 얼굴.

방금까진 초월적인 기세를 뿜어내던 황태자의 태도가 순식간에 평소의 건들거림으로 바뀌었고.

- 이제 끝내자. 슬슬 지겹다, 잔재주 보는 것도.

몸을 감싼 일곱 화염이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

그의 신형이 사라짐과 동시에.

방금 일격을 피했던 드래곤 앞에 나타났다.

어찌해 볼 새도 없었다.

다시금 뒤섞인 무지개가 피어나자 드래곤의 목이 바닥으로 추락했다.

잠시 고개를 올린 그가 어둑한 하늘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쯧, 혀를 차곤.

검을 크게 흩뿌리자 품은 불이 하늘로 내달렸다.

바알이 피워 낸 거짓 자색염을 지워 내는 덴 큰 노력이 필요치 않았다.

황태자의 인생을 담은 불이 거짓된 자색염을 순식간에 잡아먹었고.

어둑한 보랏빛으로 사람들의 시야를 절망으로 물들였던 하늘이 이내 찬연하게 바뀌었다.

아름답다.

전쟁 와중에도 불쑥 튀어나오는 감탄사.

과거 처음 사제가 되어 신전에 발을 들였을 때.

한낮의 태양을 투과하며 신비로운 풍경을 자아내던 스테인드글라스보다도 더욱 아름다웠다.

세상이 신전이며 황태자가 뿜어낸 불이 성스러움을 드러내는 스테인드글라스가 된 듯한 풍경.

성화의 주인공이 된 황태자가 이지러지는 검을 들어 자신을 따라 한 사특한 악마를 가리켰고.

- 먹어! 찢어 죽여 버려!

대악마 바알이 그를 올려다보며 발작하듯 소리 지르자.

나머지 드래곤 하나가 다급히 황태자를 향해 입을 쩌억 벌렸다.

물론.

두고 볼 리 없다.

놈의 아가리가 황태자의 주변에 닿기도 전.

거대한 진동에 이어, 땅속에서 튀어나온 무언가.

강철로 만들어진 토룡, 대파수꾼.

드워프들이 준비한 비장의 수가 마지막 순간 땅을 허물며 등장했고.

덥썩, 악의로 빚어 만든 세 번째 드래곤의 다리를 잡아챘다.

놈이 대파수꾼을 향해 브레스를 뿜어내려 할 때.

- 어딜!

어느덧 나타난 페르페투아가 놈의 목덜미를 덥석 잡고는 날개를 힘차게 퍼덕였다.

아래에는 기계 토룡, 위에는 세인트 드래곤.

찢어지는 마지막 드래곤의 너저분한 육신이 여유로운 황태자의 뒷배경으로 자리했다.

자신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 한 바알의 얼굴을 무심히 바라보던 황태자가.

- 왜? 이것도 따라 해 봐.

기회를 주었다.

명백한 조롱.

오랜 세월 강자로 군림해 온 시간 동안 이러한 굴욕은 처음이었다.

압도되다니, 그것도 고작 인간에게!

놈이 금세 감정을 떨쳐 내곤.

- 좋다! 그 빌어먹을 모습마저 모조리 따라 해 주마! 아니, 더 강력한 모습으로 네놈을 찢어 먹어 주마!

황태자에게서 빼앗은 불을 마구 휘감기 시작.

처음 어린아이의 조악한 색칠 놀이 같았던 불꽃이 점점 그럴싸한 형상을 갖추어 갔다.

- 크흐흐! 네놈은 실수한 거야! 그런 힘을 얻었다면 지체 말고 날 베었어야지! 이젠 늦었다! 네놈은 끝났어!

어둑한 일곱 빛깔 무지개가 놈의 몸을 감쌌다.

심지어 머리를 물들인 모양새마저 같았고.

곧 바알이 뿜어낸 불이 황태자가 물들인 하늘로 올라 다시 제 영역을 주장했다.

세상이 반으로 갈린 듯 황태자와 바알이 같은 모양 비슷한 불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황태자가 찬란했다면 대악마는 어둑했다는 것 정도가 차이.

이번엔 대악마가 기괴한 브레이커를 휘둘렀고.

황태자가 아슬아슬하게 이를 피했다.

갈라지는 세상.

- 황태자! 나도 도울게!

페르페투아가 하늘 가득 머물러 있는 빛살을 함빡 빨아들였고 이내 하얗게 빛나던 육신이 일곱 색으로 물들기 시작.

신성의 힘에 더해 황태자의 불까지 머금은 그녀가 브레스를 뿜어냈으나.

- 헛짓거리다!

바알이 이를 비껴 내었다.

어차피 같은 힘, 소용없다.

페르페투아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 같이 공격하면 이길 수 있어! 어서!

황태자와 합공한다면 놈을 무너뜨릴 수 있다.

하지만.

- 필요 없다.

황태자는 그녀의 참전을 거부했다.

- 이 짐은 내 선조들이 져 왔던, 그리고 후손들이 져야 할 짐. 드래곤, 너는 네 임무를 다했다.

- 무슨 소리야? 지금? 미쳤어?

* * *

기껏 멋진 척 좀 하려 했는데 미쳤냐니.

하여튼 분위기를 참 못 맞추는 드래곤이다.

생각해 보면 태생적으로 눈치가 좀 없는 것도 같고.

얼빵한 표정을 짓고 있는 페르페투아를 외면하곤.

아직까지 살벌한 얼굴로 날 노려보는 바알을 향해.

- 간단히 말하면, 혼자서도 충분히 이기니까 끼어들지 말란 뜻이다.

오만을 부렸다.

놈의 얼굴에 나와 같은 미소가 번져 나갔다.

아아, 평소 저런 표정이었구나.

내심 감탄하며 잠시 광기와 패악이 깃든 얼굴을 감상하는 사이 놈이 검을 휘둘렀고.

세상을 가르듯 검 끝이 공간을 베어 내려 하기 전.

시간이 멈추었다.

얼굴 위로 찬찬히 올리는 왼손.

내리긋는 손 틈새로 자리하는 가면 하나.

과거 알리굴과의 싸움에서 보였던 백금면신장. 이를 마주한 고대 악마가 떠올린 건.

마왕, 마도왕국의 주인.

순환을 반복하는 사이 보았다.

운명의 깊은 곳, 끝에 도달해서야 알았다.

깊이 숨어 있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았고 무수한 순환 속에서 이를 붙잡았다.

[신비 백금면신장이 새롭게 개화합니다! 가면에 새로운 얼굴 마왕이 새겨집니다. 신비 백금면마왕이 당신의 얼굴을 덮습니다]

[신비 염제심결 일곱 심장의 불이 신비 백금면마왕의 얼굴을 물들입니다!]

바로 마왕의 혈통, 어머니의 핏속에 흐르던 잠재력을.

흉악한 마왕의 얼굴이 칠색으로 빛났다.

- 마왕……!

바알이 과거 자신을 봉인했던 원수의 얼굴을 보고 경악했고.

인간의 해방자 건국제의 후손이기도, 마도의 시초인 마왕의 핏줄이기도 한 몸에 이제 두 초월의 힘을 모두 담아 냈으니.

바알이 맞이할 것은 봉인 따위가 아닌.

- 죽어라.

멸망.

뻗은 손에서 피어난 무수한 가능성이 악마의 몸을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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