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내가 곧 제국이다
참 신기했다.
수십만에 달하는 이가 침묵으로 황태자의 한마디를 기다리는 광경.
모두가 기대감 어린 얼굴로 오직 존귀한 황태자 전하의 입술만을 바라보았다.
사실 들어서 알고 있다.
장성 너머 얼마나 치열한 싸움이 있었고 얼마나 위대한 승리를 이끌었는지.
누구도 그리하라 명한 적 없지만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전하의 승리 보고를 기다렸다.
소문과 발언은 다른 법.
황태자의 입에서 승리하였단 말이 떨어져야 비로소 평화가 찾아오리라는 믿음.
그만큼 강철성을 비롯하여 수도 페르마에서 지내는 이들의 황태자를 향한 믿음은 공고했다.
그가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이다.
존귀한 전하께서 무릎을 꿇으며 마침내 평화가 찾아왔다 말한 순간.
황태자를 연호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강철성 너머, 수도 페르마 너머까지 가득했다.
그의 호칭을 외치는 제국민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승리를 일구고 돌아온 황태자를 찬양하는 문구와 초상화가 가득한 거리.
깃발을 들고 행진하는 사람들.
그야말로 건국일 못지않은 축제 분위기.
이들이 이리 기뻐하는 것은 황태자의 무사 귀환 때문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모두의 무사를 축하키 때문이기도 했다.
그들 또한 보았고 겪었다.
악마의 준동과 악의 속에서 어떤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
괴로움과 두려움만이 가득했던 나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절망 속에서 누군가의 구원을 간절히 바랐던 순간.
황태자는 여명처럼 찾아왔다.
어두운 새벽을 헤치고 떠오르는 아침 해처럼 깨끗한 백금발과 강렬한 불을 두른 채.
그리고 그들을 잡아먹으려 하던 악마들을 살라 버렸다.
하나도 남김없이.
찾아온 일상에 감사했고, 앞으로의 무사를 빌었다.
하여 멀리 떨어졌으나 느낄 수 있었다.
저 너머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었고 지금은 얼마나 기쁠지.
사실, 대대로 제국과 왕국 연합의 사이가 나빴다고 해도 그건 지배 계층 간의 문제일 뿐.
어떤 이익 관계도 원한 관계도 없는 이들에겐 그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다.
자신들이 겪었던 구원을 그들도 겪기 바라는 마음이 오히려 기특하지 않은가.
“황태자 전하 천세! 천천세!”
“황제 폐하 만세! 만만세!”
황태자와 황제를 찬양하는 소리가 거리에 가득했고.
아이들이 제국의 깃발을 들고 뛰어다니며 밝게 웃었다.
원래라면 제국의 깃발을 함부로 다룬다 혼이 나야겠으나.
“어이쿠, 깃발 상할라. 조심히 다니렴.”
“네에!”
기사들도 병사들도 제지하지 않았다.
글쎄, 제국의 힘은 상징에서 나오지 않는다.
아이들이 깃발을 안고 달린다 해서, 바닥에 떨어져 흙이 조금 묻었다 해서 제국의 영광이 퇴색되지 않는다.
그저 툭툭 털어 내고 다시 번쩍 들어 올리면 될 뿐.
근거 있는 자신감.
전하께서도 그리 말씀하셨으리라.
달리는 아이들을 따스한 눈으로 보던 기사들이 문득 왕성 높이 흔들리는 제국의 깃발을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들고 다니는 조악한 깃발과 달리 새까만 비단 백금 자수로 수놓아진 쌍두독수리.
하늘로 비상할 듯 웅장하게 펄럭이는 모양새가 아름다웠다.
그래, 저런 어둠 속에서도 항상 빛났던 전하의 모습과 닮았다.
등 뒤를 따르며 악마들을 가르던 때를 기억했다.
“제국에 영광 있으라.”
기사들이 저도 모르게 충성심을 뽐내곤 시선을 내려 황태자가 계신 황성을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가 계신 이상 제국의 영광은 영원하리라.
반면 황제의 거처에선.
“그래, 왕국들의 상태는 익히 들었다. 고생이 많았다.”
“네, 빠르게 지원해 주신 덕분에 쉬이 봉합할 수 있었습니다.”
“대악마는, 바알이라는 놈은 강하더냐?”
“만만치 않더군요. 뭐, 그래도 저보다는 약하여 머리통을 깨 버렸지요.”
“다행이다. 혼사는? 싸움을 끝냈으니 슬슬 혼사도 생각해야지.”
“…혼사요?”
“그래, 혼사.”
“벌써요?”
“홍련 족장이라던 처자가 성격이 괜찮더구나. 그뿐만이냐, 발전하는 제국의 힘을 어찌 갈무리하고 어찌 발전시킬지도 생각해야지 않겠냐.”
벌써 시작된 황제의 압박에 황태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러다 체하겠다.
“제 승전식인데요, 지금.”
“승전식의 주인공은 원래 즐기기 어려운 법이다. 본래 바로 대신들과 국정을 논하려다 참은 것인데. 어찌, 국정 맛 좀 볼 테냐?”
“으윽, 어머니.”
황제의 쫀쫀한 압박에 황태자가 어머니에게 구원을 요청했으나 황비마저 눈을 피했다.
평소 자식을 지키기 위해 헌신했던 어머니이나 지금만큼은 어쩔 수 없다.
황제가 황태자에게 은은한 광기가 어린 미소로.
“얼른 준비해라, 늦겠다.”
승전식 연설을 재촉했다.
이를 들은 황태자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방금 황성에 들어와 황제에게 승전 보고를 올린 것은 약식.
승전식의 시작을 알린 것뿐.
진짜는 지금부터다.
강철성에 마련된 광장, 심지어 일반 제국민에게 처음 개방된 황성에서 승전의 결과와 공신들을 발표.
합당한 직책과 보상을 부여함은 물론 황제의 축사와 황태자 자신의 연설까지.
끝이 아니다.
다음으론 귀족들과 공신들의 축하가 이어질 터.
장장 며칠은 축제 분위기 속, 지루한 말들이 계속되리라.
벌써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니 최소 나흘은 지루한 행사를 견뎌야 할 것 같은 기분.
차라리 사람들 사이에 섞여 시원한 맥주나 한잔 즐겼으면 싶지만.
거추장스러운 예복과 더불어 거추장스러운 행사를 주관해야 하니 어림도 없는 일.
심지어.
“그러니까 폐하, 그냥 따로 준비하면 안 되겠습니까?”
“어림도 없지. 네 녀석이 어떤 짓을 벌일 줄 알고?”
“이제 와서 무슨 일을 벌이겠습니까.”
“인형 세워 놓고 자긴 밖에서 놀겠다 그런 짓을 저지를 녀석이란 걸 모를 줄 아느냐?”
“…….”
“저 봐, 저 봐! 얼굴 시무룩한 것 봐라! 진짜 계획했음이 틀림없느니라!”
어째서인지 황제는 한시도 황태자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복귀 이후 행사를 준비하는 내내, 밥 먹을 때는 물론 옷 갈아입을 때까지.
황태자가 도망갈까 취한 특단의 조치.
심지어 평소에 아들의 편을 들어 주던 황후마저.
“태자, 며칠만 참으세요. 폐하께서도 이리 원하고 제국민들도 이리 즐거워하는 게 오랜만 아닌가요. 때로 통치자는 지루하더라도 참을 수 있어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차마 어머니의 말을 비꼴 순 없어 황태자가 분을 삼키며 느릿느릿 옷을 갈아입었다.
이를 바라보는 알프레드를 비롯하여 솔과 안드레의 얼굴엔 경탄이 가득했다.
전하께서 저리 시무룩한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다!
대악마를 앞두고도 살기등등했건만 지금은 그저 순한 양.
굳이 따지면 심술이 가득하긴 하지만, 어쨌든.
황태자 또한 어머니, 아버지가 그를 위해 하는 말임을 아니까.
그렇게 억지로 준비를 끝마치고선.
“가자꾸나.”
황제를 선두로 뒤에는 황태자와 황비가 섰다.
황제의 뜻을 따라 강철성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두가 황태자의 승리를 축하하며 기뻐하는 자리.
은빛 물결이 움직이듯 솟아난 단상이 알현실 입구와 맞닿았고.
“황제 폐하 납시오-!”
우렁찬 목소리와 더불어 광장이 다시금 침묵에 빠졌다.
기사들이 검을 뽑아 예를 표했고 마법사들이 마나를 넓게 펼쳐 하늘 위로 거대한 깃발을 짜 올렸다.
그야말로 영광이 가득한 자리.
황제가 전율했다.
그의 신비가 그려 내는 광경이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보드라운 파스텔 톤이 가득한 아침, 막 자라는 새싹과 파릇파릇 생명을 더해 가는 자연, 더불어 흐드러지는 미소로 손을 잡은 사람들의 모습이 기뻤다.
어둑하기만 하던 제국이 이렇게 변할 줄이야.
이리 아름답게 변할 줄이야.
이후 이어지는 공신 선정과 직위 부여.
오랜 싸움이었으니 그만큼 많은 새로운 귀족직과 합당한 보상들이 이어졌다.
그때마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처음엔 공이 낮은 자부터 점점 갈수록 커다란 공을 세운 이들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이래야 마지막에 황태자의 이름을 부를 수 있을 테니.
그렇게 논공행상이 이어지길 꽤 긴 시간.
“안드레는 앞으로 나오라!”
“신 안드레! 대령했사옵니다!”
“경은 그간 황태자의 최측근으로서 가장 험한 자리에서 군말 없이 버텨 왔으니 그 인내심이 대단하다!”
“성은이 망극하옵나이다!”
“더불어 제 목숨을 걸고 마지막 싸움에서 커다란 전공을 세웠으니 어찌 외면하겠는가-.”
안드레의 글썽글썽한 눈을 마주한 황태자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고생이 많긴 했지.
뭐, 사실을 부정할 만큼 못돼 먹진 않았다.
폐하께서 그를 위로하듯 어깨를 짚으며.
“하여 그대에게 백작의 지위와 함께 새로운 성, 베일을 내리니! 황성 기사단 청익 기사단의 단장이며 폭풍의 기사인 안드레 베일 백작은 제국에 충성하라-.”
“……!”
순간 안드레가 숨 막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더는 평민이라 불리지 않아도 된다.
백작이라니, 천애 고아로 무시당하였던 자신이 백작이 되다니!
그런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가.
“그래, 원하는 것이 있나. 자네 고생을 아니 내 특별히 하나 들어줌세.”
자비 가득한 얼굴로 백작과 영지에 얹어 소원 하나를 들어주겠다 말했다.
잠시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던 안드레가 무언가를 떠올리곤 입을 열었다.
“전 고아입니다. 저와 같은 처지의 아이들이 삶을 보장받았으면 합니다. 제국의 어버이이신 폐하께서 돌보아 주셨으면 합니다.”
속에 품은 뜻을 밝혔다.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최소한의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다.
황제가 그의 바람을 듣고는.
“당연한 것은 소원이 아닌 법이지. 이는 당연히 이루어질 것이며, 추후 좋은 소원이 떠오르면 말하도록 하게나.”
그의 바람은 물론이오, 다른 소원도 이루어 주겠다 약속했다.
물러나는 안드레의 눈시울이 붉었다.
필사적으로 울음을 참고 있는 모양.
이어 호명된 이는.
“황실 마법사 솔은 앞으로 나오라!”
바로 솔.
그녀가 뻗친 머리를 내리누르며 다급히 폐하 앞에 쓰러지듯 엎어졌고.
“지금껏 황태자의 옆에서 가장 어려운 일을 맡아 왔으며 변함없는 충성심으로 마지막 싸움까지 훌륭히 승리를 이끌었더랬지. 고생이 많았구나.”
“서, 성은이 망극하옵나이, 나이다-.”
정신이 없는 듯 말까지 더듬거렸다.
그런 그녀의 무례를 귀엽게 본 황제가 살풋 웃곤.
“그대의 노고를 치하하여 백작의 지위와 함께 새로운 성, 아우렐리아를 하사하니, 황실 제4 마법사단 단장이자 그림자 마녀인 솔 아우렐리아 백작은 제국을 위해 마나를 사용하도록 하라-.”
“성은이 방극하옵니이다!”
백작의 지위와 더불어 새로 편성된 황실 4마법사단의 단장을 맡겼다.
제 발음 따위 신경 못 쓸 정도로 놀란 솔이 호흡을 멈추었다.
과거 마법사단 청소부에 불과했던 과거가 떠올랐던 탓.
삶이 바뀌었구나.
그리고 역시나 황제가 그녀의 소원을 물어 왔다.
평소 담아 두었던 소원 하나가 있었으니.
“저- 저어, 황태자 전하와 안드레, 알프레드, 발자크 백작이랑 또, 또오 바이올렛이랑 이엘! 이엘이랑 하란도요! 그러니까 함께 싸웠던 사람들! 그 사람들이랑 가끔은 다 같이 만나고 싶어요-!”
참으로 황당한 소원.
하나 그녀는 진심이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바빠지고, 바빠지면 만나기 어려우니까요……. 가끔씩이라도 옛날처럼 같이 만나 이야기하고 싶어요…….”
천성이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
가장 힘든 시간이기도 했지만 좋은 사람을 가장 많이 만났던 시간이기도 했다.
아마 평생 황태자 전하 옆에 있었던 시간과 더불어 이들을 그리워하지 않을까.
참으로 소박하고 어찌 보면 참으로 어려운 소원.
솔이 뒤늦게 눈치를 살폈고 황태자가 관자놀이를 짚었다.
황제께서는.
“하하하하! 아주 기특한 소원이로구나! 내 반드시 이루어 주도록 하지!”
만족하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논공행상의 마지막.
“황태자 아르한은 앞으로 나오라!”
황태자 차례.
사실 그의 공은 세는 게 무의미했다.
“황태자 아르한은 지난 시간 동안 북부로부터 시작하여 제국이 당면한 위기를 해결해 왔으며 더 나아가 서부, 남부, 동부에서 있었던-.”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일을 해결했으니까.
말해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폐하께서 잠깐씩 목을 가다듬어야 했을 정도.
그러나 지치지 않았다.
자식의 자랑거리를 이야기하는 아비가 어찌 지치겠는가.
그것도 수십만 제국민이 눈을 반짝이며 자식 자랑을 들어 주는데.
그렇게 한참을 황태자가 이룬 업적과 그의 위대함을 자랑하는 동안.
황태자는 지루함을 못 이기고 그저 아래에 비친 제 얼굴을 멀뚱멀뚱 구경했다.
아, 고놈 잘생겼다.
그리고 그의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을 눈치챈 황제가 슬쩍 손가락을 움찔거렸고.
뒤에 기립한 알프레드로부터 시작하여 중앙정보처 요원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급히 움직였다.
황태자를 내려다보는 황제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황태자가 언제쯤 끝나나 생각하며 솟아나는 하품을 참고선 고인 눈물을 말리는 사이.
“하여 황태자 아르한에겐 이와 같은 상을 내리고자 한다-!”
마침내 끝이 다가왔고 황제가 목소리를 높임과 동시에.
“황태자 아르한 아이로니아를, 황제에 임명하노라-.”
황태자의 머리에 황관을 올려놓았다.
그제야 놀란 황태자가 고개를 들자.
“내가 언제까지고 당해 줄 거라 생각했더냐?”
“태자, 그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군요?”
아들의 얼굴을 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는 황제와 황비.
모든 건 황제와 황비의 계획대로.
일부러 시간을 끌어 그의 주의를 분산.
알프레드를 비롯한 요원들이 황관을 남몰래 운반.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 황비의 손에서 황제의 손으로 넘어간 황관을 황태자의 머리 위에 안착시키는 데 성공.
“아니- 폐하!”
속았음을 파악한 황태자가 버럭 고함을 지름과 함께 일어났으나.
“오라버니-! 축하드려요!”
페르페투아의 도움으로 몰래 등장한 유리엘이 오라비의 입을 막으려 다리에 매달렸고.
페르페투아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곧 신성한 빛이 하늘을 가득 메우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이어서.
“아르한 황태자의 황제 등극을 위한 대관식을 거행하겠노라!”
황제의 갑작스러운 선언과 일제히, 수상할 정도로 동시에 터지는 함성과 박수.
사람들 사이에 섞여 들어 간 중앙정보처 요원들의 공작과 더불어 황태자 최측근들의 수상쩍은 환호.
모두가 한패로구나!
은근히 눈을 피하는 이들을 보며 황태자가 이를 갈아붙였으나.
이미 늦었다.
제국 수도 전역이 승전식에 이어 대관식이 치러진다는 선언을 들어 버렸다.
“나는 상황(上皇)이 되어 편안한 노후를 보낼 계획이니, 이제 태자가 황제가 되어 나라를 이끌도록 하라-!”
너무나도 개운해 보이는 황제의, 아니 이젠 상황이 된 아버지의 미소에 얼떨결에 황제에 등극한 아르한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철저하게 당한 것은 처음.
그러나.
“뭐, 알겠습니다. 나름 노력해 보죠.”
* * *
그리 기분 나쁘지만은 않았다.
“폐하, 한 말씀 하시지요.”
상황이 비켜선 자리, 가장 높은 자리에 올랐다.
단 몇 걸음이지만 느껴지는 무게가 달랐다.
전생에는 나를 향한 모든 시선이 부담이었다면 지금은 모두가 기뻐하고 축복하고 있다.
피어나는 그들의 운명이 소담스러웠다.
미움을 받았던 전생과 다르다.
호시탐탐 제국을 무너뜨리고 제 욕심만을 채우려 했던 이들이 아닌 진정 제국을 위하는 대신들이 가득했고.
괴로운 삶, 악마들에게 잡아먹히는 비극 없이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는 제국의 모습.
마침내 결말마저 바꾸었구나.
본래 가짜 황제에 불과했던 이가 이리 진짜가 되었으니.
머리 위에 올려진 황관이 참으로 기꺼웠다.
길고 길었던 여정, 평화로이 맞이하는 끝이자 새로운 시작.
이루어 낸 제국을 돌보아야 하리라.
하여 허리를 곧추세우고 어깨를 폈으며 턱들 들어 올려 제국을 오시했다.
내리까는 눈길엔 오만과 자신을 담았고.
“내가-.”
목소리에 함빡 신비를 담으니 은은히 퍼지는 목소리가 제국을 감쌌다.
“곧 제국이다.”
참으로 오만한 한마디 말.
그러나 누구도 부정하지 않았고 오만을 탓하지 않았다.
모두가 고개를 숙여 옳음을 시인하니.
[운명 폭군을 포식했습니다! 새로운 운명 패황이 피어납니다!]
폭군이 아닌 패황(覇皇) 아르한 아이로니아가 등극했고 제국은 전에 없던 번영을 이루어 냈다.
역사에 길이 남을 신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