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외전 2화 아름다운 계절
“우으으-!”
새벽, 떠오르는 해와 더불어 기지개를 켜는 솔의 얼굴에 보람이 가득했다.
솔 아우렐리아.
막 떠오르는 햇빛이 그녀의 얼굴과 더불어 명패 위에 부스러졌다.
황실 마법사단의 오색화림 훈련 계획과 개인 연구를 진행하느라 밤까지 새워 버렸으나.
“읏차차-!”
펄쩍 의자에서 뛰어내리는 몸짓에도 힘이 가득했다.
흥흥- 콧노래를 부르며 커피 한 잔을 타 떠오르는 해를 향해 보람찬 미소를 지었다.
“아우렐리아-. 언제 들어도 이뻐.”
솔 아우렐리아 백작.
황실 마법사단 부단장과 4마법사단장을 겸하고 있는 신흥 귀족이자 차기 단장이 유력한 공신.
황제가 황자이던 시절, 모두에게 무시당하던 시절부터 함께한 최측근 중 한 명으로 많은 은혜를 받았더랬다.
그만큼 많은 공을 세웠단 평과 더불어, 현 황실 마법사 총괄 단장 달런과 동북부 공작이자 대마법사 사일러스에게 마법을 사사받았다는 소문.
일신의 실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은 모두가 인정하는 바.
새로운 권력의 핵심이라는 세간의 평과 다르게.
“일단 훈련 계획 초안 완성했고- 다음 마법사단 회의에서 선보일 새로운 마법도 충분해.”
그녀는 일에 미쳐 있었다.
과거 마법사단의 골칫덩이이자 필요 없는 존재였던 시절.
남들이 빵빵한 지원금을 바탕으로 실력 상승을 이루어 내고, 황실 마법사단의 주요 전력으로 취급받던 당시.
마룻바닥이나 닦던 때에 비하면 지금은 천국.
남들에게 인정받는 것도 기분이 좋았지만 하나하나 자신의 손으로 이뤄 나가는 맛이 각별했다.
좋은 저택, 그녀를 모실 하녀들과 집사들이 배정되었으나 정작 집에 잘 들어가지 않았고.
하루가 모자란다는 듯 일에 몰두했다.
이리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 제국의 평화가 위협받을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근래에 생긴 그녀의 작은 소망.
“폐하께선 바쁘시니까, 내가 할 수밖에 없어.”
그리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우수가 깃들었다.
과거 처음 폐하를 마주했을 때만 해도 분노로 가득했다.
모두를 죽이고 싶다 생각했다.
글쎄, 만일 그분에게 구원받지 못했다면 어떤 짓을 저질렀을까.
누군가를 다치게 했다면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았으리라.
하나, 폐하께선 이러한 자신을 보듬다 못하여 마음에 가득했던 어둠을 그림자로 치환, 남을 지키란 사명을 주셨지.
이를 지키는 게 자신의 의무라 믿었다.
“한번 제사장은 영원한 제사장이니까요.”
폐하를 섬기기로 한 이상, 전처럼 가까이에서는 아니더라도 제 나름의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가짐.
이런 자리까지 마련하여 준 황제 폐하에게 누가 되어선 안 된다.
밤샘 작업을 끝내고 아침 해를 마주하며 마시는 커피 맛이 얼마나.
“우웩-.”
쓰디쓴지.
다급히 설탕을 때려 부은 뒤에야 솔이 새끼손가락을 치켜든 채 아침 커피를 만끽했다.
그러면서도 혹시 일찍 출근하는 마법사는 없는지 눈치를 살폈다.
왠지 남에게 보이기엔 부끄러운 모습.
“오늘이네.”
달력에 붉게 동그라미 쳐진 날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솔이 잔을 내려놓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전우들을 만나는 날이다.
* * *
커다란 창문을 지나쳐 아름답게 비치는 햇살이 얼굴을 간지럽히는 침대 위, 보드라운 비단 이불을 덮은 채 세상모르고 자는 이.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온 하녀가 물이 담긴 대야를 준비해 놓고선.
“백작님, 백작님, 일어나세요. 아침이에요.”
누워 있는 자를 깨웠다.
얼굴과 목소리에 깃든 존경심이 조심스러웠다.
그렇게 몇 번을 불렀을까.
“응, 으응? 백작님? 어디- 어디, 백작님이 오셨어.”
여태껏 잠에 빠져 있던 안드레가 화들짝 놀라 일어나서는 눈을 부볐다.
백작님이 행차하셨다니 당장 일어나 인사라도 해야지.
아무리 황태자 전하와 가까운 이라 해도 허투루 행동할 순 없다.
자신이 바로 서야 전하의 체면이 바로 선다.
안 그래도 흉흉한 기세로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시는 분인데.
그가 고개를 흔들어 억지로 정신을 차리곤 침대 밖으로 벗어나려 할 때.
“백작님?”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하녀들의 얼굴들을 보곤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금장 장식이 된 대야에 담긴 따스운 물과 몸을 감쌀 비단 가운을 들고 있는 이들.
그러고 보니 지금 자신이 깬 방 또한 과거였다면 상상도 못 할 화려함을 자랑했다.
그제야.
“아, 벌써 아침인가.”
청익 기사단 단장이자 황실 기사단장을 겸하고 있는 차기 제국 제일 검, 안드레 베일 백작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오늘 아침 일찍 일정이 잡혀 있어 이리 이르게 깨웠습니다. 두고 나가 있을까요?”
“…그래 주겠어.”
“네, 알겠습니다. 매무새를 정리하시면 불러 주세요. 아침 식사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그래.”
안드레가 친절하게 답하는 하녀에게 어색하게 손을 휘적였고.
“후우- 이거 불편해서 살겠나.”
그들이 나가고 나자 옅은 한숨을 뿜어냈다.
앞에 놓인 대야에 손을 담가 보니 딱 알맞게 덥혀진 물이 기분 좋게 손을 휘감았다.
얼굴과 입을 간단하게 헹굴 물에 불과하지만 은은하게 퍼지는 민트 향이 정신을 맑게 깨워 준다.
잠시 비치는 얼굴을 바라보던 안드레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끝났구나.”
아직도 베일이라는 성과 더불어 백작이라는 칭호가 어색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황제 폐하가 되셨다는 것도, 지독했던 싸움이 끝났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다.
언제라도 일이 터져 전쟁터로 나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
수도 하수구 구역, 진창 속을 굴러다니던 자신이 제국의 백작이 되었단 것도 모두 꿈결 같았다.
몽롱한 얼굴로 단정히 개어진 비단 가운을 덮자.
오소소 소름이 돋아올랐다.
너무 부드럽다.
기름을 몸에 덮은 듯 흘러내리는 촉감이 어색했다.
날카로운 살기와 단단한 철, 땅의 거칢에 익숙해져서일까.
주변을 감싼 화려함과 고급스러움이 어색했다.
그러던 중 문득.
옆구리에 걸리는 익숙하면서도 반가운 무게감.
손에 착 감기는 거칠거림에 고개를 돌리자.
“허, 언제 이런 걸.”
비단 가운에 어울리지 않는 검 걸이와 어느새 올려 둔 자신의 검이 눈에 띄었다.
항상 검을 지니고 다니기에 하녀들이 직접 달아 준 모양.
비록 백작이 되었으나 잘 때도 버릇으로 검을 품고 잤다.
아직은.
“잊지 못하는가 봅니다, 폐하.”
폐하와 함께 대륙을 질타하던 때를, 악마를 상대로 목숨 걸고 싸웠던 때를.
이런 영광을 바라지 않고 싸워 왔던 지난 시절을.
싫은 건 아니었다.
드넓은 창밖으로 보이는 수도 페르마의 평화로운 모습.
아침 식탁을 채운 건 딱딱한 빵과 묽은 수프가 아닌 풍족한 음식들.
든든히 배를 채운 후 씻고 나오자.
“예복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여럿이 달라붙어 옷을 입혀 주고 머리를 빗겨 주고 단장을 해 준다.
전엔 이런 사치는 꿈도 못 꾸었다.
제대로 씻지 않았다고, 손톱에 때가 끼었다고 몽둥이로 엉덩이에 피가 날 때까지 맞았었지.
그런 보육원이 지겨워 하수구 구역을 들개처럼 돌아다녔다.
이후 기사가 되어 전하, 아니 폐하를 따라다닐 때는 더 험했다.
밥? 거르기 일쑤였고 때론 이슬을 맞으며 잤다.
전쟁이란 그런 것이다.
폐하께선 더하셨지.
잠 한숨 자지 않고 며칠 밤낮을 싸우셨고 밥 따위 먹을 시간 없다며 발걸음을 서두르셨다.
마침내 이런 결과를 이루셨지.
로이스 가문에서 제공해 준 차를 타고 지나며 수도의 거리를 보자 울컥 감동이 솟아올랐다.
희생과 고난의 결과가 아름다워서이기도 했고.
“푹신하네.”
홀로 앉은 뒷자리가 넓어서이기도 했다.
항상 비좁은 트렁크에서 멀미를 참아 가며 버텼던 나날들.
힘겹지만 싫지 않았다.
폐하의 뒤를 따른다는 즐거움이 있었으니까.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된다.
누군가는 미쳤다 하겠으나 당시 안드레가 품었던 상식은 그랬다.
“도착했습니다, 백작님.”
“고마워.”
나이 많은 운전수에게 어색하게 반말을 중얼거리곤 내리니.
이른 아침임에도 사람이 그득한 열차 플랫폼 한쪽.
“어? 여기예요, 여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두툼한 로브로 몸을 칭칭 감은 솔.
뻗친 갈색 머리와 주근깨 박힌 얼굴, 장난스러운 손동작이 여전했다.
“이거, 아우렐리아 백작 아니십니까.”
“호호, 베일 백작님께선 잠을 푹 주무셨나 봐요. 얼굴이 좋아 보이네요.”
“허허허, 아우렐리아 백작께서는 밤새 일을 하다 나오셨나 봐요. 얼굴이 푸석푸석한 게 메마른 땅과 다름이 없습니다.”
“이익- 평민!”
“어허, 백작에게 평민이라니?”
“평민! 못생긴 평민!”
“요 가로등이!”
둘이 티격태격 말을 주고받다 와하하하 웃어 댔다.
사실 각자 자리를 맡은 이후에는 이렇게 대화 나누기가 어려웠다.
시간도 없거니와 보는 눈이 워낙 많아야지.
“청익은 같이 안 가요?”
“같이 가기엔 관심이 쏠릴 것 같아서 내가 대표로 가기로 했어.”
“저도 마법사단 대표로 가기로 했어요.”
마주 웃는 둘의 얼굴에 멋쩍음이 감돌았다.
평화가 찾아온 이상 무력의 대규모 이동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아마 두 백작의 만남만으로도 수군거리는 자들이 생기지 않을까.
나쁜 의도라기보단 아마 폐하께서 무언가 일을 꾸민다고 생각할지도.
여하튼 조심스러운 게 사실.
안드레와 솔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열차를 기다리는 사이.
몇몇 검은 옷을 입은 자가 그들을 주시했다.
빠아아앙-.
이윽고 기차가 짙은 오색 연기를 뿜어내며 출발.
흔들리는 차창 너머.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오랜만이네요.”
펼쳐진 들판을 보곤 과거를 떠올렸다.
북부로 향하는 열차, 몰려오는 악마들, 새벽이 올 때까지 벌였던 치열한 싸움.
해가 떠오르자 재로 변하여 흩어지던 악마들 사이.
“폐하께선 참 멋있으셨지.”
거검에 기대어 눈을 맞던 폐하의 자태가 참으로 귀했다.
과거를 떠올리는 두 백작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렸다.
치열했기에 더 그립고 마음에 남는 과거.
“요즘은 폐하를 뵙기가 참 어렵지요?”
“그러게 말이야. 전처럼 평민이라 불러 주시지도 않더라고.”
“왜요, 섭섭해요? 평민이라 안 불러 줘서요?”
“뭔가, 뭔가 좀 아쉽달까.”
“저도 그래요. 가로등이라 불러 주는 사람이 없으니까 아쉽더라고요.”
툭툭 내뱉는 마음들이 진솔했다.
그렇게 한참 북부로 향하던 당시를 회상하던 그들을 태운 열차가 한낮의 태양이 따사로운 들판을 지났고.
드디어.
- 종착역에 도착하였습니다. 승객분들께서는 놓고 내리시는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북부에 도착했다.
막 플랫폼에 발을 디딘 순간.
“바이올렛-!”
“솔! 아니, 백작님!”
“뭐예요, 어색해요-.”
기다리고 있던 바이올렛과 북부 기사단이 그들을 반가이 맞이했다.
여전한 미모를 뽐내는 바이올렛이 솔과 인사를 나누는 동안.
“어? 머리를 잘랐군요?”
안드레가 달라진 점 하나를 알아챘다.
허리 근처까지 기른 생머리를 단발로 잘랐다는 점.
고양이같이 날카로운 인상과 더불어 역으로 쓸어 올려 바스스 떠오른 머릿결이 성숙함을 더했다.
바이올렛이 자른 머리끝을 매만지곤.
“네, 그냥 한번 잘라 보고 싶어서 잘랐어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하지만 입가에 달린 멋쩍은 웃음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뭐랄까, 요즘 마음이 자꾸 헛헛했다.
분명 평화로운 시대를 살고 있지만, 전에 없던 풍요와 번영을 누리고 있지만 때로 엄습하는 공허가 생각보다 컸다.
이유 모를 허무함.
싸움이 없어서? 북부엔 아직도 몬스터들이 돌아다니니, 예전만은 못해도 때로 험한 전투를 즐길 수 있다.
악마가 없어서? 그렇다고 하기엔 지금의 평화가 사랑스러웠다.
원인을 모르니 어찌 고칠 방도가 없었고 그런 기분을 이렇게나마 표현해 봤으나.
“다시 기를까도 생각 중이에요.”
헛헛한 마음을 채울 순 없었다.
“그럼 가실까요. 베일 백작님, 아우렐리아 백작님.”
바이올렛이 비슷한 표정을 한 둘을 이끌어 북부 중심으로 안내했다.
“우와, 완전히 달라졌네요.”
“그러게, 높은 건물이 많이 생겼네요.”
“이제 더는 눈보라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가는 길,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북부의 모습에 안드레와 솔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세상을 지울 듯 쏟아지던 블리자드 때문에 낮은 층고와 기울어진 지붕만이 가득했었는데, 지금은 제각각인 높이와 모양이 화려함과 발전을 자랑했다.
척박한 추위를 피하려고 창백한 얼굴로 다급하게 발걸음을 서둘렀던 이들이, 지금은 붉게 혈기 도는 얼굴로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추위를 이겨 내고 봄을 맞이한 새로운 북부가 한창 무르익어 가는 중.
비로소 그들의 얼굴에 따뜻한 만족감이 들어찼다.
“도착했습니다.”
그들이 향하는 방향을 따라가니 군중이 모인 자리.
기사의 보고에 바이올렛을 비롯하여 솔과 안드레가 내리자.
“북부의 영웅들이 도착했습니다!”
우렁찬 목소리에 이어, 북부 기사들과 병사들이 일제히 예를 표했다.
북부가 위기에 처했을 때 목숨을 걸고 싸워 준 친우.
북부인들이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고.
그 사이를 둘이 멋쩍은 얼굴로 걸었다.
“우리를 영웅이라고 하기엔 좀.”
“폐하께서 오셨어야 했는데요.”
“왜요, 어깨 당당히 펴세요. 영웅이란 칭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니까요.”
바이올렛의 응원에 둘이 억지로 지나간 길 끝.
“오랜만이로군.”
조금 더 옅어진 연보라색 머리를 휘날리며 선 사내.
떡 벌어진 어깨가 뒤로 펼쳐진 산맥과 퍽 어울리는 모습.
입가에 띤 미소에 은은한 반가움이 어렸다.
“공작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어요, 공작님.”
바로 북부 대공 발자크 드보르작.
지금껏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공작의 직위를 하사받았다.
율리시스 가문이 사라진 자리, 드보르작 가문이 새로운 공작가가 된 셈.
드보르작 공작가의 주최하에 두 백작이 참석했으니.
그야말로 제국의 중추가 모인 자리.
황제의 신임이 두터운 이들이 자리했으니 친분을 쌓으려는 이들이 경거망동할 법도 했으나 함부로 얼굴을 들이밀지 못했다.
그럴 법도 했다.
오늘 발자크 공작의 주도 아래 이루어지는 행사는.
“북부를 위해 희생한 영령들을 향하여 묵념-!”
축제이자, 추모.
전대 백작이자 이젠 공신으로 추대된 루카르 드보르작과 그를 따르던 노병을 향하여 모두가 예를 표했다.
침묵으로 기리는 위대한 희생.
여전히 꽃 무덤 사이 홀로 우뚝 선 루카르가 순백의 고결함을 뽐내었다.
뒤에 이글거리는 불의 샘과 더불어 그가 든 검이 북부를 수호하니.
“북부의 수호령을 기리는 헌화 시간을 갖겠습니다.”
발자크를 시작으로 모두가 손에 든 꽃송이를 그의 앞에 쌓기 시작했다.
“폐하께서는?”
“오늘 급히 처리할 국정이 있으시다더군요.”
“그렇군.”
무덤덤하게 답하는 발자크의 입술이 조금 처졌다.
섭섭하고 안타까워서.
아마 오고 싶어 하셨으리라.
그렇게 헌화가 끝나 갈 즈음.
맑게 갠 하늘, 그의 앞에 쌓인 꽃 무더기 위로 한 줄기 빛이 떨어져 내렸다.
“오오-! 하늘께서도 영령들을 위하신다.”
“전대 백작님께서 우리를 위해 내리는 답일 거야!”
“수호자시여, 북부를 지키소서.”
일견 신성한 장면에 다들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을 때.
“어- 뭔가 좀 이상하죠?”
“이거 익숙한데…….”
“왜 소름이 돋는 걸까요?”
“솔도 그래요? 저도 그래요…….”
안드레, 발자크, 솔, 바이올렛은 스며드는 한기에 팔뚝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정말.
푸화학-!
거센 빛이 눈을 가린 뒤, 나타난 건.
“뭐야, 뭘들 그렇게 봐. 황제 처음 봐?”
현 황제 아르한, 그가 깨끗한 백금발과 더불어 특유의 오만함으로 북부인들을 타박했으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다들 미소로 화답했다.
그런 그들을 보며.
“쯧, 어째 요즘 날 보면 비명이 아니라 미소를 지으니 기분이 영 찝찝하단 말이야.”
툴툴거리는 황제의 목소리에.
안드레도, 솔도, 바이올렛도, 발자크도.
“폐하!”
“우왓, 오셨네요?”
“아, 말씀 좀 하고 오시죠.”
“이 늙은이, 기다렸지 뭡니까.”
반색을 표했다.
어딘가 헛헛하던 마음이 꽉 채워지는 기분.
바이올렛이 비로소 최근 느꼈던 공허함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러게요. 요즘 폐하의 광기를 보지 못하여 심심하지 뭔가요.”
“…바이올렛?”
“딸아? 미쳤니?”
아르한 부족이 그 원인.
그녀의 화사한 미소에 피식 웃음을 흘린 황제가.
“다들 대기. 오랜만에 만난 회포는 좀 있다 풀자고.”
손을 뻗어 그들을 멈춰 세우곤.
“오랜만이야, 백작. 잘들 있었나, 늙은이들.”
하얗게 굳은 루카르와 꽃 무덤 안에 깃든 노병들을 마주했다.
항상 오만했던 그의 눈가에 서글픈 따스함이 깃들었다.
그렇게 한참을 그들을 바라보던 황제가 꺼낸 말은.
“어때? 약속대로 되었지?”
에스키모와 싸우기 전, 그들에게 했던 약속.
동토에 봄을 되찾고.
“봐, 꽃이 이리 많이 피었잖아.”
꽃과 삶을 피우겠다던 약속.
그들의 약속을 처음 들은 발자크를 비롯한 모두의 눈가에 물기가 번졌다.
루카르 옆에 선 황제가 북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봐, 자네 앞에 봄과 꽃이 만발했어.”
발자크를 우러러보는 이들 모두가 꽃이니.
이만한 봄이 어디 있겠는가.
황제의 약속에 만족한 것일까.
발자크의 몸을 감싼 작은 들꽃들이 살랑살랑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대답이 되었다.
빙그레 웃은 황제가 손을 모아 꽃 하나를 피워 냈다.
일곱 불을 담은 꽃.
작지만 가장 아름답고, 소박하지만 무엇보다 귀한.
신비를 담은 꽃.
“또 하나 약속하지.”
이를 그의 검 위에 올려놓은 아르한이.
“이 꽃이 자네의 검 위에 펴 있는 한, 불의 샘과 북부에 흐르는 열기가 마르는 일은 없을 거야. 전우의 뒤늦은 추모이자 위로라 생각해.”
과거, 꽃 무덤 속에 누워 하지 못했던 말을 이제야 맺었다.
문득 불어온 바람에 꽃잎이 흐드러졌다.
얼핏 꽃잎에 휩싸인 발자크 백작의 입가가 조금은 올라간 듯도 보였다.
아름다운 계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