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외전 3화 당신은 언제나 제국의 황제였습니다
현 황제 아르한 아이로니아가 황태자이던 시절 설치한 직속 정책 연구소.
과거 황태자 궁 주변 작은 방 하나에 자리했던 연구소는 지금.
“이봐, 자료 얼른 가져와.”
“서부 홍련부터 동남부 프리델람까지 이어지는 교역로 계획서는? 준비 끝났어?”
“북부 담당 팀 주목! 여기 새로운 일이다.”
“으으윽! 팀장님, 이러다 죽는다고요!”
자그마치 4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사용할 만큼 거대해졌다.
명칭도 황실 직속 정책 연구소로 바뀐 상태.
황실에서 주관하는 사업 전체와 이후 영향을 예측, 평가하고 계획을 수립하는 만큼 많은 인력이 필요했고.
“자 자, 잠깐만 다들 멈춰 봐요. 오늘 들어온 신입들입니다-.”
많은 이가 황실 정책 연구원이 되기 위해 모여들었다.
특히 플라워 밸리 아카데미 졸업생들의 첫 번째 목표.
아르한이 황태자이던 시절, 아카데미 학생들을 향해 했던 연설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던 모양.
그 외에도 재야에 묻혀 있던 학자들이 연구소의 문을 두드렸다.
이유는 간단했다.
제국을 번영시키고 사람들의 삶을 살리기 위해.
그들의 뜻이 명확했고 황제는 고결한 뜻을 품은 이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주었다.
자신의 뜻을 알아주는 주군을 섬기기 위해 모여드는 이들.
그야말로 제국 지성의 집합체.
플라워 밸리에 존재하는 학파들이 현학적이고 이상적인 뜻을 수립해 간다면, 황실 정책 연구실은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전장의 첨단.
자료 분석과 예측, 토론이 일상인 장소.
피곤에 찌든 얼굴들이지만.
“우와아아아-!”
“오늘 회식이다-!”
“뭐야? 무슨 일이야? 저쪽 팀 왜 저렇게 신났어?”
“아, 신설된 서부 자원 특별 팀인데, 이번에 세운 칠색 모래 사용 관련 계획 보고서가 좋은 결과를 얻었다네.”
“크으- 거, 기분 좋을 만하구만.”
고생하여 만든 계획서가 통과되고 제국 살림에 보탬이 되었단 소식을 들으면 절로 환호가 터져 나왔다.
물론 빵빵한 성과급은 덤.
앞으로 관련 사업이 승승장구할수록 그들의 성과급과 더불어 이름이 높아질 터.
황제는 제국을 위하라는 의무감만으로 그들을 압박하지 않았다.
의무감에 더해 주어지는 혜택과 권리.
철저한 평가와 공정한 기회.
이것이 현 황제 아르한 아이로니아가 제국을 이끌어 나가는 방법.
고루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이다.
정작 제국 정책의 중심, 연구소를 책임지고 있는 연구소장실에선.
“소장님, 시간 다 됐습니다.”
“준비는?”
“끝마쳤습니다, 일단은.”
“그래, 알겠다.”
기이할 정도의 비장함이 감돌았다.
이전 황제의 부름으로 연구소 초기 때부터 헌신해 왔던 부자(父子).
북부 설립 계획부터 동북부 장성과 동남부 프리델람 행정 계획서까지.
황제가 벌인 굵직굵직한 사업 중 그들의 지혜가 들어가지 않은 일이 없었다.
그만큼 신임을 받는 이들.
아직도 세간엔 아르한 현 황제가 황태자이던 시절 그들의 계획서를 보고 감탄, 직접 찾아가 스카우트했단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올 정도.
전설의 주인공들은 지금.
“갑옷은?”
“입었습니다.”
“보고서는 총 몇 개나 준비했나.”
“원안 세 개, 수정안 총 4차까지 준비했습니다.”
“쓰읍- 4차? 그거 갖고 되겠어? 부소장, 자신 있나?”
“자신… 있습니다.”
“좋아, 원안 포함해서 2차까지 날릴 생각하고 3차부턴 목숨 걸어.”
“네! 소장님!”
온몸에 두꺼운 보고서를 둘둘 두른 채 결의를 다지는 중.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의문도 잠시.
쓰디쓴 커피 한 잔을 호쾌하게 넘기곤 그대로 황제가 머무는 황궁으로 향했다.
향하는 얼굴에 다급함과 긴장감이 어렸다.
“어? 소장님, 부소장님, 이 시간엔 어쩐 일로?”
“폐하를 뵈어야겠네! 당장.”
“원래 일정은 사흘 뒤 아닙니까?”
“비켜!”
“아닛, 잠깐만요!”
황실 기사가 눈을 굴리며 슬쩍 눈치를 보는 사이.
늙은 아버지와 아들이 그를 지나쳐 달렸다.
사실 세 걸음 지나기도 전에 그들을 붙잡을 수 있었으나.
“아이쿠! 이런, 너무나 빨라서 놓쳐 버렸잖아? 이봐! 소장님이랑 부소장님 지나가신다! 얼른 막아!”
정문을 지키는 기사가 어색한 연기로 그들을 보내 주었고.
“이런. 소장님, 어째 점점 빨라지십니다!”
막으란 말과 달리 모두가 그들을 피해 길을 터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알프레드 시종장!”
“시종장님!”
“폐하를 만나려 하십니까.”
황궁 전체 살림을 주관하는 알프레드 시종장이 등장.
삼엄한 기세로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듯하다가.
“이쪽으로.”
정중히 그들을 안내했다.
알프레드가 앞장서서 굽이굽이 복잡한 황궁 복도를 헤쳐 나갔고.
그런 그들을 방해하려는 듯 황궁이 변하기 시작.
그가 의안을 열어 길을 찾았다.
그리고 마침내.
“폐하!”
“알프레드! 지금 뭐 하는 거야! 치사하게!”
막 창문 밖으로 도망치려던 아르한과 그들이 마주했다.
늙은 연구소장이 다급히.
“폐하, 어딜 그리 급히 가십니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통촉하긴 뭘 통촉해! 너희가 내 고통이야!”
도망치려는 황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고 아들이 그런 아버지를 따라 옷소매를 붙잡았다.
감히 황제의 몸에 손을 대다니 사형으로도 못 갚을 죄임이 분명하나.
으레 벌어지는 일이기에 신경 쓰는 이 하나 없었다.
“어어? 너희, 이거 반역이다! 반역이야!”
아르한의 협박에도.
“죽여 주시옵소서-!”
“죽여 주시옵소서-!”
부자가 죽을 각오로 황제의 도피를 막으니.
“떼잉, 그냥 평범하게 찾아와 보고서를 올려도 되는데, 왜 꼭 이렇게 사람을 힘들게 하냔 말이야!”
결국 도망에 실패한 황제가 투덜거려 봤으나.
“보고서를 올리면 읽지도 않고 윤허하시지 않사옵니까.”
“그뿐만 아니라 계획에 대해 설명과 조언을 구하려고 해도 며칠 밤낮을 피하시니 방법이 없습니다.”
“…내가 그랬나?”
“좀 더 자세히 설명드릴까요? 풀 보따리가 한참이나 남았습니다만.”
소장의 당당한 반론에 아르한이 쩝, 입맛을 다시며 볼을 긁적였다.
그 패악스럽다던 황제가 저들에게 이리 당해 주는 이유.
“그래, 얼마나 대단한 계획들을 가져왔는지 들어나 볼까.”
진정 제국을 위하기 때문.
그렇게 한창 설명을 이어 가던 와중.
“음, 좋아. 그렇게 하자고.”
“아직 2안, 3안이 남았습니다.”
“아니, 진행해.”
“마저 들으시고 선택을-.”
“진행 좀 해! 날 좀 내버려 둬! 일 좀 그만 시켜! 나가! 꺼져! 다 나가아악-!”
황제의 발작이 벌어지고 나서야 부자가 아쉬운 표정으로 나갔다.
사실 어쩌면 진짜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쪽은 아르한이 아닐까.
“제기랄- 예전처럼 머리통 깨고 다닐 때가 그리워질 줄이야.”
험하게 투덜거리는 아르한을 바라보며 알프레드가 보람 어린 미소를 지었다.
말은 저리하지만 슬며시 올라간 입꼬리는 감추지 못하시는 분.
그렇게 투덜거리길 얼마.
“폐하! 폐하! 곧 어전 회의가 있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밖에서 찾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빌어먹을 제국은 황제 없으면 돌아가질 않는 것인가!
순간 알프레드와 눈이 마주쳤고 슬며시 발을 옆으로 틀자.
“폐하?”
알프레드가 성큼 황제의 바짓가랑이를 잡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
지겹다.
이제 좀 내버려 둬!
다시 발작을 시작하기 직전.
뒤통수에 어리는 짙은 그림자에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
“플라잉 해머호?”
“자네가 불렀나?”
“그럴 리가요.”
황궁 하늘을 가린 채 떠오른 비행선 하나.
바알과의 싸움 이후 수리를 맡겨 놓았던 플라잉 해머호가 왜 나타났나 싶을 때.
문득 전에 했던 약속 하나가 떠올랐다.
가족 여행.
언젠가 떠나기로 했었지.
왜일까, 비행선을 보는 순간 당시의 약속이 떠오르는 것은.
아르한의 얼굴에 불안감이 끼었다.
보이는 운명들이 반갑지 않았다.
“폐하! 폐하! 이러다 회의에 늦겠습니다. 어디에 계십니까-!”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사이.
“가 봐야겠어.”
“…따라갈까요.”
알프레드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황제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자네는 여기서 날 대신해서 일 좀 봐. 아무래도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알프레드의 정중한 인사에 이어 황제의 몸이 빛줄기가 되어 플라잉 해머호로 향했다.
마침 벌컥 문이 열리며.
“폐하! 시간 다 됐습니다-.”
막 들이닥친 대신들과 기사들이 황제를 찾았으나.
자리에는 시종장 혼자뿐.
의아해하는 그들을 향해.
“폐하께선 잠시 가족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다들 각자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란 명을 남기셨지요.”
황제에게 시간이 필요함을 알렸고 방금까진 일 시킬 생각에 싱글벙글하던 이들의 얼굴에 염려가 어렸다.
밖에 보인 플라잉 해머호를 보곤 다들 비슷한 생각을 하는 모양.
그중 늙은 대신 하나가 황성을 벗어나는 플라잉 해머호를 바라보며.
“알겠네. 준비하도록 하지.”
“베려 감사합니다.”
“아닐세, 아니야.”
무언가를 준비하겠단 말만 남기곤 자리를 떠났다.
뒤도는 이들의 얼굴에 슬픔이 흘렀다.
* * *
플라잉 해머호에 올라선 뒤.
눈을 뜨자.
“어, 왔냐.”
제일 먼저 살라스가 아는 체를 해 왔다.
눅눅하게 들러붙는 햇빛, 창백한 얼굴과 불그스름한 눈시울.
무언가를 심히 참는 듯 억누른 목소리.
평소를 가장하려 하지만 쉬이 가려지지 않는 마음.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길 잠시.
괜스레 오랜만에 찾은 플라잉 해머호의 내부를 살폈다.
여전히 값비싼 장식이 가득한 가운데 부유하는 먼지 속 변화하는 마나 그래프들이 신비로움을 자아냈으나.
“쓸쓸하군.”
사람 하나 없어 쓸쓸해 보임은 왜일까.
“그냥 다 오지 말라고 했어, 혼자서도 가능하니까. 가족 여행은 처음이잖냐.”
“잘했다.”
“…그래.”
그리 답하는 살라스의 어깨를 두드려 주곤 복도를 걸었다.
사람 하나 없이 조용한 복도가 낯설었다.
은은하게 울리는 진동 소리.
원래 진동이 있었던가.
항상 북적거리는 통에, 싸움 통에 있었던지라 몰랐다.
플라잉 해머호가 이리 넓었구나.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도착한 문 앞.
황족을 위해 마련된 넓은 객실의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뒤에 선 살라스의 호흡이 거칠었다.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
“저 왔습니다-.”
억지로 밝음을 가장하곤 안으로 들어서자.
“폐하, 오셨어요.”
“폐하, 오랜만에 뵈어요.”
나를 반기는 어머니와 유리엘.
그들의 표정도 살라스와 다르지 않았다.
“여기서까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세요. 유리엘, 너도 그냥 오라비라 불러라. 마음이 섭섭하다.”
예를 표하는 그들을 향해 손사래를 치곤.
“아버지, 저 왔습니다.”
커다란 침대에 누운 아버지를 향해 다가갔다.
마른 얼굴, 흐린 눈동자. 그럼에도 입가에 어린 은은한 미소.
“아버지, 여기 개처럼 고생하는 아들 왔어요.”
목소리를 높이고 나서야.
“아르한- 제국의 황제 왔느냐.”
아우구스가 고개를 돌려 아들을 바라보았다.
대관식을 치른 이후, 황제 자리를 물려주자마자 제 일이 모두 끝났다는 듯 찾아온 급격한 노화.
녹염을 쏟아부어 회복시켜 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과거 황후를 물리친 직후, 녹염으로 아버지의 운명을 연장했다 생각했는데.
생명을 붙잡은 건 녹염의 힘이 아닌 그의 선택이었음을.
아들이 끝까지 제 뜻을 관철하길 바라며, 억지로나마 버텨 준 아버지의 뜻.
점점 흐려지는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래요, 떠맡겨 주신 일 때문에 죽어라 고생하는 아들 왔습니다.”
괜히 어리광을 부려 보았다.
빌어먹을.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게 아닌데.
지금만큼은 이러고 싶지 않은데.
아버지를 위로하면 정말 만족하고 떠나 버릴까 봐 못 하겠다.
아들의 그런 두려움을 알았던 탓일까.
마른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은 아버지가.
“이제야 알겠지, 내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일에 파묻혀 있는 모습을 못 봐 아쉬울 정도다.”
일부러 농담을 건넸다.
모두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한낮의 따사로운 햇살이 어려운 때를 견뎠던 전 황제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막혀 오는 목울대를 진정시키는 동안.
“황비.”
“네, 폐하.”
“고생이 많았소.”
“…아닙니다.”
“타국에 와 살아 내느라 힘겨웠겠지. 마지막까지 옆에 남아 준 건 당신뿐이구려.”
“그런 말 마세요. 제국이 옆에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차마 쉬이 나오지 않았는지.
“고마웠소.”
“저도요.”
어색한 감사로 말을 맺었고 황비는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곤 그렁그렁한 미소로 답했다.
다음으로 유리엘에게 남기는 말.
“유리엘, 어린 너를 신경 쓰지 못했구나. 상처가 많았겠구나. 이젠 타국에 가 무거운 중책을 맡았으니, 무어라 위로해야 할지. 언제나 제국이 뒤에 있음을 잊지 말거라. 또한 제국의 황녀로서, 성녀로서 그들을 진심으로 돌보길 바라마.”
“네, 아버지. 그렇게 할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아-.”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떠오르질 않는지 울망거리던 유리엘이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
어린 나이임에도 끝이 다가옴을 느낀 모양.
황비가 눈물을 흘리는 딸을 토닥이는 동안.
다음은 살라스.
“섭섭하냐, 황제가 되지 못해.”
“시원섭섭하죠. 사실 황젯감은 못 되어서요.”
“알아서 다행이다.”
“네?”
인정할 줄은 몰랐는지 입을 벌리는 아들을 향해.
“나 또한 황젯감이 아니었고 황제가 되었다. 지난 생 전부가 고통이었어. 이리 운 좋은 말년을 맞이했지만, 그것 또한 내가 이룬 일은 아니었지.”
“아버지…….”
“사람에겐 맞는 길이 따로 있더구나. 난 네가 황제가 아니라도 나름의 삶과 행복을 찾길 바란다.”
솔직한 고백으로 위로했다.
살라스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사실 때로 고뇌했다.
황제가 되지 못한 황자에게 살아남을 가치는 있는 걸까.
어쩌면 자신은 죽음을 유예당한 것일 뿐, 삶의 의미를 다해 버린 건 아닐까.
정확히 그의 고민을 짚은 말에 살라스의 눈가가 우묵히 그늘졌다.
“모두를 이끌지 않아도 된다. 할 수 있는 만큼 내가 잘하는 것을 해 나가는 것이 인생이더구나. 그러니 살라스, 고민하지 마라. 옆에 선 황제는 네 의무를 도우면 도왔지, 해할 인물이 아니니.”
“네, 제가 할 일을 다하겠습니다.”
그가 울음을 참으며 아버지의 말을 받들었고.
마지막.
“아르한.”
“…네.”
“황제는 할 만하더냐.”
“빌어먹게 재미가 없습니다. 어떻게 견딘 겁니까?”
솔직한 말에 아버지가 쿡쿡 웃었다.
웃음마저도 힘없이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 마음이 더욱 아팠다.
그렇게 웃길 잠깐.
“그냥… 견뎠지.”
* * *
아우구스가 흐려진 눈으로 과거를 회상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후회되는 일이 참 많았다.
본래라면 황제로서 가져야 할 마음가짐, 앞으로 어떤 제국을 만들어 달라 유언을 남겨야겠으나.
“견디기만 했을 뿐, 무언가를 해내진 못했구나.”
아비로서 그럴 면목이 없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다.
몰락하는 제국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던 무능한 자신을 구해 준 것이 지금의 황제 아니던가.
“부끄러울 뿐이다, 나의 무능력함이, 황제로서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던 지난 시간이, 세상에 휩쓸려 떠돌았던 삶이.”
전 황제의 쓸쓸한 고백이 먼지처럼 떠돌았다.
“조금 더 용기가 있었더라면, 조금 더 강했더라면, 하다못해 조금 더 독했더라면……. 조금은 황제로서 마지막을 맞이할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러질 못했을까.”
“쉬운 일이 아니니까요. 감히 누구도 쉽다 말하지 못할 겁니다.”
“넌 해내지 않았느냐.”
“그건-.”
아르한이 잠시 쓴웃음을 지었다.
저도 한 번 실패했었으니까요, 라는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런 아비를 바라보던 아들이.
“폐하, 당신은 언제나 제국의 황제였습니다.”
점점 싸늘해지는 아버지의 손을 잡은 채 말을 이었다.
“새벽이 올 때까지 가장 어두운 밤을 견딘 이였으며, 마침내 성화를 후대에 넘겨준 별과 같은 황제였습니다. 우리가 맞이한 아침과 같이 깨끗한 번영 이전, 짙은 어둠을 홀로 견디었던 황제를 제국은 기억할 것입니다.”
“…….”
아들의 위로에 아버지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그의 숨이 점점 옅어졌다.
더불어 가득했던 후회와 아픔이 사그라들었고 점차 기쁨과 환희, 만족이 깃들었다.
의미 없는 삶은 아니었나 보다.
“졸리구나… 잠시 잠을 청해야겠다…….”
“그러니, 그러니- 편히 잠드십시오. 긴 여행이 될 테니까요.”
아르한의 축축한 목소리가 잠드는 아버지의 눈가 위를 덮었다.
시릴 정도로 맑은 하늘을 떠가는 비행선의 곁, 비가 내리지 않았음에도 선명한 무지개가 떠올랐다.
< 완결 >
< 후기 >
안녕하십니까!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 완결로 찾아뵙게 된 단열입니다!
우선 읽어 주신 독자님들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
21년 11월부터 22년 5월까지 약 7개월가량 연재했네요.
참으로 소중하면서도 쉽지 않은 시간이었습니다.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를 요약하자면.
황제의 대역이었던 인물이 회귀하여 제국을 살리는 이야기.
이렇게 한 줄로 축약할 수 있겠지요.
200화까지의 과정을 보자면 환생 폭군 아르한은 모두를 살리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짜에 불과했던 이가 썩어 빠진 제국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폭군이 부렸던 광기와 패악이 그가 선택한 방법이었고.
운명의 변화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200화 동안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습니다.
물론 가장 정이 든 건 주인공 아르한이겠네요.
때때로 광기는 컨셉이라 말했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사실은 즐겼던 것 같습니다.
그가 뿜어내는 광기와 아름다운 외형을 상상하며 써 내려간 장면들이 많았어요.
북부로 향하는 열차 지붕 위, 홍련의 섬에 도착하여 적야를 펼치던 때, 남부 엘프들을 상대하며 단풍 속을 거닐던 장면 등.
제가 머릿속으로 그렸던 아르한의 모습이 조금은 전달되었으면 했습니다.
시종장 알프레드, 평민 고아 안드레, 마법사단의 골칫덩이 솔.
이 세 인물 또한 처음부터 주인공과 함께했던 인물들이죠.
특히 안드레와 솔은 어느 순간부터 개그캐가 되어 버려 유독 정이 들어 버렸습니다.
원래 안드레는 반역을 도모했던 독하고 날카로운 기사로 그리려 했는데, 트렁크에 탄 순간부터 많은 게 바뀌어 버렸어요.
솔 또한 그림자 마녀로 잔혹하며 어두운 이미지로 그리려 했는데, 어느새 춤추는 가로등이 되어 있더군요.
처음 컨셉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정이 든 캐릭터들입니다.
그들의 행동에 독자님들이 웃어 주실 때 저도 기분이 좋더라고요!
가장 아픈 인물을 꼽으라면 역시 북부 루카르와 노병들이겠네요.
유료화 직전, 많은 고민을 안은 채 썼던 북부 에피소드.
루카르와 노병들의 희생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굳이 죽여야 할 이유가 있는가.
작품에 굳이 비극을 넣어야만 하는가.
다만 동화가 아니기에 그들의 희생이 모든 이들의 번영이 되리라 생각하며, 에피의 끝을 비극이자 새로운 시작으로 맺었습니다.
때때로 결정에 대해 고민을 했습니다만, 마지막 외전을 통해 마음의 짐을 덜었네요.
이번 작품 같은 경우 진행하면서 여러 번의 고비가 있었습니다.
환생 폭군은 살고 싶다, 라는 제목을 정하기 전까지 몇 번의 제목 변경이 있었지요.
그만큼 유입이 저조했고 작품 성장이 더뎠습니다.
이제 와 말하건대 30화가 될 즈음 해당 글을 중단해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30화 이후 성장세를 회복하더니 결국 이리 유료화를 해내었고 완결까지 달려올 수 있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쓰는 건 저였지만, 작품에 생명을 불어넣어 주신 것은 독자님들이었습니다.
아르한의 이야기, 환생한 폭군의 이야기를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독자님들께서 살고 싶었던 폭군을 살리셨습니다.
독자님들께서 눌러 주신 글 하나하나가 어떤 개변 점수보다 어떤 운명 포식보다 소설을 이끄는 힘이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부족한 점 많았으나 재밌는 글 쓰겠다는 마음만은 진심이었습니다.
벌써 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옵니다.
독자님들의 삶에도 파릇한 생명과 짙은 번영이 깃들기를 바라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다음번엔 더 재밌는 작품으로 찾아오겠습니다!
단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