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움직이지도 못할 정도의 애송이 인가?”
은빛의 광채, 인간이 낼 수 없을 것 만 같은 은빛의 기광이다. 마치, 백호의 사나운 눈빛처럼 제현 역시, 은빛의 기광을 뿜어내고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제현의 옷자락으로 무한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부들부들
꼼짝도 못하고 멈춰서 있는 대머리 사내를 보며 싸늘하게 미소를 짓던 제현은 돌연 기운을 거두어들이며, 한걸음 앞으로 다가 섰다.
“한번은 용서 해주마...그만 꺼져라.”
“장난하는 건가? 이건 마도생사투...제 3자는 용납하지 않는다. 아무리 강한 자라도!”
대머리의 음성이 예리해졌다. 그의 말처럼 마도생사투는 제 3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비록 아는 지인이 있다고 한들, 그저 지켜봐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현은 그 무언의 규율을 깨트린 것이다.
주위의 관중들도 약간씩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마도생사투의 역사와 문화는 지옥문화에 뿌리 깊게 자리 잡았다. 그에 따라, 무언의 법규와 무인들에게 있어서 지켜야할 수칙들이 있었던 것이다.
“저년을 놓고 간다면 이 불상사를 덮어 두도록 하지.”
대머리의 대답에는 여전히 음욕과 광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더러운 눈동자로 하윤을 보는 것 하며, 상대방을 설득 할 수 있는 말은 일체 배제하고 있었다. 그 말에 평정심만을 유지하고 있던 마음에 약간의 파동이 생겼다.
“그렇다면 좋다. 네 녀석의 눈과 목을 내놔라. 물러나지.”
제현은 자세를 잡았다. 대머리의 말이 진심이든, 거짓이든, 혹은 단순히 욕망을 채우기 위한 행동이든 죽여 버리면 만사 오케이였다. 지옥에 살면 자연히 생기는 단순한 사고, 상대를 죽이면 끝, 이것이 강자존의 법칙이다.
“뭐?”
대머리는 어이가 없었다. 조용히 끝낼 일을 이정도로 심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눈앞의 꼬마 녀석에게 겁을 먹었다는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그저 방심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녀석의 말투하나하나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발 아래로 두고 있다는 듯이 오만한 행동과 표정, 말투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것이 없었다. 그런 녀석을 보면 꼭 뭉개버리고 싶었다.
“개자식!”
후웅!
대머리는 생각 할 것도 없다는 듯이 무조건 공격을 가해왔다. 녀석의 행동은 모든 것이 무겁고 직선적이었다. 잔상을 일으키며 하나하나가 일격 필살이었다. 얼마나 솔직한지 하나부터 열까지 변칙적인 싸움만 해오던 제현에게는 하품이 나올 정도로 쉬워보였다.
“신입 치고는 제법이다.”
도대체 누가 누구보고 신입이라는 것인지....대머리는 몇 번의 공격이 실패하자 일단 뒤로 물러났다. 상대가 만만하게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녀석의 공격에는 하나하나가 기운이 실려 있어 위험천만 하건만, 제현은 아무런 기운으로 가드하지 않았다.
지잉
붉은빛이 녀석의 주먹을 둘러싸며 엮어졌다. 마치, 권투 글러브와 비슷한 모양새였다. 인파이터, 근 접형 공격을 주로 하는 자 답게, 주먹에 대부분의 내공을 투자하고 있었다.
“하압!”
대머리가 기합을 질렀다. 붉은 권기가 주먹에 넘실거렸다. 다만 눈에 거슬린다는 점이 제현에게 마음에 안 들었다. 녀석의 주먹이 몸에 닿기 전 제현이 빠르게 움직였다.
쉐에엑!
복부로 파고들어오는 강한 기운에 제현은 살짝 발걸음을 옆으로 비틀었다. 그리고는 그 발걸음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대머리의 뒤로 이동 할 수 있었다. 삼류도 펼 칠 수 있는 삼재보(三才步)였다.
고수가 펼친다면 삼류무공도 일류무공이 된다고 했던가? 제현의 발놀림은 예사롭지 않았지만 무공의 내용만큼은 삼류의 것이었다. 기초중의 기초로 대머리를 농락하자 대머리는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날 뭘 로 알고!”
“기초가 가장 중요하지.”
제현은 일체의 기운을 배제시키며 싸우고 있었다. 상대에 대한 최대한의 치욕이다. 녀석은 숨이라도 차는 것인지 말하는 와중에도 몸의 움직임이 떨리고 있었다.
대머리 사내의 무공은 그렇게 유명한 무공은 아니었지만 일류 측에 드는 무공에 속했다. 익히는 자에 따라 위력의 차이가 나지만, 대머리 사내의 무공은 상당하다고 말 할 수 있었다. 지옥의 환경 상, 고수들이 모이기 때문에 약하게 보일 뿐이었다.
“약속대로 네놈의 눈과 목을 취하겠다.”
“이...이런!”
제현은 지체 하지 않고 빠른 손놀림으로 손을 앞으로 뻗었다. 일체의 감정이 실리지 않은 동작이었다. 눈빛은 잔잔한 호수처럼 흔들림이 없었고 손은 우유 빛의 부드러운 느낌이 들건만, 상대는 그 모습에 두려움이 일어났다.
퍽!
제현의 손에서 일어나는 푸른빛의 기운이 순식간에 은빛으로 바뀌어 버렸다. 소수마공의 극성을 뜻했다. 처음에는 푸른빛 다음은 주황에서 점점 붉은 색으로 가다가 끝에는 투명의 극을 나타내는 은빛에 달하는 것이다.
“네놈은 큰 실수를 여러 개 했다.”
기운이 실리지 않은 왼손에 맞고 나가떨어진 녀석에게 무슨 블링크를 사용한 것 같은 움직임으로 그의 코앞에 나타났다. 녀석은 가슴이 아픈 것인지 맞은 곳을 부여잡으며 제현을 경계했다.
“첫째....나를 애송이라고 한 것이다. 둘째, 내 딸아이의 제자를 건드렸다는 것...제일해서는 안 돼는 말을 했다. 나를 죽인다는 것.”
제현은 아직도 가슴을 부여잡으며 독한 눈빛을 뿜어내는 녀석에게 소수마공을 펼쳤다. 지독한 한기의 장에 맞았기 때문에 그녀석의 얼굴은 점점 파리해지며 몸이 얼어버렸다. 제현의 행동하나 하나가 의미가 있었다.
“그 더러운 입부터 열지 못하게 해주마.”
퍽!
“우욱...”
제현의 매운 주먹에 녀석은 피를 토했다. 단 일격에 데미지를 입었기 때문에 다음의 주먹은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다. 더러운 입으로 나 불 거렸기 때문에 제현은 그대로 입을 뭉개버렸다.
그 다음으로 손을...그리고 다리를 차례대로 녀석의 온 몸을 뭉개 버리고 있었다.
지옥에서의 고통은 사람의 인성을 파괴한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도, 진정한 지옥을 경험한다면 악인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몇 백 년을 무간지옥에서 보낸 제현은 이런 일에 거리낌이 없었다. 자신을 나타내면 나타낼수록 상대방이 기어오르지 못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쿠쿠쿡...”
제현은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그 잔인한 행동에 주위의 관객은 물론, 당하고 있는 대머리 역시 온몸을 부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차라리 빨리 죽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순간 대머리는 눈이 점점 어둠속으로 잠기는 것을 느꼈다.
“아악! 눈이...눈이!”
관중에서는 난리가 났다. 자신들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고는 경기장의 중앙에 위치한 제현과 대머리, 그리고 하윤을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 뽑힌 것인지 양쪽의 눈알들은 차가운 경기장에 떨어져 있었다.
제현의 육체 어느 곳에서도 대머리의 피는 묻어 있지 않았다.
“이, 이건!”
“그대로 죽어라. 원망하려거든 자신의 입과 손과 눈을 탓하라!”
제현은 인정사정없었다.
“우, 웃기지마!”
대머리는 분노를 담아 입을 열었지만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고통스러운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온몸이 솜털에 물을 먹인 것처럼 점점 축 쳐져가는 것 같았다.
“아직도 소리칠 기운이 있군.”
지이잉ㅡ
한 손에서 조금씩 생기는 무형검, 내공이 극에 달한다면 사용 할 수 있는 수법이다. 현경의 경지도로 차마 사용 할 수 없을 정도의 내력이 필요하다. 순수한, 검강의 결정체. 검이라는 매개체로써 만들어 낼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제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처럼, 은빛의 휘강이 번쩍였다.
냉마기의 특성답게, 한기가 뿜어지며, 그 존재감을 나타냈다.
“파(破)”
만검의 기초 검술, 파가 사용되었다. 적이 멈춰져 있는 만큼, 공격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이 쉬웠다.
제현은 무형검이 녀석의 머리를 두부 찌르듯이 박아버리고는 기운을 폭사시켰다. 자연히 무형검의 기운이 점이 되어 뭉치며 대머리의 머리를 날려버렸다.
펑!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그리고 주위의 정적! 무형검으로도 모자라 이런, 설명하기 어려운 기술까지 사용하는 무림인은 본적 없었다.
근 500년간, 지옥에는 수많은 고수들이 등장하고 사라졌다. 하지만 이정도로 강한 자는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지금의 지옥 1위도 이 정도는 못할 것이다. 경기장의 중앙이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폭사되어 형체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흡혈마공(吸血魔功).”
제현의 손이 아직 싱싱한 피를 끌어당기며, 양손에 기운이 모여들었다. 직접적인 흡수가 아닌, 내공의 정제였다. 냉기를 사용하는 만큼, 그 피 속에 첨가된, 화기를 제거하는 한편, 마령심법으로 그 기운을 냉기로 바꾼 것이다.
쩌저적!
강한 냉기에 공기는 얼어붙고 있었다. 하지만 제현은 개의치 않는 다는 듯이, 하윤에게 다가갔다.
“꼬마, 기절해 있는 척 해도 소용없다.”
제현의 말처럼 애초부터 녀석은 잠이나, 기절해 있지 않았다. 숨소리에서부터 차이가 났다. 숨소리는 가늘고 고른 한편, 몸을 다친 하윤은 숨이 약간 길었고, 거칠었다. 그 차이로 깨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들어서 알겠지만, 너에게 전수해준 무공은 나의 바탕이 되는 것들이다. 귀찮게...등이나 돌리 거라.”
제현은 기운이 없어 느글거리는 하윤을 보며 기운을 주입했다. 그래봐야, 원기회복과 체력회복이었기 때문에, 내공의 증진은 그렇게 기대 할 수 없었다. 이건, 같은 무공을 사용하는 최소한의 배려다.
“우, 웃기지마. 그런다고 내가.....”
하윤은 그냥 꼬마로 알고 있던 자가, 계급 상으로 높다는 것을 알고, 나이도 상당하다는 것을 알고는 약간 주춤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제현은 살짝 웃으며 회복마법은 물론, 기운을 주입해 몸속의 텅 빈, 기운을 채워 주었다.
우우우우우!!
관중석에서 울리는 목소리가 경기장 구석구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지만 제현은 평온함 그 자체였다. 제현이 한 행동은 결코 지옥에서는 용납 될 수 없는 행동이다.
마도생사투를 끼어 든 것도 모자라. 무인에 대한 예의를 차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알까? 제현으로써는 최대한 바 준 것임을....
“닥쳐라!”
하지만 제현은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 다는 듯이 사자후를 펼치며 관중들의 비난 어린 목소리를 잠재워 버렸다. 강자가 곧 법이다. 이제 이곳에서의 볼일은 끝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문다면 귀찮아질 것이 뻔 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여행
한동안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첫 번째 도시에서 벌어졌던 마도생사투의 일은 기대했던 대로 지옥의 사람들에게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중심에는 당연히 제현과 하윤에게 있었다. 신입으로 알고 있던 제현은 과거 은거고수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졌고, 하윤은 전설로만 전해지던 흡혈지존의 제자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그리고 그 무공을 얻기 위해 많은 무리들이 습격을 하는 등 귀찮은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습격하는 무리 중에서는 당연히 3계인 무림인들이 대부분이었고, 간혹 2계의 검사출신들이 습격하는 등 많은 일이 있었다.
무림인들을 포함한, 전직, 살수, 어쌔신, 용병등, 많은 순위권의 습격 자들이 잔인하게 목숨을 잃었고, 그나마 살아남은 자들은 단전이 파괴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파다했다. 그 이유는 잘 알겠지만, 다시 살아난다면 단전이 복구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옥에서의 비밀이지만, 은연중 제현이 흡혈지존, 본인이라는 소문도 떠돌고 있었다. 마지막에 펼쳤던, 흡혈마공이 그 원인이다. 대 놓고 그를 흡혈지존이라고 칭하는 자들은 없었지만 짐작이나마 이미 눈치를 채고 있었다.
어쨌든 이 일련의 일들이 모두 지옥에 속해있는 자들에게는 큰 파란을 불러 일으켰다. 각각의 문파들이 들고 일어나며, 연합을 하는 등, 많은 무리들이 제현과 하윤을 쫒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당사자들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이 여유롭게 여행을 즐기고 있었다.
“아....아아아아...나도, 할아버지가 생긴 건가? 호호. 그런데 귀찮게 왜, 습격이나 하고 짜증나.”
하윤의 불평어린 목소리와 장난기 가득한 말에 제현은 침묵을 고수했다. 일주일간의 고심 끝에 얻어낸 대답인 듯했다. 여전히 예의라고는 눈곱만치도 없는 꼬마였다. 알고 보니, 녀석은 하은의 딸이었다.
어떻게 1계로 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에서 이런 딸을 낳아 버렸으니, 골치 꾀나 섞였을 것이다.
“왜 거짓말 했느냐...? 처음에는 학생 때 만났다고 하지 않았느냐. 딸아이는 조용하고 말이라도 잘 들었지만, 너란 녀석은....예의가 있는 것이냐? 엄연히 네 녀석의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시끄러워. 말이 그렇다는 거야. 할아버지는 무슨...딸자식 버려두고 어디 갔나 했더니, 이곳에서 짱 박혀 있었 구만.”
제현의 말에 정색하며 하윤은 눈살을 찌푸렸다. 딸아이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르는 것은 대략 다섯 살 때의 모습이니, 많이 변했을 것이다. 아마, 크면서 그렇게 교육을 받은 것인지, 아버지에 대한 예의는 가르치지 않았던 모양이다.
“허허....인과응보(因果應報)인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가족들이 없어지고 나서야, 소중함을 알아챘으니, 말 다한 것이다. 제현은 씁쓸한 마음으로 하윤을 쳐다봤다. 하은과 비슷한 외모로, 처음부터 약간 친숙함은 있었지만 설마 딸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2대째 지옥에서 만나다니,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다.
“엄마가 얼마나 찾았는지 알기나해?”
“.......”
늘 이런 식이다. 일주일간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제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마 뭐라고 화내기도 그랬다. 이미, 자신의 혈육이라는 것을 안 이상, 어떻게 뭐라고 화를 내도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고 마무가내로 내버려두지는 않았다. 하윤의 말처럼, 처음 보는 사이, 남남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지금...미행하는 자가 있다. 살기를 감추는 것이 숙련된 자다.”
“뭐?!”
“평범하게 행동하도록.”
제현은 일상대화처럼 중저음으로 하윤에게 말했다. 900년이나 되는 동안, 많은 전투를 격은 만큼 모든 상황의 대처 능력이 많이 향상되었다. 적을 속이는 것이야 말로, 뛰어난 전술이라는 것을 잘 아는 제현으로써는 하윤에게 말할 필요도 없건만, 약간의 긴장감을 주기 위해 일부러 하윤에게 정보를 흘렸다.
그로부터 제현과 하윤은 조금씩 대화를 줄였다. 대화를 하는 것부터 부자연스러우니 자연히 대화를 끊어 버리는 것으로 평범했기 때문이다. 평소부터 말수가 별로 없는 제현으로써는 이것이 제일 편했다.
“여기서 흩어진다. 적당히 먼 거리를 가고 나서 기척을 죽이며 나를 따라 오도록.”
“무슨 소리야....같이 싸우는 것이...!”
“아니, 혼자가 편하다. 애초부터 목적은 나의 무공...”
제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하윤과 거리를 벌렸다. 그렇게 하윤의 모습이 멀어 질 때 까지 이동해온 제현은 자리를 잡고 섰다. 제현의 예측대로 살수들은 제현을 쫒고 있었다. 왜소한 외모를 보고, 쉬운 상대라고 생각한 것인지, 모습을 서서히 드러냈다.
“......”
“흡혈마공을 내놔라. 그렇다면 목숨은 부지 할 수 있게 해주마.”
지금 제현의 심정은 평온함 그 자체다. 그저 오후에 운동하고 음료를 마시는 기분이라고 할까? 긴장감 따위는 없었다. 적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혹시 내 심정을 아는 가? 어리석은 자들이여.”
“하하하...벌써 두려움이 이는 가?”
“나는 그저, 오후의 차를 마시는 기분이다. 극히 편안한 느낌. 애초부터 너희들, 아니, 지옥의 누구도 나를 긴장하게 한 자는 없다. 있다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지.”
제현은 살벌하게 살기를 뿜어대는 살수들과 2계의 존재들을 보며, 앞으로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산책이라도 나온 듯이, 사뿐 거리는 발걸음에 이곳에 있는 존재들은 어이가 없는 듯이 무기를 고쳐 쥐고 있었다.
“몸 어딘가 잘려 나가야 정신 차리겠군. 쳐라!”
검은 물결, 하지만 제현의 감상은 그저 하늘을 날아다니는, 하루살이에 불과했다. 온몸을 옥좌해오는 저주와 속박 마법들이 제현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그리고 하늘을 가득 메우는 검은 물결에 제현은 그저 가만히 그들을 응시했다.
“말 안했던가? 나에게는 지금의 상황이 지극히 평범하다는 것을.....”
제현은 간단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검은 물결은 파도가 갈리듯이 길을 열며 흩어 져 버렸다. 간단한 손짓 하나에 제현의 절기가 뿜어졌다. 은빛의 선이 천천히 그려지며 멀리 떨어져 있는 마법사에게 날아들었다.
“로즈 바디(Lose Body)”
마법사들의 몸이 옥좌 되며 더욱 조여 졌다. 그리고 곧, 그들의 몸이 분해가 되기 시작하며, 육신의 일부가 지상으로 떨어지며, 붉은 피가 대지에 뿌려졌다. 재차 돌진해오는 살수들을 보며 왼손을 살짝 내저었다. 만검의 무살(霧殺), 싸늘한 예기 마저 느껴지지 않는 수도에서 무자비 하게 살수들의 육신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린다.
팔, 다리, 몸통, 어느 한곳 성한 곳이 없다. 간결한 초식이건만 나타난 무력만으로는 기본초식인 살을 뛰어넘는 화려함을 보여 주고 있다.
“으.....”
처음부터 나불대던 녀석은 몸이 온전하게 살아 있었다. 나머지는 싸늘한 시체가 되며 대지를 더럽히고 있었다. 기척을 죽이며 지켜보고 있던 하윤은 제현의 무위에 놀라워하며, 처음 보는 무공에 눈을 빛냈다. 하지만 곧, 많은 피비린내에, 미간을 좁히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배후가 누군가는 궁금하지 않다. 또한,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나의 마지막 여행을 방해하지마라! 그리고 전해라. 흡혈지존이 다시 돌아왔노라고.”
“으으으...”
제현은 그 말을 내 뱉고는 처음으로 그 자리에서 움직였다. 그의 주위에는 마치 마법진이라고 그려 져있는 듯이, 그 자리를 중심으로 피의 마법진이 그려졌다. 흡혈마공이었다. 흡수의 수법으로 피의 줄기를 이용해 마법진을 그린 것이다.
“리커버리(Ricovery)다....가서전해라.”
붉은 핏빛의 마법진이 움직이며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살수의 온 몸을 훑고 지나갔다. 그의 몸 구석구석, 자잘한 상처가 사라져 가며, 곧 몸을 일으키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나와...왜, 이런 모습이 무서운가?”
“아니!”
제현은 미소를 지으며, 하윤을 불렀다. 그 평온한 모습에 약간 흠칫거리는 하윤을 보며 질문을 했지만 곧, 하윤은 정신을 차리고는 부정했다. 차마, 그 평온한 모습이 두렵다고 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옥이란 이런 것이지. 죽고 죽이는, 뺏고 빼앗는 것이다. 지옥은 또 다른 차원이라고 볼 수 있지. 하나의 세계. 어쩌면 살아 있을 때가 지옥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제현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는 다음 목적지인, 혈교가 있던 곳으로 몸을 틀었다. 이미 마도맹이 있던 곳을 보고 난 뒤이기 때문에 혈교를 보는 것으로 여행은 종결 될 것이다.
혈교와 마신군의 전쟁터를 구경하고 마교와 마도맹의 전쟁터를 보는 것으로 제현은 여행은 끝 날 것이다.
채, 한 달도 남지 않은 시간을 느끼며, 생각도 없던 아쉬움과 허탈감이 떠올랐다.
900년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