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0화 (130/269)

공작가의 정식 저택에서 조금씩 멀어져갔다. 하지만, 작은 별장 같은 것이 눈에 들어오자, 케실리온은 살짝 눈을 빛냈다. 이곳이 자신이 일할 곳이라는 것을 생각하자. 마음이 쿵쾅 거렸기 때문이다.

하얀 백발과 하얀 수염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케실리온은 크라우스의 허리 정도 밖에 안 되는 키를 가지고 있었지만 집사의 걸음에 맞추기 위해, 빠르게 발을 놀렸다. 가는 곳곳 마다, 예쁜 꽃들이 만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점점 별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전체 적인 색이 화이트칼라를 띠고 있었기 때문에 깨끗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주위를 꽉 메운 꽃들로 인해, 절로 기분이 좋아지게 만드는 별채였다.

“정식으로 소개하지, 대 저택을 총괄하는 공작가의 집사 크라우스다.”

“.......”

케실리온은 살짝 긴장했지만, 집사의 위엄에 꿀리지 않게 당당히 가슴을 폈다. 간만에 나온 행동이었다. 그간 많은 고통으로 마음의 문이 닫혀 있었지만 지금의 풍경으로 인해 살짝 풀리는 것을 느꼈다.

“너의 일은 이 별채의 시종이 되는 것이다. 한마디로 집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네가 이곳의 유일한 시종이 될 테니까.”

“예...?”

케실리온은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흑발과 흑안이 어우러진, 귀염틱 한 모습과 별채가 잘 어울렸다. 공작가에는 총 저택과 몇 개의 별채가 있는데, 그곳마다 관리하는 집사들이 있다. 물론, 집사라고 부르기에는 좀 그렇지만 일단 집사로 통하고 있었다.

“어린 꼬마에게 이런 일이 힘들지 모르겠지만, 공작님께서 부탁하신 일이니, 네가 이곳을 관리해라.”

집사 크라우스의 말에 케실리온은 입만 뻥긋 거렸다. 어떻게 이런 큰 별채를 관리한다는 말인가. 그것도 혼자서 이건 불가능을 넘어선 일이었다. 공작의 부탁이 이런 것이었다면 그런 호의는 받지 않았을 지도 모르지만, 아직 어린 케실리온은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이곳은 사용한지 상당히 오래됐기 때문에 일이 많을 것이다. 그럼.”

대 저택의 집사는 케시리온을 골탕 먹일 생각인지, 살짝 미소를 띠며 별채에서 멀어져 갔다. 주위를 자세히 보니, 가꾸어지지 않고 정리 되지 않은 풀들이며,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있었다. 게다가, 별채 역시, 오랜 세월의 흔적인 것인지, 약간 엉성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마냥 아름답기만 하던 별채의 모습이 아니었다. 살짝 불안해지기 시작한 케실리온은 무거운 발걸음을 별채의 문으로 이동시켰다.

“어떻게...혼자서..!”

별채 안으로 들어선 케실리온은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먼지가 수북이 쌓인 바닥과 가구들, 오랜 시간을 환기 시키지 않은 것인지 쾌쾌한 냄새가 풍겨졌다. 아마, 이건 대 집사의 농간일 것이다.

이렇게 큰 별채를 혼자 관리하는 것은 숙달된 시종도 힘든 일이었다. 하물며, 작디작은 꼬마가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끈..지끈

지끈거리는 머리를 살짝 두드린 케실리온은 이층으로 된 별채의 문이란 문을 모두 열어젖혔다. 우선 탁한 공기를 제거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은 보폭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케실리온의 발걸음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걸어가는 내내, 몸을 속박하고 있는 쇠사슬이 거슬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익숙해졌다는 듯이 일정한 패턴으로 이층과 일층을 왔다 갔다 하며, 모든 문을 열수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별채였으나, 상당히 넓은 크기를 자랑하고 있는 곳이었다. 아마,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보자면 크겠지만 어른들이 본다면 보통수준으로 보일 것이다. 물론, 그 대 집사에게 한해서겠지만 말이다.

“헉...헉, 힘들다.”

한참을 분주하게 움직인 끝에 별채의 문을 다 열어젖힐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먼지가 많은 탓에 작은 움직임에도 많은 먼지들이 하늘로 비상하기 시작했다.

“켁...콜록!”

케실리온의 눈과 코에서 액체들이 쏟아지며,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대 집사의 말처럼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것인지, 먼지들이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그 먼지들 때문에 접근도 어려워 청소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먼지의 고통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밖으로 뛰쳐나간 케시리온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좁힌다고 해서, 무서운 표정이 나올 리가 없었다. 되려, 귀여운 표정을 지으며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이 커다란 집을 혼자서 청소하는 것은 하루 이틀로 힘들 것 같았다. 게다가, 노동이라고 해본 것이 어머니를 따라, 좁은 집의 문을 여는 것과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바닥을 닦는 일만 해왔으니, 얼마나 귀하게 자라온 것인지 잘 알 수 있었다.

아무리,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자랐다고는 하지만, 귀하게 자란 만큼 세상물정은 물론, 힘든 일을 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었다. 노예상인들에게 잡히면서 세상이 얼마나 더러운 것이며, 위험한 것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휴...”

살짝 한숨을 내쉰 케실리온은 눈앞에 보이는 별채가 이 순간만큼은 감옥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미 더러웠지만 더러워진 손바닥을 보며, 주먹을 살짝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성내의 하천 같은 곳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웬만한 귀족 가에는 마법을 이용한 우물을 사용하는데, 깨끗한 지하수를 마법을 이용해 끌어 올리는 원리였다. 하물며, 귀족중의 귀족인 공작가에는 그런 시설이 구비되어 있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을 잘 모르는 케실리온은 흘러가는 하천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먼지가 쌓인 별채를 청소하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물을 구해야 했기 때문에 케실리온은 별채에서 벗어나 모험(?)을 시작하기 시작했다.

찰랑...

발목에서 들려오는 청명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발목을 휘감고 있는 은색의 체인은 케실리온의 발소리에 맞추어서 들리는 소리였다. 별채에서 점점 멀어지는 소리에 상큼한 바람은 케실리온의 머리칼을 휘날렸다.

커다란 성의 웅장함에 입을 벌리기도 하고, 간간히 보이는 신기한 것들로 인해 정신이 하나도 없어졌다. 지금껏 이런 신기한 곳은 처음이었다. 대 집사와 왔던 길을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눈에 띠기 시작하자, 케실리온은 약간 긴장했다.

어느 순간에서 부턴가, 사람에 대한 불신이 서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나온 행동이었다. 그렇다고 무서운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스쳐지나가는 사람을 힐끔 거리며 올려다봤다.

꼬르륵...

사람들을 따라 걸어가다 보니, 어디가 어딘지 감히 잡히지 않았다. 케실리온으로 써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배까지 살짝 고프니,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은 심정이다.

때마침, 케실리온의 모습을 본, 한 시녀가 사푼거리며 다가왔다. 브라운계열의 갈색머리였다. 시녀 복을 단정하게 입은 모습에 살짝 고개를 숙인 케실리온이 입을 열기 위해 얼굴을 들어 올렸지만 시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머? 귀여운 아이구나. 무슨 일이니?”

“저기....”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는 시녀의 행동에 케실리온은 약간 얼굴을 붉혔지만 자신의 일에 대해서 생각하며 머리를 살짝 흔들었다.

“저기...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이 어디죠? 별채에 필요한데...”

“아...네가 이번에 왔다던 아이구나.”

시녀는 케실리온이 귀엽다는 듯이 살짝 웃으며 손가락을 어딘가로 가리켰다. 시녀의 말을 들어보니, 이곳에서 물을 구할 수 있는 곳은 의외로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선, 성내의 우물이라는 곳에서 구할 수 있었으며, 저택 내의 워터 로드(Water Road)라는 장치로 물을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머...힘들겠다. 혼자서 별채를 담당하다니...”

시녀는 자신의 일인 마냥, 케실리온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고는 어디론가 뛰어가 버렸다. 아마, 자신의 일이 생각 난 듯 한 행동이었다.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본 케실리온은 몸을 틀었다.

워터 로드라는 것이 별채 쪽에도 하나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는 그곳에서 물을 받아 쓸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올 때는 몰랐지만 이곳에 거대한 공작가라는 사실을 생각하고는 살짝 몸을 떨었다.

돌아 가야할 길을 몰랐기 때문이다. 정처 없이 떠돌다 이곳에 온 것이기 때문에 어디가 어딘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오늘 안으로 별채로 돌아가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찰랑...

다시 정처 없이 움직이기 시작한 케실리온은 얼마가지 못해 배를 움켜쥐며, 괴로운 듯이 신음을 토해냈다.

“윽...배고파.”

공작령으로 오기 전에 포식을 했지만 성장하는 어린이로써는 언제가 배가 고프기 마련이다. 하물며, 대 집사의 안내로 별채에서의 생활을 시작한지 대략 반나절, 그동안 아무것도 못 먹었기 때문에 연신 배는 고프다고 아우성을 질러대고 있었다.

배고픔에 고통을 호소하던 케실리온의 후각에 향긋한 냄새가 전해졌다. 어느새 그 냄새에 취한 케실리온은 입가에 침이 살짝 고이며, 그곳을 향해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무의식 적으로 나온 행동이었다.

게다가, 공작이 오는 내내, 말하지 않았던가. 자신은 고용인이다. 고용인다. 그렇기 때문에 배고프면서 일할 필요가 없다는 말을 들었다. 고로, 케실리온은 배부를 권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 억지스런 생각이 미치자, 케실리온은 그 향기를 쫒아 조금씩 걸음을 옮겼다. 먼 거리가 아니었던지, 꽃으로 만발한 곳의 가운에,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심에는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처음 보는 자신의 또래에 눈길이 갔지만, 잘 차려진 음식과 이상한 물을 보자, 케실리온은 더 이상 생각을 하지 않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공녀, 루시아

“흑발에 흑안? 누구지....?”

오후의 티타임을 즐기고 있던 루시아의 시야에 자신의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아이는 기다랗다 매끄러운 흑발이 햇빛에 반사되어 신비로운 느낌을 주고 있었다.

어디가 아픈 것인지 멍한 표정으로 이곳을 보는 것이 쓸어질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의 얼굴을 보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눈, 코, 입이 매우 절묘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이목구비가 어린 나이임에도 예뻤다.

“루시아님, 이번에 들어왔다던, 하프 드래곤입니다.”

“드래곤? 동화책에 나오던 악당 말이야? 렌?”

“호호...루시아님도 참. 저기 보이는 소녀는 인간과 드래곤의 혼혈이랍니다.”

옆에서 시중을 들고 있던 여성이 살짝 찡긋거리는 눈을 뜨며, 루시아의 찻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루시아에게 하프 드래곤에 대해 설명하고는 찻잔에 붉은 빛이 도는 차를 루시아에게 건네고는 멀리서 걸어오는 소녀(?)에게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다가갔다.

“어머, 네가 그 유명한 케실리온이라는 아이구나?”

“아...?”

렌이라는 시녀는 휘청거리며 다가오는 케실리온의 손을 꼭 잡고는 루시아에게로 인도했다. 루시아의 옆에는 자신의 또래와 비슷한 여자 시녀가 루시아와 담소를 나누며 웃고 있었다.

“루시아님, 이 아이가 케실리온이라는 아이입니다.”

“너 예쁘게 생겼구나. 반가워 난 루시아 넌?”

렌의 소개에 화사하게 웃으며 케실리온을 반긴 루시아는 자신을 소개하고 있었다. 뭐가 뭔지 모르는 케실리온으로써는 입을 뻥긋거리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지만 그것도 귀여운 것인지 렌이 케실리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는 케실리온....”

꼬르륵

배가 고픈 것인지 온몸에 힘이 쫙 빠지고 있었다. 향긋한 냄새가 케실리온의 코 속으로 들어가 미각을 자극하니, 절로 침이 입에 고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루시아는 웃긴 것인지 옆에 앉아 있던 다른 시녀와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라나, 먹을 거라도 좀 주렴.”

“네, 호호호”

꼬르륵 거리는 소리에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루시아와 그 시녀들은 케실리온에게 간단한 쿠키와 차를 건넸다. 처음 보는 음식에 약간 움찔한 케실리온은 손을 살짝 들어 올리고는 쿠키로 손을 뻗었다.

“맛있다...이런 건 처음 먹어봐.”

처음 먹어보는 음식이었지만, 케실리온은 거리낌 없이 그 쿠키를 먹었다. 얼마나 배가 고팠던지, 뜨거운 차를 입에 털어 넣고는 쿠키를 주워 먹기 바빴다. 한참을 주워 먹던 케실리온은 톡 쏘는 시선에 먹던 것을 중지하고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아...죄송합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중앙에 있는 여자아이의 모습에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옷차림도 예사롭지 않았고, 하녀를 거느린 것을 보면, 높은 자리에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은 이곳의 고용인이었기 때문에 높은 사람에게는 존댓말을 써야 한다는 집사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너 재미있는 녀석이구나.”

“루시아님! 녀석이라니요. 그런 천박한 말씀을...루시아님은 공작가의 공녀이십니다.”

“렌!”

루시아의 말에 호들갑을 떨는 렌의 모습에 루시아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늘 있는 일인지, 라나라는 하녀는 케실리온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상당히 쾌활한 주인 인 것 같았다.

“저는 공작 각하에게 고용된 케실리온입니다. 죄송합니다.”

케실리온은 공작가의 공녀라는 말에, 집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공작에게는 외동딸이 있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눈앞에 있는 존재가, 공작가의 유일 무일한, 공작 각하의 외동딸이라는 생각에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찰랑~

쇠사슬이 뒤엉키며 케실리온은 뒤로 넘어졌다. 예전부터 생각한 것이었지만, 너무 거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려니 하고 그대로 다니다 보니, 익숙해졌지만 뒤로 움직이는 것은 불편했다.

“아...”

“괜찮아?”

뒤로 넘어진 충격에 살짝 미간을 구긴 케실리온은 땅을 짚고 일어나려했다. 그때, 고사리 같은 손이 케실리온의 눈앞에 들어오자, 절로 시선이 올라갔다. 푸른빛이 감도는 드레스를 입은 루시아였다.

그녀는 살짝 허리를 굽히며 케실리온의 손을 쥐고는 일으켜 세웠다. 물론, 렌이라는 메이드는 손이 더러워진다는 말을 하고는 손수건으로 루시아의 손바닥을 닦고는 옆에 대기했다.

“어딜 가려고 그래? 이야기나 좀 하면서 같이 놀자.”

“저 아이는 고용된 아이입니다. 루시아님, 고용된 자들은 각자 맞은 바 일이 있는 법입니다.”

루시아의 말에 당황해 하던 케실리온은 렌이라는 하녀의 말에 구원을 받았다. 지체 높은 귀족이랑, 노예인 자신과 논다는 것은 불가능이었다. 어떻게 되었든 간에 케실리온은 몸을 일으켰다.

“저는 고용인,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물론, 오늘이 처음이라 모르는 것이 많지만.”

케실리온은 그 말을 하고는 루시아와의 거리를 벌렸다. 속으로 여러 가지의 생각이 교차했지만, 집사가 했던 말이 모두 떠올랐기 때문이다. 고용인과 고용주는 결코 어울릴수 없다는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때 집사가 했던 말은 공작 각하와의 관계는 케실리온과 적용되지 않는 다는 뜻이었지만, 케실리온으로써는 이런 상황을 놓고 하는 말 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어린 나이인 만큼 순진하기 짝이 없었다.

“루시아님, 저는 가보겠습니다. 별채에 할 일이 많아서.”

케실리온은 렌의 눈짓에 몸을 돌리고는 정처 없이 어딘가로 걸음을 옮겼다. 이곳이 어딘지도 잘 몰랐지만 가다가 보면, 자신이 가야할 곳이 나온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렌의 말이 고마웠다.

결코 자신은 그 누구도 친구를 삼을 수 없다는 것을 상기 시킨 것이다. 자신은 노예요, 하프 드래곤이다. 드래곤은 신의 분노를 받은 종족, 게다가, 자신은 반쪽이지만 저주 받은 종족의 피를 이었다.

“야! 너 너무 건방진 거 아니야! 감히 고용인 따위가.”

멀리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케실리온은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저절로 시선이 돌아갔다. 멀리서 소리치는 루시아의 모습이 보였다.

“나의 말을 무시해? 그러고도 네가 편안하게 이곳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귀족가의 공녀라고 보기 힘든 모습이다. 갑작스럽게 변한, 공녀의 모습에 두 하녀는 물론, 케실리온까지 약간 당황해 하며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두 하녀는 고개를 설래, 설래 흔들고는 빨리 가라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케실리온은 빠르게 그곳에서 벗어 날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달린 끝에야 공작가의 변방에 위치한 별채에 도착했지만 이미, 시간은 흘러 밤이 된 후였다. 

*          *          *

“아가씨! 그러니 아카데미에서도 놀림을 받는 것입니다. 귀족가인 만큼 여성스럽게 행동하셔야죠.”

“씩...씩, 나도 잘하고 싶은데 저 녀석이 나를 무시하잖아!”

렌과 라나는 울 듯 한 표정으로 루시아의 옷매무세와 준비했던 찻잔을 챙기고는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이미, 태양은 기울어지며, 밤이 찾아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아까 그 녀석, 아버지께 부탁해서 달라고 해야겠어. 일이 좋으면 죽도록 일을 시켜야지!”

루시아는 아까, 건방지게 굴던, 녀석이 떠오르자, 절로 화가 났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스리며 중얼거렸다.

“아...그런데 그 녀석, 여자?”

“아뇨, 루시아님, 16세가 되기 전에는 남자 여자 구분이 없답니다. 성격과 특성에 따라 변하겠지요. 라나, 아가씨를 모시고 가세요. 저는 단장님을 뵈러 가겠습니다.”

루시아의 말에 살짝 생각한다는 표정으로 있던 렌은 자신이 아는 대로 이야기를 했다. 물론, 라나도 놀라워하는 표정에 머리를 쓸어 넘겨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사실, 렌은 기사단의 일원으로 공녀를 호위하는 기사였다. 공작가의 유일한 여성 기사로써 공녀를 호위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검술도 상당히 뛰어났기 때문에 공녀의 호위로는 적격이었기 때문이다.

“칫! 아무튼 그 녀석, 단단히 혼내 줄 거야.”

루시아는 분이 덜 풀렸다는 듯이, 땅을 걷어차고는 공작가의 대 저택으로 들어가 버렸다. 당황스런 표정을 짓던 렌은 멀리 사라져간, 케실리온을 살짝 걱정했다.

공녀, 루시아

“다시!”

너무 조용하던 별채에서 호통소리가 들려온다. 흰 백발이 가득한 중년이 창문가에 손을 가져다 대며, 살짝 손을 창틀에 가져다 한번 쭉 긋고는 손가락을 눈높이로 들어올렸다. 작은 먼지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꼼꼼한 모습을 보였다.

“먼지가 있잖아! 다시! 바닥에 누런 때는 뭐야! 전부 다시!”

크라우스 집사의 호통소리가 별채에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꾸지람을 듣는 아이는 열심히 걸레질을 하며, 구석구석 다시 청소를 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크라우스는 등을 돌렸다.

집사 크라우스의 시선에는 열심히 청소를 하고 있는 아이와 비슷한 키에 같은 흑발, 흑안을 가진 소녀였다. 그 소녀는 눈을 찡긋하며, 엄지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잘했어, 집사! 저 녀석은 더 굴려야해.”

“당연한 처사입니다. 아가씨. 신입인 만큼 저 정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니지요. 안 그렇습니까. 렌경, 라나양?”

크라우스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루시아의 뒤에 대기하고 있는 호위기사 렌경과 하녀 라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 둘의 표정은 약간 안쓰럽다는 듯이 케실리온을 보고는 옆으로 살짝 돌리며 긍정을 표했다.

“호호..뭐, 그렇지요. 집사님”

“호호.”

두 여성의 말에 만족한다는 주름이 접힌, 입가를 쫙 펴며, 케실리온에게 시선을 던졌다. 열심히 바닥을 닦는 그의 모습에 약간 만족했던지, 콧수염을 살짝 비틀었다.

“빨리 움직여라, 케실리온! 아직 할 일이 많다. 청결을 유지 하는 것도 집사의 임무! 청소하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나!”

칭찬에 인색한 것인지, 잘하고 있는 케실리온을 더 닦달했다. 이런 일도 벌써 일주일에 달하고 있었다. 물론, 오늘부터 공녀 루시아가 이곳에서 생활하게 된다는 것을 안 것도 일주일이나 흘렀다.

“예, 예!”

차랑~

바닥에 질질 끌리는 쇠사슬의 소리에 맞춰 케실리온은 착실히 얼룩진 바닥을 깨끗이 청소해 나갔다. 케실리온으로 써는 이정도 청소했으면, 별채가 반짝이는 듯이 깨끗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인지 공녀의 압박과 집사의 압박에 못이겨, 이렇게 일주일이나 청소만 죽어라 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참을 수 없는 것은, 공녀의 외침이다.

“케실리온! 빨리 빨리 못 움직여?”

예의바르고, 남을 배려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공녀인줄 알았다. 하지만 이게 웬일인가? 남을 부려 먹으로 닦달하는 것이 일인 그녀였다. 그에 비해, 호위기사 렌경과 하녀 라나는 천사나 다름없었다.

“아가씨, 케실리온도 쉬면서...”

“안 돼! 저 정도도 못해서야, 별채의 집사라고 할 수 있나!”

땀을 뻘뻘 흘리며 청소를 하는 케실리온의 모습에 렌경은 살짝 걱정하며 루시아를 설득했지만 고집이 센 루시아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하지만 구원의 손길도 많아지면 그 뜻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루시아와 동갑인, 하녀 라나가 간곡하게 청을 올렸다.

“루시아 아가씨, 점심 때되 되었는데, 케실리온도 식사는 해야지요.”

“흠...역시 그래야겠지?”

케실리온은 지금 이 순간, 악녀 루시아가 천사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눈빛으로 루시아를 쳐다본 케실리온은 뒤쪽에서 싱긋 웃는 라나를 보며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역시, 라나는 둘도 없는 구원자였다.

“마음에 안 들어...너! 바닥 청소 다 하고 밥 먹어! 흥!”

케실리온의 시선을 알아차렸던지, 루시아는 돌연 안면을 구기고는 집사와 하녀, 호위기사 렌경을 이끌고 별채에 딸려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케실리온이 2층의 복도를 열심히 닦고 있었다면, 그들은 1층에 있는 식당에서 열심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또각..또각.

루시아의 구두마찰음이 점점 멀어지자. 케실리온은 열심히 닦던 걸레를 멀리 내팽게 쳐버렸다. 이런 치욕은 많이 당해봤지만, 오늘처럼 서러운 적은 처음이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청소와 빨래, 각종 노동으로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했건만, 이대로라면 점심도 물 건너가는 것 같았다. 케실리온에게는 식사가 유일한 낙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주일 전부터 이런 날의 연속이었다.

“아...악녀 같은...”

멀리 내팽게 치진 걸레를 보며 우울한 표정을 짓던 케실리온은 절망적으로 넓은 복도를 보며, 원망어린 듯이 넓은 별채를 저주했다. 작은 몸에 고사리 같은 손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저주스러웠다.

하지만, 이제 반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멀리 내팽게 쳐진 걸레를 주워들고는 물에 더러워진 걸레를 잠수시켰다. 익숙하다는 듯이, 걸레를 적시고는 힘껏 걸래를 비틀었다.

쫙!

양팔에 힘이 들어가자, 자연히 걸레는 눈물 같은 물을 토해내며, 물을 담아둔 양동이로 떨어졌다. 양동이로 수직 낙하하는 물방울들이 튀며 얼굴을 더럽혔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빨리 이 지긋한 청소를 끝내고 싶었다. 

“간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걸레의 질주를 시작했다. 물기가 가득한 곳이라, 미끄러지기 일쑤였지만 조금씩이지만, 복도가 깨끗해지는 것이 조금씩 보였다. 수십번을 왔다갔다를 반복하자,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하아..하아..”

숨이 차오를 때면, 이상한 숨쉬기를 하는데, 그것을 시작하며,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노예의 마을에서부터 시작된 이 숨쉬기에 점점 정신이 맑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눈이 좋아 진 것인지, 먼 거리도 잘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몸의 활력까지 주니, 일석이조인 셈이었다. 평소 숨 쉬던 방법에서 벗어나, 일정한 패턴으로 들이마시며, 숨을 내 뱉으니 온 몸에서 활력이 솟는 것 같았다. 한참을 이상한 숨쉬기를 반복했을 까. 땀이 마르며, 온몸에서 힘이 솟아났다.

“좋아!”

매일 같이 힘든 청소를 하니, 자연히 체력도 좋아졌고 과거에 대한 사념도 줄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토록 더럽기만 하던, 별채도 점점 깨끗해지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쭈우욱!

툭..

몇 차례 걸래질을 반복했을 까. 누군가의 발치에 걸레가 걸려버렸다. 그 악독한 악녀의 발이었다면, 호통은 물론, 점심까지 없으리라. 그런 생각이 들자, 온몸이 저절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다른 곳을 향해 걸레질을 시작했다. 일단 도망이 우선이다.

“어머, 케실리온. 열심히 하는 구나. 힘내!”

뒤쪽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라나였다. 밝고 명랑한 그녀는 케실리온의 일을 도와주며, 배고픈 케실리온에게 몰래 음식도 가져다주는 착한 아이였다.

“라나! 놀랬잖아. 나는 또, 루시아 아가씨인줄...휴.”

“호호..자, 점심이야.”

무릎을 굽히며, 바닥을 닦고 있던, 케실리온은 허리를 펴며, 몸을 일으켰다. 라나가 빵을 가져온 것을 본 것이다. 아마, 아가씨 몰래 가져다 준 것이리라.

“빨리 먹어야지. 혹시 아가씨라도 본다면...으으”

예전에 라나가 가져다 준 빵을 먹다 걸린 적이 있었다. 그때 된통 혼났기 때문에 악녀 루시아 앞에서는 결코 빵을 먹을 수 없었다.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탐색하던 케실리온은 안심했다는 듯이 빵을 받아 들었다.

그동안 케실리온은 밝은 성격을 가질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대화를 통해 세상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가장 문제라면, 보통 사람과 다르게 먹는 양이 많다는 것! 그리고 악녀 루시아 뿐이었다.

루시아는 그렇다 치고, 언제나 배고픈 케실리온은 굶는 것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허겁지겁!

후다닥, 점심을 빵으로 때운, 케실리온은 라나를 보며 헤프게 웃었다. 찰랑거리던 머리칼은 살짝 입에 걸리며, 얼굴은 걸레질로 인해 튄 물기가 아직도 묻어있었다.

“케실리온, 얼굴에 묻은 물기는 닦아야지.”

쓱쓱!

라나가 메이드 복의 중앙에 달린, 주머니에서 천 같은 손수건을 꺼내 들며, 케실리온의 얼굴에 가져다 댔다. 그 모습에 살짝 당황한 케실리온은 뒤로 한걸음 물러났지만, 공격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고는 눈을 감았다.

“역시 라나는 착해. 고마워, 너라도 없었다면 악녀 루시아에게...”

퍽!

“으헉...”

얼굴에 뭍은 물기를 다 닦아 냈던지 감각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케실리온은 순간 강한 충격을 받으며, 멀리 나가떨어져 버렸다.

“이거 미안하군. 악녀라서 말이야.”

“아, 아가씨!”

라나는 당황해 하며, 루시아를 말리고 있었다. 씩씩 콧방귀를 뀌며 팔짱을 끼고 있었다. 도저히 공녀라고 보기 힘들었다. 옆에 메이드 복을 입고 있는 라나가 공녀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열심히 하는 모습을 봐서 봐주려고 했더니...뭐? 악녀?”

“아...”

언제나 이런 식이다. 케실리온은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인지 도무지 몰랐다. 일주일 전부터 시작된 이런 시달림은 끝이 없었다. 사사건건, 무엇을 하던 간에 잔소리다. 열심히 닦아 놓은 곳이 더럽다고 우기는 것도 수십 차례!

화를 내고 싶어도 못한다. 그녀는 고용주, 케실리온은 고용인이다.

“하하하. 청소 청소!”

어색한 웃음을 흘린 케실리온은 걸레를 꽉 쥐며 화를 삭였다. 그리고 묵묵히 걸레질을 시작하자, 루시아도 더 할 말이 없는 것인지 오후 티타임을 즐기기 위해 라나와 밖으로 나가버렸다.

툭툭.

“이해해, 아가씨잖아?”

“예... 저래 보여도, 따뜻한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먼저 사라져간, 루시아를 멍하니 보던, 케실리온은 어깨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렌경이었다. 렌경은 이해하라는 듯이 몇 마디하고 지나가 버렸다. 하지만 그 여운이 남아 있었던, 케실리온은 어색하게 중얼거리고는 남은 일을 위해 열심히 몸을 닦달했다.

그리고 일주일 전의 일을 살짝 떠올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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