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케실리온은 생소한 주변 환경에 눈을 껌벅거렸다. 처음 보는 의복, 그리고 붉은 하늘이 눈에 띠고 있었다. 하지만 몸은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물먹은 솜처럼 온 몸이 무겁기 그지없었다.
“공야비운...잘도 우리를 속였더군.”
“하하하! 조제현, 설마 처음 보는 사람을 전부 믿고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
하늘을 쳐다보고 있던, 시선이 저절로, 아래로 향하며, 누군가를 직시하고 있었다. 상대는 자신과 같은 검은 색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생김새 역시, 이국적인 외모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약간 긴장감이 감돌았다.
게다가, 저절로 입이 열리며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지만, 확실히 상대에게 전하는 말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아무래도 좋다. 공야비운, 나를 속였고, 풍운지를 속였던 죄는 죽음으로 값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네놈 때문에 5년 전 풍운지가 쓸쓸히 지옥을 떠났던 날을 한시도 잊었던 적이 없다.”
온 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한기가 뿜어지고 있었다. 그 현상의 중심이 케실리온, 자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크게 놀랐지만 목소리는 밖으로 세어 나오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온 것처럼, 자신의 의지는 무시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죽음이라...과연, 흡혈지존 이군. 설마 했는데, 저런 무리까지 이끌고 있는 것을 보니 보통이 아니군.”
공야비운을 중심으로 적포를 휘날리는 무리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케실리온의 주위에도 비슷한 무리가 나타났다. 오직 검은 묵빛이 감도는 흑포가 휘날리고 있었다. 그들은 기묘한 느낌의 검을 뽑아 들고는 서로를 주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명을 기다린다는 듯이, 병장기들을 뽑고는 케실리온의 뒤에 대기하고 있었다.
“주군, 저희들의 상대는 저 혈교의 무리입니까?”
“후후후...마도맹의 첫 번째 전투로 기억되겠군. 당송군.”
“주군의 뜻은 저희의 뜻입니다.”
은빛의 도(刀)가 예기를 뿜고 있었다. 땅으로 향한 도를 움켜쥐며 한쪽 무릎을 꿇음으로써 케실리온에게 예의를 차리고 있었다. 절도와 절제에 케실리온은 속에서 부들부들 떨렸지만, 한편으로는 두근거리는 느낌도 받았다.
“당송군...공야비운은 내가 처리하겠다.”
“지당한 말씀, 주군을 배신한 자는 천 번을 죽어도 마땅한 벌! 지존의 뜻을 받들겠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있던 당송군이라는 자가, 서서히 몸을 일으키며, 천지가 울릴 듯이 우렁찬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흑풍의 무리 역시, 함성을 지르며, 케실리온을 스쳐지나갔다.
우와아아아!!
챙챙!
케실리온과 공야비운이라는 자를 중심으로 적풍과 흑풍이 몰아쳤다. 아비규환의 늪에 빠진 주위는 살과 살, 뼈와 뼈가 갈리는 소리가 천지를 개벽시키고 있었다.
“공야비운, 네놈은 동료를 어떻게 생각하는 것이냐! 감히 우리를 속이고도, 편안하게 잠잘 수 있더냐!”
케실리온은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불어 닥치는 기억의 파편에 이것이 사자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기세를 가득 머금은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지자, 곧, 공야비운의 검이 하늘로 향했다.
“애초에 속은 네놈의 잘못! 나는 당당한 혈교의 교도! 크큭, 마교 마저 속였던 나를 네놈이 어찌 알리오!”
“개자식...네놈의 피로 치욕을 씻겠다.”
케실리온은 이 상황에 침이라도 삼키고 싶었지만, 자신의 몸이 아닌 것처럼, 저절로, 오른손을 들어올려, 싸늘한 검을 뽑아 올렸다. 그리고 검을 느슨하게 쥐고는 땅으로 검을 축 늘어뜨렸다.
특이한 방법의 기수 식에 루시아와의 대련이 살짝 떠올랐다. 자신 역시, 마지막에 이런 방법의 기수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호오...그게 만검이라는 특이한 검법인가? 중원에서 보지 못한 기수식이군.”
“네놈 따위가 알 정도로 호락호락한 검법이 아니다.”
케실리온은 자신이 마치, 이 몸의 주인과 동화 된 것처럼, 절로 분노가 치솟았다. 하지만 곧, 호수의 잔잔함처럼 마음이 식어버리며, 부동심을 유지 해 나갔다. 지금 몸의 주인은 지극히 평온함 그 자체였다.
“후후후...과연 지존이라고 불릴 정도의 기세군.”
피가 튀는 전장에서 평온함을 유지하는 모습에 이채롭다는 듯이, 웃고는 공야비운이라는 자의 양 발에 힘이 들어갔다. 그 순간, 앞으로 쏘아진 공야비운의 검이 케실리온의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갑작스런 공세에 케실리온은 눈을 질끈 감았지만, 몸은 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캉!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청명한 진동에 눈을 살며시 뜬 케실리온은 눈을 부릅떴다. 바로 앞에서 있는 살기 없는 살기는 내뿜는 공야비운의 모습도 놀라웠지만, 평범하게 검을 치켜든, 조제현이라는 자의 움직임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차가운 냉기가 온몸에서 뿜어지며, 양발의 움직임이 기묘하게 뒤틀렸다. 그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상한 이름의 걷는 방법
마영보법(魔影步法)이라는 것이었다. 공야비운의 검을 이화접목의 수로, 밀착 시킨 후, 걷는 방법으로 옆으로 이동 한 것이다.
“과연! 하하하!”
아군의 피인지 적군의 피인지는 몰라도, 케실리온의 시야에 피가 튀기고 있었다. 그 피가 조제현이라는 자의 손을 적시고 있었다.
“배신자 치고는 한수가 있군. 그 순간에 몸을 비틀다니.”
공야비운의 허리춤에는 붉은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짧은 순간의 걷는 방법을 응용해, 상대의 옆구리를 베었던 것이다. 어떤 검법이 좋은지 모르는 케실리온이었지만, 이런 깔끔한 수법을 펼치는 자는 고수라고 생각했다.
그토록 짧은 순간을 노치지 않고 공격하는 전투적인 센스에 케실리온은 몸을 떨었다. 만약, 이런 자가 자신의 상대였다면, 1초도 못 버티고 차가운 바닥에 몸이 누웠을 것이다.
“크윽, 어떻게...5년 만에...그때는 나의 기운조차 못 읽던 애송이가.”
“하하하! 과연, 마냥 애송이라고 생각했던 녀석이 나보다 강했다니!”
조제현이라는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의외로 상대가 강한 것인지 몸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즐거움에 대한 떨림이었다. 마치, 전장을 누비는 아수라처럼, 강한 상대를 찾아 해매는 늑대 같아 보였다. 아니, 마룡이었다.
“배신은 곧, 죽음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지. 공야비운!”
순간, 케실리온은 천지가 멈춘 것처럼 천천히 시간이 흐르는 느낌을 받았다. 발끝 하나하나, 온 몸의 털이 곤두서며, 기감이 뻥 뚫린 것 같았다. 발걸음 하나하나, 모든 것이 뇌 속으로 전해져 왔다.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것처럼 느릿하게 움직였다.
“만검...살(殺)”
짧은 외침에 조제현이라는 자의 움직임이 더욱 거세어졌다. 먹이 감을 낚아채는 매처럼, 그의 검에서는 은빛의 은은한 광채가 생겨나더니, 공야비운이라는 자의 살과 뼈를 가르기 시작했다.
단 1초도 허비 하지 않겠다는 듯이, 횡으로 그리고 수직으로 내려찍는 검이 수백의 잔영을 만들어냈다. 삽시간에 주위는 조제현이라는 자의 지배를 받는 것인지, 조용해졌다.
“배신자는...죽음 뿐이다.”
휘이잉
때마침 불어온, 작은 미풍에 공야비운의 눈이 움찔거리며 떨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의 육체는 만가닥의 은빛 선에 의해 갈갈시 찢겨지며, 온몸이 조각나 버렸다. 전투가 시작된 이래, 단 세 번의 움직임이었다. 첫 번째, 공야비운의 검을 맞받아 칠때, 그리고 걷는 방법을 행할 때, 그리고 만검의 살이라는 것을 펼칠때...
단 세 걸음으로 공야비운이라는 자를 차디찬, 바닥에 쓰러뜨린 것이다. 그리고 케실리온은 생각했다. 앞의 상대가 결코 약하지 않다. 이 몸의 주인인, 조제현이라는 자가 비정상적으로 강할 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네놈에게 어울리는 죽음이다. 공야비운.”
차르릉...탁!
조제현이 움켜쥐었던 검의 손잡이에서 힘이 풀리는 가 싶더니 저절로 검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마치, 주신의 품으로 돌아가듯이, 검집으로 날아든 검은 청명은 음색을 토하고는 납검(納劍)되었다.
“주군의 뜻에 따라 적을 섬멸하였습니다.”
희끗한 머리의 사내가 이묘한 자세를 하며 예의를 차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제현이라는 자는 무심히 그를 내려다보고는 다시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그때, 하늘이 검은 색으로 변하며, 케실리온의 정신은 이상한 곳으로 흘러갔다.
“쿠쿠쿡, 어떠냐. 네놈도 저런 강함을 가지고 싶지 않은가?”
케실리온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전신이 검은 색의 물체가 보였다. 액체인지 고체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그 존재가 광기어린 목소리로 말하자, 절로 몸이 움찔 거렸다.
“저런 통쾌하게 죽일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다.”
움찔...
“하하하! 역시 네놈은 원하고 있는 것이다. 저런 힘을...더러운 놈에게 죽어간 네 엄마를 떠올려라.”
검은 존재는 알고 있다는 듯이 손을 뻗어 케실리온의 흑발을 쓸어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싫지만은 않은 것인지,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은 원하고 있었다. 자신의 엄마를 죽게한 원흉에 대한 분노!
“나는...”
“그래, 너는 힘을 원하는 것이다. 잔인하게, 적을 없애 버리는, 만조각을 내며 죽여 버리는 그 힘을!”
주춤거리고 있는 사이, 검은 물체가 말하는 말은 더욱 유혹적이었다. 마치,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는 모습에 약간 주저함이 있었지만, 확실히 마음속으로 그 힘을 갈구 하고 있었다.
하지만 순간 스치는 엄마의 목소리...
“얘야, 케실리온. 힘의 오만함은 너 자신을 죽일 뿐이란다...”
마음속 깊숙이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지만, 계속해서 들려오고 있었다. 언제나 따뜻하게 불러주시던 엄마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케실리온에게 전해지는 순간, 결심했다.
“필요 없어...아직은...아직은 지금의 생활에 만족해.”
노예였던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 카논공작, 많이 부리기는 했지만 따뜻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던, 루시아 아가씨, 그리고 언제나 친절한 라나, 말없이 도움을 주던 렌경의 모습이 떠오르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아직은 필요 없어! 언젠가 필요하겠지만...지금은!”
“멍청한! 나약한 자식! 떠올려라! 네놈을 괴롭히던 존재들을...호오...루시아 라는 계집이 너를 부려먹던 것을 떠올려라.”
“싫어! 아가씨는 부려먹은 게 아니야!”
“크크큭, 멍청한! 그저 네놈은 노예일 뿐이다. 소모품...언제고 내쳐질 존재! 네 엄마처럼 비참하게 죽을 것이다. 네놈의 사용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검은 물체가 온몸을 휘감는다. 하지만 목소리는 똑똑히 들려오고 있었다. 순간순간, 분노가 치솟으며, 자신에 대한 경멸과 짜증이 치솟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의 생활에 만족하는 자신만 있을 뿐이다.
모든 것이 머릿속에서 정리되기 시작했다. 알 수없는 기억과 노예였던 자신에게 친절을 배풀던, 카논 공작과 라일경...그리고 공작가의 사람들...이상한 생각이 마구 치솟자, 저절로 입이 움직였다.
그 검은 물체는 끝까지 물고 늘어지겠다는 듯이, 발목을 시작으로 허리, 가슴까지 케실리온의 몸을 물들이고 있었다.
“쿠쿠쿡, 네놈이 원하지 않는 다면, 내가 원하게 만들어주마!”
“닥쳐!”
어두운 물체의 달콤한 말에 힘을 빼려고 했지만 발목에서부터 느껴지는 따끔한 느낌에 정신을 차리고는 자신의 마음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말을 내뱉었다.
단 한마디, 닥쳐! 하지만 그 말을 시작으로 어둡고, 갑갑하기만 하던 어둠이 사라져갔다. 어둡기만 하던 공간에는 사람들의 인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감히! 케실리온 네놈 따위가!”
루시아 아가씨의 목소리가 들리자, 왠지 모르게 졸음이 몰려왔다. 그리고 붉은 머리의 여성이 자신의 몸을 붙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미 정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털석..
“뭐야...기절했나?”
공허한, 붉은 머리 여성의 외침이 공간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악녀 트리오
“케실리온! 물 가져와.”
평범한 일상이다. 기나긴 잠에서 깨어난 케실리온은 여전히 자신을 부리는 루시아의 행태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역시 그때, 힘을 원했어야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나도! 알지?”
“예..예, 어련 하실까.”
또 한명의 다크호스! 페이린이라는 같은 종족의 여성이었다. 게다가 제국의 후작씩이나 되는 여성이었기 때문에 꾸준히, 그녀의 명령에도 움직였다.
시원한 꽃들이 만발한 공작가의 변두리에 앉아 경치를 구경하고 있는 두 여성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은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별채의 일도 산더미로 쌓여 있건만, 두 여성은 요지부동, 유아독존의 행태를 보이며, 부려먹고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아가씨...그리고 페이린님”
좀처럼 보기 힘든 유리잔이다. 공작가인 만큼 이런 귀한 잔을 사용 할 수 있는 것은 당연했고, 그 잔을 움켜쥔 두 명의 여성을 보며,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케실리온, 손! 이것도 수업이다.”
“예...”
벌써 일주일이 넘는 시간을 페이린과 생활했다. 자칭, 사부라는 이름으로 많은 것을 가르치고 있었지만, 순전히 부려먹는 것이 일이었기 때문에 신용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좋은 점도 있었다.
갈수록 메말라가는 마음의 평온을 주는 존재였다. 온 몸을 휘젓는 차가운 기운을 바로 잡아주는 존재 역시, 페이린이었다. 간혹, 케실리온의 침실에 들어와 난감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했지만 같은 종족이라는 생각에 그렇게 거부감은 없었다.
“손에 마나를 집중시켜, 너무 세지고, 약하지도 않게...살짝.”
그녀의 말처럼 요즘 들어 이런 수련은 잦아졌다. 하체 쪽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차가운 느낌을 떠올리며, 양손에 마나를 집중시키는 수련, 이것으로 차가운 물을 얼음물로 변하게 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양손은 붉은 선홍빛이 감돌며, 차가운 기운이 퍼져나가고 있었다.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머릿속에서도 이런 종류의 기술이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숨 쉬는 방법을 이용해, 마나라는 것을 모은다는 것을 페이린에게 배웠다.
물론, 케실리온이 하는 방법은 위험하다며, 하지 말 것을 강요했지만 밤이나, 새벽에 몰래 하는 것으로 그 숨 쉬는 방법을 수련했다. 게다가, 페이린이 가르쳐준 숨 쉬는 방법을 이용해 수련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쩌저적.
순식간에 출렁이던 물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너무 과하게 마나를 집중시킨 탓에 물이 완전히 얼어 버린 것이다. 게다가, 물의 부피마저 커진 것인지 유리잔에는 금이 가 있었다.
“뭐야, 누가 그렇게 마나를 집중시키래!”
붉은 머리가 찰랑거리며, 고운 이마는 주름이 잡혀 있었다. 페이린의 말에 자신의 손을 내려다 본, 케실리온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잘하는 짓이다. 케실리온”
루시아의 말에 더욱 미간을 좁혔다. 일주일이나 넘었건만, 여전히 저런 말투 행동을 하는 아가씨의 모습에 처량해지는 케실리온이었다. 매일 같이 일어나는 말썽과 행동을 수습하는 것은 케실리온이었고, 별채를 어지럽게 만드는 존재는 두 명의 여성이었기 때문에 피곤 한 것은 케실리온이었다.
“그만 좀 하십시오. 이젠 지쳤습니다.”
흠칫...
갑작스런 케실리온의 외침에 루시아는 움찔 거렸다. 간혹 저런 싸늘한 말투에 가시가 돋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루시아였다. 케실리온의 1차 성징이 끝난 후부터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페이린의 말로 따르면, 1차 성징은 육체도 성장하지만, 성격까지 성장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간혹, 성격도 변하기 때문에 난처한 상황도 있다고 한다고 하지만, 이건 정도가 심했다. 정반대의 성격으로 돌변한다니...
꽃들이 만발하던, 꽃밭에서는 때 아닌, 냉기에 꽃들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다. 같은 하프 드래곤이라지만, 페이린 역시 이상함을 느꼈다. 자신 역시 1차 성징을 경험했던 몸, 이것은 정도가 심했다.
인간으로 치자면, 사춘기의 반항심 정도라고 치부해야 하겠지만, 케실리온은 정도를 벗어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페이린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를 가지고 놀지 마시죠.”
“호, 호호”
페이린은 케실리온의 말투에 어설픈 웃음을 머금었다. 페이린을 난처하게 만드는 모습에 루시아는 웃음을 머금었다.
“호호호, 아줌마 당황해 하는 것 봐!”
“뭐야! 이 꼬마가!”
두 여성의 모습에 케실리온은 할 말을 잃었다. 당황해 하던 모습은 벗어 던지고 말싸움을 해대는 두 여성의 모습에 그만 케실리온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또, 이런 모습을 보였다. 마음속에서 부터 끓어오르는 분노와 경계
힘에 대한 갈망이 치솟았던 것이다. 누군가로부터 억압 받는 생각에 저절로 이런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일주일간 많은 고뇌를 했다. 자신은 무엇인가? 무엇 때문에 힘을 갈망하는 가...그 대답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알 수 없는 기억으로 혼동을 하는 날도 많았지만, 이처럼 두 여성의 행동에 기분이 풀리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제가 다 죄송합니다. 그만하시죠.”
무표정하다. 1차 성징이라는 것을 하고 나서부터 육체의 성장은 부쩍 늘어나, 10살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키가 커버렸다. 게다가, 냉기가 뚝뚝 흘러넘치는 말투하며, 모든 것이 어색한 느낌이 들었다.
루시아와 페이린은 따뜻한 7월의 햇살을 맞으며, 서로를 헐뜯는 싸움을 멈췄다. 때 마침 시원한 바람이 몰아치며, 루시아와 같은 또래의 하녀가 통통 거리며 뛰어 오고 있었다. 라나였다. 언제나 밝은 모습을 보여 주는 라나였기 때문에 케실리온도 그녀를 언제나 밝게 대했다.
아마, 같은 신분의 위치라 생각했기 때문에 편안하게 대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자신과 같은 또래의 다른 여자에게 시선을 옮기는 케실리온이다.
흘끗.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검은 흑발 머리가 여름의 햇살을 받으며 반짝이는 광채가 신비스럽게 뿌려졌다. 어린 나이였지만 귀족가의 기품이 느껴지는 몸짓...하지만 말투를 보면 평민의 개구쟁이 아가씨처럼 말괄량이였다.
휘이잉ㅡ
‘평화롭구나....’
시원한 바람에 케실리온의 머리칼이 요동치자 저절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바람이 불 때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뻥 뚫리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케실리온은 세삼 불어오는 바람에 찰랑이는 검은 흑발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루시아가 눈을 부라리며 케실리온의 눈동자를 주시하고 있었다. 눈 깜짝 하지 않고 바라보는 그녀의 모습에 케실리온은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왜 그러십니까. 아가씨.”
“그게....괘, 괜찮은가 싶어서.”
“....? 무슨...”
“네가 며칠이나 쓰러졌을 때 말이야. 어디 불편한데는 없나 싶어서.”
푸른 하늘에 시선을 주던, 케실리온은 루시아 아가씨의 말에 살짝 눈이 흔들렸다. 약간 루시아의 걱정이 담긴 듯 한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하하! 아가씨, 걱정대신다면 부려먹지나 마십시오.”
“큭, 바보!”
케실리온의 말에 화라도 났다는 듯이 고개를 획 돌려버리는 루시아였다. 그 모습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페이린의 모습에 케실리온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루시아 아가씨.”
“응?”
멀리서 뛰어온 라나는 루시아 아가씨를 부르고 있었다. 약간 숨이 찬다는 듯이 숨을 고르고는 입을 열었다.
“주인마님께서 이곳으로....”
“에엣! 뭐야, 엄마가?”
“예, 별채 생활이 궁금하시다면 서...”
라나를 쳐다보고 있던 루시아의 눈이 한없이 커져버렸다. 들어서는 안될 것을 들었다는 듯이 온 몸을 부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뭐야...언니가?”
“아, 페이린님.”
라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페이린에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흥미 없다는 듯이 케실리온이 만들어 놓은 얼음 조각을 입에 가져다 넣고 있었다.
“루시아 아가씨, 무슨 일이라도....”
“케실리온, 네가 몰라서 그래, 그녀는 악녀야 악녀!”
루시아 아가씨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악녀라면 이미 몇 차례나 보아 오지 않았던가. 루시아와 페이린, 그녀들만으로도 난감한 상황을 여러 번 겪었기 때문이다.
“저는 바빠서....주인마님께서 오신다는데, 별채가 더러우면 안 되겠죠.”
케실리온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별채로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루시아가 두려워 할 정도면 엄청 엄할 것이라는 것이 케실리온의 생각이었다.
케실리온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루시아는 떨리던 몸을 멈추며 중얼거렸다.
“숨어야해...”
악녀 트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