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하네.”
하늘에서 쏟아지는 찌를 듯 한 열기에 케실리온은 땀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아침을 끝으로 루시아 아가씨의 모습은 어디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라나의 모습을 제외하고는 렌경은 물론, 루시아 아가씨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별채 내의 청소를 모두 끝마쳤기 때문에 한가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언제나 심부름에 갖은 노동을 부려 먹던, 루시아 아가씨의 부재는 케실리온을 한가롭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그 생활이 그리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조용히 나무 그늘에 앉아 잡초나 뽑고 있었다.
“그렇게 주인마님이 두려운 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평화로움에 모든 것이 귀찮았지만, 나름대로 잡초를 뽑는 것도 괜찮았다. 물론, 이마에서 쏟아지는 땀방울을 제외한다면 모든 것이 좋았지만, 간간히 불어오는 바람에 시원함을 만끽했다.
“케실리온, 열심히 하는 구나.”
“뭐 그렇지, 라나도 쉬엄쉬엄해.”
바쁜 걸음으로 이리 저리 돌아다니며 일을 처리하는 라나의 모습에 손을 흔들었다. 이런 평화스러운 나날이 계속 되기만을 기대했건만, 막상 이런 상황에 놓이니, 너무 평범한 하루가 되는 듯했다.
꽃 냄새에 취해 이리 저리 옮기며 꿀을 따는 벌들의 모습에 살짝 눈을 감은 케실리온은 호흡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몸에서 느껴지는 시원한 느낌에 흐르던 땀방울도 식어갔다.
“호호, 페이린 많이 변했구나.”
“언니도 참, 누추하지만 들어와.”
붉은 머리의 여성과 금발의 여성이 별채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금발의 여성을 보좌하는 것인지 몇 명의 하녀들이 줄줄이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때 아닌, 소란스러움이 느껴졌다.
첫 보기에도 귀품이 느껴지는 귀부인의 모습이었다. 페이린과 루시아의 모습과는 다르게 다소곳하고 품위가 느껴지는 행동에 케실리온은 저런 것이 귀족의 표본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어머, 저 아이는.....”
“케실리온?”
별채를 감상하고 있던 금발의 여성이 나무 그늘 밑에서 말똥거리는 시선으로 쳐다보고 있는 케실리온을 발견했다. 갑작스런 관심에 케실리온은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주인마님 되시죠. 안녕하세요. 케실리온입니다.”
예의 바른 인사는 사람의 심성을 나타낸다고 했다. 최대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케실리온은 싸늘한 침묵에 약간 긴장했다. 자신이 뭔가 잘못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 어머! 흑발에 흑안! 귀여워.”
“예?”
케실리온은 주인마님의 갑작스런 행동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짜고짜, 몸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는 것이 아닌가. 순간 온 몸에 소름이 돋기 시작했다.
“찰랑이는 흑발에 앙증맞은 눈망울이라니!”
마치 보물을 찾았다는 듯이 반짝이는 눈빛으로 케실리온을 이리 저리 돌려가며 보기 시작했다. 당황해 하는 모습에 페이린은 쿡쿡 거리며 웃고 있었지만,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을 보면, 실수는 아니었다.
“저기...마님?”
“아? 왜 그러니 케실리온.”
순간 스친 생각이지만, 갑자기 눈앞의 다소곳한 마님의 기억은 사라지고 없었다. 온 몸이 떨릴 듯 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저절로 뒤로 몇 걸음 물러나게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얼굴임에도 너무 친절하다. 지금 케실리온의 머릿속에는 눈앞의 그녀가 너무 수상하게 보였다. 게다가 알 수는 없었지만 온몸이 위험신호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시아 아가씨를 보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닙니까?”
“얘 너무 딱딱하다. 편하게 생각하렴, 편하게~”
금발의 찰랑이며 케실리온의 얼굴을 스치듯 지나갔다. 태풍이 지나간 것처럼, 케실리온의 심경은 초토화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행동이나, 말투는 귀부인의 표본이나 다름없었지만, 상대를 쳐다보는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나저나, 루시아가 안 보이는 군요. 엄마가 왔는데도 얼굴을 비추지 않다니...”
“언니도 참!”
루시아의 모습이 안 보이는 탓인지 마님은 눈물을 글썽이는 듯 한 모습을 보이고는 별채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페이린과는 죽이 잘 맞는 것 인지, 거침없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주인마님의 일행이 사라지자, 케실리온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휴....”
힘이 풀렸다. 머릿속을 휘감는 주인마님의 모습에 오싹함을 느꼈던 것이다. 두려움의 오싹함이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느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케실리온을 흘겨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아가씨 거기서 뭐하십니까?”
케실리온은 별채 속으로 들어가려 했다. 케실리온은 슬며시 숨어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뭐하십니까? 주인마님께서 아가씨를 찾고 계신데...”
언제 나타난 것인지, 별채의 뒤로 슬금슬금 도망가고 있는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케실리온의 갑작스런 등장에 놀란 것인지, 루시아는 작은 비명을 질렀다.
“뭐야, 케실리온이잖아. 네 볼일이나 봐.”
“마님께서 찾고 계십니다만...”
“나는 절대, 절대 안가겠어.”
루시아는 절대 가까이 가지 않겠다는 듯이 손을 내젓고 있었다. 케실리온은 이렇게 도망가고 있는 루시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평소 말썽만 부리고, 부려먹기만 하던 그녀와 동일인물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혹시 무서운 겁니까? 후후후.”
“뭐, 뭐야? 무서운 게 아니라. 두려운 거다. 엄마가 두려운게 아니야. 고상한 취미....으으..”
루시아는 자존심이 상한 듯 발끈하며 소리치다 뒷말을 흐렸다. 그녀의 모습에 케실리온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쓴 웃음을 터뜨렸다.
“뭡니까. 마님의 취미 때문에 숨어 있단 말입니까? 하하.”
“그럼 네놈이 당해봐...하루 종일...으 상상만 해도 몸이 떨려오니까!”
케실리온은 루시아의 모습에 머리를 긁적이고는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순간 루시아의 기척도 빠르게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흐음...루시아? 고상한 취미?”
“아아...도망을...”
언제 나타난 것인지,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주인마님의 모습이 보였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라는 듯이,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루시아의 뒤를 밟고 있었다. 게다가, 루시아는 못볼것을 봤다는 듯이 빠르게 발을 놀리며 사정권에서 벗어나기 위해 뜀박질을 했지만, 얼마가지 못해, 주인마님의 손에 붙잡히고 말았다.
“놔! 놔....이젠 지긋지긋해!”
“어머, 루시아 오랜만인데 무슨 소리니! 그만 포기하고 가자꾸나...게다가 전속 하녀까지 데리고 왔으니, 벗어 날수는 없을 거야.”
주인마님의 울리는 목소리에 정신이 아늑한 것인지, 루시아는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것을 그만두고 힘을 쭉 빼고 있었다. 그리고 애처롭게 케실리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케실리온...네놈!”
“케실리온, 잘했어요.”
웃는 자와 우는 자는 갈린 것인지, 루시아는 케실리온에게 화를 내고 있었지만, 주인마님은 살짝 웃는 얼굴로 케실리온을 칭찬하고 있었다. 개처럼 끌려가는 루시아를 따라, 케실리온 역시 별채로 들어갔다.
많은 하녀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라나 역시, 같이 움직이며, 차를 대접하고 있었고, 페이린은 무료하다는 듯이 하품을 하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영문도 모르는 케실리온은 그저 뒤를 따를 뿐이었다.
악녀 트리오
샤라락...
루시아는 옆에서 들려오는 기척에 무거운 눈꺼풀을 말아 올렸다. 어두운 암실을 연상캐 하는 방 속에서 뭔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뭐...뭐야!”
“루시아...이제 시간이 다 됐구나. 호호, 준비는 끝났어.”
케실리온들은 지금쯤, 1층의 바람이 선선히 들어오는 곳에서 티타임을 가지고 있을 시간이었다. 아무리, 많이 부려먹는 루시아라고는 하지만, 오후의 티타임은 누구나 즐기게 했던 루시아였다. 하지만 자신은 무엇인가!
땅거미가 기어 들어갈 시간이었기 때문에 방은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와 옷과 옷의 마찰음이 더욱 공포스러움을 자아냈다.
차라락!
‘......엄마?’
언제 들고 온 것인지, 공포스런 상자가 있었다. 곧, 방안을 비추고 있던 햇빛은 스며들었다. 도망가기 위해 방을 나서기 위해 손잡이를 잡는 순간, 공포스런 물건이 윤곽을 드러났는데, 다른 아닌, 엄마의 손짓이 눈에 들어왔다. 루시아는 조심스럽게 좌우를 살피며 피할 곳을 찾았지만 방 안에 포진해 있는 엄마의 직속하녀들이 눈을 빛내고 있었기 때문에 살짝 체념의 눈길을 보냈다.
“체념...하셨군요. 아가씨”
조용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하녀들의 목소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문 앞을 지키는 또 하나의 하녀, 완전한 밀실이 되어 버렸다. 그제야 움직일 생각을 한 것인지, 공작부인은 루시아의 앞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수상해...예전 같으면 무턱대고...’
루시아는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두려움, 절망의 마음이 퍼지기 시작하며, 무턱대로 창문으로 뛰어 들었지만 이미, 공작부인의 손아귀에 잡힌 후였다. 재빠른 몸놀림이었건만, 이미 예측했다는 손 동작, 모든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공작부인이 들고 있는 작은 옷고름 그것은!
‘역시나!’
루시아는 감을 잡았다는 듯 인상을 구겼다.
한편 공작부인은 그녀의 행동에 코웃음을 치고는 점점 루시아에게로 접근해갔다. 공작부인은 루시아의 굳은 표정을 보고는 작업에 착수했다. 마른침을 삼키며 벽에 붙어 도망갈 궁리는 하는 루시아에게 입을 열었다.
“호호호, 루시아, 엄마의 손에서 벗어 날수 없어요. 저번처럼 도망 갈수는 없을 거예요. 설마, 이런 곳에 숨어 있을 것이라고는....!”
루시아의 앞에 다다른 공작부인은 살며시 미소를 머금었다. 사나운 맹수가 먹잇감을 낚아채듯이 루시아의 전투복(?)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전투복이라고 해봐야, 활동하기 쉬운 옷이었다. 대부분의 귀족들 역시, 집안에서 만큼은 편안한 활동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이상할 것이 없건만, 공작부인은 화려하지도, 수수하지도 않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후훗, 루시아, 순순히 엄마의 손길을 느끼세요.”
짝짝!
공작부인의 손뼉치는 마찰음에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은 재빠르게 루시아의 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옷이 벗겨진 루시아는 절망의 구렁텅이 속으로 빠져 들어버렸다.
“꺄아...이거 놓지 못해! 명령이다. 이거 놔!”
“호호호, 아가씨, 저희는 주인마님의 하녀! 명령 따위는 소용없습니다.”
이미, 반나체가 되어 버린 루시아의 모습에 만족한다는 듯 한 공작부인은 준비 되어 있던 옷을 하나 둘씩 꺼내기 시작했다.
그렇다. 공작부인은 누군가에게 예쁜 옷이나, 특이한 옷을 입힘으로써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귀여운 상대에게 옷을 입히는 것을 낙으로 삼는 사람인 듯했다. 루시아의 비명소리는 방을 타고, 1층에까지 퍼지고 있었다.
“역시 예쁜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하는 구나, 후훗”
뭔가 억측이다. 괴로워하는 루시아를 보며, 좋아한다는 말을 하는 공작부인은 뭔가. 마치 광기에 휩싸인 악녀 같았다. 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애초에 루시아를 보는 것으로 시작되어 있었다. 그것도 하녀를 대동 한 것은 끝을 보겠다는 뜻이니, 루시아로써는 탈출의 기회는 제로였다.
똑똑...
“거기까지! 더 이상의 행동은 용납하지 않아, 언니!”
루시아의 옷을 다 입힌 주인마님은 다른 옷을 입히기 위해, 바쁜 손놀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곧, 누군가의 침입! 페이린이다.
“아...아줌마!”
구원의 손길을 느낀 루시아는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엄마의 행동을 제지하는 차가운 목소리, 루시아는 돌아보지 않아도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으며, 행복이 섞인 미소를 흘렸다.
“뭐니? 페이린? 설마 구경이라도 하기 위해서 온 거니?”
자신의 행사를 방해하는 존재에 앙심을 품은 것인지 지옥의 화신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한 투기를 발산하는 공작부인이 서 있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에 페이린의 머리가 출렁거렸다.
“당연하지, 언니도 참. 내가 방해할 생각이겠어? 아줌마라....”
공작부인의 질문에 페이린은 평소처럼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답했다. 그 순간 루시아는 느꼈다. 이제 끝이 구나라는 생각이!
“역시...페이린은 뭘 좀 아는 구나. 나는 또...”
“언니, 시작하세요.”
침대에 걸터앉은 페이린은 느긋하게 침대에 기대며, 루시아가 망가지는 모습을 즐기고 있었다.
“절대! 절대 가만 두지 않겠어.”
“훗, 루시아...아줌마라는 소리가 들려온 순간, 타협의 여지는 사라졌다.”
페이린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능글거리는 페이린의 모습에 입술을 꽉 깨문 루시아는 눈을 꼭 감았다. 그런 루시아의 모습에 오리려 페이린이 더 의아해졌다.
‘이상한데? 이렇게 순순히 포기 할 줄은...’
페이린의 의혹이 담긴 눈길에 재미없다는 표정으로 하녀들의 행태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샤라락...
옷을 갈아입히기 위해 하녀들의 속박이 풀렸다. 루시아는 그때를 노렸다는 듯이, 페이린이 열고 들어온 문을 향해 빠르게 발을 놀렸다.
“앗!”
공작부인도 미처 몰랐다는 듯이 재빨리 문을 열고 나가는 루시아를 제지 할 수 없었다. 공작부인의 머릿속에는 아차, 당했다! 라는 생각이 가득했고, 약간 토라졌다는 듯이 페이린을 쳐다 볼 뿐이었다.
“멈춰! 루시아!”
“훗, 엄마의 마수는 거기까지야!”
다급한 비명을 내지르는 공작부인을 보며, 루시아는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방 안에는 공허한 외침이 들어왔다. 살짝 어이없다는 말투도 섞여 있었다.
“루시아...옷은 입고 나가야지...”
“어머, 아가씨도 참!”
그렇다. 루시아는 너무 다급한 나머지, 속옷차림으로 밖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2층이라는 절대적인 영역인 만큼 1층을 통과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그 모습을 보이고 말 것이다.
악녀 트리오
루시아 아가씨가 끌려간 후 처음으로 맞는 편안한 티타임
“자, 케실리온 따뜻할 때 마셔야 맛있어.”
1층 바람이 잘 드는 곳에 라나와 케실리온, 페이린이 저물어가는 하늘을 보며, 티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뜨거운 차를 식히고 있었다.
라나가 준비한 차는 블랙 티로 다른 곳에서는 홍차라고 불리는 차였다. 게다가, 갓 구워 낸, 쿠키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맛있는 향기를 내뿜었다.
와삭..
“맛있어.”
“흐응...케실리온 너무 좋아 하는 거 아니야?”
맞은편에 앉아 있던, 페이린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케실리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페이린의 말에 라나는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이 구워낸, 쿠키에 손을 가져다 댔다.
“후작님 너무 하세요...”
“호호호, 라나 얼굴 붉힌 것 봐...내가 뭐라고 했나?”
케실리온에게는 모든 것이 평화롭게 보였다. 다만, 2층에서 들려오는 분주한 발소리에 약간 신경이 거슬리는 것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나저나, 페이린님은 무슨 이유로 여기 남으신 건지....”
“뭐 황성은 지루하고 답답한 녀석만 있기 때문이지...여기가 재미있거든.”
케실리온은 쿠키를 집어 먹는 페이린에게 살짝 의문이 들며 홍차를 들이켰다. 약간 식어버린 것인지 씁쓸한 맛이 전해졌지만, 의외로 향기롭다. 페이린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케실리온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럴 때 본다면, 귀품이 느껴지는 모습이지만, 한번 발동이 걸린다면...
와락!
“악...무슨 짓이에요. 페이린님”
페이린의 손짓에 케실리온은 당황한 듯 의자에서 일어나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가자기 와락 껴안는 페이린 때문에 난처했기 때문이다. 간혹, 이런 돌발행동에 난처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뭐 간혹, 엄마가 하던 행동 때문에 별다른 거부감은 없었지만 숨이 막혔기 때문이다.
“후후후...역시 얘는 얘라니까. 이런 것에 당황하다니...”
“그런...”
갑작스런 페이린의 행동에 라나는 굳은 표정을 지었지만 페이린의 웃음에 파 묻혀 버렸다. 물론, 라나는 페이린의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 찻잔에 차를 따르는 것으로 일단락 되어 버렸다.
“질투하는 거냐? 라나...”
“흥...페이린님, 너무 케실리온을 괴롭히지 마세요. 싫어하잖아....꺅”
삐졌다는 듯이 코웃음을 친, 라나의 표정에 장난기가 발동한 것인지, 페이린은 타깃을 바꿔 라나는 마구 껴안기 시작했다. 워낙 장난을 좋아하는 페이린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난감하게 만드는 것을 낙으로 삼는 것 같았다.
“에에...”
페이린의 무대뽀 정신에 압도당한 라나는 다시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뭐 어찌 되었건, 페이린은 기분 좋다는 듯이 블랙 티를 단숨에 삼켜버리고는 쿠키를 와그작 씹어댔다.
“언니도 참...너무 시끄러운 거 아니야...이렇게 조용히 차를 마시고 싶은데...”
페이린의 말에 뻥진 것은 라나와 케실리온이다. 그렇게 사람을 당황하게 만들어 놓은 장본인이 조용히 차를 마시고 싶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페이린님의 말에 동의 할 수 없네요.”
“흐응? 아직도 정신 못차렸어? 라나.”
“그, 그런!”
라나의 말에 다시 굳은 표정으로 돌아서는 페이린의 모습에 라나의 표정은 급속히 어두워졌다. 케실리온은 그런 라나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이 손을 살짝 잡아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후 페이린의 행동이 잠잠해지는 가 싶더니, 2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폭풍의 핵이 지나간 것처럼, 힘이 쭉 빠진 라나와 케실리온은 간만의 한가함에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참 재미있는 분이죠? 페이린님은...”
“응, 문제는 언제나 힘이 넘친다는 것이지만.”
라나는 힘들다는 듯이 고개를 흔드는 케실리온의 모습에 살짝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붉은 하늘에 비친, 케실리온의 모습에 살짝 얼굴을 붉혔지만, 서쪽으로 사라지는 태양의 햇살 때문에 화끈 거리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좋아해요.”
두근두근..
선선한 바람에 휘날리는 흑발에 라나는 살짝 입을 열었다. 어째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절로 좋아한다는 말이 나왔다. 열 살이지만, 두근거리는 마음을 아는 것인지 얼굴은 서쪽으로 사라지는 태양처럼 붉어지고 있었다.
그때, 케실리온의 말에 두근거리는 소녀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나도...좋아해.”
“아...”
라나는 뛰는 듯 한 마음이 주체 할 수 없는 것인지 촉촉이 젖어가는 눈망울이 한없이 흔들렸다.
“저기 봐...붉은 하늘로 사라지는 태양...엄마도 좋아했고 나도 좋아해...”
“그런...역시 그렇군요.”
라나는 살짝 실망했다는 듯이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바로 옆에 서 있던 케실리온이 못들었을리 없었기 때문에 이상하다는 듯이 라나를 내려다 봤다.
1차 성징을 한 뒤였기 때문에 비슷하던 라나와의 키는 현저하게 뒤바껴 있었다. 루시아 보다도 컸기 때문에 같은 또래의 아이들 보다, 배는 크다고 할 수 있는 케실리온의 키였다.
“라나? 무슨 일 있어? 눈가도 촉촉하고.”
“아...먼지가...”
케실리온은 고개를 숙이며 흐느끼듯 눈가를 훔치는 라나의 표정에 의아한 것인지 라나에게 물었지만 다시 돌아오는 말에 살짝 안심했다. 이렇게 터놓고 이야기 하는 상대도 라나가 유일했기 때문에 어디 아프다면 상당히 곤란하기 때문이다.
같은 또래라면 루시아 아가씨도 있지만, 신분의 차와 드센 성격을 맞추기 힘들기 때문이다.
꺄아~
그때 들려오는 루시아 아가씨의 비명에 둘의 어색한 분위기는 급속히 반전되어갔다. 케실리온은 어색한 침묵에 웃음을 흘리고 있었고, 라나는 다 마셔버린 찻잔을 챙기고 있었다.
“내가 도울게.”
“괜찮은데....”
힘겹게 혼자 자리를 치우는 라나의 모습에 케실리온은 근처에 놓여 있는 찻잔과 쿠키를 담은 바구니를 들고 라나를 도우기 시작했다. 워낙, 일에 숙달 된 것인지, 저절로 몸이 반응 하는 것인지는 몰라도, 찻잔을 나르는 케실리온의 모습은 능숙했다.
간단하게 모든 자리를 치운 케실리온과 라나는 한가롭게 어두워지는 밖을 쳐다보며, 일할 거리를 찾고 있었지만, 이미 아침에 다 정리했기 때문에 일거리는 하나도 없었다. 긴 시간 동안 별채의 생활을 하다 보니, 저절로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
“여! 라나, 케실리온”
“아...렌 언니!”
라나가 갑작스레 등장한 렌의 모습에 반가워하며 별채 밖으로 뛰어 나가고 있었다. 기사다 보니, 훈련시간도 있기 마련이기 때문에 이처럼 오후가 되어서야 별채로 돌아오는 것이다. 물론, 아가씨의 호위가 우선이지만 공작가라는 환경 때문에 그렇게 일거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땀을 많이 흘린 것인지 땀 냄새가 멀리있는 케실리온에게 까지 전해지고 있었다.
“라나, 목욕 좀 하고 싶은데...물 좀 받아 줄래?”
“네!”
조금 우울해 하던 라나가 활기차게 대답하고는 욕실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평소보다 활기찬 모습에 렌은 머리를 갸웃 거렸다.
“라나...무슨 일 있나? 평소보다 활기차네. 뭐 좋겠지.”
티타임을 즐기던 곳에 털썩 주저앉은 렌은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2층에서는 무엇을 하는 것인지 궁쾅 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고, 곧 아가씨가 허겁지겁 1층으로 뛰어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문제라면 문제랄까..속옷 차림으로 뛰어 나오는 모습을 하고 잔득 겁에 질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헉...헉, 악녀! 도망을...”
가쁜 숨을 토해내며 내려오는 아가씨의 모습에 렌은 경악했고, 케실리온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무슨...옷은 어쩌고 그런 모습이십니까!”
“렌! 나 좀 숨겨줘..엄마가!”
“하...또, 주인마님이십니까?”
못 말린다는 듯이 루시아를 쳐다본 렌은 근처에 있던 타월을 루시아의 몸을 가리고는 2층에서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앉혔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는 렌이었다.
“헉..헉”
루시아는 창백한 안색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도무지 진정이 되지 않는 것인지 얼굴이 시뻘게져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앞에 서 있는 케실리온은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아가씨, 왜 그러십니까?”
“......”
루시아는 대답 대신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이를 갈았다. 마치 루시아의 눈빛이 왜 질문 하냐는 듯 한 눈빛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케실리온을 노려본 루시아는 안정하게 숨을 고르고는 눈을 감았다.
“악녀야, 약녀!”
“하하...그건 좀, 다정하신 분이신거 같은데.”
“다정? 자기 취미에 대한 도구라고 난!”
말이 거칠어진다. 엄마에 대한 안 좋은 추억이 잔득 있는 것인지 질수 없다는 듯이 외친다. 눈에서는 광선이라도 뿜어질 듯 한 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아무리 딸이 좋아해도 그렇지, 몇날 며칠을 쓰다듬고, 옷 갈아입히는 것을 물론, 하녀들 까지 시켜, 옷을 입히는 것에 한도 끝도 없었다.
옷을 입히는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것을 관찰일기를 하듯이 그림까지 그리는 그녀의 취미에 이골이 났던 것이다. 게다가 관찰하며 어느 부분이 부족하다는 것까지 적어 대고 있으니, 저절로 엄마를 피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루시아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중이었다. 케실리온은 이해가 가지 않는 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 루시아...이런 곳에 숨어 있었구나.”
“싫어! 싫다고...엄마 따위 없어졌으면 좋겠어!”
“그런! 엄마는 얼마나 루시아를....”
“싫어!!!
루시아를 찾아 내려온 것인지 주인마님이 숨어있는 루시아에게 말을 걸며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하녀 무리를 이끌고 왔고, 페이린 까지 합세하고 있었다. 하지만 루시아의 발악성 발언데 살짝 뒤로 물러난 주인마님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순간, 케실리온은 루시아의 말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토록 아껴주는 엄마가 있으면서도 어리광을 부리는 그녀가 부럽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던 것이다.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손이 앞섰다.
짝!
“뭐?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넌 뭐야! 그딴 어리광은...난...난!”
케실리온은 알 수 없는 분노에 치를 떨었다. 다정하게 보이는 주인마님은 당황했다는 듯이 어쩔 줄 몰라 했고, 하녀들은 물론, 페이린, 렌까지 굳어버렸다.
“케실리온! 무슨짓이야.”
“그딴 취미면 어때서! 난 엄마가 없단 말이다!”
루시아는 갑작스런 케실리온의 행동에 쌍심지를 켜며 케실리온에게 따지듯 물었지만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루시아 역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끝끝내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별채 밖으로 뛰어 나가버렸다.
“난...엄마가 없어...”
힘이 빠진 것인지 케실리온은 털썩 자리에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자신의 행동에 의문도 들었지만,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은 없었다. 그때, 따뜻한 온기에 케실리온은 머리를 들 수 있었다.
악녀 트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