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린님, 저런 곳에서 문제가 생길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계산 착오였어. 이미지의 문제점이 그곳에서 생길 줄이야.”
케실리온의 마법 시현이 제대로 끝맺지 못한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것인지 페이린은 고개를 살짝 떨어뜨렸다. 비아냥거리는 제스의 말에도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약간 실망한 표정을 짓는 케실리온을 쳐다봤다.
마법 시현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파괴하는 것을 이미지 마지 못한것, 한마디로, 꿰뚫리는 나무토막을 상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딘가 모순이 느껴지겠지만, 케실리온은 파괴본능이 충분치 못했다. 작은 상상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질책 보다는 너무 평화에 물들어 있는 케실리온에게 약간 실망한 듯했다.
노예로 팔려올 정도였으면, 분노라는 감정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나이도 나이인 만큼 저 정도는 이해가 갔지만, 마지막의 이미지는 케실리온에게 알맞지 않은 것 같았다.
“으음, 하긴 아직 케실리온의 성격과 맞지 않을 지도.”
“안 돼! 저런 재능을 내버려 두는 것도 안 좋아. 생활 속에서 파괴 본능을 이끌어 내야 해!”
고뇌하는 케실리온에게 충고라도 해주고 싶건만, 아직 때가 아닌 것 같았다. 무언가를 부순다는 것에 떨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케실리온에게는 파괴본능을 심어 주어야 할 때 인 것 같았다.
마법의 하이라이트인 파괴가 성립되지 않는 것은 진정한 마법이 아니다. 하물며, 검술에 대한 것도 파괴본능이 없다면 허울뿐인 검술이 되는 것이다. 어릴 때 어떤 환경에서 자라 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케실리온에게는 본능을 일깨워야 한다!
“면목 없습니다.”
“아, 아니! 케실리온, 넌 아직 순수하다는 증거다. 이 스승이 너의 파괴본능을 일깨워 주마!”
페이린은 약간 불타오르는 눈빛으로 케실리온에게 외쳤다. 무언가를 부순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을 뿐, 한번 배운다면 반드시 펼쳐지는 것이 파괴의 본능이다. 인간의 피가 반쯤을 섞여 있을 테니, 본능은 충분히 잠제 되어 있는 것이다.
“이 위기를 극복 하는 방법은.....”
“분노를 느끼는 방법 입니까? 역시....”
소곤거리는 제스와 페이린의 모습에 약간 움찔한 케실리온이다. 그리고 옆에 있던 라나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이 둘을 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둘의 모습에 케실리온은 더 이상 의욕이 불타오르지 못하는 것인지, 라나에 대한 미안함이 묻어나는 표정을 지었다.
“케실리온....”
라나는 그런 케실리온을 보며 안타까운 눈으로 지켜보았다. 누군가를 해를 입히는 것은 쉽지 않다. 라나 역시, 요리를 하기 전에 약간의 미안한 표정을 짓는 것도 재료가 되는 것에 대한 연민(?)이 묻어나기 때문이었다.
장난 끼가 많아, 개미를 죽이는 어린아이들은 많다. 하지만 이 처럼 무언가 에게 해를 입히는 것에 거부감이 드는 것은 드물다. 인간의 본능은 자신이 해를 입기 전,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으로 자신의 고통을 회피하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가지고 있는 깊은 마음속의 어둠이다.
“저 아이는 너무 순수 한 것 같군요. 하하하.”
제스의 말에 더욱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케실리온이다. 순수하다. 뜻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부터 타오르는 느낌, 엄마가 죽어갈 때 보였던 눈빛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것, 그것은 상대방에게 아픔을 준다는 생각이 케실리온의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깊은 마음속의 여린 마음이 나무 장작을 부수지 못했던 것이다.
“예전에 페이린님이 하시던 말이 떠오르는 군요. 제대로 끝맺지 못한 마법은 마법이 아니다.”
쿵
그 말이 비수가 되어 케실리온의 가슴을 꿰뚫었다. 그 말에 라나는 약간 발끈 거리며 화를 내려 했지만 차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약간 수긍도 갔던 것이다. 끝 맺지 못한 요리는 진정한 요리가 아니다. 이것이 자신이 하녀 수업에서 배웠던 말이었다.
“상대방을 다치기 싫어서 마법을 못 펼치겠다...그건 약자의 변명일 뿐이죠. 안 그렇습니까. 페이린님. 마법을 순수하게 학문이라고 배우는 시기는 끝났습니다. 오직 파괴, 파괴 본능이 지배하는 것이 마법이다....이게 요즘 마탑에서 내세우는 학설이 아닙니까. 그것을 경멸해 마탑을 뛰쳐나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질끈!
“닥쳐라 제스, 진정한 마법사는 수련만으로 이루지 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의 말이 맞을 지도.”
제스의 말에 페이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과거를 회상하는 듯이 멍한 눈빛이었지만 꽉 쥐어진 주먹을 보건데, 그들의 학설에 대해 거부를 하지만 거부 할 수 없는 것이 느껴졌다.
그들의 말에 케실리온은 비틀거리며, 뒤 돌아 걸음을 옮겼다.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어떤 말을 들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속으로 라나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휘적휘적 걸어갔다.
“제스...앞으로 내 눈에 띠지 마라. 발전 가능성이 제로인 네 녀석을 상대하기 싫다.”
페이린은 라나를 이끌고 제스에게 외쳤다. 그녀의 표정은 한없이 사나워져 있었다. 싫었던 기억이 떠오르는 것인지 눈이 파르르 떨려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휘청거리며 걸어가는 케실리온에게 뛰어가는 페이린의 모습에 어깨를 으쓱한 제스였다.
“후후, 예, 전 실패한 마법사입니다. 그 학설을 경멸해, 순수 학문을 갈고 닦던 저에게 활력을 불어 넣어주시던 분이, 다시 그 학설의 길에 접어들다니. 시간은 많은 걸 변하게 하는 군요. 저 역시 알고 있습니다. 마법은 순수 학문이 아닌, 무언가를 부수고, 파괴하는 학문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제스는 자신의 잘못된 학설을 끝까지 믿어주던 페이린을 떠올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순수하게 연구를 하며 높은 경지로 올라가는 마법사는 이제 전무하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발전의 속도가 느릴 뿐만 아니라. 올라갈수록, 느껴지는 거대한 벽 앞에 주저앉을 뿐이다.
파괴의 마법이야 말로, 빠른 발전의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한 뛰어난 재능을 가진 마법사는 5서클에 머물 뿐이었다. 거대한 벽에 막혀, 도전을 포기한 마법사. 제스
* * *
“케실리온! 잠시만, 얘기 좀 하자.”
뒤에서 들려오는 페이린의 말에 케실리온은 도망치듯이 별채의 뒤뜰로 걸어갔다. 그의 뒤를 따르는 페이린과 라나의 모습에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이 답답했던지, 페이린이 케실리온을 추월해 앞을 막아섰다.
“자자, 이야기 좀 하자. 너 답지 않게 왜 침울해 하고 있어. 그깟 일 가지고 말이야.”
페이린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케실리온을 다독였지만 여전히 시무룩해 하고 있었다. 페이린은 그가 금세 의기소침한 기분을 털고 웃어 줄 것 만 같았다. 언제나 힘들어도 그런 식으로 기운을 차리던 케실리온이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웃고 밝은 표정을 짓는 케실리온이었기에 언제나 밝은 아이로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마음속 깊은 곳에 그것을 쌓아 두는 타입이었다.
“나다운 게 뭡니까.”
페이린의 말에 케실리온은 하늘을 보고 있던 시선을 내려 깔며 물었다. 마치 화라도 난 것인지 얼굴은 붉어져 있었고 목소리도 약간 거칠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페이린은 할 말을 잊은 것인지 우물쭈물했다.
‘케실리온.’
케실리온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었다. 눈동자에 옅은 수막이 형성되었다. 그제야 페이린은 자신이 무엇을 한 것인지 깨달았다.
케실리온은 언제나 웃고 있었지만, 마음을 울고 있었다. 평화롭게 지내던 자신의 엄마를 떠나 보낸 이야기를 들었을 때, 페이린 역시 쓰게 웃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저 아이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쓰디쓴 과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10살이라는 어린 소년일 뿐이다. 어른의 한마디에 상처를 입을 수 있고, 작은 행동에도 상처를 받을 수 있는 연약한 소년이라는 것을 떠올리자, 페이린은 차마 다음 말을 이어 나갈 수 없었다.
그런 페이린의 모습에 화가 난 것인지, 케실리온이 돌연 소리를 질렀다.
“네! 전 노예였습니다. 엄마를 잃었고, 피를 나눈 가족은 이 세상에서 없단 말입니다. 그리고 무서워요. 누군가가 다치는 것이! 무언가를 부수고 싶지만...부수고 싶지만.”
케실리온은 격앙된 목소리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듯이 다시 머릿속을 휘감는 이상한 기억이 자신을 고통 스럽게 만들었다.
마치 과거에 겪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과거, 누군가 괴롭힘을 당하는 모습이 생생하게 들어오자, 다리에 힘이 풀려버렸다.
털석.
“케, 케실리온?”
페이린과 라나는 놀랐다는 듯이 케실리온을 부축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온몸에 식은 땀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게다가,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더욱 당황해 했다.
“싫어, 날 더 이상 괴롭히지 마!”
페이린의 품속을 벗어나기 위해서인지, 더욱 소리를 높이며 움찔 거리고 있었다. 멍하게 변한 눈동자가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처럼, 마구 흔들리고 있었다.
“널 아무도 괴롭히지 않아. 케실리온.”
꾹...
페이린은 발작하듯이 매일 밤 악몽을 꾸는 케실리온을 떠올리고는 쓴 웃음을 지었다. 마냥 꿈인 줄 알았던 자신에 대해 약간 책망의 눈빛도 어렸다. 매일 같이 잠을 자건만, 이 정도로 부담감을 주고, 부려먹는 것에 약간 회의도 들었다.
순간 케실리온의 흔들리던 몸이 잠잠해지자, 고른 숨결이 느껴졌다.
“페이린님, 잠들었는데요.”
울먹이는 라나의 표정이 얼마나 놀랐는지를 대변해주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약간 웃음을 짓고는 케실리온을 번쩍 앉아 들었다.
“호호, 라나, 검의 축제에는 대려가 줄 테니 걱정하지 마. 케실리온의 이런 행동에는 내 책임도 있을 테니까.”
“예...”
페이린은 가볍게 머리를 쓰다듬고는 별채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신음 하듯이 들려오는 케실리온이 약간 걱정 된 탓이다. 물론, 라나도 걱정 되는 것인지 힐끔 거리며 훔쳐보고 있었다.
검의 축제, 소년이여 마법을 펼쳐라.
“나의 부탁을....”
금발의 소녀가 슬픈 듯이 중얼거리고 있다. 전혀 다른 곳, 회색빛의 거대한 탑들이 늘어선 공간에서 단 두 명, 케실리온과 금발의 소녀만이 서 있었다. 금안의 눈에서 흘러넘칠 듯 한 습기에 케실리온은 자신의 마음이 떨려왔다.
“누구야...넌.”
“잊은 거야? 나와의 약속을...”
회색빛의 거탑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붉게 변하며, 뜨거운 열기가 회색을 붉은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나타나기 시작한, 수많은 무리들, 이국 적인 외모의 사람들이 처참 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케르르륵...
싸늘한 예기가 비치는 손톱을 가지고 있는 몬스터였다. 얼굴은 삐죽 튀어나온 주둥이를 시작으로 상하로 벌려진 입에서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인간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언뜻 언뜻 비치는 몬스터와 인간의 전쟁에 케실리온은 몸이 떨려왔다.
“그만....그만! 네가 누군지 난 모르겠어.”
“흑...벌써 잊은 거야? 나와의 약속을...”
점점 갈갈이 찢겨가는 소녀의 모습에 케실리온의 몸은 부르르 떨려왔다. 금빛의 빛줄기가 몬스터는 물론, 케실리온의 몸을 휘감았다.
“그만! 제발 그만...이제 그만해, 난 네가 누군지 몰라!”
“이젠 눈을 떠...네가 누군지, 넌 나와 약속을 한, 최초의 인간이잖아?”
온몸을 휘감는 차가운 느낌에 케실리온은 몬스터를 향해, 그리고 금발의 소녀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서서히 몬스터들은 얼음조각으로 변해가고 있었고, 금발의 소녀는 슬픈 듯한 표정을 지우고 웃고 있었다.
“그래, 넌, 조금씩 깨우치고 있는 거야. 너의 힘을...”
“넌 누구야! 이딴 꿈 따위! 여긴 나의 꿈이란 말이야! 그만!”
검은 묵빛의 기운이 케실리온의 손에서 뿜어져 나가자, 작은 구슬 모양의 구가 하늘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작이었던지, 회색빛의 탑은 조금씩 무너져 내려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그 모습에 놀라며 도망가고 있었다.
수없이 떨어져 내리는 운석들, 그리고 친근하게 다가오는 사람들에 케실리온은 희미하게 눈에서 눈물이 고이고 있었다. 그들이 누군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케실리온을 알고 있었다.
“넌...나의 계약자, 절대 잊을 수 없는 잠재된 기억.”
“꺼져! 난 네가 누군지 몰라!”
은 빛과 흑 빛의 기운이 케실리온을 중심으로 뻗어나가자, 서서히 하늘은 모자이크라도 된 듯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조각조각, 변한 붉은 하늘은 피가 된 듯이 떨어져 내리며 검은 공간으로 변해 버렸다.
“빨리 너와 나의 약속을 기억하기를 바랄게...”
금발의 소녀 역시, 퍼즐이 된 듯이 조각으로 변하며 떨어져 내렸다. 약간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에 케실리온은 가슴이 아파왔다. 검은 공간이로 완전히 변한 곳에서 작은 빛이 세어 들어왔다.
* * *
“케실리온! 정신 차려.”
걱정에 가득 찬 목소리가 케실리온의 귓가에 울린다. 가는 목소리에서 슬픈게 잠긴 목소리에 케실리온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헉...헉, 난 너를 모른 다고!”
또로록.
이마에서 시작된 땀방울이, 침대의 시트를 가득 적시고 있었다. 그제야 이곳이 자신의 방이라는 것을 알아챈 케실리온은 안도의 한숨과 멍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부르고 있는 페이린을 올려다봤다.
페이린은 많이 걱정했던지, 케실리온을 꼭 안고 있었다. 끈적거리는 땀방울에 아랑곳 하지 않는 다는 듯이 케실리온을 자신의 가슴에 안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자식을 안고 있는 듯이 부드러운 감촉이 케실리온의 얼굴에 전해져 왔다.
“하...하, 또 안 좋은 꿈을 꿨네요. 죄송...”
언제나 아침은 이렇게 시작했다. 이해 할수 없는 공간에서 소녀와의 대화가 자신을 이렇게 만든 것이다. 금발의 소녀, 언뜻 느껴지는 포근한 느낌과 이질 적인 느낌에 언제나 케실리온의 몸은 땀으로 범벅 되었던 것이다.
“휴...얼마나 걱정한지 알아? 평소보다 더 심했어. 잠자고 있던 나까지 놀랐다고.”
“그러게, 왜 같은 방을 쓰시는 건지...”
마음이 진정 된 것인지, 페이린은 가벼운 표정으로 케실리온의 땀을 훔쳤다. 케실리온도 싫지 만은 안 은 것인지, 축축해진 침대의 시트를 걷어내고는 묵묵히 방을 나섰다. 언제나 아침은 빨래로 시작했기 때문에 페이린도 군말 없이 몸을 일으켰다.
“됐어. 오늘은 축제니까. 라나와 같이 구경이나 가자.”
“아...축제.”
가볍게 페이린이 마법으로 시트를 깨끗하게 만들었다. 볼 때 마다, 신기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케실리온은 부러움이 가득 찬 표정이었지만, 악몽 같은 꿈 때문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딱!
페이린이 케실리온의 머리에 꿀밤을 놓자, 몸에서는 상쾌한 느낌이 감돌았다. 침대 시트를 정리 할 때와 비슷한 느낌에 그녀가 땀으로 얼룩진 몸을 깨끗하게 만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늦는 다고, 좋은 자리는, 서둘러!”
페이린은 눈을 살짝 찡그리며, 케실리온을 재촉했다. 어느새 아침이 된 것인지, 새들이 지저귀며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여름의 막바지임에도 축제날이라는 듯이 서늘한 바람이 창가를 뒤 흔들며 찝찝했던 기분을 날려 보냈다.
간단하게 몸을 전돈한 케실리온은 예의 집사 복을 입었다. 평생 입어야 할 의복, 어떻게 본다면 언밸런스 하지만, 의외로 몸에 잘 맞는 옷이었다. 축제 때 입고 나가기는 좀 그렇지만 정장이라는 것을 볼 때, 단정한 느낌을 주었다.
흑발을 질끈 동여맨 케실리온은 모든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케실리온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목소리를 떨었다.
“왜요. 이상한가?”
“아, 아니. 잘 어울리네.”
힘이 빠졌다는 듯이 중얼거린 페이린은 평소 잘 입는 옷을 걸쳤다. 가슴이 파여, 잘보이는 옷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옷이었지만, 페이린은 곧잘 입고 다녔다. 게다가, 가슴을 살짝 가리는 브로치를 중심으로 검은 색의 패션용 망토가 뒤로 넘실거렸다.
평소부터, 짧은 스커트 모양의 치마를 입은 그녀는 한바퀴 돌고는 케실리온에게 물었다.
“어때, 이 몸의 모습이.”
“아...뭐, 늦었다면서요. 하하.”
케실리온은 약간 이상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지, 페이린을 재촉했다. 그녀는 약간 부루퉁해진 얼굴로 케실리온의 노려봤지만 군말 없이 방에서 나섰다.
* * *
같은 시각, 대 저택에서는.....
“여보! 여보! 역시 드레스를 입는 게 좋을 까요? 두 공작 까지 온다는 데, 좀 튀는 옷이 나으려나.”
“크음...당신은 아무거나 입어도 잘 어울리오.”
새벽부터 시작된 몸단장에 카논 공작은 피곤하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지만, 아루린은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여러 옷을 갈아입으며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찾기에 바빴다. 검의 축제인 만큼, 공작가의 귀족들이 대회장의 가장 눈에 뛰는 곳에 앉기 때문에 치장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카논 공작이야, 스타일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귀족들이 잘 입는 정장을 입고 있었지만, 이루린의 성화에 못 이겨, 흑발에 어울리는 푸른빛과 보랏빛이 어우러진, 캐주얼한 정장을 입었다.
그래봐야, 여타의 귀족과 다를 바가 없었지만, 아루린은 특별한 모습에 눈을 빛내며,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하하하, 슬슬 루시아도 준비를 해야 하는데 말이오. 아루린 너무 외모에 신경 쓰는 것 아니오. 언제나 난, 당신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오.”
“어머, 당신도 참. 하지만 공작가의 가문의 어머니인 만큼, 이 정도는 필수라고요!”
쿠쿵.
카논 공작은 가슴이 털썩 내려앉는 느낌이 받으며, 몇 시간이나 더, 잡혀 있어야 했다. 축제의 시작은 당연히 검술 대회였기 때문에, 참관인으로 나서는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지만, 답답함을 느꼈다.
“그럼, 부인은 천천히 하시오. 난, 루시아를....”
“그렇게는 안 되지요. 당신이 감상을 해줘야 한다고요.”
아루린의 말에 카논은 다시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그는 속으로 이런 말을 되새겼다.
‘이래서...수도에 있으려 했건만....’
카논의 잦은 외박은 이것에서 비롯되었다.
* * *
“하아아아.”
별채의 식사현장. 루시아의 긴 한숨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그녀는 식사를 하는 와중에도 여러 가지 문서를 처리하고 있었다. 이미 거의 다 끝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몇 가지 문서가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푹 고개를 숙이며 절망적인 눈을 하고 있었다.
“저기, 루시아 아가씨, 공작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검의 축제인 만큼, 공작가의 귀족 중의 귀족이 참석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렌, 난 지금 바쁘다고, 축제가 끝나면 2학기의 시작인데, 무슨 축제인지....”
렌은 아침 일찍 대 저택의 부름을 받고 잠시 다녀온 뒤였다. 렌이 본 것은 처참한 몰골로 흐느적거리는 공작의 모습에 약간 움찔 거렸지만, 자신의 임무를 잘 알고는 루시아를 데리러 온 것이다.
뭐, 케실리온이나, 페이린, 라나는 축제라는 생각에 들떠 있었지만, 렌과 루시아는 절망의 날이었다. 기사단의 대회에 참석해야 했으며, 루시아는 밀린 숙제를 처리 해야 하기 때문이다.
벌써 일주일 동안 꼬박 숙제에 매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모든 것이 귀찮아 지고 있는 시기였다. 그놈의 신입생 숙제가 뭔지 모르겠지만, 루시아는 지금 피곤한 상태였다.
“루시아 아가씨, 슬슬 축제가 시작하는데, 편하게 쉬는 것이...”
라나는 궁상떨고 있는 루시아의 모습에 약간 측은함이 들었던지, 휴식을 권했지만 루시아는 쉴 수 없었다. 이제 대 저택으로 가야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호호호! 꼬마, 우리는 즐기다 올게. 열심히 하라고!”
사심 없이 웃는 페이린, 하지만 그 미소는 루시아의 기분을 어둠의 나락으로 가라앉히기에 충분했다. 루시아는 허탈한 표정으로 페이린을 노려본 후, 렌을 따라 대 저택으로 나섰다. 식탁에 박혀있던 머리를 들며, 지긋이 페이린을 향해 저주라도 퍼부어 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
“그럼, 즐거운 축제 되십시오. 페이린님.”
렌은 살짝 페이린에게 인사를 건넨 후, 도살장으로 끌려가다 시피, 걸어가는 루시아의 뒤를 따르며, 별채에서 벗어났다.
“루시아 아가씨도 불쌍하네요. 아카데미가 뭔지...”
“케실리온 너도 장차 알게 될 거야. 아카데미를...”
“.....? 무슨 의미 입니까.”
케실리온은 페이린의 말에 약간 당황하며, 물었지만 웃음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라나는 약간 갸웃 거리며, 축제에 갈 채비를 갖추었다. 상기된 표정으로 보건데, 많이 기대했다는 듯 한 표정이었다.
검의 축제, 소년이여 마법을 펼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