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손 놔라. 더러 운 것들...”
초점을 잃어버린 눈에서 은빛의 기광이 어린다. 정신을 잃어버린 케실리온은 말을 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그의 몸과 목소리는 움직이고 있었다. 한기가 온몸을 휘감자, 주위는 어느새 케실리온에게 압도당해 버렸다.
“오랜 만에 잠을 자고 일어났더니...색마 같은...!”
“색마? 그게 뭐지? 꼬마가 어른들 행사에 끼지 말고 조용히 찌그러져 있어라.”
“하하하, 내 나이가 얼만데 꼬마라는 소리냐. 재미있구나. 2계의 존재라는 것들은...여전히.”
마치, 자신이 다른 세계의 존재처럼 말하는 케실리온의 모습에 라나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강풍이 휘몰아치자, 그곳에 서 있는 자는 케실리온이었다. 그리고 단정하게 묶여 있던 긴 흑발은 찰랑이는 자유스런 모습이었다.
어딘가 여유로움이 넘치고, 힘이 솟아나는 느낌이랄까.
“1서클이라...환생...첫 시작이군.”
가볍게 몸을 뒤튼, 케실리온은 자신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운에 약간 만족하지 못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보았던, 케실리온과 완전히 다르다. 매직 애로우를 하나를 만들기에도 벅차던, 케실리온이었건만, 5개의 매직 애로우가 의지대로 만들어졌다.
두웅...
“케, 케실리온?!”
둥실 떠오른 은빛의 화살, 포크와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진한 마나의 향기를 느꼈던 것인지, 페이린이 눈을 떴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지는 진득한 풍경. 하늘을 메우는 다섯 개의 매직 애로우에 페이린은 당황했다.
“나쁘지는 않군. 이 몸도.”
그렇게 중얼 거린 케실리온의 몸이 씻은 듯이 사라진다. 어떤 수법을 사용 한 것인지, 기척의 중심이 되어야 할, 바닥에서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파파팍!
순간 노예 상의 뒤에서 나타난 케실리온은 하늘에 떠 있는 마법을 그대로 작열 시켰다. 어떻게 안 것인지, 급소만을 골라서 공격했다. 서 있는 그대로 멈춰 서버린, 존재들은 움직여지지 않는 몸에 급속히 안색을 굳혔다.
“무슨 짓을!”
“1서클 마법은 별 다른 살상력이 없는 마법이지. 물론, 서클이 높아진다면 살상력이 높아지겠지만, 아직 이 몸은 1서클. 굳이 이것으로 공격할 필요는 없다. 마혈만 집는 다면 상대를 무력화 시키는 것도 시간문제지.”
아직도 엉뚱한 소리를 하는 케실리온의 모습에 라나는 눈을 껌벅였고, 페이린은 놀라워했다. 고도의 집중력을 요하는 것을 1서클의 능력으로 다섯 개나 만들어 내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현상이었다.
순식간에 두 명이 제압당해 버리자, 노예 상의 대장은 주춤 거리며, 검을 뽑아 들었다.
챙!
“주, 죽여 버리겠다.”
“하하하! 그 모습으로? 기본기도 덜 된 녀석이...감히 누구 앞에서 검을 뽑는 것이지?”
케실리온은 가소롭다는 듯이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사라져 가는 마법, 그에 페이린은 침음 성을 삼켰다. 어떻게 두 명은 처리했지만, 한명은 마나를 사용하는 자다. 페이린은 자신이 나서기 위해서 손을 뻗었지만, 케실리온의 행동에 눈을 껌벅였다.
“근력, 도약력, 순발력...모든 것이 떨어지지만, 커버 되는 것이 있다. 깨달음!”
후웅!
거칠게 공간을 뚫고 날아드는 검에 케실리온의 손이 좌우로 갈렸다. 노예 상의 검을 뱀 처럼 휘감고는 그대로 노예 상의 가슴을 쳐 버렸다.
퍽!
“천마소수(天魔素手)를 응용한다면 어떤 것이든 가능하다.”
평범한 어린 아이의 주먹처럼 아프지는 않았지만, 노예 상은 기분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그리고 봐주지 않겠다는 듯이 검을 고쳐 쥐고는 희미하게 검에 마나를 끌어 올렸다.
익스퍼트의 단계였다. 노예 상치고는 상당한 경지!
“오러 소드, 케실리온 뒤로 물러나! 네 상대가 아니야.”
“넌 누구지? 나의 일이다.”
페이린의 다급한 음성에 케실리온은 싸늘하게 말했다. 마치, 그녀가 누군지 모른다는 모습이었다. 그 말투에 페이린은 할 말을 잊어버리고는 입만 뻥긋거렸다. 게다가 케실리온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는 듯 한 모습이다.
“검기를 사용한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웃기지마!”
케실리온의 말에 발끈한 그는 빠른 속도로 검을 휘둘렀다. 푸른빛의 마나가 넘실거리며, 가슴으로 날아들었다. 그때, 케실리온의 손에 들려진, 작은 나이프, 고개를 자르는 검이다. 채 20센티미터도 되지 않는 작은 나이프를 들고 설치는 모습이 웃긴 것인지, 노예 상은 코웃음을 쳤다.
“하하하. 고작 고기 써는 나이프로 나를 상대하겠다고?”
“충분하다.”
아이 같지 않은 음성에 노예 상은 움찔 거렸지만, 곧, 평정심을 찾으며 검을 휘둘렀다. 일자로 날아가는 깔끔한 수법에 그는 회심의 웃음을 터뜨렸다. 이대로 날아간다면 녀석의 목을 베어 버리리라!
“안 되!”
페이린은 비명을 지르며, 마법을 펼치기 위해 마나를 끌어 올렸지만 거리상으로나 시간상으로나 늦어버렸다. 라나는 눈을 감으며 비명을 내질렀다.
캉!
작은 식용 나이프답지 않게 청명한 소리를 내지른다. 마치, 본드로 붙인 것인지, 실전용 검은 나이프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이화접목(移花接木)....상대방의 힘을 역이용하거나...중화시키는 기술이지.”
“무, 무슨!”
바짝 달라붙은 검을 때어 내려고 했지만, 돌연 그 검이 자신의 가슴을 노리자 노예 상은 검을 놓아 버렸다.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황당한 검을 다루는 방법에 그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지었다.
“후후...솜방망이 같은 주먹에 맞아야겠다. 색마!”
퍼퍼퍽!
천마소수의 수법으로 내질러지는 주먹에 사혈이란 사혈은 모두 맞아 버렸다. 온몸의 짜릿하게 전해지는 고통에 노예 상은 비명과 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지, 지옥에나 떨어져라!”
“지옥? 좋지....”
퍼퍼퍽!
짧은 타격을 할 때 마다, 집중되는 마나의 기운에 노예상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개 거품을 물었다.
‘이, 이럴 수는.....나 같은 프로가 고작 꼬마에게....’
점점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한줄기의 정신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순간 들려오는 구원의 소리에 그는 정신을 놓았다.
“공작령에서 누가 소란을 피우는 것이냐!”
쾅!
거칠게 술집의 문이 열리고 일단의 무리가 들이닥쳤다. 공작령을 수호하는 경비병이다. 그들의 품에는 포박용 밧줄과 창을 움켜쥐고 있었다. 잘 훈련 받은 것인지, 눈빛에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컥...뭐야...아직 동화가...”
케실리온은 입에서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온몸을 휘감는 고통에 그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그의 뒷말에 페이린은 이상함을 느꼈지만, 쓰러져 버린 케실리온을 받쳐 들고는 마법을 펼쳤다.
치유 마법이다.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가 굳어가며, 딱지를 만들었지만, 바닥에 쓰러지며 부딪힌, 탁자에 다시 머리를 찍어버렸다. 그 순간 활발하게 휘몰아치던 마나도 사라지며, 케실리온은 새근새근 잠을 자기 시작했다.
검의 축제, 소년이여 마법을 펼쳐라.
“하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던지, 케실리온은 긴 하품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머리에서 느껴지는 지끈거리는 두통에 약간 신음을 토했지만, 그렇게 아프지는 않았다. 홀로 방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씁쓸한 미소가 베어 나왔지만, 쓸대 없는 상상이었다.
“읏차...”
벌컥.
몸을 일으키자, 누군가 방으로 들어왔다. 자신과 비슷한 키의 여아, 갈색머리에 양 갈래로 땋아 올린 머리가 잘 어울리는 소녀였다. 그 아이는 살짝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케실리온은 밝게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지? 라나!”
“어, 어? 케실리온!”
라나는 무엇이 놀라운지,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달려와 케실리온은 끌어 앉았다. 키가 작은 라나가 끌어안는 다는 것에 약간 이상함이 느껴졌지만, 그런 데로 볼만한 상황이었다. 슬픈 음색의 목소리에 케실리온은 약간 당황해 했지만, 금세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웬 호들갑...”
“있지, 네가 무려 5일 동안이나 쓰러져 있었다구! 난 영영 네가 깨어나지 않을 것만 같아서...흑”
라나는 붉게 물든 눈에서 한줄기 물기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 아련히 전해지는 느낌에 가슴이 아파오는 것을 느낀 케실리온은 힘껏 라나는 끌어안고 잠시 동안 그 모습을 유지했다.
“5일이라니, 오늘 축제잖아?”
“바보! 축제는 벌써 이틀 전에나 끝났다고.”
케실리온의 온기 때문인지, 라나는 금방 눈물을 그칠 수 있었다. 하지만 5일간이나 잤다는 말에 그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한 케실리온은 굳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꿈이....아니었어?”
약간 떨리는 목소리에 라나는 시선을 케실리온에게 주었지만, 여전히 무언가 생각하는 모습에 케실리온의 몸을 살짝 끌어안았다. 라나는 다시 바뀔 것만 같았다. 페이린과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케실리온의 모습으로 바뀔까 두려웠다.
마치, 처음 보는 사람으로 대하던 그 눈빛, 마법과 재빠른 행동을 취하던 그 모습이 떠오르자, 두려워 졌다. 케실리온이 변할 까봐. 페이린이 누누이 말하지 않았던가. 언젠가 하프 드래곤은 본래의 성격을 잃고,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어둠이 눈을 뜬다고.
그것은 광기, 대대로 내려오는 드래곤들의 성격에 눈을 뜬다는 말에 라나는 두려웠다. 페이린은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라나에게는 그것이 진실로 들렸다. 축제 당일 보여주었던 성격하나하나가, 두렵게 느껴졌다.
부르르
“그게 나였다고?”
무엇이 두려운 것인지 케실리온은 몸을 떨고 있었다. 때 마침, 페이린이 방안으로 들어서자, 기묘한 기류가 흘렀지만, 곧 진정 될 수 있었다. 페이린이야, 케실리온의 상태를 보러 온 것이었지만, 방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둘의 묘한 모습에 굳어 버린 것이다.
“아침부터 불타오르는 구나. 너희 둘.”
“어맛!”
페이린의 말에 라나는 얼굴을 붉히고는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때서야 케실리온은 정신을 차린 것인지, 예전과 같은 밝은 눈빛으로 아침을 시작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한 것인지, 그렇게 밝은 표정은 지을 수 없었다.
“그나저나, 케실리온 네가 눈을 뜬 모습을 오랜 만에 보네. 혹시 기억 못하는 것은 아니겠지?”
“무슨 말씀을...페이린님 아닙니까.”
“휴...다행이다.”
페이린은 케실리온의 모습에 약간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올바른 대답에 표정을 빠르게 고쳤다. 축제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들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아무리 10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그 정도는 구분 할 수 있었다.
“에잇!”
퍽!
“무슨 짓을!”
“벌이다 벌! 감히 그때, 정신 차리지 못한 벌!”
페이린의 기합 성이 터져 나오고, 케실리온의 등판에 손바다이 작열했다. 둔탁한 소리가 터져 나왔고, 케실리온은 아픈 것인지 미간을 좁히며, 항의했지만 페이린의 막무가내식의 대답에 묵묵히 계단을 타고 내려 갈 뿐이었다.
‘향기롭다.’
1층으로 내려서자, 솔솔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맛있는 냄새가 전해져 왔다. 언제나 맡아 보아도 향기로운 냄새, 과거 엄마와 먹던 아침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었다. 매일 같이 빵으로만 아침을 처리하던 시절과 또 다른 느낌이었으며, 노예 상에게 끌려갔을 때, 먹던 음식과도 다른 느낌이다.
딱딱한 빵도 아니었고, 묽은 스프도 아니었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냄새의 음식들이 케실리온의 정신을 맑게 했다.
“이제야 정신을 차렸네, 케실리온.”
“아! 루시아 아가씨, 5일간 죄송했습니다.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잠이나 잤으니...”
루시아의 말에 가시가 돋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케실리온은 살짝 머리를 숙였다. 그간 밀려 있을 일과 빨래 감이 눈앞에 선 했기 때문이다. 물론, 라나가 있지만, 라나의 일도 많았기 때문에 떠넘길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식사를 끝마치고 금방 처리하죠.”
“아니, 필요 없어. 우린 수도로 갈 거야. 호호, 벌써 방학 끝인가...이제 이곳에 올 일은 5년 하고도 반 개월...”
루시아의 씁쓸한 음성에 렌은 살짝 먹던 빵 조각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된 것이다. 1학년의 2학기를 시작으로 공작령에 올 일은 없어졌기 때문이다. 수도에서 생활해야 한다.
16세 성인이 됨으로 해서,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것을 물론, 성인으로써, 귀족으로써, 여러 파티에 참석해야 하는 것이다. 귀족 중의 귀족이다 보니, 많은 초대장과 인맥을 쌓는 시기도 아카데미와 아카데미를 졸업한 시기의 파티에서 이루어진다. 이제 미래를 설계 해야 할 루시아의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렌은 한숨을 터뜨렸다.
“휴...행복은 끝이겠네요. 아가씨.”
“무슨 뜻이야. 렌! 행복은 끝이라니!”
“5년간 학교 다니랴. 귀족으로써 응당 해야 할, 파티 참석 등 여러 가지 일이 있잖습니까.”
“쳇.”
렌의 말에 루시아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진수성찬이다. 스프와 빵은 기본이고, 특별한 날 인 것인지, 통돼지를 그대로 익힌 채 내 놓은 바비큐까지, 그리고 야채샐러드나, 음료 같은 것 들이, 식탁의 다리를 휘청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럼 약 5년간 이 별채도 저 혼자 있어야겠군요. 뭐 제 일이니, 걱정은 없습니다.”
“무슨 소리야. 같이 올라가야지.”
“예? 무슨...저는 별채를 관리하는 집사입니다만....”
“아 몰라! 넌 그저 나의 시종일 뿐이야. 시종!”
루시아의 말에 멍한 느낌을 받아야 했지만, 그렇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이라도 들었던 것인지, 콧잔등이 시큼 거렸다. 이별에 대한 아쉬움과 슬픔이 교차했건만, 장난치듯 말하는 루시아 아가씨의 말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축제는 어떻게 됐습니까. 제가 오랫동안 잠을 자서...하하.”
“아, 케실리온은 못 봤던가? 라일 단장님의 우승으로 끝났지. 일도 많았고...”
케실리온의 물음에 렌 경은 지친다는 표정을 짓고는 차를 벌컥 벌컥 입에 털어 넣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다지 재미있는 일은 없었지만, 이야기 해 줄게.”
렌은 살짝 기억을 더듬는 다는 듯이 별채의 천장을 올려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모습을 본다면, 연약한 레이디의 모습이었다.
푸른색의 짧은 머리와 기사답지 않게, 하얀 손목이 한번 흔들리고는 이야기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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