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쯧쯧, 여자의 질투란...”
케실리온은 겉으로 그런 말은 했지만 속으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 구절을 떠올렸다.
[어쩌면 비운의 후궁이라고 제목을 지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난 비운의 영웅이라고 하고 싶다. 그 엄지손가락만 한, 돌 속에 갇혀 버린 왕의 문장은 그 영웅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 돌의 이름은 ‘페덜의 돌’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지금도 어딘가에 잠들어 있다. 왕의 후손에게 내려진, 왕의 상징이 된 페덜의 돌은 복종과 속박을 상징한다.]
‘그럼...그 마령석이라는 것이...페덜의 돌이란 말인가!? 그렇단 말이지...’
케실리온은 그제야 모든 것이 풀렸다는 듯이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레딕에 대해서 떠올리고 있었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짧은 진동에 케실리온은 가슴을 한번 쓰다듬었다.
처단의 검, 퍼니쉬(Punish)
도서관 지기인 엘제이에게 이 두 책을 받고 난 후, 밤이었다. 케실리온은 약간 고민하는 눈빛으로 손바닥에 올려져 있는 마령석을 내려다봤다. 아니, 페덜의 돌이라고 불러야 하나?
레딕에게 받은 구슬이 ‘페덜의 돌’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돌을 포기하기 하기에는 너무나 유혹적인 기운을 품고 있었다. 때문에 케실리온은 약간 흔들리는 눈빛으로 그 돌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복용은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직접 뽑아 쓰는 수밖에...’
에레노아는 이미 잠에 빠진 지 오래였다. 그만큼 늦은 시간이었고, 벌써 세상은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돌에서 묘하게 검붉은 빛이 감도는 것을 본, 케실리온은 양손으로 그 돌을 감싸 안았다.
지이잉-
케실리온의 손으로 기운이 모여들수록, 그 돌은 짧은 공명음을 토해내고는 부르르 떨어 댔다.
‘흡혈마공(吸血魔功)... 물질을 매개체로 기운을 뺏어 오는 것은 비슷하다. 꼭 피를 이용할 필요는 없겠지...’
케실리온은 흡혈마공의 특성인 피를 갈취하는 것을 고려하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지옥에서의 경험을 살려 흡혈마공을 이용해, ‘페덜의 돌’ 속에 들어 있는 기운을 빼내기로 결정했다.
그 기운을 거부하겠다는 듯이 몇 차례 부르르 떨던 돌도 금방 잠잠해져 버렸다. 손에서 뻗어나간 기운이 돌을 잠식해 간 것이다.
우우웅!
돌은 케실리온을 거부하겠다는 듯이 손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었지만, 몸속의 내공을 이용해 단단히 잡고 있던 케실리온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것을 잘 아는 것인지, 돌에서 뿜어지는 한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음기를 주로 쓰는 케실리온은 손에서 느껴지는 한기에 감각이 무뎌지고 있었다.
스스슷
워낙 큰 한기였기 때문인지, 케실리온의 손에서는 때 아닌, 한기에 방안은 점점 추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운을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유혹적인 기운에 흡혈마공을 시현을 중단 할 수 없었다.
‘크으윽, 엄청난 한기군... 이게 레딕의 기운이란 말인가?’
생각하지 못한 한기였다. 얼마나 이곳에 기운을 중첩 시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대단한 기운이었다. 아마 최소 1갑자 정도의 강한 기운일 것이다. 뭐, 이곳의 검사들은 무식하게 기운을 쌓고 다니기 때문에 1갑자의 기운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모를 것이다.
한 줌의 내공으로도, 산을 몇 개 타며, 검기를 몇 줄이나 뽑을 수 있던가.
자멸자생(自滅自生)!
자기 자신을 죽여!
자식자사(自食自死)
자신을 죽여 자신의 몸을 취한다.
혈흡자흡(血吸自吸)
피를 취해 자신의 것으로 흡수한다!
‘한기로 몸을 죽여... 나 자신의 기운을 재정립한다.’
케실리온은 자신의 몸으로 침투하는 한기를 내버려 두었다. 이것이 흡혈마공의 기초! 기운으로 자신의 몸을 죽이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기운을 다시 흡수함으로써, 기운을 쌓는 것이다.
푸시시..
그것을 실행하겠다는 듯이 케실리온의 온몸은 한기로 휘몰아쳤다. 마치 얼음처럼, 마치 겨울처럼... 차가운 기운이 케실리온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우웅... 추워, 케실리온! 문 닫아... 수련도 적당히 하라고. 그러다 몸 상해.”
에레노아의 음성이 방안에 울려 퍼졌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더욱 사나운 한기만 뿜어 질뿐이었다. 사실, 에레노아도 기사가 되기 위해 밤새 공부를 한다. 예법, 역사 등, 여러 가지 공부를 병행하며 늦게 자는 아이였다.
하지만, 케실리온은 매일 같이 심법수련을 밤새 하기 때문에 창문을 열어 놓고 지내는 것을 잘 아는 에레노아였기 때문에 잠꼬대 같은 소리를 하고 있었다.
벌떡!
“제발, 그만 하라니까!”
이불을 끌어 앉고 잠을 청하던 에레노아는 참을 수 없는 한기에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고는 거칠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뭐, 뭐야... 너! 무슨 짓을...!”
에레노아는 가부좌를 취하며, 페덜의 돌을 감싸 쥐며 눈을 감는 케실리온의 모습이 보였다. 가부좌야 매일 같이 보고 있었기 때문에 신기한 것은 없었지만, 온몸이 얼어붙어 버린 것처럼 시퍼레진 모습은 가히 보기 좋지 못했다.
계속해서 뿜어지는 한기에 에레노아는 몸을 한차례 떨고는 케실리온의 곁에서 멀어졌다. 그 추위에 자신마저 얼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흡혈마공이니라.’
흐으읍-
온몸의 지배권이 한기로 넘어가자. 케실리온은 다시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마구 날뛰는 기운을 하단전으로 인도하기위해 기맥(氣脈)의 지배권을 다시 정립했다. 흡혈마공을 익히기 위해서는 많은 수련이 필요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이곳에 왔을 때부터 사용할 수 있었다.
아마, 하프 드래곤에게 생기는 1차 성징이라는 것이 크게 작용한 것 같았다. 하프 드래곤에게 있어서 1차 성징은 허물을 벗는 것과 비슷했다. 아마,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한 임시방편일 것이다.
스르륵...
차가운 내공이 기맥을 따라 움직이자. 케실리온은 마령심법으로 구결을 교체했다. 특별한 구결이 없는 마령심법은 느낌대로, 익숙한 길을 통해 마구 날뛰고 있는 기운을 인도하고 있었다.
순행과 역행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생각지 못하게 많은 기운이 모여 있다. 한 번에 다 흡수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천천히, 느긋하게 흡수하는 거다.’
케실리온은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900년이 넘게 알아온 일이다. 너무 과하면 적은 것보다 좋지 못하다는 것을 인생의 깨달음을 통해 알아 온 것이다.
너무 과해도, 너무 적어도 좋지 않은 것이 기운이다. 적당히, 천천히, 그리고 육체가 받쳐주는 대까지 흡수하는 것이 좋다. 자칫, 너무 과한 기운을 흡수한다면 육체의 붕괴가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스스슷!
수십, 수백! 기운이 온몸을 타고 순행과 역행을 거쳤을까. 점차적으로 하단전을 메우기 시작한 기운은 하단전을 넘어, 중단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기운의 포화... 너무 과한 기운이 하단전을 메우자, 기운이 중단전을 침범한 것이다.
아직, 하단전과 중단전의 길을 연결하지 못했기 때문인지, 기운의 유동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기운의 포화다... 이대로는...!’
케실리온이 수용 가능한 기운을 넘어서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하단전의 기운만 3갑자에 달할 것이다. 반 갑자의 기운이 반 갑자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기운이었다. 이런 무식한 기운이 담긴 ‘페덜의 돌’을 복용했다면 꼼짝하지 못하고 레딕의 부하가 됐을 것이다.
영원한 노예로... 벗어나지 못할 늪에 빠졌을 것이다. 그것을 떠올리자 분노가 치솟았다.
‘꼼짝하지 못하고 당한다...! 신궐혈(神闕穴)... 그리고 연액혈(淵腋穴)...그리고 중단전(中丹田)’
하단전과 중단전의 길을 뚫기는 쉬웠다. 과거 해보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몸속을 막고 있던 기맥이 대부분 뚫려있었기 때문인지, 중단전과의 연결을 쉬웠다.
“케실리온... 뭐하고 있어... 눈 좀 떠봐.”
에레노아는 걱정되는 것인지 케실리온에게 다가가며, 손을 뻗었다. 알게 모르게 한기가 그렇게 뿜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그러진 한기에 용기를 낸 것인지 에레노아는 케실리온에게 손을 뻗었다.
덥석...!
울컥- 푸웃!
케실리온의 입에서 붉은 피가 뿜어졌다. 그것은 에레노아가 케실리온에게 손을 가져다 댔기 때문이다. 아무리 케실리온의 마령심법이 안전하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마공이었다.
‘에, 에레노아인가? 아니면... 레딕?“
케실리온은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지는 것을 느꼈다. 애써 진정시켜놓은 기운이 들끓기 시작하자, 그것의 막기 위해 입에서는 피(血 : 피혈)를 쏟아 낸 것이다. 그리고 중단전의 기운이 완충작용을 하자. 그렇게 심한 내상은 입지 않았지만, 기껏 쌓아 놓았던 중단전의 기운이 날아가 버렸다.
“케실리온! 야, 눈 좀 떠봐...”
번쩍!
눈을 뜨지 않을 것 같던, 케실리온의 눈이 번쩍 떠졌다. 은빛의 섬광에 뒤로 넘어진 에레노아는 눈을 찌푸렸다. 너무나 생생한 살기였다. 자신을 죽일 듯이 쏘아낸 안광에 넘어진 에레노아는 한차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명히... 내가 마나 수련을 할 때는 건드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당연한 이야기다. 하단전을 메운 3갑자와 중단전을 채우고 있던 4개의 고리가 3개로 줄어 버린 것이다. 그래 봐야 하나의 고리에 기운을 축적시키는 것이 다였지만, 안타까웠다.
우우웅!
“그건 뭐야...?”
손바닥에서 ‘우우웅!’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페덜의 돌일 것이다. 하지만, 손바닥에서 은빛으로 빛이 나는 구슬을 보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케실리온의 것이라는 것처럼, 얌전히 손바닥에 안착해 있었다.
“네 녀석이 상관할 일이 아니다. 꺼져라.”
“칫... 기껏 걱정해 줬더니! 하지만, 너무한 거 아니야? 그 정도로 한기를 뿜어내니까 잠을 잘 수가 없잖아.”
에레노아의 투덜거림에 케실리온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보며, 란델 아카데미의 풍경을 감상했다.
팟- 스스슥!
“침... 입자?”
케실리온은 이질 적인 기운이 란델 아카데미를 스쳐지나갔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중얼거렸다. 기운의 상승으로 오감의 능력이 상승 한 것이다.
처단의 검, 퍼니쉬(Punish)
여전히 사위가 어두운 밤하늘, 뱀파이어 로드이자, 아카데미의 학생인 레딕은 교장실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의 발걸음은 보통 때와는 다르게 급하다는 듯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추기경 회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런 건 곤란합니다.”
레딕의 표정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짜증이 깃들어 있었다. 빠르게 걸어왔기 때문인지, 그의 목적지인, 카이룬 공작의 집무실에 도착 할 수 있었다. 물론, 더 이상 이곳에 발걸음을 해서는 안 되지만, 아카데미의 침입자가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카이룬 역시 알고 있겠지만, 일단, 녀석에게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엄연히 이곳은 녀석이 관리하는 곳이다. 아무리 제1 추기경이라고 한들, 란델 아카데미에서는 녀석의 말을 존중해야 한다.
집무실 앞으로 도착하자, 레딕은 문을 거칠게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 하나의 기운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덜컥-
“카이룬 나, 레딕이다.”
레딕은 거칠게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의 표정은 짜증이 치솟았기 때문에 예의를 차리며 방문을 두드릴 정도로 마음이 너그럽지 못했다. 얼마나 급하게 왔던지, 교복이 밖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붉게 물든 레딕의 표정으로 보건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카이룬!”
그그그극-
카이룬 공작의 대답이 없자, 레딕은 다시 소리쳤다. 그때, 책장에서 기이한 소리가 들려오며, 카이룬의 모습이 집무실에 비쳐졌다.
“레딕... 분명히 이곳에 오지 말라고 했을 텐데?”
카이룬 공작은 애써 레딕의 사나운 표정을 무시하며, 거칠게 레딕에게 소리쳤다. 약속대로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하던 레딕이 이곳에 발걸음 한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카이룬은 제1 추기경에 대한 예의라고는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느끼지 못한 건가? 네 녀석!”
“뭘 말하는 거지?”
카이룬 공작은 짐짓 모른다는 듯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며 레딕에게 응수했다. 그 모습이 답답했던지, 레딕은 좀처럼 보이지 않던 노기 어린 표정으로 카이룬에게 소리쳤다.
“마나의 향기! 침입자 말이다.”
“그다지...”
카이룬 공작은 레딕의 말을 의도적으로 흘리며, 레딕이 돌아가기를 원했다. 자신이 가장 지체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듯이 이래라저래라 하자, 카이룬 역시 노기를 들어내며 소리쳤다.
“추기경이 네놈 뜻대로 돌아가는 줄 알고 있나? 레딕! 단독으로 움직이는 것도 끝이다.”
“단독? 무슨 소리냐.”
“페덜의 돌...! 이건 회의를 거치지 않고 사용하는 것은 추기경 회를 능멸하는 일이다.”
카이룬의 말에 레딕의 표정을 순간 굳어졌다. 하지만, 능청스런 표정을 유지하며 모른다는 말을 했지만 오랜 연륜에서 뿜어지는 경험 때문인지, 카이룬은 레딕의 말을 무시했다. 그렇다고 레딕 역시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카이룬의 말을 곱씹던 레딕은 조용히 뇌까렸다.
“그래서... 녀석을 끌어들인 것인가? 나의 약점을...? 죽고 싶나, 카이룬.”
“규율을 어긴 자에게는 규율의 검을... 규율을 준수한 자는 자비의 검을...”
“쿠쿠쿡,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카이룬. 언제 네놈의 목을 따 버릴지 모르니까.”
레딕은 교장실의 문을 거칠게 열어젖히고는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 무례한 행동에도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작게 손을 흔들었다.
“섀도우, 나와도 된다.”
“오랜만입니다. 만월(滿月)의 러그(Rough)”
카이룬의 그림자로부터 솟아오른 자는 다름 아닌, 섀도우였다. 그림자와 그림자를 타고 이동하는 섀도우는 암살과 추적이 뛰어난 자였다. 그는 달의 일족에 해당하는 자였다. 혹자는 그림자 일족이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림자는 엄연히 달의 일족이다.
그림자 일족은 달빛에 의해 능력이 향상되지 않는다. 어떤 달이든, 그들의 힘은 축소되거나. 강해지거나 하지 않는 중성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그 누구보다도 강하지 않지만, 그 누구보다도 약하지 않은 종족이 그림자들이다.
“레딕이 잘도 제 물건을 훔쳐갔더군요.”
“페덜의 돌... 어디에 쓸 생각이었지?”
“글쎄요. 하지만, 저에게는 중요한 것이라고 해야겠군요. 그리고 우리 추기경 회에서도 말입니다.”
섀도우는 짧게 대답하고는 그림자 속으로 동화되어 갔다. 그때, 섀도우의 목소리가 짧게 교장실에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웃고 있는 목소리였다.
“처단의 퍼니쉬를 만났습니다. 아직... 애송이더군요.”
섀도우의 말에 카이룬 공작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워낙 큰 웃음이었기 때문에 교장실 밖으로 퍼질 정도였지만, 섀도우가 펼쳐 놓은 그림자 장막에 막혀 소리는 퍼지지 않았다.
“빠른 시일 내에 답을 기다리겠네. 규율을 어긴 자에게는 처단의 검을...”
“규율을 준수한 자에게는 자비의 검을...”
“레딕을...”
“처단하겠습니다.”
섀도우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고, 카이룬 공작은 밝은 표정으로 아카데미의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 뒤로 짧은 반짝임이 있었지만 미처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심지어, 추격술과 암살술이 뛰어난 섀도우마저 눈치 체지 못하고 있었다.
“제가... 일부러 더러운 개의 냄새가 풍기는 그곳으로 갔겠습니까? 후후후.”
레딕은 스산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곁으로 날아오는 한 마리의 박쥐가 그의 망토자락에 들러붙었다. 그리고 등을 타고 올라간 박쥐는 레딕에게 속삭였다.
찍... 찍찍!
“호오... 처단의 검을 들겠다는 말입니까.”
레딕은 뜻밖의 소식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박쥐를 어둠이 깃든 밤하늘로 던져 올렸다. 레딕의 주위를 맴돌던 박쥐는 늘어진 날개 죽지를 퍼덕이며 달빛을 뚫고 어디론가 날아가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저에게는 처단(處斷)의 퍼니쉬(Punish)가 있습니다. 하하하!”
레딕의 음성이 란델 아카데미의 복도에 울려 퍼졌지만, 그 누구도 그 음성을 듣지 못했다. 잠시 멈춰 있던 걸음을 빠르게 옮기며 레딕은 사라져 버렸다.
* * *
“섀도우 로드를 뵙습니다.”
“목표는...?”
“오감이 뛰어납니다. 동화되어 있던 곳을 간파하더군요.”
섀도우는 표적 케실리온의 말이 나오자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리고 생각지 못한 변수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처리 할까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네, 내가 직접 처리하지... 넌 그저, 레딕의 동태를 살펴라. 박쥐 일족에게 빚진 것도 있으니... 그림자 먹기를 허용하겠다.”
“감사합니다! 흐흐...”
섀도우 로드의 말에 검은 그림자는 짧게 출렁이며, 가까운 나무에서 투영된 그림자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림자를 통해 수십, 혹은 수백의 무기가 떠올랐다. 그는 단검을 하나 들고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섀도우 웨폰(Shadow Weapon)”
섀도우는 자신의 무기를 꺼내기 위해 자신의 수하와 마찬가지로 그림자에 손을 뻗었다. 달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오직 검은 빛만 가득했다. 하지만, 땅바닥 속에서 갇혀 있듯이 섀도우의 움직임에 따라, 혹은 달빛의 빛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의 보였다.
이것이 그림자 먹기, 인간을 그림자로 만들어 버리며, 그 인간의 모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낮에는 인간의 모습으로, 밤은 달의 종족으로 변하는 것이, 그림자들의 습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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섀도우 웨폰, 죽인 상대의 무기를 그림자로 만들어내는 기술이다. 이건, 섀도우들의 취미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림자 먹기, 2계에 사는 모든 존재에게 해당하는 일이다. 그림자 일족보다 약한 존재의 그림자를 먹어, 그 행새를 한다. 자신보다 강하다면 그림자를 먹을 수 없다.
* 정신이 혼란스러울때나 두려움이 많을 때, 등등 같은 혼돈의 상태...일때..*
그림자를 먹으면, 그 인간의 모습을 훔쳐오는 것이다. 그 외의 능력은 알려지지 않았다.
간혹, 도플갱어라는 그림자 일족도 있다. 그들도 그림자 일족의 일원이다.
처단의 검, 퍼니쉬(Punish)
“케실리온 무슨 소리야. 침입자라니...!”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았다. 케실리온이 본 것은 희미한 일렁임이었다. 하지만 잘몬 본 것이 아니다. 오랜만에 돌아온 오감은 정확했다. 아니, 오감이 상승한 것이 아니라. 내공이 상승함으로써, 그 거리가 늘어난 것이다.
내공을 주위로 퍼트리면서 결계 같은 것을 형성하는 것으로 오감을 상승시키는 것이다. 몸속의 혈도들을 다 열어, 기운을 받아들이는 식으로 주위에 있는 공기의 진동, 마나의 진동 등을 이용해 상대의 기척을 파악하는 것이 오감이다.
케실리온은 미심쩍은 눈으로 기척이 사라진 방향을 노려봤다.
‘아무래도 이상해...’
불길한 느낌도 들었지만 케실리온은 심신이 약간 피곤했기 때문인지, 군말 없이 침대에 누워버렸다. 케실리온이 침대로 들어 누워버리자 사위는 삽시간에 어둠으로 변해버렸다. 그리고 침묵
뒤척, 뒤척...
에레노아는 잠이 오지 않는 것인지 뒤척거리며 몸을 비틀고 있었다. 케실리온에게는 신경 쓰이는 일은 아니었지만, 잠깐 동안의 심마(心魔, 마음의 악마)로 마음이 뒤숭숭한 상태였다.
그것이 모두, 에레노아의 탓이라고 생각하니 화도 나기도 했지만, 어린아이를 상대로 화를 내봐야, 돌아오는 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눈만 감고는 무공에 대해 생각했다.
“저기... 케실리온! 자고 있어?”
케실리온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시선을 에레노아 쪽으로 향하게 했다. 은은하게 뿜어지는 안광에 에레노아는 살짝 당황한 듯 보였지만, 금세 표정을 고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피 토한 거 괜찮아?”
괜한 것을 물어보고 있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한 것이다. 뭐라고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조용히 눈을 기숙사의 천장으로 향하게 했다. 구석진 기숙사라 그런지, 약간 칙칙한 느낌도 들었지만, 지옥에 비해서는 천국이다.
“응? 괜찮으냐고.”
말 할 때까지 말할 작정일 것이다. 어린 아이일수록, 관심을 끌기위해 끝까지 말하는 습성이 있으니, 오랜 연륜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문득, 환생을 했을 자신의 부인들과 아이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손녀, 하윤까지 떠오르자 약간 애틋한 느낌도 들었지만 금방 생각을 고칠 수 있었다. 이미 지난생각을 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없었다.
“괜찮다.”
간결하고 짧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에레노아는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왜 그렇게 수련에 집착하는 것인지 물어보고 싶어졌다.
“케실리온, 왜 그렇게 수련에 집착해? 나도 뭐... 별다를 것은 없다고 보지만, 넌 좀 심하잖아. 몸도 생각해야지.”
“약속이다. 지금 어딘가에서 즐겁게 있을 녀석... 이 세상에서 누구보다 강해지는 것. 그것이 녀석과 한 약속이다.”
케실리온은 에레노아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케실리온의 음성에 에레노아는 살짝 몸을 떨었다. 이유는 케실리온의 음성이었다. 애틋함과 즐거움, 애정... 추억 그리고 분노와 살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래, 풍운지와 약속했지, 죽는 순간까지...나를 위해.’
지옥에 있을 때 일을 떠올리자 괜스레 침울해졌다. 그 마음을 아는지 에레노아 역시 입을 다물어 버렸다. 하지만 곧 다시 입을 열며, 케실리온을 달래겠다는 듯이 웃으면서 자신에 대해 이야기했다.
“하하하! 사실 난....”
에레노아의 말에 침대에 누워있던 케실리온은 몸을 옆으로 살짝 비틀었다. 약간 관심이 생겼기 때문이다.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우자, 옆구리 쪽에서 작은 예기(銳氣, 날카로운 기운)가 느껴졌다.
슈욱!
그것을 느끼는 순간, 케실리온의 침대에는 작은 단검이 틀어박혀 있었다.
“무, 무슨 일이야.”
스슷!
케실리온은 빠르게 몸을 에레노아 쪽으로 날렸다. 그리고 손을 들어 에레노아의 입을 틀어막으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입을 달싹거리며 에레노아에게 전음(全音, 소리를 전하는 방법)으로 당황해 하는 녀석을 달랬다.
=조용히 해라. 침입자다. 어떤 소리도 내지마라. 알겠으면 머리를 끄덕여.
끄덕
케실리온의 지시에 에레노아는 몸을 떨면서도 머리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안심이 된 것인지 케실리온은 살며시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때내며 녀석과의 거리를 벌렸다.
=목표는 나다. 넌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해라.
“이봐, 목표는 나겠지. 그렇다면 따라와라!”
팟!
케실리온의 신형은 활짝 열려 있는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그 뒤를 따른다는 듯이 암살자 녀석도 밖으로 뛰어내리는 모습에 케실리온은 약간 안심했다.
‘뛰어난 암살자다. 그 정도 거리까지 다가와서야 눈치 채다니...’
일정량의 기운을 되찾지 못했다면 꿈틀하기도 전에 죽었을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니, 묘하게 흥분되기도 하며, 분노도 일어났다. 케실리온에게는 패배 할 수 없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어떻게 됐든, 상대해주지.”
케실리온에게는 자신의 몸에 맞는 검이 없다. 그렇다고 펼치기 어려운 만오의 검법도 펼칠 능력이 되지 않는다. 아직 실전에서 쓸 만큼 정교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육합권과 소수마공, 천마소수 같은 체술은 실전에서 쓸 만큼 단련이 되어 있다.
문제는 얼마만큼 몸이 따라 주는가. 파괴력을 낼, 결정타를 먹일 근력이 되는 가였다. 스피드라면 내공과 보법으로 어느 정도 커버가 될 것이다.
“쿠쿡, 재미있군요.”
암살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레딕과 비슷한 느낌의 녀석이었다. 그러자 살짝 기분이 나빠졌지만, 평정심을 깨는 것은 패배를 의미한다. 의미 없는 도발에 넘어갈 정도로 케실리온의 실전경험은 낮지 않았다.
“당신은 줄을 잘못 섰습니다. 안타깝군요. 하필이면, 더러운 신월(新月, 초승달)에게 몸을 의탁하다니, 안타깝습니다.”
“싸움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다.”
케실리온의 낮은 으르렁거림에 암살자의 이상한 옷자락이 한 차례 펄럭였다. 두건과 어깨, 양팔에 달려 있는 긴, 천이 바람에 따라 흩날리고 있었다. 망토와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지만, 자유와 힘이 느껴졌다.
“좋습니다. 저의 이름은 섀도우(Shadow) 기억해 두십시오.”
녀석은 자기 자신을 섀도우라고 밝혔다. 하지만 케실리온의 관심은 거기에 없었다. 녀석이 움직일 방향과 어떤 수법으로 공격을 들어 올 것인지, 그것에 대한 것이다.
전투를 많이 한다면 머릿속에 수십 가지에 달하는 공격루트가 머릿속에 그려진다. 하지만, 그것도 몸이 따라 줘야 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준비가 되셨군요. 그럼... 섀도우 웨폰(Shadow Weapon)”
스륵... 챙!
녀석은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왼쪽에 있는 그림자를 향해 손을 뻗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아카데미의 그림자. 그 그림자가 일렁이자, 그곳에서 수백 가지의 무기들이 그림자 속에서 떠올랐다. 그 중, 녀석은 짧은 단검을 꺼내 들고 있었다.
‘단검, 투척용이나, 근접에 능통한 녀석이다. 발걸음을 봐서는 일정한 수련을 거친, 프로..’
케실리온은 녀석의 움직임과 무기의 선택을 보고 생각했다. 녀석은 암살에 있어서는 프로였다. 하지만, 간과한 것이 있다. 암살자의 프로일지는 몰라도, 수많은 전투를 경험한 프로는 눈앞에 있다는 것을, 한 줌의 내공으로도 수십의 무림고수들을 상대해온 케실리온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끝마치자 녀석은 곧, 무릎을 살짝 굽히며, 양쪽 발을 바깥쪽으로 비틀었다. 아마, 달려들 생각인 것 같았다.
팟!
녀석이 달려려들었다. 하지만 순간, 녀석의 신형이 씻은 듯이 사라져버렸다. 이건 보법의 문제가 아니었다. 완벽하게 기척이 사라진 것이다. 케실리온은 침착하게 내공을 순환 시키며 주위를 경계했다. 이건 정신력과 경험의 문제였다.
처단의 검, 퍼니쉬(Puni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