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이잉- 뚝...
찰나의 시간이었다. 잠깐 잠깐 불어오던 바람마저 그쳐버렸다. 사위는 순식간에 조용해져 버렸다. 아카데미 내에서 울려 퍼지던 벌레며, 나무위에서 울던 새들마저 조용해졌다. 케실리온은 짧게 숨을 고르며 섀도우가 나타날 곳을 떠올렸다.
전투 경험을 미루어 보건대, 사혈이 분포되어 있는 정면의 가슴과 명치, 그리고 지속적인 데미지를 줄 수 있는 양쪽의 옆구리, 그리고 다소 위험하지만, 몸의 감각을 둔화시키거나, 굳게 만드는 후방 이 세 가지를 예상해 볼 수 있었다.
하늘에 떠있는 쌍월의 방향은 케실리온을 비추고 있었다.
슈욱!
단검이 공간을 가르며 찔러오는 것을 느낀 케실리온은 몸을 비틀었다. 예상했던 루트다! 등 뒤, 동작을 굼뜨게 하는 공격방법이다. 전투를 처음 겪는 초보라면 당해버릴 위치였지만, 케실리온은 엄연히 프로 중의 프로다.
비트는 와중에도 케실리온은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해 내공을 등 뒤로 집중했다. 이 정도라면 상처를 입더라도 금방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양손은 희미하게 소수마공(素手魔功)의 기운을 띠고 있었다.
“소용없는 짓!”
“그렇군요. 하지만... 이건 어떨까요.”
또 사라져 버렸다. 짧은 교차의 순간임에도 케실리온은 짧게 외쳤지만, 섀도우는 짧게 대꾸를 하며 그림자 속으로 숨어버렸다. 아까의 수법인지, 기척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완벽한 동화(同化, 일체가 되다.)였다.
‘똑 같은 수법,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지만... 피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케실리온은 침착하게 녀석의 공격을 기다렸다. 녀석은 짧은 공격의 순간 기척이 드러나고 있었다. 살기와 기척마저 죽이는 수법에 짧게 감탄했지만, 아직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완벽하게 살기를 죽이는 것이 암살자가 할 일이다. 녀석은 뭔가 부족했다.
슈욱!
“같은 패턴!”
녀석은 같은 패턴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옆구리를 찔러 오는 손동작, 그리고 움직임이 똑 같았다. 전투에 있어서, 같은 공격 패턴으로 이길 수 있는 자는 없다. 무공을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몇 개의 초식을 섞어서 색다른 공격 패턴을 만들어 내는 것, 이것이야 말로 전투 술의 기본이다.
케실리온은 짧게 손을 내저으며, 녀석의 공격을 처내려했다. 하지만, 녀석은 손이 세로로 살짝 흔들려, 허리를 베고 지나갔다. 긴 검흔(劍痕, 검의 상처)이었다.
푸슉... 주르르..!
“대단하군. 좀처럼 볼 수 없는 수였다.”
탁- 타타탁!
케실리온은 길게 세로로 그어진, 상처를 빠르게 타혈했다. 벌어진 상처로 흘러내리던 피는 금세 멈추고는 짧게 움찔 거리고 있었다. 피는 멈췄지만 고통은 여전한 것이다. 빠른 대처 능력에 녀석도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섀도우 롤링(Shadow Rolling)에 당하고도 그런 대처 능력이라니 대단하군요. 더러운 신월보다는 저, 흑예의 밑으로 들어오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섀도우는 짧게 감탄을 하고는 자신의 기술을 생각했다. 섀도우 롤링은 그림자 일족에게서는 고급 기술이었다. 간단한 기술이지만, 약간 고난위도의 기술이다. 처음 썼던, 가로 베기를 이용해 페이크를 넣은 것이다.
가로로 베는 척하며, 세로로 찍어 내린 것이다. 옆구리에 난 상처는 아주 심한 상처였다. 찍어 내렸기 때문에 긴 상처가 남아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녀석의 수법에 왼쪽 허리를 잘 이용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고작 그 뿐이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마영보(魔影步), 그림자는 네놈만 사용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케실리온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였다. 녀석처럼 기척을 완벽하게 사라지게 만들 수는 없었지만, 극히 적은 소리를 내며 신형이 움직였다. 아직 보법의 완성은 아니었다. 아직, 신법도 익혀야 하며, 풍운지의 보법과 신법을 익힌다면 마지막 보법을 익힐 수 있다.
풍류마신보, 이것이야 말로 만검을 펼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보법이다.
스스슷!
짧게 진각을 밟은 케실리온은 섀도우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기어코 움직인 것이다. 녀석은 재빠른 케실리온의 움직임에 그림자 속으로 숨기 위해 몸을 흩날렸다.
“하, 하이드(Hide)”
“어림없다. 네놈의 수법은 뻔하다.”
케실리온은 짧게 지각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소수마공이 깃든 주먹이 녀석의 그림자를 가격했다. 찰나의 순간이었기 때문에 녀석은 힘없이 가슴에 적중되고 말았다.
퍽!
“어, 어떻게...!”
케실리온은 녀석을 가격한 것이 아니다. 섀도우의 그림자를 향해 소수마공을 펼친 것이다. 처음에는 몰랐지만,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을 보고 녀석의 움직임을 알 수 있었다. 의외의 패널티, 녀석은 달빛의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했냐고? 지금도 나의 머릿속에는 네놈이 움직일 방향을 예측하고 있다. 어디로 움직이며, 어디를 공격하는 게 가장 좋을 까.”
“.......”
“네놈의 행동 패턴은 뻔하다. 달에 의해, 달을 의존해.... 그림자로 움직이는 것, 네놈의 기술이야 뻔하지. 정면에서는 펼칠 수 없는... 아침이 되면 극히 능력이 낮아진다.”
녀석은 케실리온의 말에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사실이었다. 밤이 되면 능력이 향상되는 것은 달의 일족에게는 뻔한 사실이다. 하지만, 낮이 되면 자연히 약해지는 것도 달의 일족이다.
그것은 뱀파이어, 그림자 일족에게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늑대족이야, 아침에도 강하니 상관없지만 그것은 지금 신경 쓸 이야기가 아니다.
“쿠쿡, 정곡을 찔렀나? 섀도우 롤링은 하이드라는 것만 간파한다면 피하기 쉬운 기술이다. 하지만, 낮에는 사용 할 수 없는 기술이지. 낮에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은 대략 하나에서 두 가지 정도. 맞나?”
“어, 어떻게... 분명, 피하기에 급급했을 텐데.”
“그런 것은 하수에게나 통할 기술이다.”
케실리온은 녀석의 기술을 모두 간파했다. 하이드라는 것은 그림자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의 이동, 이것은 달빛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이것이 녀석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약점, 달빛의 방향으로만 이동 할 수 있는 것 문제는 그 사물이 어느 방향으로 서 있냐는 것이다.
이것을 모두 간파하는 것은 약간의 관찰력만 가지고 있다면 다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섀도우 롤링이라는 것은 무기를 약간 다룰 수 있는 존재라면 다 펼쳐 낼 수 있다.
하지만, 섀도우 웨폰이라는 것은 이해 할 수 없었다. 어느 방식으로 많은 무기를 그림자 속에 감추는 것인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섀도우 웨폰이라고 했나? 신기하더군. 쿠쿡, 그래 봐야 잡기지만.”
“크... 일족의 특유 기술이다. 네놈이 알 기술이 아니야! 그림자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아공간, 인간이 쓸 기술이 아니란 말이다!”
녀석은 흥분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말로, 최고의 기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흥분은 죽음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케실리온은 살며시 보법을 펼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녀석은 무슨 생각인지, 몸이 점점 희미해졌다.
“시, 시간이...! 네놈, 언젠가는 반드시... 이 치욕을...!”
섀도우는 짧은 말을 남기고 그림자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안타까운 순간이었다. 녀석이 자신에게 암살을 시도한 것은 어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좋든, 나쁘든 레딕과 관련 있다는 것은 당연했다.
“신월이라... 역시 레딕. 당분간 네놈의 종으로 행세해주마. 하하하!”
케실리온은 점점 밝아 오는 하늘을 보며 기숙사로 몸을 날렸다.
처단의 검, 퍼니쉬(Punish)
아침은 느닷없이 찾아온다. 어제의 전투를 잊었다는 듯이 새벽의 여명은 금빛의 가루를 흩날리며 세상을 밝히는 것이다. 하지만, 케실리온의 방에서는 때 아닌, 피 분수가 몰아쳤다.
“저리 가라고 했다.”
“야! 이 상처 보라고. 이 정도 상처면 중상이야 중상!”
밤에 입은 상처 때문 일 것이다. 왼쪽 옆구리의 긴 검흔에서 흘러내리는 한줄기의 피 때문에 많이 놀랐을 것이다. 긴 상처와는 다르게 미미한 피였지만 엄청 난 상처였다. 케실리온은 말없이 거부했지만 끝끝내, 붕대를 감아 주겠단다.
하는 수 없이 케실리온은 간단하게, 1서클의 마법인 클린으로 몸을 씻었다. 짧은 전투였지만 심신이 쇠했기 때문에 1서클의 마법도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클린(Clean)”
솨아아-
신성력과 비슷한 이펙트에 에레노아는 잠깐 손을 놓았지만 차가운 한기가 몰아치자 얼굴을 찌푸렸다. 케실리온의 마법은 이상하게도 한기를 띠고 있었다. 게다가, 다른 속성의 마법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오직, 빙(氷, 얼음)속성의 마법만 용납했다.
짧은 시원함에 케실리온은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남이야 춥든 말든 상관없다는 모습이다.
“네 소원대로 붕대는 감으마.”
“소원은 무슨... 다쳤으니까. 걱정해주는 거야. 미안한 것도 있고...”
에레노아는 간밤에 있었던, 짧은 주화입마를 신경 쓰는 것 같았다. 4서클을 만들던 마나를 잃었다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이미 지난 일이다. 지금 생각해 봐야 4서클이 돌아오는 것도 아니었고, 오랜 연륜에서 나오는 기다림도 익숙했다.
도약의 실패는 더 높은 도약을 만든다고 하지 않던가.
스르륵
“가만히 있어. 상처에 알맞게 감아야 하니까.”
에레노아는 익숙하다는 듯이 케실리온의 옆구리를 몇 차례 감으며 붕대를 꼼꼼히 점검하고 있었다. 케실리온은 익숙하게 감는 에레노아의 모습을 이채롭게 쳐다봐야 했다. 녀석은 귀족이다. 귀족이 이런 일을 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눈으로 보지마. 다쳤을 때, 몰래 감아봤으니까.”
에레노아의 말을 들어보니, 녀석은 엄청난 장난꾸러기였을 것이다. 귀족이면 귀족답게 다소고니 자랄 것이지, 어찌나 억새고 실수투성이 인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검술이나 공부를 게을리 하는 것도 아니니, 딱히 말할 것도 없었다.
“그나저나... 밤에 무슨 이야기 하려고 했냐.”
“늦었어. 비밀이야.”
케실리온의 물음에 에레노아는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어제 밤에는 말 할 듯 행동하더니, 낮에는 비밀이란다. 잠깐 무슨 생각하는 지, 묶던 붕대를 부여잡고는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여자란 걸 밝힐 생각을 하다니... 나도 참.’
에레노아는 짧게 탄식을 했다. 자신을 비밀을 지켜야, 가문을 살릴 수 있으며, 정략결혼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수련과 공부에 매진해야 하는 것이다. 이상한 감정은 사치에 불과했다.
“묶을 거야 말거야. 귀찮으니까. 빨리 해결해.”
“아...”
“정신을 어디 파는 거냐.”
케실리온은 짧게 한숨을 토하고는 벗어 두었던, 교복의 상의를 챙겨 입었다. 벌써 몇 주는 지났지만 도무지 익숙하지 않는 옷이었다. 망토는 즐겨 입었다고 손 치더라도, 교복의 디자인이 약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슴 중앙에 아카데미의 엠블럼을 차야 한다니... 아무튼 케실리온은 준비를 끝마치고 기숙사를 나섰다. 워낙 일찍 준비를 했기 때문인지, 아카데미는 한산한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
조용한 분위기에 에레노아는 참지 못하는 것인지, 어색한 웃음을 흘리고는 케실리온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헤헤, 조용하다. 그치?”
“좋은 분위기군. 얼마 만에 한가한 분위기 인지.”
에레노아의 웃음에 케실리온은 짜증이 난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좋은 분위기는 맞았다. 다만, 에레노아의 시끄러운 소리에 입을 막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어젠 대단했어. 너...”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케실리온의 짧은 말에도 불구하고 에레노아는 상관없다는 모습이었다. 왜 기사에 집착하는 것인지는 몰랐지만, 그렇게 소망하니 꼭 기사가 되었으면 하는 케실리온이다. 그렇다고 수련 같은 것을 도울 생각은 없었다.
약간의 가르침 정도야 내려주겠지만...
“그 정도면 기사는 우습게보겠지?”
“설마... 어제 그 움직임을 봤다는...?”
“응, 희미하지만.”
케실리온은 간결한 에레노아의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 정도의 스피드를 볼 정도면 검에 대한 자질은 뛰어나다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동체시력이 좋다는 것으로 검의 끝을 볼 수는 없지만, 에레노아 정도의 끈기라면 충분히 기사가 될 것이다.
뭐, 케실리온의 수련 량을 따라오려면 한참이나 남았지만. 아무튼, 에레노아는 거대한 문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가 문을 열어 젖혔다.
끼리릭-
“오늘은 1등이네.”
열 살 어린이는 어린이다. 처음 온 것 정도로 좋아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그렇다고 저런 행동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저런 모습을 보이는 녀석들이 후일 크게 되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극소수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해야겠지만. 녀석은 약간 달랐다. 아직 어려서 그런지, 아침부터 단 것을 보며 침 흘리는 것은 다 똑같았지만, 진지하게 수업을 듣는 것부터 남달랐기 때문이다.
오물오물.
“좀 먹을래? 달콤한 게 맛있어.”
“거절.”
케실리온은 녀석의 말을 단박에 거절하고는 매일 즐겨 먹는 과일을 집어들었다. 언제 차려 놓은 것인지 매일 같이 아침마다 올라오는 푸짐한 밥상에 케실리온은 내심 즐거웠던 것이다.
와삭...
“너... 스타푸르츠(Starfruit)가 맛있어? 정말 쓴 과일인데.”
“왜 쓰겠나... 이건 인생과 같은 과일이다.”
“인생? 하하, 모르겠어.”
역시 어린 아이다. 인생은 쓰다. 너무 괴로워서, 죽고 싶어서 쓴 것이다. 즐거운 일도 많지만, 고통의 나날이 더 많다면 얼마나 쓰겠는가.
“인생은 쓴 것으로 인해서 참다운 인생이 되고, 희망이 있는 것이다. 난 그것을 위해 이것을 먹지.”
모양부터 범상치 않았지만 맛도 끝내주게 신맛이다. 그 신맛을 견뎌내며 매일 아침을 시작하는 케실리온은 일종의 서약과 같았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의 무력을 되찾는 것.
‘약속은 약속이다. 시간이 바뀌고, 세상이 바뀌어도 변치 않는 마음의 약속.’
케실리온은 과거를 떠올리며 그 과일을 단번에 베어 물었다. 그 모습마저 신 것인지, 에레노아는 고개를 팩 돌려버리고는 식사에 열중했다. 점점 불어나는 사람들로 인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짝짝짝!
“대단 하십니다. 케실리온. 그 인생관 잘 들었습니다.”
레딕이다. 하지만, 어딘가 초조해 보이는 모습도 언뜻 비치고 있었다. 그 능글거리는 가면 속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 지내심 궁금했지만 약간 들어나는 녀석의 얼굴에 케실리온은 미소로 화답했다.
“하하하, 그래, 무슨 일?”
“알잖습니까. 비밀이야기지요.”
레딕은 짧게 대꾸하고는 케실리온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짧은 말에 케실리온은 표정이 약간 굳어졌지만, 그 속내를 파악한 케실리온은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마령석은... 페이크입니다. 속박의 돌, 혹은 페덜의 돌이라고 하지요. 제 명령은... 절대적입니다.”
레딕은 저런 어처구니없는 말을 지껄이고는 식당을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에레노아가 끈질기게 물어왔지만 단박에 거절하고는 케실리온 역시 식당 밖으로 나갔다.
처단의 검, 퍼니쉬(Punish)
아직 새벽의 여명이 다 그치지 않은 아침이다. 란델 아카데미에는 때아닌, 안개로 인해 검술 수업은 중단되어 있었다. 물론, 오후가 된다면 정상수업에 들어가겠지만, 밖에서 하는 수업은 중단되어 있었다.
안개를 뚫고 사람의 인적이라고는 없는 아카데미의 외각으로 이동하는 둘이 보였다. 그 둘은 서로 거리를 두며 일체 어떤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앞과 뒤의 거리는 누가 봐도, 적이 서로 경계할 수 있는 거리였다.
등을 보이고 걸어가는 자는 레딕이었고, 유심히 등을 쳐다보고 있는 자는 케실리온이었다. 아침 식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이곳으로 발걸음을 한 것이다.
“명령은 절대적입니다.”
긴 침묵을 깬 자는 앞서가는 레딕이었다. 그 말을 하고는 몇 걸음을 더하고 약간의 햇빛이 드는 장소로 이동해 있었다. 다른 곳과는 다르게 햇빛이 비치는 장소, 그 장소는 여타의 학생과 동떨어지게 하고 있었다.
마치, 빛의 세계와 안개의 세계를 이어주는 곳인 마냥, 밝은 황금빛의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이런 곳에 올 정도면 중요한 이야기겠군.”
한기가 느껴지는 주위의 환경에 케실리온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살짝 내저었다.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는 안개의 한기가 케실리온을 미소 짓게 만들었다. 하지만, 웃는 표정임에도 케실리온의 시선은 레딕에게 향하고 있었다.
케실리온의 눈동자 속에는 짜증이 묻어나고 있었고 노기를 띤 목소리였다.
“명령이라고 했나? 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나?”
케실리온은 아까와는 다르게 굳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레딕에게 전해지자, 레딕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마치, 물건을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흥미롭고, 재미있는 물건!
하지만, 레딕은 그 표정을 지우며, 능글거리는 목소리로 케실리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왼쪽 가슴에 손을 올리고는 소리죽여 말했다.
스륵..
“못 믿으시군요. 후후후.”
케실리온은 왼쪽 가슴에 올려져 있는 레딕의 손을 내려다봤다. 차갑고 흰 손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어야 할, 생기는 미약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미약하게 뿜어지는 마기는 거대한 잠룡(潛龍)을 보는 듯했다.
탁!
거칠게 레딕의 손을 뿌리친 케실리온은 사납게 소리쳤다.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보건대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살기까지 흘리고 있었으니, 완벽한 분노였다.
‘이딴 연극도 잠시다.’
“뭘 믿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케실리온은 해볼 테면 해보라는 표정으로 소리쳤다. 레딕은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케실리온이 있는 곳이다. 약간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케실리온의 소리에 증거를 보여주겠다는 행동이었다.
솨아아!
앞으로 뻗어진 손에서 미약하게 마기가 쏘아졌다. 물론, 한차례 가슴에 붙어 있는 아카데미의 엠블럼에서 미약한 빛이 쏘아졌다. 마기를 정화한 것이다. 정화된 마기는 케실리온의 몸을 휘감았다.
케실리온은 그 기운을 거부한다는 듯이 자신의 기운으로 외부로부터 흘러오는 기운을 튕겨냈다. 그것도 잠시, 케실리온은 비명 같은 신음을 토해냈다.
“흐음...”
“고통을 느끼셔 정신을 차리시겠군요.”
솔직히, 케실리온은 레딕의 행동에 코웃음이라도 쳐 주고 싶었다. 전혀 고통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케실리온은 들키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에게 분근착골수(分筋錯骨手)라는 수법으로 자신의 몸에 기혈을 막았다.
분착근골수는 천마소수의 변형으로 상대를 고통스럽게 하는 타혈법이다. 물론, 지옥에서도 많이 사용한 경험이 있었다. 상대의 몸을 고문시키는 역할을 하는 고문 무공이었다.
이 무공의 가장 특별한 점은 자신에게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네놈의 장단에 놀아주는 것도 힘들군. 하지만, 내공의 완성을 위해서는...’
우두둑
뼈가 뒤틀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레딕의 행동에 맞춰진 것 같았다. 팔과 다리가 기이하게 뒤틀렸지만 묘하게도, 골격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다. 단순히 몸의 기혈을 몇 번 타혈 했을 뿐인데, 온몸이 고통스러웠다.
뼈가 뒤틀리기 시작하자, 몸속의 내공이 흐르는 기혈도 뒤틀리는 느낌이 들었다. 사지 근맥이 뒤틀리는 느낌에 고통이라면 이골이 난 케실리온도 미약한 신음을 토해냈다.
“크으으.”
케실리온의 미약한 신음에 레딕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기운을 흩뿌렸다. 그러자 케실리온의 신음도 ‘뚝’ 그치며 몸도 안정되어 갔다. 레딕 자기 딴에는 케실리온에게 고통을 준 것으로 생각하겠지만, 케실리온의 자작극이었다.
레딕의 손짓에 케실리온은 스스로의 기운을 통해 온몸에 타혈되어 있던 분근착골수의 수법을 풀었기 때문이다. 사실, 스스로 자신에게 고문을 한다는 것은 어지간한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했다.
그 고통스러운 수법을 펼치고 풀 수 없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기 때문에 고문을 해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스스로에게 고문을 하는 미친 행위는 하지 않는다.
“이제 정신 차리셨겠지요. 이제, 당신은 저의 종입니다.”
레딕의 어처구니없는 말에 케실리온은 가슴 한구석이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두려움도 아니었고, 분노는 더더욱 아니었다. 차갑게 식은 마음은 복수, 그리고 죽이고 싶은 순수한 감정이었다.
게다가, ‘페덜의 돌’이 가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미약하지만, 케실리온의 기운을 머금고 있었기 때문에 차가운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리고 주위의 안개와 한기가 더욱 차갑게 만든 것 같았다.
‘이 돌이 언젠가 너를 고통스럽게 할 것이다.’
케실리온은 차갑게 한기를 내뿜는 돌을 생각했다. 언젠가 이 돌을 이용해 녀석을 속박할 생각이다. 옆에 두고두고, 분착근골수를 당하게 할 것이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말이다. 물론, 이것을 꼭 녀석에게 사용하라는 보장도 없지만, 아무튼 녀석을 고통스럽게 만들 계획이다.
“자, 이제 누가 위고, 누가 아래인지 아시겠군요.”
“......”
레딕의 말에 케실리온은 침묵을 유지했다. 말해봐야 손해만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연기를 통해 녀석의 신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녀석의 능력을 조금씩 알아 갈 것이다.
“하하하, 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의 심장에 제 기운이 유동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겠지... 내가 일부러 감추지 않은 것이다.’
케실리온은 스스로 기운을 드러냈다. 물론, 심장의 마나였다. 하프 드래곤이라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가슴에서 회전하고 있는 단일의 서클에서는 레딕의 마나를 이용해 만들어진 3서클이 있다.
“이제부터 용건을 말하겠습니다.”
“뭐...냐.”
“말투가 거슬리지만 용서하지요.”
레딕은 자신에게 내려진 죽음의 그림자가 더욱 짙어졌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녀석이 왕이다. 케실리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녀석의 입을 주시했다.
“침입자를 죽이십시오. 당신은 처단의 검, 저의 검입니다.”
“누굴 죽이라는 것이냐.”
“저를 감시하고, 저를 노리는 그림자. 제11추기경입니다.”
레딕의 말에 간밤에 침입해 자신을 죽이려 했던 녀석을 떠올렸다. 흑예의 섀도우라고 하던 녀석.
“녀석은 흑예의 섀도우. 그림자를 이용한 공격을 합니다.”
레딕의 간단한 말에 케실리온은 간밤에 있었던 전투를 떠올리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이채로웠던지 레딕은 머리를 갸웃거렸다.
“알고 있었습니까?”
“나를 죽이려고 했던 녀석.”
“호오... 흥미롭군요. 아무튼, 녀석은 추기경 회의이단! 퍼니쉬(Punish)인 당신이 없애야 할 적입니다.”
사실, 레딕에게는 천적인 존재였다. 무력 상으로는 가장 약한 존재가 섀도우다. 암살과 뛰어난 추적술을 가지고 있지만, 정면대결에는 나약한 존재다. 하지만, 박쥐 일족에게 만큼은 강한 존재가 그림자 일족이다.
그런 눈에 가시를 치우며, 추기경 회를 견제하니, 레딕에게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마치 이런 상황이다.
‘나에게는 처단의 검, 퍼니쉬가 있으니. 눈치껏 행동해라.’
이런 말이다. 그렇게, 케실리온에게 내려진 첫 번째 명령은 처단의 검을 드는 것이다.
흡수 마스터, 검집을 얻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