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4화 (184/269)

11월 말, 케실리온이 받은 의뢰가 끝나기 직전의 날이다. 멀리 보이는 순백의 도시로 비치는 서광(西光)의 정토에서 비치는 황홀한 오후의 태양이 케실리온을 맞이했다. 붉은 빛이 감도는 태양은 실버 울프들의 마음을 찹찹하게 만들었지만, 의뢰의 끝이라는 것을 알리는 불빛이기도 했다.

종교의 도시, 디바인 내추럴(Divine Nature)! 아니, 지저스의 왕국이라고 불리기까지 하는 거대 도시국가다. 어떤 국가의 간섭도 없으며, 교황과 성녀가 다스리는 그런 도시! 제국의 황제와 같은 신분을 가지는 그런 도시

달가닥! 달가닥!

처음 시작했던 10대의 마차는 7대로 줄었을 정도로 험난한 여정에 일행들은 피곤한 기색을 뛰고 있었다. 배신과 거짓, 희열과 절망이 교차했던 순간까지 긴장의 끝을 늦출 수 없었던 실버 울프의 여행이 끝났다. 

저 은빛의 성벽 너머에 있을 마지막 종착역에 일행은 한걸음 다가섰다. 흰색의 수도복을 입고 바삐 움직이는 교도들의 표정은 한없이 행복해 보였다. 여타의 도시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깔끔한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 성벽 너머가 우리의 목적지 디바인 내추럴이다!”

로이젠의 말에 용병들은 말의 속도를 점차적으로 높였다. 이미 식수과 식량이 바닥난 상황이었기 때문에 용병들은 많이 지쳐있었다. 하지만, 이젠 걱정할 필요가 없다. 평화와 행복이 넘쳐나는 도시가 눈에 들어온 것이다.

말없이 앞만 보고 있던 케실리온의 눈에 힘이 들어간 것도, 알파가 몸을 떠는 것도, 레딕의 흥미로운 표정이 솟아나는 것도 모두 저 도시라는 존재 때문이다. 아무튼, 일행들의 힘찬 발 구름에 성벽에 한없이 가까워졌다.

히히힝!

신성 도시답게 성문을 지키는 이들은 신전에 속해 있는 기사들이었다. 가슴 한 구석에 그려져 있는 십자가는 성 카르디스 지저스를 뜻하는 문장이 그려져 있었고, 순백의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당당했다.

성벽은 활짝 열려 있었기 때문에 제국인 란델과 두 왕국인 라디안과 하멜의 잦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때마침 오후라는 시간 때문이었던지 동쪽의 성벽은 한산한 편이었다.

“멈춰서시오!”

성문에 가까워지자, 성벽에 서서, 출입자의 방문목적과 국적을 적는 방명록을 잡고 있는 기사가 제일 첫 번째 마차를 세웠다. 때문에 용병들의 투덜거림이 일었지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례였기 때문에 기사인 앤더슨이 대표로 그 기사 앞에 섰다.

“크루세이더(Crusader)소속, 앤더슨이라 하오!”

“아! 경이 바로, 이번 임무의 앤더슨 경이오?”

“그렇소이다. 얼른 성지(聖地)로 가야하니 길을 여시오.”

앤더슨의 간단한 말에 문을 지키던 성기사는 약간의 예를 취하며 방명록에 성기사 앤더슨이라고 적었다. 기사가 이끄는 마차라면 특별히 조사할 필요성도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간단한 절차 몇 가지를 거치고 나서야, 그 성기사는 길을 열었다.

디바인 내추럴에도 특별한 땅이 있다. 그것은 지저스교에서도 특별히 신성시 되는 장소이자, 종교의 발상지이자, 역대의 순교(殉敎)자들, 그러니까. 교황이나, 성녀가 신앙을 지킨 장소를 말하는 곳이다.

바로 그곳이 성지인 아르켄(Archean)이다. 이곳은 디바인 내추럴의 가장 중심부에 있으며 가장 높은 탑이었다. 성녀와 교황이 사는 곳답게,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탑의 맨 상층부가 교황이 사는 곳이었고, 그 아래가 성녀가 사는 곳이다.

그 밑으로 줄줄이 교단의 역사와 여러 자료를 구축한 도서관이나, 예배를 들이는 예배당이 있었다. 그야 말로, 종교를 위한, 종교를 있게 한 그런 장소가 바로 아르켄이다. 지금 용병들이 향하는 곳도 중심부의 아르켄이었다.

“아르켄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소. 지저스의 교에 속해 있는 자들... 그러니까. 당신들 말로는 이곳의 시민들만이 들어갈 수 있소이다.”

“흐응...?”

성기사 앤더슨의 말에 레딕은 은근한 시선으로 큰 탑인 아르켄을 올려다봤다. 마치, 구름이 걸린 듯이 새하얀 거탑이었다. 그곳을 왕래하는 은빛의 무리들인 성기사들과 순백의 교도들이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점점 그 중심부로 들어서는 긴 행렬의 마차를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이나 경계심이 담긴 눈길을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럼 착수금을 제외한 후불금은 어찌 되는 것이오.”

“맞아... 맞아.”

실버 울프의 단장인 로이젠이 말하자, 많은 용병들이 머리를 끄덕였다. 이번 일은 착수금을 제외하더라도, 위험수당을 두둑이 받아야 할 것이다. 거기다. 거짓 의뢰까지 있었으니, 그에 따른 별도의 돈도 받아야 한다.

그것을 잘 아는 로이젠이나, 용병들은 혹여, 배 째라 식으로 나올지 모르는 신전 측의 행동을 경계했다.

“걱정 마시오. 신의와 자애, 평화와 빛의 신을 믿고 있는 우리 디바인 내추럴이오. 약속은 반드시 지킬 것이오.”

“앤더슨 경이 그렇게 말하니, 거탑 앞에서 기다리고 있겠소.”

이미 도착한 모양인지, 마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여가고 있었다. 그렇게 몇 초를 앞으로 갔을까. 마차가 완전히 정차했다. 그에 따라, 마차에 올라타 있던 기사들이 중앙의 마차에 다가서며, 검은 묵빛의 상자를 조심스럽게 바쳐 들었다.

무슨 의식이라도 되는 것인지 검은 상자에 머리를 가져다대던, 앤더슨이 양손으로 받쳐 들고는 거탑 안으로 한걸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거탑의 문으로 도착하자, 신도들의 행동이 바뀌었다.

이미, 앤더슨이 도착했다는 것을 알린 보고가 성녀와 교황의 귀에까지 도달했던 모양인지, 거탑 내부에 있던 교도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리고 크게 울리는 성스러운 종소리가 디바인 내추럴에 울려 퍼졌다.

땡...! 우웅! 때앵...!

“유색의 비드가 도착했다!”

신도들의 거대한 함성과 기대에 찬 눈빛, 찬양과 더불어 희열이라는 기분이 교차하는 순간이다. 그에 비해, 용병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 유색의 비드 때문에 고생한 것이 얼마나 많았던가.

네크로맨서와 한스의 배신 등을 크게 꼽을 정도였지만, 그 밖에도 여러 일들이 있었다. 멋도 모르는 산적들에게 공격당한 것도 수차례였고, 네크로맨서의 연이은 공세도 만만치 않았지만, 처음에 비해서 미비한 상황이었다.

그만큼 힘든 여정이었던 만큼, 의뢰를 완수한 뿌듯한 마음도 들기도 했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던 모양이다. 그저 빨리 후불금과 위로금을 받고 죽은 용병들의 유가족에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에 불타올라 있었다.

땡...!

마침, 마지막 종이 울려 퍼졌다. 총 여섯 번의 종소리였다. 게다가, 울리던 종의 위치도 각각 달랐다. 처음은 동에서 울렸고, 서, 남, 북이 울렸다. 마침내는 제일 하층부에 있는 종이 울려 퍼졌고, 마지막은 아르켄의 제일 꼭대기에 배치된 은빛의 종이 울려 퍼졌다.

그 종소리가 끝나기가 무섭게 은빛의 행렬이 이어졌다. 성녀의 모습이 거탑의 입구에 나타난 것이다. 성녀의 뒤로 여신도들이 그녀를 보좌하고 있었다.

“신념의 검이여, 그대의 노고를 치하합니다.”

성녀 크리엘이었다. 그 은발에 은빛 눈동자 속에서 묻어나는 성스러운 기운이 넓게 포진해 있는 신도들에게 퍼져나갔다. 마법의 확성 마법도 없었지만, 성녀의 목소리는 넓은 디바인 내추럴의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 은은한 목소리에 성기사 앤더슨은 왼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의 양손은 묵빛 상자를 위로 치켜들었다. 그 행동이 취해지자, 자연스럽게 성녀는 묵빛의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 다시 벌어지는 작은 입술로 사근사근한 음성이 퍼져나갔다.

“신탁의 성물, 첫 번째 비드가 도착했습니다.”

성녀는 잠시 말을 끊으며, 많은 신도들의 눈을 찬찬히 살폈다. 모두 맑고 깨끗한 눈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잠시 호흡을 고른 성녀는 곧장 다음 말을 이었다.

“신은 우리에게 많은 시련을 내리셨습니다. 하지만! 그 시련은 우리의 신앙을 증명하는 고통입니다. 이번, 첫 번째 비드가 바로, 그 첫 번째 시련입니다. 신도 여러분. 우린 첫 번째 시련을 이겨냈습니다.”

“성 카르디스 지저스님 만세! 교황님 만세! 셩녀님 만세!!!!”

많은 신도들이 성녀의 말에 열광했다. 축복받은 대지가 진동할 정도다. 하지만, 성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에 모두들 함성을 멈췄고, 성녀의 입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우린 고작 첫 번째 관문을 통과했을 뿐입니다. 너무나 쉬운 통과였습니다. 다섯 번! 그건 우리가 이겨 내야할 시련의 문입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여섯 개의 시련이 끝난 다면, 하나의 절망과 하나의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꿀꺽.”

성녀의 진중한 표정에 신도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것은 실버 울프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자신들이 신도들이라도 된 듯 함성도 지르며, 즐거워하며, 무거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케실리온은 말 잘하는 소녀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성녀가 다시 입을 연 것은 모두들 두 손을 모으며 신에게 기도를 올릴 때였다.

“아직 우린 즐거워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시련과 절망과 기다림이 끝난 순간. 우린 웃고 즐거워 할 수 있습니다. 자, 모두 만물의 근원이자, 지배자인 성신 카르디스 지저스님에게 경배를 올립시다.”

쿠쿡...

긴 성녀의 입담에 케실리온은 싱긋이 웃음을 흘렸다. 그 목소리가 워낙 작았지만, ‘쿡쿡’거리는 소리가 성녀의 귓가에 전해졌던 모양이다. 기도를 올리며 눈을 감고 있던 성녀의 맑은 두 눈이 케실리온과 맞부딪혔다.

폴리모프를 하고 있지 않던, 케실리온이다. 은빛의 눈동자로부터 뿜어지는 지배자의 기세가 성녀에게 뿜어졌다. 하지만, 성녀의 은은한 성력은 케실리온의 기세를 무시했다. 그렇게 서로를 마주보던 성녀와 케실리온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나 침묵의 끈을 깬 것은 성녀였다. 그녀의 입술에서 작은 목소리가 케실리온은 물론, 모든 신도에게 전해졌다.

“그대는 누구인가요?”

성녀의 갑작스런 말에 신도들의 시선이 마차위에 앉아 있던 케실리온에게로 향했다. 지금 케실리온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흑발이던 머리칼은 은빛으로 변해 있었다. 더욱이 두 눈은 성녀와 같은 은안이다.

이것이 다, 마룡의 육신을 받아들이며 나타난 현상이리라. 단전의 상처가 전화위복이 될지 누가 알았던가! 케실리온은 몸의 상처를 치유하던 중, 우연한 계기로 단전내의 기운을 더욱 차갑게 바꾸어 놓았다. 그 덕분인지 검은 색이었던 머리카락이 은발로 바뀐 것이다.

그렇다고 무력이 강해 진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몸을 회복한 것이 다였다. 때문에 지금은 움직이는데 불편함도 없거니와, 예전에 비해, 초식의 완성도가 높아졌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건강했다.

“은발에 은안!!”

신도들은 갑작스럽게 나타난 케실리온의 존재에 크게 놀라는 듯했다. 은발과 은안은 아무나 가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하늘의 아들과 딸! 오로지 성녀만이 두 가지를 가질 수 있다.

간혹, 은발을 가지고 태어나는 존재가 있지만, 두 눈은 은안이 아니다. 그리고 은안을 가지고 태어난들, 은발이 아니다. 이 처럼, 상반되는 곳이 다른 빛을 가지니, 성녀의 존재는 특별했다. 그런데 저기 있는 존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후후후! 이번에 새롭게 엠블럼을 받을 존재. 처단의 퍼니쉬가 바로 나.”

케실리온의 말에 주위의 신도들 중 간부급의 인물들이 눈을 크게 떴다. 소문으로만 무성하던 추기경이 나타난 것이다. 흑예의 섀도우가 죽고 나서 비어있던 11추기경의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저 어린 소년이 추기경이라는 생각에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해한다는 듯이 끄덕였다. 그러나 성녀에게 존대를 하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표정이 썩 좋지 못한듯했다.

“성스러운 힘을 지닌 자 만이, 엠블럼을 받을 자격이 있어요. 그대는 엠블럼을 받을 자격이 있나요?”

“자격...? 푸하하하! 자격이라... 이런 걸 말하는 건가!”

만검 1장 4초 살(殺)

케실리온의 오른손에서 출수한 마령검이 하늘에 커다란 수를 놓았다. 그야 말로 은빛의 물결이다. 차갑디, 차가운 기운이 몰아치자, 신도들은 무릎을 꿇었다. 지금의 모습이야 말로, 신의 축복이 아닐까!

투툭...

하늘에서 눈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맑았던 날씨가 변했다. 지금의 모습은 마치, 성자와 같았다. 은발에 은안... 그리고 신묘한 능력! 그가 검을 펼치는 순간 하늘이 울었고 땅이 울었다.

검으로부터 뿜어진 은빛의 줄기는 눈이 되어 떨어지니, 대지는 차갑게 식어갔다. 하지만, 그 성스러운 분위기가 끝이 났다. 모두들 아쉬운 표정으로 케실리온을 올려다봤다. 지금 이 순간, 케실리온이 성자로 비춰졌다.

“서, 성자?!”

신도들의 외침에 성녀가 돌연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하지만, 케실리온의 다음 말에 신도들의 표정을 굳어졌다. 이런 망측한 말도 없을 것이다. 저런 오만 한 자가 성자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성자? 웃기지마라. 난 성자 따위가 아니다! 얼른 그 엠블럼이라는 것을 내놔라.”

“저... 저! 망측한! 신성모독이다!”

케실리온의 외침에 발끈 한 것인지 신도들의 입에서 신성모독이니, 신벌이 떨어질 것이라는 소리가 맴돌았다. 그 모습에 케실리온은 희미하게 웃음을 띠었다. 케실리온이 생각하기로, 자신은 존경 받을 대상이 아니라. 두려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자신은 선도 아니었고, 악도 아니지만. 남을 위해 일할 생각 따위는 눈곱만치도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마음이 가는대로 행할 뿐이다.

“그대! 처단의 퍼니쉬, 저를 따라 오세요.”

성녀의 자애로운 표정이 신도들의 마음을 가라앉혔던지, 모두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무튼, 케실리온이 아르켄으로 들어섰다. 물론, 용병들은 외부인이었기 때문에 거탑 앞에서 대기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알파는 특별대우였던지, 케실리온과 동행을 허락했고, 레딕은 추기경을 나타내는 명패를 보임으로써, 거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케실리온님! 가까운 여관에 있겠습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케실리온과 이별하는 것이 못내 아쉬운지 로이젠은 가까운 여관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하고는 몸을 틀었다. 물론, 후불금과 위로금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몇몇의 용병들이 거탑의 앞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은빛의 추기경

“뭘 봐! 감히...”

케실리온이 아르켄에서 뛰어 내린지 그렇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실버 울프 소속의 용병 몇몇이 용케 케실리온을 발견하고 ‘신의 은총’이라는 여관으로 에스코트 하고 있었다. 뭐, 에스코트라고 해봐야, 주위의 시선을 물리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케실리온으로써는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는 상황이다. 은발과 은안을 가진 케실리온이었기 때문인지, 인간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몰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거기다. 범상치 않은 레딕과 알파의 모습도 단단히 한몫했지만, 그 중심은 단연 케실리온이었다.

부릅!

“거기... 썩 비켜라.”

“죄, 죄송...!”

로이젠이 보낸 이들은 모두 하나 같이 인상이 험악했다. 때문에 마냥 길을 걷던 이들도 슬금슬금 케실리온에게서 멀어졌다. 이 얼마나 편안한 행보인가. 겨우 인상 하나로 하나의 거리를 주름을 잡고 있으니, 케실리온은 아주 만족스런 표정을 지으며 실버 울프가 잡아 놨다던, 곳으로 이동했다.

“성자시여...”

세상 참 살기 편하다. 은발과 은안을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모든 이의 존경과 경외가 담긴 모습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지저스교의 교도들은 케실리온을 숭배하듯 경배의 대상이 되었다.

가는 길에서 흔히 볼수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에 길을 걷는 일행들에게는 특별히 관심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기어오는 녀석들을 물리치는 용병들에게는 그저 귀찮은 존재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런 진풍경은 ‘신의 은총’이라는 여관의 앞으로 도달하기 까지 계속되었다.

“저깁니다. 케실리온님.”

한 용병이 케실리온의 앞으로 나서며 한 건물을 가리켰다. 거탑인 아르켄에서 그렇게 멀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인지, 많은 관광객들이 투숙하고 있는 곳 같았다. 사실, 디바인 내추럴은 성금과 기부금을 받지 않더라도,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사용하는 돈으로 이 도시를 운영하고 있다.

그만큼 관광객들의 숫자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였기 때문에 많은 행렬을 쉽게 볼 수 있다. 또한, 간간이 보이는 귀족들의 행렬도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이곳이 서대륙의 중앙인 점을 감안해, 여러 국가의 귀족들이 보이는 이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덜컹!

케실리온은 가벼운 손짓으로 여관의 문을 열었다. 아직 초저녁이었기 때문인지, 많은 이들이 여관에 머물고 있었다. 그렇지만 케실리온의 관심은 멀리 떨어져 앉아 있는 용병들의 무리다.

“어서 오십시오! 케실리온님! 가셨던 일은 잘되셨습니까.”

가장 먼저 머리를 숙이는 녀석은 로이젠이었다. 의뢰 금에 대한 일이 잘 풀렸기 때문인지 모든 용병들의 표정은 한결 편안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다. 그들 각자 두둑한 주머니를 짤랑 거리며 웃고 떠들며 케실리온을 맞이했다.

“그럭저럭... 흠... 아무래도 난 이곳에서 몇 일 더 머물러야겠군.”

“크... 이거, 너무 기대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이 없다면 저희랑 같이 남부 쪽으로 같이 가주십사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남부...?”

케실리온은 로이젠의 표정에 남부에 무슨 일거리가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못내 아쉬워하는 로이젠들을 보니, 케실리온의 힘이 필요한 모양이다.

“그게... 남부에 큰 영지전이 있다고 합니다.”

영지 전, 귀족들 간의 불화와 반란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지전이 빈번이 벌어지는 곳은 대체로 남부 쪽의 귀족들이다. 대체로 소외된 지역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남부는 오직 강한 귀족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에 수도에 비해 영지전이 벌어질 확률이 대체로 높다.

일단 영지 전이 벌어진다면, 가장 좋아할 존재는 용병들이다. 개인의 사병만으로 어쩔 수 없는 귀족들인 만큼 흔히 소모품으로 쓰이는 용병들은 가장 좋은 이용수단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용병들은 그런 의뢰를 꺼리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반기기도 했다.

전쟁은 약탈과 같은 일들이 성행하기 때문에 귀족들의 값진 물건을 취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너무 후진 귀족가라면 그런 물건도 없겠지만 귀족들을 잡아 노예로 팔거나, 이래저래, 즐거운 일(?)이 있기 때문에 용병들은 뿌리 칠 수 없는 일이다.

“흐음... 영지전이라... 어떤 가문과의 싸움이지?”

“제니어스 남작가와 하르그 남작가입니다. 알려진 바로는 혼인으로 가문을 통합하려던 가문 같습니다.”

“같다고?”

“혼인이 깨졌지요. 제니어스 측에서 약혼을 일방적으로 파기해 버린 것 같습니다. 약한 가문치고는 강단 있는 결정이었겠지요. 하하하!”

로이젠이 말하는 영지전이라는 것에 흥미가 생겨버렸다. 그 사소한 일 때문에 전쟁이 벌어진다는 것에 약간 어이없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수긍이 갔다. 2계라는 곳은 물론 어느 차원이든 정략결혼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가문의 돈독과 부흥을 위해 벌어지는 일이기 때문에 하고 있는 것 같았지만, 로이젠이 말한 약혼은 약간 틀린 것 같았다. 한 가문의 일방적인 복속을 야기 시키는 문제 같았다.

“전력 차도 심합니다. 제니어스는 그렇다할 금액도 없고, 기사들도 없으니 망해가는 가문이었지만, 상대인 하르그 가문은 틀립니다. 류드릭 공작가의 가신가문으로 알려져 있지요.”

“그래서 너희들은 하르그 쪽으로 붙을 생각인가...?”

케실리온은 전력 차를 들었기 때문에 실버 울프들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꼭 영지 전에 참여하겠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기회가 된다면 참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하! 저흰 당연히... 제니어스 쪽이지요. 그곳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더 큽니다. 물론, 지면 쪽박이겠지만... 이긴다면 어마어마한 금액이 굴러 들어오겠지요.”

“하하하하! 그래서 날 끌어들일 생각을 한 건가?”

“뭐... 부정은 안하겠지만.... 바쁘 시다고 하니, 물 건너간 의뢰겠지요. 하하!”

로이젠의 호탕한 말에 케실리온은 큰 소리로 웃었다. 녀석이 지금까지 이런 이야기를 한 이유가 케실리온의 큰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케실리온의 무력은 최소 소드 마스터 상급 정도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데스 나이트의 무력을 생각해서 상상해낸 무력일 뿐이다. 더 밑일 수도 있으며, 더 위일지도 모르지만, 케실리온이 있다면 이길 확률은 배로 상승 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류드릭이라... 류드릭... 카이룬 폰 류드릭인가? 알파! 그 카이룬이 맞나?”

“예, 케실리온님. 지금 2 추기경의 위치에 속해 있습니다.”

“호오... 한번쯤 만나봐야 할 상대였구만...”

케실리온의 긍정적인 표현에 로이젠은 밝은 표정을 지었다. 일단 다음 행선지가 남부 부근이라는 것이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남부라고 한다면, 류드릭 공작가가 지배하는 곳이다. 그 드넓은 싸움의 공간을 적절하게 유지하는 류드릭의 수완은 대단하다.

“그렇다면... 남부로 가실 겁니까?”

로이젠은 확인 차 다시 물었다. 의뢰를 하지 않더라도, 케실리온의 존재가 남부로 온다면 든든한 아군을 얻은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쿠쿡... 별일이 없다면”

케실리온은 혹시나 모를 변수를 생각하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갈수 있다면 가겠다는 소리다. 그렇게 말을 하고 나니, 여관 내부는 약간 썰렁한 느낌이 감돌았다. 그제야 로이젠은 케실리온에게 아무것도 대접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종업원을 불렀다.

“이봐! 종업원! 뭐하고 있어.”

“예... 예! 갑니다.”

로이젠은 그제야 약간 마음에 들었다는 듯이 케실리온에게 넌지시 시선을 주었다.

“케실리온님, 오늘은 제가 쏘겠습니다. 하하하! 아참, 그리고 여기... 의뢰 금입니다. 착수금과 후불금, 위험수당을 넣어서 총 120골드입니다. 그리고 일행 분들 것도 넣어서 360골드입니다.”

끄덕...

케실리온은 묵직한 주머니 하나를 받으며 머리를 끄덕였다. 360골드.. 말이 360골드였지, 평민들은 손에 만져보기도 힘든 돈이다. 그런 거금은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드는 케실리온이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휙!

그 금주머니가 알파에게로 떨어졌다. 얼떨결에 받은 알파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케실리온을 쳐다봤다. 때문에 케실리온은 다시 입을 여는 수고를 해야했다.

“보관해라. 앞으로 잡다한 계산은 네가 해라.”

“아, 알겠습니다.”

케실리온의 직설적인 말에 괜히 얼굴을 붉히는 알파였다. 아무튼, 돈에 관한 일은 잘 마무리 되었고, 남은 일은 실버 울프들과 술을 마시는 일일 것이다.

“케실리온님, 여기 잔 받으시죠. 하하.”

로이젠은 케실리온에게 잔 하나를 건네고는 용병들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리고 크게 입을 벌렸다.

“모두 잔에 술을 채워라! 오늘 우리가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다 케실리온님 덕분이다. 모두 술 채웠으면... 복창해라! 케실리온님을... 위하여!!”

“위하여!!”

그 큰 함성과도 같은 소리에 여관 밖을 지나는 여행객들은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실버 울프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디바인 내추럴에서 저런 모습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케실리온님... 저희는 내일 떠날 겁니다. 남부로 오신다면... 실버 울프를 쉽게 찾을 수 있도록... 위명을 떨치겠습니다.”

“후훗... 왠지 위명을 찾고 오라는 소리로 들리는 군. 하지만, 그만큼 강해질 수 있을 까?”

“쿠쿠쿡... 케실리온님... 우린.. 실버 울프입니다. 자... 이 녀석들아... 우리가 누구라고?”

“실버 울프!!!”

그날 여관에서는 세상이 떠나갈듯, 신전이 떠나갈듯 소리치는 용병들 때문에 밤새 잠을 자지 못한 여행객들이나, 주위의 신도들의 원성을 들어야 할 만큼 기쁨의 함성과 케실리온을 찬양하는 구호들이 끝도 없이 들려왔다.

‘케실리온님을 위하여!’

‘우하하하! 우리가 바로 실버 울프다!’

라는 소리가 마신의 세계인 밤을 지나, 새벽의 여명이 펼쳐질 무렵 끝나고야 말았다.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해야 용병들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즐거운 실버 울프와의 한때가 지나는 순간이었다.

뚝... 뚝...

테이블에서 떨어지는 술을 쳐다보고 있던 케실리온은 문뜩 느껴지는 기척에 시선을 돌렸다. 아마 아르켄에서 나온 모양이다. 원탁회의 때문에 직접 온 것 같았다. 때문에 케실리온은 차갑게 웃음을 흘리고는 머리를 몇 번 주억거렸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가겠다는 뜻이었다.

은빛의 추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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