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6화 (186/269)

“기분이 풀리셨나요. 추기경.”

성녀는 여전히 침착한 표정으로 자신의 목에서 넘실거리는 오러 블레이드를 쳐다보고 있었다. 은빛으로 빛을 뿜는 차가운 기운이 그녀의 목을 얼리고 있었지만, 곧, 신성력을 통해 몸을 보호 하고 있었다.

그녀의 은안에 비치는 케실리온의 마령검이 아련히 떨리고 있었다.

“가자, 알파.”

케실리온은 마령검을 회수하며 성녀의 방을 나섰다. 괜히 짜증이 나는 것인지 마령검을 그림자 속으로 집어 던진 케실리온은 성녀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걸음을 살짝 멈추며 등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향해 말했다.

“운 좋은 줄 알아라. 성녀. 뭘 믿고 까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단? 내가 다 처리 해주마.”

쾅!

그렇게 성녀의 방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여전히 몰아치는 케실리온의 기운을 억누르는 성녀의 인자한 신성력이 출렁이고 있을 뿐이다.

“호호... 부탁하겠어요. 은빛의 추기경.”

성녀의 작은 입술에서 아련히 퍼지는 목소리가 케실리온의 귓가에 전해졌다. 여전히 투덜거리는 듯 한 케실리온의 모습을 보며 알파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케실리온님... 제가 처리 할까요?”

“네가 처리할 상대가 아니다.”

알파의 조심스러운 말에 케실리온은 거침없이 말했다. 알파는 케실리온의 말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점점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 이 신성 도시에 오고 나서 부터다. 자신의 일은 그저 뒤를 따를 뿐!

알파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케실리온의 힘이 되겠다고!

‘강해져서... 당신의 적을 상대하겠습니다. 반드시! 강해져서.’

알파의 염원이 전해지듯, 새벽의 구름 사이로 비치는 밝은 태양이 지상에 떨어졌다. 광명(光明)이었다. 케실리온의 길을 인도하듯, 남쪽의 구름 사이로 비치는 빛이 길을 만들었다.

“알파.. 남쪽으로 가자. 우리의 일은... 비드의 확보와 이단 처리다.”

“예, 케실리온님.. 당신이 향하는 길이라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이윽고 밝은 태양이 디바인 내추럴의 남쪽 성문이 열렸다. 그 뒤로 흐르는 밝은 빛줄기가 케실리온의 은발을 뒤 흔들었다.

*          *         *

“교황. 이제 만족하셨습니까?”

“이단 색출이 그렇게 불만인가? 성녀.”

“애꿎은 추기경들만 추궁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교황의 담담한 표정에 성녀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교황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약간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이단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들은 신성한 추기경이다.

교단의 힘이자, 핵심이 되는 자들이 이단일 리가 없다. 교단의 11사도는 신의 사제이다. 그들이 배신자 일리가 없다.

“애꿎다. 그럼.. 비드의 입수 경로를 파악하고 습격해오는 이단들은 어떻게 알았을까? 추기경만 알고 있는 사실을 말이야. 더욱이... 가장 믿을 수 있는 크루세이더들도 알지 못하는 사항이다.”

“교황님의 말씀도 맞습니다. 크루세이더들 중에서도 다 뽑히는 것이 아니지요. 비드의 운반은... 확실히... 추기경을 의심이 갑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신의 시련이 아닐까요?”

“허허허... 신의 시련이라.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신의 시련을 끝내는 존재는 인간이라네. 이 모든 일이 시련이라... 그럼 신께서는 우리에게 왜 시련을 내리는 것이란 말인가...”

“그... 그건!”

성녀는 교황의 말에 감히 입을 열수가 없었다. 답이 없었다. 그녀는 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저..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의 메시지를 전하는 성녀 일뿐!

“시련은... 인간이 정한 의미 일뿐.”

“신입인 12 추기경에서 그런 임무를 내린 건 무슨 의도 입니까?”

“시련을 깨기 위해서지. 교단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이단을 색출하기 위해 말일세. 왜! 그에게 나와 성녀에게 만 칭해진다는 은빛이라는 호칭을 내린지 아는가?”

“......”

성녀는 입을 다물었다. 교황의 질문은 답하기 어려운 것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도무지 상상도 할 수 없는 답이다.

“바로... 그가 실버 드래곤의 후예이기 때문이네. 이미, 그가 마룡이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을 터! 마룡의 전설에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지... 그 전설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실화네.”

“그럼... 스스로 마룡이 되었다는 실버 드래곤이 바로...”

끄덕!

“이 방으로 발을 들인 순간부터 알 수 있었네. 책으로만 읽었던... 절대자의 기운이 어떤 것인지. 그는 진정... 은빛의 절대자였네. 12 추기경은...”

교황의 아련한 기억이 성녀에게 전해졌다. 감히 억누를 수 없는 무한의 기운을 감당해야 했던 찰나의 순간을 말이다. 오금이 저리도록 시린, 차가운 기운이 방을 덮쳐 오는 순간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로 차가운 기운을 말이다. 

피의 각성

후광의 태양을 등지고 걸어가는 두 명. 그 남녀의 모습은 신비로웠다. 찰랑이는 은발과 청발. 등 뒤로 펼쳐진, 디바인 내추럴의 광경은 이루어 말할 수 없을 정도다. 가닥가닥, 찰랑이는 은발 사이로 비치는 무표정한 은안이 번뜩였다. 

“미행이다.”

케실리온의 짧은 말에 옆에 서서 걸어가고 있던 알파의 어깨가 움찔 거렸다. 느끼지 못했다. 아니, 처음부터 미행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아무것도 도움이 안 되는 이 무력감이 온몸을 엄습하자, 알파의 어깨가 잦아들었다.

‘젠장! 난... 정말 도움이... 되는 걸까?’

알파는 입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혈향을 느끼며 케실리온의 보폭에 맞추어 걸음을 옮겼다. 디바인 내추럴에 다가갈수록 느껴졌던 그 무력함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온몸을 옥좌 하던 뜨거운 빛줄기들이 생생하게 생각났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알파의 결심이 서는 순간, 케실리온의 팔이 알파의 목에 걸렸다. 마치, 어깨동무를 하듯 자연스럽게 조여 오는 그 감촉에 알파의 눈동자는 세차가 흔들렸다. 이유는 몰랐다. 그저, 케실리온이 하는 행동에 따라야 할뿐.

“뒤를 돌아보지 마라. 지금부터... 동쪽으로 향한다. 최대한... 한적하고 좁은 곳으로...”

“네, 케실리온님.”

케실리온의 음성이 알파의 귓가에 울리자 얌전히 케실리온에게 몸을 맡긴 알파는 머리를 몇 번 끄덕일 뿐이었다.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존재인 자신을 이끌어 주는 존재. 알파는 순간 자신의 힘에 대해 분노를 느꼈다.

‘왜 이렇게 나약하단 말인가.’

‘왜!’

‘왜왜!’

가늘게 떨리는 알파의 흔들림에 케실리온의 눈에서 약간 동요의 빛이 뛰었지만, 그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의 충돌. 짜릿하면서도 쿡쿡 찌르는 느낌은 분명 미행과 주시의 눈빛이다.

그 눈빛이 좋든, 좋지 못하던 확실히 케실리온과 알파를 주시하고 있다. 한명이 아닌 듯이 두 명 이상의 느낌이다. 케실리온의 감각을 피해 묘하게 기감을 느낄 수 있는 범위를 피하고 있었다. 하지만, 좁은 길로 갈수록 그 기운은 확실하게 케실리온에게 전해질 것이다.

지금 다급한 쪽은 케실리온이 아니다. 주시자들, 미행을 하고 있는 자들이다. 다급함, 조급함을 참고 있는 그들로써는 가벼운 걸음도 벅찰 것이다. 그 미행의 목적이 어떻게 되었건 간에 말이다.

“평소대로 행동해라. 알파.”

“하, 하지만.”

“조급해 하지 마라. 후후.. 충분히 처리 할 수 있는 적이다. 분명!”

케실리온의 확고한 목소리에 알파는 머리를 떨어뜨렸다. 힘이 없었다. 나약한 자신이. 점점 힘이 빠져 나가듯 공허한 느낌만 드는 것 같았다. 아직 신월이 뜨려면 조금 남았다. 그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 날수도 있겠지만, 아직 피가 부족한 것도 아니다.

‘신월이 뜨려면 아직 남았다. 그런데 이 허전함은...’

뱀파이어에게는 반드시 해야 할 행동이 있다. 신월이 뜨는 밤. 피를 취해야 한다. 이것이 뱀파이어의 생존조건. 다른 종족과는 다르게 피를 통해 생명을 유지하며 강해지는 종족이 바로, 달의 일족 중에서도 뱀파이어다.

상대의 피가 강하면 강할수록, 고귀하면 고귀할수록 뱀파이어의 힘은 강해진다.

“그나저나... 레딕은 그곳에 남겠다고 하던가?”

“예?... 아! 레딕 말씀이군요. 예, 디바인 내추럴에 남겠답니다.”

“역시... 그런가. 뭐 상관없겠지.”

케실리온은 걸음을 걷는 와중에도 움찔 거리며 몸을 파르르 떨어대는 알파가 마음에 걸렸다. 아니, 정확하게는 신경에 거슬렸다. 디바인 내추럴에 들어올 때부터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 같았다.

가끔 부르르 떨거나, 비틀거리는 현상. 몸에 무슨 이상이 있었다면 케실리온이 가장 먼저 알아 차렸을 것이다. 몸의 기운은 예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 예전보다 더 좋아졌다고 해야 할 것이다.

몸속에 흐르는 마기의 정순함이 과거에 비해 좋아졌기 때문이다. 아마, 케실리온의 근처에 자주 있기 때문일 것이다. 케실리온은 달의 일족에게 유용한 마기를 품고 있다. 거의 떨어지지 않으니, 케실리온의 기운에 적응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무리하지마라. 네가 아프면 상당히 귀찮아지니까.”

케실리온의 무심한 목소리에 알파는 몇 번 머리를 주억거렸다. 내심 기분도 좋아진 것 같았다. 케실리온은 필요이상의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간혹, 이야기를 걸어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것도 일수다.

그만큼 먼저 말을 거는 횟수도 적었다. 케실리온의 걱정에 알파는 애써 웃는 표정을 지으며 디바인 내추럴의 서쪽에 위치한 울창한 산으로 들어왔다. 그다지 멀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디바인 내추럴의 내부가 보일 정도였다.

11월 말에 접어든 만큼 산은 약간 황량한 느낌도 주고 있었다. 푸른 나뭇잎을 잘아하던 잎들은 갈색으로 바뀌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삭!

땅으로 떨어진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차가운 바닥과 발의 마찰음... 그리고 바스라 지는 나뭇잎이 내는 요란한 기척 음에 케실리온의 기운이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주위를 탐색하는 것! 기척을 읽는 것이다.

아직도 기척의 범위에서 벗어난 존재의 움직임이 슬슬 짜증에 솟구쳤다. 하지만, 참고 기다린다면 녀석들은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케실리온님... 언제까지.. 으윽!”

“응? 괜찮은 건가?”

“예.. 하지만... 머리가..”

“귀찮군. 기척도... 움직임도. 더 깊이 들어간다. 사방이 뚫린 곳으로.”

케실리온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비틀거리는 알파를 품에 앉고는 조금씩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그에 따라, 녀석들의 움직임도 바뀌었다. 어딘가 조급해지는 느낌. 분명 걸려 들 것이다.

이정도로 정교한 방법으로 상대의 기척을 벗어나는 녀석들이 새삼 감탄스러웠지만, 케실리온에게는 짜증나는 녀석들일 뿐이다. 안 그래도 누군가에게 명령을 받는 다는 느낌으로 움직이고 있다.

여차하면, 그대로 녀석들에게 뛰어갈 기세 같았다. 그러나 녀석들의 목적을 모른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왜 미행하는 것인지. 혹여, 녀석들은 네크로맨서의 끄나풀인지도 모른다. 때문에 케실리온의 움직임이 조심스러운 것이다.

“훗! 좋아. 마침 좋은 장소가 보이는 군!”

케실리온의 시각에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전혀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마을 같았다. 조잡하게 지어진, 나무집 사이로 비치는 황량함을 보건데 버려진 마을 일 것이다. 그리고 마을에 퍼져 있는 사기(死氣)를 보건데, 마을은 죽어 있다. 

“저곳으로 간다. 저곳에 도착하면 적당히 휴식이나 취하도록.”

“죄, 죄송...”

“상관없다. 후후후.”

케실리온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조금씩 마을의 초입부근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을의 중심에 보이는 여러 뼈 조각들. 아직도 다 썩지 못한 시체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마을이다.

휘이잉~ 파사사삭

강한 바람이 몰아치자, 마을에 퍼져 있던 먼지 뭉치들이 바람에 이리 저리 쓸려 다니고 있었다. 어딘가 익숙한 광경에 케실리온의 머리가 약간 갸웃 거렸지만, 곧 그 행동을 지우고 미행자들을 기다렸다.

“어이! 나오라고. 확실히 느끼고 있으니까. 애초에 날 미행한다는 건 불가능이다. 기습은 더더욱. 이미 나의 오감은 민감해져 있다고.”

케실리온은 사방이 뚫려 있는 산의 내부에 소리를 질렀다. 마을을 중심으로 펼쳐져 있는 목책의 사이사이로 울려 퍼진 목소리가 마을의 외각으로 펴져나갔다.

파사삭! 쿵!

인간의 발길이 끊긴지 상당히 오래된 것인지 마을의 집들은 덜컹거리거나,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심에 있는 여러 시체들 사이에서 꿈틀거리는 벌레들의 유동까지 들려오자, 케실리온의 눈동자는 한 없이 투명해졌다.

아니! 은빛으로 빛을 발한 건지도 몰랐다. 그리고 어느새 들려있는 마검! 마령검이 차가운 바람에 흩날리며 케실리온의 오른손에 굳게 쥐어져 있다.

“슬슬 짜증난다고. 앙!”

스캉!

케실리온의 검이 출수되었다. 반월을 그리며 마을의 집 한 채를 통째로 날려버리고 나서야 원래 자리로 돌아온 검이 요란하게 ‘우우웅’ 거리고 있었다. 뒤늦게 들려오는 폭음!

콰... 꽈꽝!

부스슥, 풀석!

집 한 채가 그대로 폭사되었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폭발의 폭풍과 케실리온의 마기가 퍼지나, 녀석들의 기척이 확연하게 들려왔다. 어느 샌가 나타난 두 녀석. 검은색 마스크를 쓰고 있는 녀석들이었다.

전체적인 복장은 여행자 복장이었지만, 얼굴을 가린 모습이 의심스러웠다. 검은색 마스크 위로 펼쳐진 두 개의 안구. 보라색... 그리고 옆에 있는 녀석은 분홍색처럼 요란하게 무심한 눈길을 띠고 있었다.

보라색의 눈동자를 가진 녀석의 머리 역시 긴 보라색이었고, 분홍색 눈을 가진 녀석의 머리는 핑크빛의 머릿결을 가지고 있었다. 몸에서 풍기는 기운과 옷 사이로 비치는 녀석들의 골격을 보건데 아직 나이가 어린 여자들이다.

“미행의 목적은? 암살자인가? 마냥 따라오는 벌레들인가.”

“......”

“대답은... 없는 건가? 건방지군.”

케실리온의 눈동자가 녀석들과 마주쳤다. 그 순간 녀석들 중 보랏빛의 눈동자가 웃고 있었다. 마스크로 가리고 있는 얼굴 중 드러나 있는 것은 녀석의 눈동자와 이마뿐이었지만, 케실리온은 그렇게 느꼈다. 눈으로 웃고 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마스크 부터 없애 주마.”

“호호... 실력이 된다면... 케실리온?”

“호오... 날 알고 있구나. 뭐. 상관없지.”

케실리온은 약간 감탄스럽다는 듯이 웃음을 띠었다. 코끝으로 느껴지는 간질거리는 느낌에 마령검을 옆으로 살짝 움직였다.

좌우로 늘어진 마을의 끝에 보이는 작은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온 순간, 케실리온의 신형은 앞으로 쏘아졌다. 정확하게 두 녀석들에게 몸을 날린 것이다. 케실리온의 눈동자로 비치는 세상!

모든 것이 멈춘 것처럼, 세상의 시간이 늦게 흐르기 시작했다. 사위에서 떨어지는 나뭇잎의 기척도 느껴졌고, 바람의 움직임 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서있는 두 녀석의 움직임도 보였다.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녀석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었다. 짐작컨대 단검일 것이다. 그리고 케실리온의 오른쪽 눈으로 보이는 핑크빛 머리칼을 가진 녀석은 마스크로 가려진 입이 달싹 거렸다.

무슨 주문이라도 외는 것 같았지만, 케실리온에게는 소용없는 짓이다.

피의 각성

슬로우(Slow)이런걸 놓고 말하는 것인지도 몰랐다. 마치, 세상의 모든 것의 생체 기능이 느려진 것처럼, 사물의 행동이 느려진 것처럼. 케실리온의 눈에는 모든 것이 한 없이 느려보였다.

일보(一步)를 내딛는 케실리온의 발자국 사이로 번지는 작은 기척이 귓가로 전해졌다. 세상의 흐름을 알듯 오감을 넘어 육감에 이르도록 케실리온의 기감은 주위로 펼쳐졌다. 녀석들의 행동 하나하나, 보랏빛 눈동자의 품에서 빠져나온 둥근 두 개의 물체가 케실리온을 향해 쏘아졌다.

울퉁불퉁한 표면 사이로 비치는 감미로운 향기가 코끝을 간질거렸지만, 이미, 케실리온의 숨결은 멈춰 있었다. 독도 소용없다. 암기도 소용없다. 케실리온의 머릿속은 수십 가지의 공격 패턴을 생각하고 있었다.

파사사사!

느려진 세상만큼 둥근 물체가 날아오르는 소리도 요란해졌다. 둥근 구 모양의 두 물체는 케실리온의 하체와 상체로 뻗어왔다. 하지만, 케실리온의 속력은 줄지 않았다. 앞으로 쏘아진 케실리온의 신형은 두 개의 구를 스치듯 지나갔다.

“소용없다.”

스악!

두 개의 구가 쏘아지기 무섭게 베어 버린 케실리온의 신형은 거침이 없었다. 이미 그의 사고는 평범함을 넘어섰다. 적의 패턴을 알고 있다는 듯이 휘둘러진 마령검 사이로 일렁이는 차가운 기운이 몰아치는 순간 두 개의 구는 그대로 갈려버린 것이다.

좌우로 쪼개는 물체 사이로 퍼지는 아련한 향기를 맡는 순간 케실리온의 행보는 거짓말처럼 멈추어 버렸다.

텅! 떼구르르...

케실리온을 지나 한참이 지난 곳에 떨어진 두 개의 구가 바닥을 구르는 순간 케실리온의 눈앞에 펼쳐졌던 느릿한 현상이 사라졌다. 뒤에서 느껴지던 물체에서 아련하게 퍼지는 향기가 그 원인이다.

“과일?”

바람소리도, 덜컹 거리던 문짝 소리도 빠르게 들려왔다. 다소 의아한 것인지 케실리온의 목소리가 천천히 새어 나올 뿐이었다. 암기였다고 생각했던 물체가 고작 과일이라는 생각에 허탈한 것인지 케실리온의 마령검은 바닥으로 천천히 꽂혔다.

“호호... 케실리온 오랜... 꺄아.”

파사사삭!

케실리온의 시선이 앞을 향하는 순간까지 얌전히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마치 가루로 바뀌어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그 마스크위로 드러난 얼굴은 약간 당황한 것인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전혀 상처 없는 고운 모습이 드러나자, 케실리온의 두 눈빛이 약간 누그러들었다. 솔직히 처음부터 느낄 수 있었다. 녀석들이 살의를 품고 있지 않다는 것쯤은 말이다. 다만,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너흰 뭐지...?”

살의를 비치지 않던 비치던 녀석들이 미행한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케실리온은 뒤로 몇 걸음 물러난 뒤 차갑게 쏘아보며 물었다. 그 물음에 두 녀석 중 보랏빛 머리칼과 보라색의 눈을 가진 여자 아이가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죽어 있는 마을의 그늘진 나무 아래에 앉아 있던 알파는 약간 알 것 같다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신이 없는 것인지 힘들어 하는 기색으로 신음을 삼키고 있었다.

“프린.”

짧은 대답이었다. 검은색 마스크를 벗으며 핑크빛 여자아이가 입을 열자 케실리온은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마령검을 그림자 속에 집어넣기 위해 땅 바닥에서 미미하게 움직이는 검은 공간에 손가락을 튕겼다.

“섀도우 웨폰”

시리도록 차갑게 말하자, 케실리온의 그림자 속에서 불쑥 하나의 문이 열렸다. 그림자 속에 숨어 있던 무기 창고.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마령검은 신비로웠다. 하나의 연기로 변하듯 사라진 마령검을 뒤로 하고 케실리온은 가볍게 땅을 박찼다.

슥!

짧은 기척을 내고는 사라진 케실리온은 놀랍게도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여자 아이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꽉!

“웃기지마라. 네 녀석들.”

“케, 케실리온...나 레나야...”

목이 부서 질듯 꽉 움켜쥔 케실리온의 손아귀에서 힘이 약간 풀렸다. 하지만, 끝까지 움켜쥔 손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지금 케실리온의 모습은 아카데미에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은빛으로 물든 머리칼과 두 눈, 은연중 풍기는 분위기 까지 달라져 있었다.

“어떻게 알았지?”

“다, 당연하잖아. 그 손부터... 학!”

스르륵...

케실리온은 숨쉬기 어려워하는 녀석의 목을 풀었다. 옆에 있던 프린이라는 녀석의 눈동자에서 미미하게 마나의 향기가 느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약한 주제에. 쿡”

케실리온의 웃음에 그제야 핑크빛 눈동자에서 마나의 향기가 사라졌다. 괜히 힘 뺀 셈이었다. 고작 이런 녀석의 미행에 긴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웃겼다. 그것까지 생각에 미치자 케실리온은 미련 없다는 듯이 몸을 틀고는 알파를 일으켜 세웠다.

어색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레나와 프린이라는 미행자 녀석들이 머쓱하다는 듯이 어깨를 몇 번 으쓱 거리고는 케실리온의 곁으로 다가왔다. 약간의 눈길을 주고는 걸음을 옮기는 케실리온의 행동에 레나라는 보랏빛 눈을 가진 녀석이 케실리온의 발길을 잡았다.

“친구잖아? 응? 그냥 따라왔을 뿐이야.”

“여전히 읽을 수 없어. 너의 마음을... 하지만...”

레나와 프린의 말에 케실리온의 발걸음이 딱 멈춰졌다. 녀석들이 누군지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 같이 이야기를 몇 번 나누었던 사이, 노예상인들에게 잡혀 이야기를 나누었던 사이.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웃기지마라.”

케실리온은 미련 없다는 듯이 마을의 입구로 향했다. 알파의 흐린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순간 알파의 몸이 케실리온 쪽으로 기울었다. 기절이다. 비틀거림도 없었다. 마치, 영혼이라도 빠져 나간 것처럼 케실리온에게 기대왔다.

휘이잉

“옛날, 옛적에...지상 최강의 종족인 드래곤이 있었어요.”

무뚝뚝한 음성이 케실리온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케실리온의 발걸음은 거짓말처럼 다시 멈추었다. 어색하지도 않은 무감각한 목소리가 케실리온의 마음을 잡아 끈 것이다.

“신에 도전한 드래곤들은 신의 분노를 샀어요... 그리고 신의 분노를 산 드래곤의 봉인과... 하프 드래곤의 출현이 시작된 곳이 바로 이 땅이었지요.”

프린의 말에 케실리온은 알 수 없는 떨림을 받았다. 이야기가 약간 다른 것 같았지만, 아련하게 전해지는 기억의 저 편에서 무언가 갈망하는 느낌을 받았다. 레나도 아니었고, 프린도 아니었다. 케실리온 자신의 깊은 마음속에서 울리는 목소리.

“너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대지의 기억은 알 수 있다.”

프린의 말에 케실리온은 그제야 뒤를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 녀석이 어떻게 그 이야기를 아는지 몰랐다. 기절해 있는 알파와 뒤에서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는 레나의 모습, 그리고 묘하게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는 프린을 돌아본 케실리온은 마을의 끝에 위치한 초라한 집 한 채가 눈에 들어왔다.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곳이 나의 고향이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목적이 뭐야.”

“우린 그저... 기억을 쫒아 왔을 뿐이다. 케실리온!”

프린, 그 꼬마는 정신의 정령을 다루는 녀석이다. 분홍색 머리, 분홍색 눈동자의 끝에 자리 잡은 확고한 의지. 그리고 옆에서 일렁이는 희미한 존재가 그 정령일 것이다.

털석.

옆에 있던 알파가 힘없이 바닥을 뒹굴었다. 케실리온이 움직인 것이다. 그림자로부터 솟아 오른 마령검이 오른손에 쥐어져 있었다. 은발과 은안이 투명해졌다. 그 주위로 퍼지는 마기가 하늘로 치솟아 오른 것이다.

디바인 내추럴에서 가지고온 엠블럼도 소용없는 것인지 케실리온의 기운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하늘로 치솟았다. 

“기억? 그딴 기억 개나 줘라. 고작 10년의 기억!”

케실리온의 마령검이 손에서 떠났다. 그리고는 두 꼬마 여자 아이를 스쳐지나가며, 마을 저편에 있는 집을 향해 덮쳐갔다. 이기어검이었다. 무식할 정도로 일렁이는 은빛의 기운이 폭사하는 순간! 케실리온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너희가 이곳을 알아냈는지는 묻지 않으마. 방해하지마라.”

푸쾅! 꽝!

이기어검에서 뿜어진 강한 강기가 마을 끝에 있는 집 한 채를 통째로 부셔버렸다. 말 그대로 소멸시키듯 갈라버린 집은 형체도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버렸다. 부서진 집을 싸늘하게 쏘아본 케실리온의 표정에는 묘하게 웃음기 가득한 표정이 지어졌다.

대충 짐작했다. 프린이라는 녀석이 말하는 순간. 싫어도 떠오르는 몇 개월 전의 사건이 떠올랐지만, 케실리온에게는 이미 관심 밖의 일이었다. 이미, 복수는 끝났기 때문이다. 그 일이 있었기에 자신이 있다.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레나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과거는 누구나 가지고 있다. 싫은 기억이든 즐거운 기억이든 가지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날... 도발하지마라.”

케실리온은 쓰러진 알파를 무심히 내려다봤다. 축 늘어진 모습을 보니, 묘한 감정이 떠올랐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케실리온은 알파를 어깨에 짊어졌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딱 들기 알맞은 무게였다.

오른손에서 느껴지는 알파의 상태가 전해진다. 생기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몸이었다. 하지만, 고른 숨결과 어깨 너머로 느껴지는 심장의 고동소리가 전해진다. 걸음을 걷는 내내 들려오는 뒤쪽의 기척이 신경 쓰였지만 상관없었다.

“케실리온! 이거 알고 있어? 란델 제국이 널 주시하고 있다는 것.”

다시 들려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레나의 목소리는 사라져 가는 케실리온을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 뒤늦게 행보를 따라 잡으려는 빠른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끝까지 쫒아 올 심산 인 것 같았다.

케실리온은 레나의 말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성녀의 말과 연관 지어 생각하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정보를 흘리고 있는 추기경, 아니. 이단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꼬마 녀석들이 알 리 없는 케실리온의 과거에 대해 알 정도라면, 추기경 중에서도 가까운 자일 것이다.

제국과 케실리온, 케실리온과 신전에 관해서 그리고 신탁의 내용, 목적에 대해서도 알 것이다. 

피의 각성

절로 추위가 전해지는 겨울이다.

짙은 녹음(綠陰)이 지고 설원(雪原)으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 위로 스치는 한줄기 냉풍은 내려쬐는 하늘의 태양을 차갑게 식게 만들기에는 충분했다. 태양의 무구한 노력으로도 녹이기에 불가능한 추위다.

콰앙!

우지지직!

둘레가 성인이 양팔로 휘감기에도 버거워 보이는 거대한 나무 한 그루가 부러지고 있었다. 정확히, 잘리고 있다고 해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일체의 오차도 없이 잘려나가는 나무 기둥의 요란한 소리를 내뱉고는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나무를 잘래내고 얼굴을 잔뜩 찌푸린 은발의 소년은 살짝 투덜거리며, 눈을 살짝 가리는 은발을 뒤로 쓸어 넘겼다. 목원 지대여서 그런지 햇살도 잘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공간이었지만, 나무를 베어내자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는 햇살이 소년을 비추었다.

“후우... 귀찮군.”

투덜거리는 존재는 케실리온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입에서는 입김한번 뿜어지지 않았다. 전혀 추위를 타지 않고 있다는 소리다. 거기다. 자신의 체온을 조절해 주위의 온도와 비슷하게 만들었다는 증거.

여전히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저 멀리 양지 바른 곳에 앉아 있는 두 명의 소녀와 쓰러져 있듯 자고 있는 소녀를 보고 있자니, 짜증이 확 치솟았다.

“빌어먹을 내가 왜 이런 짓을...”

마령검이 고작 나무를 베는데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에 헛웃음도 세어 나올 법 하건만, 일주일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는 알파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만약 알파가 일어나 있었다면 이런 귀찮은 일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마족이라는 것이 추위를 잘 타지 않으니 이런 일을 시킬 리도 없다. 더욱이 케실리온 자신은 추위를 타지 않는다. 아니, 추위를 좋아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추위야 말로 가장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시기다.

기운의 속성이 냉마기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겨울이 가장 적합한 기온이다.

“합!”

케실리온은 투덜거리면서도 마령검을 휘둘렀다. 만검의 1장 1초인 낙이었다. 그 초식을 사용하는 순간, 케실리온의 오른팔은 미약한 잔영을 남기고는 다시 검을 그림자 속으로 숨겼다. 그야말로 극쾌였다.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극쾌!

파사삭!

수십 조각으로 갈려버린 나무 기둥은 보기 좋게 잘려 있었다. 알맞게 땔감으로 쓸 수 있을 정도의 크기다. 그것 중 대충 몇 개를 마법으로 띄워 올린 케실리온은 오들오들 떨고 있는 둘에게 그 장작을 던져 버렸다.

휙!

“알아서 불이나 켜라.”

“고, 고마워.”

추위 때문인지 얼굴 안색이 파란색으로 빛나고 있는 모습이 딱하게 보였지만, 케실리온은 그저 무뚝뚝하게 장작을 녀석들의 앞에 던져 버릴 뿐이었다. 이제 자신이 할 일은 다했다. 이 남는 시간에 검 한 번 더 휘두르는 것이 이익일 것이다.

그일, 그러니까. 레나와 프린이 자신의 뒤를 쫒을 때 느끼지 못했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수련이 부족하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다. 그리고 무공의 진전이 없다는 것은 벌써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내공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육체적인 문제도 없다. 깨달음도 부족할 게 없었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벽에 가로막힌 것도 아니다. 그저 먼저 가보았던 길을 따라 걸어가면 될 일이 이렇게 늦어지고 있었다.

어디부터 잘못된 것인지, 어디가 잘되는지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과거였다면 그딴 어설픈 미행은 단박에 잡아내야 정상이다.

“으아아아!!”

케실리온은 괜히 소리를 내질렀다. 이래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서 되는 일이 없었다. 아카데미에서 천천히 힘을 찾으려던 목표도, 저급하다고 생각했던 2계의 녀석들에게 당한 것도 모두!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한 케실리온이다.

그 답답한 마음이 폭사하듯 케실리온의 커다란 외침이 목원지대에 울려 퍼졌다. 수북하게 쌓인 눈들이 높은 나위 가지에서 떨어져 내리기도 했지만, 케실리온의 근처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흩어져 버렸다.

부드득!

“꺄아... 겨우 불 피웠는데.”

케실리온의 함성이 아무래도 녀석들의 행사(?)에 피해를 준 모양이었다. 약간 글썽거리는 표정으로 케실리온을 쏘아보는 레나와 무표정하지만, 약간 질시어린 눈빛을 보내는 프린의 모습에 케실리온은 짜증난다는 듯이 장작이 있는 곳 까지 다가갔다.

“짜증나는 군. 다크 파이어(Dark Fire)”

흑마법사의 1서클 마법이었다. 헬 파이어의 축소판이라고 해도 될 터였지만, 위력에 비해 마나 소비가 큰 축에 드는 마법이었기 때문에 흑마법사들에게도 잊힌 마법이다. 물론 케실리온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라면 문제일 것이다. 

푸확... 화르륵!

모든 것을 녹여 버릴 듯이 굉장한 소리를 내뱉던 장작은 곧 정상적인 불꽃을 내뿜었다. 그 신비로운 모습에 레나와 프린은 약간 몽롱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죽은 듯이 자고 있는 알파의 곁에 주저앉듯이 자리를 잡는 케실리온의 투덜거림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귀찮게 하는구만.”

“뭐야? 우리 보고 한 소리야?”

“죽은 듯이 자고 있는 녀석이나. 추워서 벌벌 떠는 꼬마들이나. 별 차이는 없지.”

케실리온의 말에 레나가 발끈 거렸다. 확실히 틀린 말은 없었다. 이곳으로 오면서 만난 몬스터나 산적 같은 것을 처리 한 것이 케실리온이었다. 남부로 향하면서 출현빈도가 높아지는 몬스터들의 습격에 당황해 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이미 짜증의 극에 달해 있던 케실리온에게는 그저 화풀이 도구에 불과한 녀석들이었지만, 계속 출현 빈도가 높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마저 짜증에 속하고 있었다.

탁... 타탁!

장작에서 튀는 불꽃을 묵묵히 쏘아보고 있던 케실리온은 여전히 못마땅하게 쳐다보고 있는 두 명의 소녀를 보고는 실소를 머금었다. 괜히 웃음이 흘러나오는 이유를 몰랐다.

“하하하!”

그저 안쓰럽게 훌쩍이며 콧물을 애써 흘리지 않으려는 모습이 웃겼는지도 모른다. 조금씩 따뜻해지는 기운에 진정이 되는 것인지 두 소녀는 약간 홍조가 띤 표정으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케실리온이 못들을 바도 아니었지만,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때, 케실리온의 귀를 잡아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꼬르륵...

“뭐야, 배고픈거냐?”

“아... 아침부터 계속 굶었잖아. 누구 때문에! 그러는 넌 배 안고파?”

추위가 가시니 배가 고픈 것인지 먹을 것부터 찾고 있었다. 그 톡 쏘는 표정에 케실리온의 표정이 미미하게 떨렸다. 딱히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두 녀석은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 토록 케실리온과 비슷한 표정을 구사하고 있던 프린도 약간 지쳐 보였고, 어색하게나마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에 케실리온은 ‘칫’ 거리며 투덜거렸지만, 적당하게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까운 거리에 동물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에 산책(?)하는 겸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거기다. 이런 곳은 별로 위험한 녀석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에 녀석들의 안전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여간.. 꼬마들이란. 녀석이나 잘 보고 있어라. 깨어날지도 모르니.”

“응!”

케실리온의 담담한 목소리에 힘차게 대답하는 레나의 모습이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 새 마냥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고 있었다. 그 부담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걸음을 옮기는 케실리온의 심정은 딱히 좋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녀석을 위해 움직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지금껏 해온 일이 그렇게 되겠지만, 자기 자신을 위해 움직였다는 것으로 치부하고는 저 멀리 느껴지는 미세한 기척을 따라 움직였다.

트르륵... 뿌욱... 푹.

그새 눈이 많이 쌓인 모양이다. 케실리온의 가벼운 몸까지도 뚫고 들어갈 정도였기에 얼마나 많은 눈이 쌓인 것인지 실감났다. 물론, 케실리온의 행보에는 지장이 없었다. 과거의 기억을 느끼고 싶었기에 눈을 세게 밟아 봤을 뿐이다.

그러고 보니, 눈을 본 것도 몇 백 년 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이상한 괴물과 싸우기 전에 느꼈던 눈과 지금의 눈에서 풍기는 느낌은 확연히 달랐다. 뭐랄까. 모든 것이 무감각해졌다고 해야 할까? 마치, 세상을 굽어보는 듯 한 눈빛이다. 이게 다, 세상사 연륜과 경험에서 나오는 눈빛 일 것이다. 

케실리온은 스스로 마음을 추슬렀다. 더 이상 과거를 회상한다고 할지다로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다. 생각 해봐야 돌아오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다. 현재와 미래가 더 중요하기 때문에.

스스슷!

사념을 지우자 케실리온의 보법은 더욱 힘이 들어갔다.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신묘한 움직임이 펼쳐지자, 눈밭은 케실리온의 행보를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눈 길 위로 스쳐지나가는 케실리온의 두 눈빛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뀌어 있었다.

푸드득!

순간, 케실리온의 기척이 사라졌다. 더 도 말고 할 것 없이 그 자리에 우뚝 선 것이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새들, 그리고 점점 사라져 가는 겨울철의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멈춰 버렸다. 이건 케실리온의 탓이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느껴지는 혈향이 케실리온의 코끝으로 전해졌다. 목원지대였기 때문인지 끝도 없이 치솟은 나무들이 태양빛을 가리고 있었다. 완벽한 어둠도 아닌, 완벽한 낮도 아니었다. 우중충한 숲의 느낌에 어느새 마령검이 잡혀있었다.

“크큭...”

우적... 찌이익! 추릅.. 춥!

기이할 정도로 정적이 감도는 가운데 비릿한 웃음과 살이 찢기고 피가 흘러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생생한 느낌이 케실리온에게 전해지자. 무릎을 살짝 구부린 케실리온은 하늘로 치솟았다. 때마침 케실리온의 자리로 덮쳐 오는 괴인이 근처 나무를 잘라버리고 나서야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뒤늦게 케실리온의 신형을 찾은 모양이다.

“블러드 네일?”

케실리온이 그 괴인에게서 처음 본 광경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는 날카로운 손톱! 즉, 블러드 네일이었다. 뱀파이어만이 사용하던 기술이 그 괴인의 손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생각에 까지 미치자, 녀석이 뱀파이어라고 확정지었다.

“피...! 피가... 필요해!!!! 크아아아”

입에서 떨어지는 끈적이고 진한 향기를 보건데 동물의 피였다. 인간과는 다른 피! 자연의 향기를 가득 머금었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의 피의 느낌에 케실리온은 녀석의 의도를 깨달았다. 생기가 넘쳐나는 인간의 피를 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중력의 법칙에 의해 조금씩 떨어져 내리던 케실리온을 향해 달려드는 그 괴인의 행동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만약 이 현상이 모든 뱀파이어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라면 레나와 프린이 좀 위험하다고 느꼈다. 그것에 까지 생각에 미치자마자, 케실리온의 마령검은 녀석의 미간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스아악!

피의 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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