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7화 (187/269)

마령검이 휘둘러지니 마치 성난 파도가 밀려드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케실리온의 주 무공인 만검 중 하나인 낙(落)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 빠른 검술에도 눈앞의 뱀파이어는 눈한 번 깜짝하지 않았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마치 얼어붙은 사람처럼 굳어 있던 뱀파이어가 머리 위로 작렬하는 마령검을 보자 녀석의 오른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붉은 기류가 흐르는 블러드 네일이 머리를 보호하듯 길게 늘어뜨렸다.

카앙!

검과 마기가 부딪히며 요란한 소리를 낸 것이다. 케실리온의 얼굴에 약간 놀라운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비록 기운이 실리지 않았다고 하나, 극쾌의 낙을 막아 낼 줄 몰랐기 때문이다. 뱀파이어에 대한 감탄도 잠시.

“타합!”

우렁찬 기합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케실리온의 검은 손톱위에서 흩날렸다. 처음부터 없었다는 것처럼 먼지처럼 흩날린 것이다. 케실리온의 오른팔의 근육이 순간 수축하면서 내는 극도의 쾌속을 이용해, 허공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뱀파이어의 허리어림을 쓸어갔다.

캉! 카앙!

연이은 두 번의 소리, 어느새 허리를 굳건히 방어한 뱀파이어는 마령검을 살짝 밀어내고 케실리온에게 역습을 시도했다. 말 그대로 전광석화와 같은 동작이었으니, 케실리온은 당황하지 않았다. 검을 막은 것 자체가 신기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가슴 부근인 중단을 치고 올라오는 뱀파이어의 손톱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하지만, 그 뿐이다. 위협적이긴 했으니, 속도와 힘의 차이가 명백했다. 세 번의 공격을 막은것 자체가 우연이라고 치부했다.

“제법이지만...!”

한쪽 눈썹 끝을 더욱 크게 들어 올린 케실리온의 손이 신속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자리 잡은 어둠이라는 정적을 뒤로 하고 케실리온의 몸속에 있는 기의 경락을 통해 기운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카앙 캉 캉 캉!!

수십의 공방이었다. 이처럼 즐거운 일도 없을 것이다. 저급한 녀석들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비록 진심으로 싸우는 것은 아니었지만, 눈앞의 뱀파이어는 케실리온이 휘두르려는 검의 궤적을 꾀고 있었다. 이정도만 하더라도 녀석을 인정 할만 했지만, 녀석은 무언가에 홀린 듯 한 느낌이다.

캉!

“훗!”

가로막힌 마령검을 보던 케실리온이 비릿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번번히 가로막히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 수법에 가로막힌다고 한들 케실리온에게 지장될 것은 아니었다. 엄청난 속도로 진행되는 공방이 어느 정도 익숙해진 케실리온은 마령검에 기운을 불어넣었다.

진즉 기운을 불어 넣었어야 했지만, 약간 녀석과 겨루어 보고 싶었다. 물론, 레나와 프린이 있는 곳이 약간 마음에 걸렸지만 느긋하게 이 싸움을 즐기고 싶었다. 간만에 풀어보는 검의 혜우를 느끼고 싶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묵직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마령검에서 미약하게나마, 은빛의 기운이 일렁거렸다. 수직, 대각선, 수평을 동시에 베어가는 케실리온의 검이 수십으로 불어났다. 은빛으로 출렁이는 기운이 빛의 궤도를 만드는 것은 물론, 살기까지 비치고 있었다.

스악!

“크아아!”

그제야 뱀파이어 녀석이 심음에 찬 비명을 터뜨렸다. 옆구리에 이어, 허벅지를 베어 버린 것이다. 하얀 눈으로 뒤덮인 곳은 어느새 뜨거운 피로 인해 모락모락 김이 뿜어지는 붉은 융단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피가... 피가 필요해!!”

녀석의 눈이 묘하게 은빛을 띄기 시작했다. 그 순간, 길게 뻗어 나오는 양쪽의 송곳니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상처를 입은 곳이 아물기 시작하더니, ‘팟’하는 소리와 함께 죽어버린 피가 뿜어졌다.

‘그르륵’ 거리며 아물어 버린 상처 위로 녀석의 거친 숨결이 전해졌다. 상당히 지친 표정이 역력했지만, 눈빛은 살아있었다. 케실리온을 죽여 피를 취하겠다는 의지가 전해지고 있었다.

“타합!”

케실리온의 기합성과 동시에 검에서 출렁이던 기운이 사라져버렸다. 그 기운도 실리지 않은 검은 뱀파이어의 손에 막힐 것이 자명했다.

캉!

여지없이 막혀 버린 마령검을 쳐다보던 뱀파이어의 비릿한 웃음소리가 전해져왔다.

“크큿!”

“죽어라... 뱀파이어.”

녀석의 비릿한 웃음소리를 뒤로 하고 케실리온의 날카로운 마검이 움직였다. 가로막힌 블러드 네일을 따라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령검을 놓아 버린 케실리온의 손을 떠나 자유롭게 뱀파이어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휘리릿!

이기어검의 수법이었다. 지옥에서나 볼법한 검술의 극치였다. 2계의 인물들은 감히 사용 하지 못할 최고의 검극! 검의 극치를 보여주는 수법에 뱀파이어는 당황했다. 손에서 검을 떠난 뒤에도 움직이는 신묘한 수법에 놀란 것이다.

“크... 저럴...!”

녀석은 말의 끝을 맺지 못했다. 이미 목이 달아나 뇌의 기능이 정지 해 버린 것이다. 두 눈을 부릅뜨며 목이 날아가 버린 것으로 보아, 밑을 수 없는 일이었던 모양이다. 손에서 떠난 마령검은 뒤에 있는 나무를 통째로 베어 버리고 나서야 케실리온의 손으로 돌아와 있었다.

공간을 압축하듯 날아가 뱀파이어의 목을 베어버린 깔끔한 수법에 대해 감상에 젖어 있던 케실리온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급히 신법을 전개했다.

교묘한 진기의 운용으로 용천혈을 통해 땅을 밀어내자, 케실리온의 몸은 하늘로 약간 떠올랐다. 지형지물(地形地物)을 피해 움직이는 케실리온의 움직임은 가히 최상의 몸놀림을 자랑했다.

넓게 포진한 눈길에 어떤 발자국도 남기지 않은 광경을 누군가 봤다면 넋을 잃었을 것이다. 간간히 바닥을 박차는 케실리온은 순식간에 처음의 장소로 돌아갔다. 눈에 보이는 것은 날뛰고 있는 하나의 뱀파이어,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피를 갈구하는 짖은 살기에 젖은 모습에 케실리온은 입에서 비릿하지만, 짜증이 나는 듯이 투덜거렸다.

“칫!”

불찰이다. 아까 처리했던 뱀파이어에게 너무 시간일 빼앗긴 것 같았다. 아지랑이 같이 솟아오르는 알파의 손톱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만 늦었다면, 알파에게 모두 당했을 것이다. 손톱이 완전히 솟아오르는 것을 확인한 케실리온은 눈밭을 향해 힘차게 땅을 박찼다.

쿵!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울리는 거대한 소리에 자연히 알파와 레나, 프린의 눈길이 그곳을 향했지만, 눈이 하늘로 치솟는 모습만 봐야했다. 이미, 케실리온은 저 높이 솟아있는 나무를 박차고 있었다. 가지에 매달린 눈이 떨어지고 나서야 케실리온은 레나와 프린의 앞을 막아 설수 있었다.

“설마 했건만...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군.”

“피가... 필요해!!!!”

케실리온의 찹찹한 말투에 알파는 손톱을 그대로 수직으로 그어 내렸다. 피를 봐야 풀릴 것 같았다. 거의 일주일이나 잠을 잤으면서 저런 움직임을 보인다는 것에 대해 놀라움도 있었지만, 그런 사사로운 감정에 잡혀 있어서는 안 된다.

아까 보았던, 뱀파이어와 차원이 다른 몸놀림이었다. 붉게 타오르는 두 눈과 찰랑이는 파란색의 머리칼이 대조적이었다. 날카로우면서 청조한 분위기... 그 어중간한 분위기에 케실리온은 마령검은 그림자 속에 넣어두었다.

저렇게 변해 있지만, 본질은 자신의 수하, 믿음을 받은 이상, 녀석은 케실리온의 수하였다. 첫 번째 수하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마, 마족?!”

레나와 프린은 떨리는 목소리로 알파를 가리키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케실리온이 느끼기에도 엄청난 살기였다. 거기다. 앞을 가로막은 케실리온이 걱정되는 것인지 떨리는 눈동자에는 케실리온의 얼굴이 서려있었다.

“피가...!!!”

슈악!

케실리온을 덮쳐 오는 날카로운 기운에 급히 보법을 펼치며 옆으로 피한 케실리온은 알파의 손을 자신에게로 유도했다. 천마소수를 이용해 녀석을 유도하자, 자연히 시선은 케실리온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 날카로운 블러드 네일이 좌우로 떨리며 케실리온의 손길에 따라 움직였다. 이미, 케실리온의 손은 알파의 차가워진 쳐내며 궤도를 바꿔가고 있었다. 차츰 궤도가 다른 곳으로 향했을 쯤, 케실리온의 오른손의 움직임이 변했다. 둥글게 말아 쥐고 있던 손을 펴며, 손을 날카롭게 세우며 알파의 손목을 향해 휘둘렀다.

퍼억!

짧은 타격 음이 가해지자, 알파의 손이 부르르 떨리며 아래로 축 늘어져 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언제 이런 수법을 배운 것인지 알파의 가녀린 손의 방향이 위로 향했다. 나긋나긋한 바람을 일으키며 흔들리던 알파의 손에서 날카로운 바람이 일렁였다.

“피를...!”

위로 치고 올라오는 녀석의 블러드 네일을 보며, 약간 뒤로 물러난 케실리온은 침착하게 일장을 펼치며 왼손의 손바닥을 녀석의 팔을 쳐냈다. 단순하지만, 전혀 단수 할 수 없는 방어에 알파가 약간 주춤 거렸다. 그렇다고 케실리온의 움직임이 멈춘 것은 아니었다.

소수마공을 펼치기 위해 신형을 아래로 낮춘 몸이 그대로 알파의 품으로 파고든 형국이었다. 눈길을 좌우로 갈라버린 케실리온의 보법에 돌연 알파의 손이 움직였다.

양손이 교차하듯 움직이는 알파의 공격 수법에 케실리온은 소수마공을 유지한 양손을 그대로 알파의 공격 범위에 맞추어 크게 좌우로 휘둘렀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케실리온의 오른팔과 알파의 왼팔이 교차하며 뒤엉켜 버렸다.

“허억... 줘... 피를!”

거친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일순간 감도는 숨 막히는 긴장감에 레나는 헛바람을 삼키는 것은 물론,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알파가 미처 뱀파이어였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껏 그저, 어디 다친 소녀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나이와 비슷한 또래! 그런데 저런 뱀파이어의 모습이라는 것을 꿈에도 몰랐다는 표정이다.

“하악...”

거친 숨결을 뒤로 하고, 서로 엉켜 있는 팔을 풀어내기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서로의 팔이 풀리며 누가 더 빨리 상대를 공격하고 방어를 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릴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 교차한 눈빛 사이로 흐르는 싸한 긴장감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히고 긴장감이 팽배해진 순간, 케실리온이 움직였다.

“후우웃!”

케실리온은 입을 모아 알파의 얼굴에 바람을 불었다. 갑자기 몰아치는 향긋한 냄새. 알파의 코끝을 간질이는 향긋한 냄새에 약간 당황한 눈치를 보였다. 케실리온의 입에서는 약간이지만, 비릿하게 번지는 혈향이 느껴졌던 것이다.

일부러 입안을 상처를 내, 입안에 고일 정도로 피를 만들어냈다. 물론, 스스로 상처를 낸다는 것이 약간 꺼림칙했지만, 알파의 거친 행동을 막을 수 있지 않을 까 해서였다. 아무튼, 그 달콤한 내음의 정체를 파악하지 못했고, 짧은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졌다. 그것을 노칠 케실리온이 아니었다.

한 순간 풀려버린 케실리온의 흰 피부가 뒤덮인 손이 알파를 향해 내뻗어졌고, 알파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몸을 비틀어 심장을 포함한 급소를 보호하는 것이 최선일 뿐이었다.

퍼억!

뒤쪽으로 튕겨져 나가는 알파.

그녀의 입가에는 내상을 입었음을 증명하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뒤늦게 그 광경을 목격한 레나와 프린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저런 수법은 처음이었다. 파이터도 저런 수법을 펼치지 못할 것이 자명했다.

상대를 밀어내는 모습을 했건만, 저렇게 땅을 끌며 뒤로 튕겨 나가는 것은 신비함을 넘어 두려움으로 찾아왔다. 입에서 뱉어내는 검은 피가 꾸역꾸역 새어 나왔기 때문이다.

“으으으...”

알파는 애써 몸을 바로 세우며 신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알파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로 비치는 신월, 스칼렛의 신월이었다. 쥬얼의 만월과 대비되는 붉은 달의 신월은 모든 것을 스산하게 만들었다.

세상을 뒤덮은 어둠속에서 비치는 아련한 달빛을 받은 알파의 몸이 몇 번 움찔 거리더니, 가슴이 이상할 정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카아아아!!”

앵두같은 입술을 비집고 튀어 나온 두 개의 송곳니와 붉어질 대로 붉어져, 은빛으로 변해 버린 눈동자가 케실리온을 주시하고 있었다. 레나와 프린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생각하는지, 케실리온을 향해 끈적이는 시선을 보냈다.

“저에게... 피를 주시겠습니까? 당신의 모든 것을 담은 피를!!”

차분하지만, 평소의 알파가 낼만한 목소리가 아니었다. 어딘가 침착하지만, 끈적였고, 무언가를 유혹하는 목소리다. 이것이 바로, 뱀파이어의 큰 무기가 되는 유혹일 것이다. 피를 취하려는 자를 꿰어 내기 위한 달콤한 속삭임.

“당신이 필요해요. 그대의 피를 저에게...”

휘이잉!

겨울바람은 강했다. 강한 바람이 몰아치자, 눈발이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케실리온의 코끝으로 전해지는 달콤한 향기를 맡는 순간 케실리온은 몸이 굳어졌다.

“이럴... 수가!”

전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바람을 통해 독이라도 뿌린 것 같았지만, 지금의 케실리온에게는 독은 아무런 피해를 줄 수 없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최상의 컨디션을 자랑하는 케실리온이다.

번쩍!

알파의 눈에서 뿜어진 안광사이로 비치는 갈라진 눈빛이 케실리온의 눈에 파고들었다. 그리고 코에서 전해지는 향기로운 냄새... 이상하지만, 마음이 편안해졌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알파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어이없는 상황에 케실리온은 하단전의 기운을 온 몸으로 퍼뜨렸다. 그 빠른 기의 유동에 입속은 비릿한 혈향이 가득했다. 일부러 만들어 놓았던 피가 입을 통해 흘러내리자, 알파는 참을 수 없는 지, 흘러내리는 피를 향해 입을 맞추었다.

쪽!

케실리온의 입속으로 들어오는 알파의 숨결이 느껴졌다. 그리고 흘러내리던 피는 알파의 입속으로 전해졌다. 

피의 각성

‘달콤해... 이 피’

알파는 하나도 정신이 없었다. 입속을 통해 들어오는 달콤한 향의 피를 느꼈기 때문이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마기의 향기에 취한 알파는 그 피를 더 취하고 싶었다. 이런 피는 처음이었다.

심장이 터질듯 두근거렸다. 몸과 정신을 충만하게 만드는 이 피의 주인을 보고 싶었다. 오락가락 하던, 정신과 시야가 밝아졌다. 주위는 어두웠지만, 상대가 눈에 들어왔다.

‘케, 케실리온...? 도대체!’

알파는 순간 당황했다. 정신이 번쩍 드는 기분이 들었다. 감히 누구의 피를 취하고 있단 말인가. 입속으로 전해지는 아늑한 향기에서 벗어 날수 없었다. 계속 밀려드는 뜨거운 피와 숨결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몸이 의지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 것인지 알파의 혀는 조금이라도 더 피를 취하기 위해 케실리온의 굳어 있는 표정과 입속을 파고들었다. 부드러운 혀가 부딪히자, 알파의 얼굴은 살짝 홍조가 드리웠다.

‘아... 내가 무슨 짓을...’

알파는 시선을 어디로 둘지 난감해 하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 강렬한 피는 뿌리 칠 수 없었다. 적은 피였지만, 어떤 피보다 질이 좋았다. 알파의 시선이 하늘로 향하자 세차가 심장이 두근거렸다.

‘시, 신월?! 언제! 벌써 신월이라니!!’

붉게 타오르는 스칼렛의 신월이었다. 그 뜨거운 달빛에 알파는 더욱 케실리온을 껴안으며 피를 취하려 했다.

“뭐, 뭐하는 거야!”

“뱀파이어?”

등 뒤에서 들리는 가녀린 두 목소리에 알파의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렸다. 일주일이나 자고 있었기 때문에 누가 누군지, 어떻게 이런 상황이 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알파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몸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쭈욱...

아쉽게도 알파의 입술과 케실리온의 입술을 약간 떨어졌다. 뒤에 있는 방해꾼 때문인지 알파의 몸은 저절로 블러드 네일을 만들어 냈다.

“방해... 하지마!”

‘도대체... 이게! 내게 무슨 일이.’

알파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입은 벌어졌고 몸이 움직였다. 이미 정신이 돌아왔건만 몸은 줄 풀린 인형처럼 마음대로 날뛰고 있었다.

“흐, 흥!”

“방해... 죽인다.”

레나는 갑작스럽게 사나운 눈빛을 보내는 알파의 행동에 주춤 거렸다. 알파의 입가에 묻어 있는 케실리온의 침과 피가 알파의 입가로 흘러내렸다. 레나는 다소 의연한 자세를 취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미 알파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히 누구의 피를 빨았던가. 바로 케실리온이다. 평소 같았으면 그런 행동은 있을 수 없었다.

“프, 프린. 어떻게 해봐...”

“어떻게 해보라고 해도...”

프린은 나름대로 방법을 강구하고 있었지만, 답답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저 뱀파이어를 상대로 어떤 수를 써야 할지, 자신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겪는 상황이어서 그런지 좀처럼 생각나지 않았다.

“나를 공격해라. 프린, 정신계 공격쯤은 있겠지? 나를 향해 사용해라.”

“......?”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케실리온의 다급한 목소리에 프린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케실리온의 몸이 굳어 있는 것도 이상했지만, 자신을 공격하라는 말은 이해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뱀파이어가 사용하는 유혹에 걸린 것 같다. 차라리, 정신 공격을 받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케실리온의 판단은 어느 정도 맞았다. 뱀파이어가 사용하는 유혹은 쉽사리 뿌리 칠 수 없다. 그 상대가 이성이라는 것이 큰 작용점을 했을 것이다. 케실리온의 깨달음과 몸속의 기운을 생각해본 다면 이상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케실리온의 상태는 유혹에 걸린 것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었다.

공기 중으로 퍼진, 뱀파이어의 체취와 눈에서 뿜어진 정신계 마법의 종류가 동시에 사용했기 때문 일 것이다. 물론, 케실리온은 그 런 수법에 당하려야 당할 수가 없지만, 상대가 수하라는 점과 과한 살수를 펼치지 않을 생각이었기에 이런 상황을 당하고 말았다.

공기중으로 퍼뜨리는 달콤한 향기는 뱀파이어가 내뿜는 특유의 향기다. 예전에도 맞았지만, 아무이상이 없었던 이유는 알파가 감히 그럴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점과 하늘에 떠있는 신월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세가 가장 큰 스칼렛의 신월이다. 지금은 뱀파이어의 힘이 가장 큰 시기로 두 가지의 기술에 먹혀든 케실리온이 꼼짝 할 수 없었다는 것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갈만 했다.

“다쳐도 난 모르는 일이다. 그럼...!”

프린은 케실리온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하고는 알파를 피해 정신계 정령을 소환하기 위해 프린은 눈을 감으며 두 손을 모았다. 마치 기도를 하는 모습과 같았기에 신성하기 까지 했다. 잠시후, 눈밭에 그려지는 복잡한 마법진으로부터 투명한 존재가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다.

“마인더!!”

프린의 외침에 마법진에서는 밝은 빛이 뿜어졌다. 형체를 이루기 시작한 마인더는 정령사가 아니더라도 모습을 내비쳤다. 마법진을 이용한 소환이었기 때문인지, 아카데미에서와는 다르게 그 힘의 차이가 확실히 틀렸다.

형체를 갖춘 마인더는 어느 정도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입을 뻐끔 거리는 정령을 보며 프린이 몇 번 머리를 끄덕이자, 마인더라는 정령이 케실리온을 향해 날아갔다. 그 정령은 여성의 모습이었는데, 상반신은 벗고 있었고 하반신은 나풀거리는 옷을 입고 있었다.

꾸벅..

[마인드 브레이크(Mind Break)]

정신계 정령인 마인더는 케실리온에게 뾰로롱 거리며 날아가 머리를 꾸벅 숙였다. 인사 같은 행동을 유심히 보고 있던 케실리온은 갑작스럽게 미간에 손을 올려놓는 마인더라는 정령을 보자 얼굴을 살짝 구겼다. 아무래도 상단전에 그대로 충격을 줄 모양이었다. 

쿠웅!

머릿속에서 요동치는 커다란 충격에 케실리온의 정신은 약간 아득하게 펼쳐진 검은 색의 공간으로 빨려드는 느낌이 들었다. 울컥 치솟는 피와 토할 것 같은 느낌을 느끼고 나서야 케실리온의 몸이 움찔 거리며 약간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기로 상단전을 보호 하지 않았다면,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다행히, 그렇게 큰 충격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몸이 조금씩 움직여졌다. 마인드 브레이크, 말대로 정신을 파괴하는 수법이었다.

자칫 이지를 상실케 할지도 모르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내는 케실리온을 보며 프린은 머리를 설레설레 저었다.

“신월이군. 역시... 그래서 레딕이!”

케실리온은 레딕이 왜 동행하지 않은 것인지 대충 이해했다. 알파의 폭주를 예상하고 있었을 것이다. 지금의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했다는 것보다, 레딕이 미리 일러 주지 않았다는 생각에 치를 떨어야 했다.

“꺄아아악!”

레나의 비명이 들리고 나서야 케실리온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 알파를 잠재워야 할 것이다. 이대로 폭주 하게 놓아두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다시 덮쳐 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다지 싫지만은 않았지만, 피를 빨린다는 것은 썩 내키지 않았다.

“뭐하는 거야! 프린, 케실리온! 도와줘.”

알파의 블러드 네일을 겨우 피해내며 비명 같은 소리를 내고 나서야 케실리온이 움직였다. 레나를 향해 덮쳐 가는 알파의 행동에 케실리온은 결단을 내렸다. 이미 하늘에 스칼렛의 신월이 떠 오른 마당이다.

그것은 알파의 힘이 평소의 배 이상으로 상승했다는 말과 같았다. 때문에 케실리온은 소수마공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마령심법으로 유동하던 기운을 더해 소수마공을 펼친 것이다. 평소부터 한기를 내뿜는 기운이었던 마당에 소수마공을 끌어 올린 것은 큰 위력을 발휘했다.

팟!

땅을 박찬 케실리온의 신형은 레나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미 달려들고 있던 알파의 시야에 갑작스럽게 등장한 케실리온 때문에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그렇다고 그녀의 블러드 네일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수직으로 내려 그어지는 블러드 네일을 보며 케실리온은 천마소수를 이용해 그녀의 손목을 살짝 휘감았다. 빠른 속도로 내려 그어지던 블러드 네일이 놀랍게 케실리온의 흐림을 따라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마치 태극권을 보는 것처럼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확실히 그녀의 수법을 파훼하며 케실리온은 레나를 보호 한 것이다.

“크아아!”

쉽게 가로막힌 블러드 네일을 보며 알파가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번들거리는 눈을 통해 케실리온의 피를 갈구 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까와 비슷한 향기와 함께 케실리온을 옥좌하기 위해 유혹의 눈길을 뻗었다.

“흥! 두 번은 걸리지 않는 다!”

케실리온은 유혹의 눈길을 피해 눈을 질끈 감았다. 은은하게 퍼지던 눈길을 받는 순간 몸이 굳어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인에게 있어 눈을 감는 다는 것은 치명적인 결과를 나을 수도 있지만, 케실리온은 다르다.

눈이 없어도 피부로 와 닫는 살기와 감각! 작은 기척을 통해 위치를 파악하는 일은 쉬웠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녀의 몸에서는 무시 할 수 없는 마기가 뿜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케실리온은 쉽게 공방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휘리릿!

케실리온의 팔에 감겨 있던 알파의 손목을 튕겨내듯 쳐 내고는 몸의 균형을 아래로 향하게 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듯 굽어진 케실리온의 허리와 두 눈동자에서 매섭기 그지없는 기운이 퍼지기 시작했다.

“죽여 버린다!!”

“닥쳐라!”

뭔가 일이 잘 풀리지 않은 것인지 알파의 눈은 살기로 번뜩이며 케실리온을 죽이겠다는 말을 하고는 케실리온의 신형에 따라 양손에서 뿜어지는 블러드 네일을 좌우로 교차시켰다. 그야 말로 엑스로 교차하듯 뻗어진 수법에 케실리온은 미소를 지었다.

짧은 호통에 이어 케실리온의 기운이 담긴 장법이 알파의 복부를 향해 이동했다. 알파의 동작이 워낙 컸기 때문에 케실리온의 장이 그녀의 복부에 닫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퍼억!

둔탁한 음향과 함께 케실리온의 장이 알파의 복부와 부딪쳤다. 그 뒤로 이어지는 소수마공이 장을 통해 뿜어졌다. 소수신장이었다. 장을 통해 뿜어진 한기가 알파의 복부를 통해 내부기관으로 관통하자, 알파는 괴로운 듯 비명을 토해냈다.

“꺄아악!!”

그녀의 비명을 통해 뿜어진 선혈이 입에서 흘러내렸다. 심각한 내상을 당한 것이다. 당연한 일인지 몰랐다. 케실리온의 수법은 지독할 정도의 수법이었기 때문이다. 소수신장! 그 장법이 몸을 덮치는 순간 내부 장기를 얼려버린다는 것은 지옥의 사람들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무서운 장법이 펼쳐졌으니, 알파는 회생불능이 되었으리라. 물론 케실리온이 어느 정도 손속을 두었지만 이 장법을 펼친 것은 실수였다. 자신도 모르게 흥분한 나머지 알파를 향해 살수를 펼친 것을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 진물, 깔끔하게 죽이고자 그림자 속에 두었던 마령검을 움켜쥐었다. 소수신장에 당하면 엄청난 고통에 시달리기 때문에 깔끔하게 보내주는 것도 자비일 것이다.

“내 손속이 과했다. 미안하게 됐다. 알파.”

“아아...”

알파의 입술과 볼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피부색까지 푸르스름하게 변해 버렸다는 것은 이미 소수신장이 내부 장기를 거쳐 심장에 이르렀다는 소리였다. 심장에 까지 도달한 소수신장은 그대로 심장을 얼려버리는 것으로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사라랑!

케실리온의 검에서 짧게 공명음을 토했다. 그 뒤로 뿜어진 검강에서 은빛의 기운이 일렁였다. 완벽하게 형체를 가춘 강기가 알파를 향하기 시작했다. 이대로 알파의 미간을 뚫어 버릴 것이 자명했다.

거침없는 찌르기 공격에 레나와 프린은 약간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말로만 마룡의 위력을 파악하고 있었지만, 이정도로 강자 일 줄은 몰랐던 것 같았다. 찔러 들어가는 검의 끝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자, 약간의 회전이 더해졌다. 이것은 알파의 죽음을 예고 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 모습에 레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비록 마족이라고 하나,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자의 죽음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우웅!

그렇게 수초가 지나도록 레나의 두 눈은 떠질 줄 몰랐다. 약간의 바람이 몰아치자 레나의 눈은 서서히 떠졌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붉은 혈기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뱀파이어의 죽음을 알리듯 땅으로 흘러내리는 피가 눈에 들어왔다.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져 내리는 피의 길을 따라 향한 곳은 놀랍게도 케실리온이었다. 오른손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에 레나의 입에서 약간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꺄!”

“젠장....!”

케실리온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짜증과 어이없는 상황에서 삐져나오는 지독한 통증에서 비롯된 욕설이었다. 케실리온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자신의 오른손을 바라봐야 했다. 갈가리 찢어져 원래의 형체를 찾아볼 수 없는 소매 사이로 드러난 두 손.

인간의 한계를 넘어 마룡의 육신에 버금가는 자신의 손이 형편없이 망가져 있었다. 검을 못 쥘 정도는 아니었지만, 손바닥은 심하게 찢어져 있었다. 피부는 너덜너덜해지고 벗겨진 피부 아래서 핏물이 배어나왔다.

시뻘겋게 물든 팔은 고기로 보일 정도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팔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열 가닥의 줄기가 손바닥을 타고 어깨 끝까지 이어진 것이다.

할짝...

케실리온의 발치에는 떨어진 피를 취하기 위해 혀를 놀리는 알파가 무릎을 꿇고 고여 있는 케실리온의 피에 혀를 가져다 대고 있었다. 추한 모습이었지만, 케실리온의 두 눈동자가 옅게 파르르 떨렸다.

케실리온이 놀란 것은 그녀의 무위가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반탄력을 발생시키며 역습을 한 것! 단순히 따지면 케실리온도 할 수 있는 공격법이었다. 상대의 기운을 흘려보내고 그대로 자신의 마령검을 휘두르는 것!

하지만, 케실리온이 이해 할 수 없는 것은 언제 그녀가 그 정도의 빠르기로 휘둘렀느냐는 것이다. 전혀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녀의 마기가 자신을 뛰어넘고 있다는 것으로 설명할 수 있었다.

단순하게 반탄력을 이용한 공격이라면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리 스칼렛의 신월이 떴다고는 하나, 알파의 마기는 자신에게 못 미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질끈!

 케실리온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약간의 틈을 통해 떨어지는 피를 보던 케실리온은 흡혈마공을 끌어 올리며 자신의 피를 다시 취했다. 다시금 빨려 들어가는 혈로를 보며 알파의 시선이 케실리온에게 향했다.

“줘... 피를!”

휘릿!

케실리온은 급히 뒤로 신형을 뽑아냈다. 확실히 알파는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자신의 피를 통해 강해진 것인 가는 모르겠지만, 아까보다 공격속도가 상승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소수신장에 당했던 복부는 완벽하게 치유된 것인지 움직임에 어색한 점은 찾아 볼 수 없었다.

뒤로 한걸음 물러난 케실리온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달빛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까보다 밝아진 빛에서 묘한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훗..!”

케실리온의 작은 웃음에 주위는 약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약간 당황해 하던 모습을 감춘 것이다. 케실리온의 은안이 알파의 그림자로 향했다. 묘한 생각이라는 것이 그림자를 보는 것에 그쳤다는 것에 레나와 프린도 약간 어처구니없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다시금 눈을 부릅뜰 수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왔다.

케실리온의 신형이 알파를 스쳐지나가며 그림자로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그 뒤로 뻗어진 오른손을 통해 은빛이 세상을 뒤덮었다.

“그림자 먹기!”

상대를 압도하는 마기! 뛰어난 정신력! 그리고 상대 그림자와의 접촉! 이 모든 것으로 케실리온의 모습은 자취를 감췄다.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무릎을 꿇으며 신음을 터뜨리는 알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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