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파가 피의 각성을 이룬지 벌써 일주일이나 지나있었다. 알파가 정신을 차렸을 무렵 약간 어수선한 분위기와 어색한 느낌도 있었지만, 알파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 말투와 케실리온을 대하는 것이 처음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케실리온은 나름대로 알파의 기운이 강해진 것을 알고 있었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성장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정작 본인은 자신의 힘을 잘 모르는 듯 했지만 케실리온이 인정할 정도로 강해져 있었다.
“저... 보았습니다. 케실리온님의 모습을...”
“응?”
케실리온은 갑작스럽게 이상한 말을 하는 알파의 행동에 의문을 품었다. 특별한 일도 없었고, 각성에 대한 의문도 없었기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서는 별다른 추궁을 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알파 자신이 이야기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꿈에서... 아니, 케실리온님의 기억에서...”
알파의 모습은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부쩍 커버린 키를 가지고 있었다. 대충 보아도 165정도의 키와 찰랑 거리는 머리칼이 케실리온의 눈에 들어왔다. 물론 케실리온이 자신에게 걸어 놓은 마법을 푼다면 알파보다 크겠지만, 특별히 마법을 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마계도 아닌, 중간계도 아닌 곳... 하지만 강자가 넘치던 곳... 그 중심에 있던 케실리온님의 모습을...”
그제야 케실리온은 알파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지옥... 지옥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수백, 수천에 이르는 지옥 고수를 상대하는 모습을 봤던 것 같았다. 케실리온에게는 그저 추억에 지나지 않은 일이었지만, 알파에게는 큰 충격이 된 것 같았다.
부르르...
알파는 약간 떨리는 몸을 추슬렀다. 마족도 무시 할 수 없는 강자가 넘쳐흐르는 곳에서 위용을 뽐내던 케실리온의 모습이 가시지 않은 모양이다. 그 모습을 보는 케실리온은 웃음을 흘릴 뿐이다.
“하하! 과거의 일이다. 뭘 본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뇨.. 제가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은 다 케실리온님 덕분입니다.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그 모습을...”
케실리온은 도대체 무엇을 봤기에 저런 표정을 하는지 심히 궁금했다. 인간이나, 마족... 아니, 생각하는 모든 생명체는 가지고 있다. 과거의 일, 추억...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을 저장하는 곳! 바로, 뇌이다.
스스로는 모르고 있지만, 스쳐 지나간 일과 무의식중에 벌인 일을 뇌는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 많은 기억의 구슬을 통해 알파의 어린 시절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케실리온이다. 알파 자신은 기억하기 싫어 잊은 듯 보였지만, 케실리온은 확실히 봤다.
“혼자서... 수백, 수천을 상대하던 케실리온님... 검 한 자루로...”
케실리온은 알파의 말에 지옥에서 있었던 일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기억 하고 싶지 않아도 떠오르는 무수한 기억 속에 마지막에 보았던 조씨 가문의 후손의 얼굴이 떠올랐다. 하지만 곧 잊혔고, 지옥을 종횡무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생각이 떠오를수록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곧 표정이 굳어졌다. 무언가 답답하던 기분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머릿속을 채우는 과거의 잔재가 떠올랐다.
지옥 900년, 케실리온... 아니, 조제현으로써는 자유를 만끽하던 시기였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무기 한 자루도 없던 그 날을 떠오르자, 괜스레 상쾌한 느낌이 감돌았다.
억압도, 막을 자도 없었던 무의 극을 보던 시기.... 아련히 떠오르는 과거의 모습이 비춰졌다. 170정도의 키를 가졌으며, 동안의 모습과 부족 할 것이 없었던 아미(蛾眉)... 약간 오만하게 보일 정도로 치켜세워져 있는 아미였다.
하지만, 정작 서 있는 곳은 수천의 무인들이 길을 가로막으며, 조제현을 짜증나게 만드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옆에서 어찌 할 바를 모르는 하윤의 모습까지 생생히 그려지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허허허... 본좌의 행보를 막고 싶은가?”
“웃기지 마라! 우리는 정도맹! 풍운신협의 뒤를 잊는 최고의 고수라고 자부하고 있다. 하지만....!”
“하지만...? 본좌의 행보를 막을 이유가 없다면 길을 비켜라.”
“고작... 과거의 고수에게 순위를 양보 할 수 없는 노릇! 이곳에서 결판을 보자! 흡혈지존 조제현!”
“허허허... 정도맹이라... 생소한 집단이군. 그래서 단체로 날 공격하겠다는 말인가?!”
조제현의 말에 주위가 술렁거렸다. 이름 높은 정도맹을 몰라보는 자는 이번이 처음 일 것이다. 지옥의 어떤 집단 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하며, 지옥의 상위권 고수들이 모여 있는 집단인 만큼 누구도 무시 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정작 오만한 옛 1위라는 작자는 두려움은커녕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귀찮게 엮여 드는 시정잡배의 무리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 모습에 화를 참지 못한 자가 몇몇 뛰쳐나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웃기지 마라! 우리가 곧 법이다!!”
스아악!
공기를 가르는 무서운 기의 파장에 조제현은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떤 철제 무기도 없는 조제현으로써는 약간 무모한 행동이었지만, 누구도 무시하거나 비웃지 않았다. 너무나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는 정도맹의 고수들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리군. 힘이 곧 법이다. 이 지옥은!”
조제현은 자신에게 쏘아진 검을 보며 일말의 기운을 일으키지 않았다. 날아드는 검강의 용맹한 기세에 짧게 손을 흔들 뿐이었다. 그리고 짧은 고요함이 흐르자, 조제현의 손에는 이름 모를 녀석이 휘두른 장검이 꽉 잡혀 있었다. 특유의 무표정이 더해, 공포스런 모습을 자아냈다.
움찔.. 움찔!
“네놈...!!!”
꿈쩍도 하지 않는 검의 모습에 녀석은 이를 갈뿐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그저 조제현의 흐름에, 손놀림에 검을 내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호오... 애송이 주제에 좋은 검을 사용하는 군. 부족함이 없구나.”
조제현은 빼앗아 온 검을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보기보다 좋은 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 저리 둘러보던 조제현은 감 잡았다는 듯이 자신만의 기수식을 취했다. 하지만, 만검의 기수식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기수식을 취하는 모습에 옆에 있던 하윤은 침을 꿀꺽 삼켜야만 했다.
“후우... 말년에 얻은 무공으로 가 볼까...”
조제현이 말년에 얻은 무공이라고 한다면, 만검의 2장일 것이다. 만검의 1장에 해당하는 4초식을 보완해 만든 최고의 검법이었다. 물론, 쉽사리 펼쳐내지 못한다는 점과 내공 소모가 많다는 점을 볼 때, 아직 미완성의 검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존재 자체만으로도 검의 극을 논할 정도로 완벽한 검이었다.
“처음에는 역시... 쾌검이 좋겠군... 누가 나의 검을 받아 보겠나?”
“네놈... 웃기지 마라! 잘도 우리를 비웃는 군!”
“노인 공경을 모르는 군... 자네로 하지... 두려우면... 기어라!!!”
조제현의 일갈에 수천이나 되는 정도맹의 무인들이 몸을 떨어야 했다. 이건 진심으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은빛으로 빛나는 두 눈동자 사이로 무시 할 수 없을 만큼 뻗어 나오는 살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발검의 자세를 취하던 조제현은 무릎을 약간 굽히더니, 검을 빠르게 횡으로 그어 버렸다. 일말의 망설임과 흔들림 없는... 군 더기 잡을 수 없는 극의 쾌였다. 평범해 보이는 휘두름이었지만, 앞서 나와 있던 무인은 피하지 못했다.
아니! 피할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알면서도 피하지 못하는 비통함에 젖어 있었다. 서서히 느껴지는 아련한 고통에 그 사내의 시선은 옆구리로 향했다. 단 일초도 받아내지 못한 비통함도 있었지만, 옆구리로 쏟아지는 내부 장기들을 보자 절망적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스악!
뒤늦게 베어지는 소리가 울리자, 사내의 옆구리에서는 피의 파도가 몰아쳤다. 철철 흘러내리는 피가 바닥을 타고 정도맹의 무사가 모여 있는 곳으로 흘러갔다. 그 모습에 모든 무인들은 각자 침을 삼키거나, 병장기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었다.
“허허허... 본좌가 만든 첫 번째 초식이라네... 이름은... 낙쾌(落快)라고 하지!”
진정 쾌검의 극이었다. 눈으로 보였지만 피할 수 없는 쾌검! 이걸 두고 쾌검의 극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 까? 단순한 휘두름이 최고의 초식이 될 줄 누가 알았던가. 그렇게 사라져간 정도맹의 무사를 보며 조제현은 다시 한 번 손을 뻗었다.
“두 번째 초식이네... 허허허! 처음을 봤으니 끝을 봐야 하지 않겠나! 모두 덤비시게!”
“이... 이! 잘도!! 뭐하고 있나! 모두 쳐라!!”
한 사내의 말에 정도맹의 모든 무사들이 조제현을 향해 보법을 펼쳤다. 모두 고수라고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의 무인들이었다. 하지만... 상대를 봐가면서 덤벼야 하는 것이 진리다. 상대는 절대고수!
흡혈지존인 것이다.
누가 흡혈지존의 무위를 논할 것인가!
괜히 1위가 아닌 것이다. 전대에 비해 현재의 고수들의 수준차가 심한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천천히 움직이는 조제현의 모습을 보던 하윤은 침을 꼴깍 삼켰다.
푹...!
지금 단순하게 바닥에 검을 꽂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특별한 기운의 유동도 없었다. 그저 바닥에 검을 꽂아 넣음으로써, 짧게 초식 명을 중얼거렸다.
“파천(破天)....”
마공의 깨달음(피의 각성2)
둥근 달은 음기(陰氣)를 머금은 세상에 창백한 빛을 뿌리고 있었다. 지옥의 천정이라고 불리는 월(月)을 기준으로 삼아 지상으로 떨어지는 월광(月光)은 기이하게도 틀어지지 않고 지상의 파란(波瀾)을 불러 일으켰다.
기세를 머금은 달의 울음이 퍼지듯 하늘은 단 하나의 검에 기세를 꺽은 모습을 보였다. 흐릿해지는 붉은 하늘을 뒤로 하고 떨어지는 하나의 점은 아수라(阿修羅)조차 무릎을 꿇게 만들 무시무시한 기세였다.
조제현의 표정이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해졌다. 땅을 향했던 그의 시선이 방향을 바꾸었다. 세상천지를 부술 듯 한 눈을 하고서 향한 하나의 점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몇 백 년이나 거듭해 만큼 최고의 초식이다.
스르릇!
굳게 자세를 잡고 있던 제현은 일단의 검병에 올려져 있던 손을 하늘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 호선을 그리며 아래로 내려 그어지는 제현의 손.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던 하나의 점이 두 개로... 거기서 세 개로... 순식간에 수백의 강기로 변해 버렸다.
“하늘이여... 울어라! 대지여... 울부짖어라! 사라져라... 하늘이여.”
시작은 느릿한 하강(下降)이었다. 그러나 은빛을 발하는 순간 작은 구슬의 형상을 뛰고 있던 강기는 하나의 어엿한 검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무형검(無形劍)을 보는 것처럼 찬란한 은빛의 검이 만들어졌다.
쇄에엑!
느릿했던 하강은 거칠 것이 없는 질주의 시작을 알린 것뿐이라는 듯이 빠르게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저것이... 파천(破天).....?”
조하윤은 검의 낙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랬다. 저것은 하늘을 부수는 파천의 재현(再現)이었다. 누구도 감히 생각지 못했던. 누구도 정하지 못했던 이름을 파천이라고 지었다.
태양의 저편으로 사라졌던 검은 하늘이 떠오른 것이다. 진정 검의 극을 보는 것 같았다. 강기의 파편은 가속을 더했다. 은빛의 긴 선이 허공에 떠올랐다. 반짝이는 빛은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며 위대한 역린(逆鱗)의 힘을 보여주고 있었다.
파슈슈슛!
수백의 검이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자, 수천의 무인들은 혼비백산했다. 자신들이 누구였던가! 바로, 지옥을 주름잡는 정도맹(正道盟)이었다. 한낮 독불장군에게 질 정도로 나약한 곳이 아닌 곳이다. 어떤 고수도. 어떤 상대라도 이길 자신이 있던 그들이었기에 충격은 엄청났다.
대기를 뒤흔드는 듯 한 파천의 위용에 정도맹의 고수들은 하나 둘씩 피를 흩뿌리며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이미, 지상은 붉은 액체가 수를 놓았고, 인간의 살점이 나뒹굴었다.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파천(破天)
그 말을 제외하고는 저 초식에 붙을 수식어는 없을 듯했다. 진정 하늘을 부술 정도의 위력이었다. 단 일수에 무너지는 수백의 무인들을 보며, 앞서 달려오던 자는 일보(一步)를 멈추었다.
그는 속으로 자신에서 떨어지지 않은 검의 위력에 대해 안심했다. 그 범위에 있던 자는 시체마저 온전하지 못했다. 오직 붉은 혈액과 살점만을 남기며 시련의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을 뿐이었다.
“저, 저런 말도 안 되는....!!”
적인 제현을 앞에 두고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땅을 뒤흔들며 파인 대지의 안쪽에서는 사람의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자욱한 먼지가 걷히자 아까의 위용을 뽐내듯 스산한 바람이 스쳐지나갔다.
휘이잉!
수백의 강기의 압력 때문인지 사람들은 납작해졌으며, 병장기 들은 둥글게 휘어져 있었다. 병장기의 손잡이로 보이는 곳의 속에서는 붉게 피로 젖어 있었다. 아까, 대단한 위용을 보였던 자들이 남긴 것이라고는 병장기와 피, 살점이 전부였다.
그 피와 살점만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할 뿐이었다. 하늘을 부서트리는 것을 연상시키는 엄청난 검술이 호신강기는 물론, 육체에 상상을 초월하는 압력을 가하고, 그 안쪽의 인간을 형체조차 남기지 못한 채 혈무(血霧)로 화한 것이다.
“세상에...! 저런 검법이 존재 한다니...?”
흡혈지존의 검법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균형잡힌 초식과 지존으로 이끈 검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내력이면 내력, 검술이면 검술!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단 한수에 이정도로 정도맹을 무릎 꿇게 만들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물며, 저런 초식이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다. 간혹 2계에서 온 술법사가 펼치는 술법에도 저런 수법이 없었던 것이다. 잔혹하면서도 깔끔하게 처리하는 한수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그런 존재를 상대 하려했던 정도맹의 생존자들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저와 같은 검술을 마주했을 때 자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수유의 순간 허공으로 흩어지는 자신의 육신을 바라보는 것이 다일 것이라는 결론이 나올 뿐이었다.
“나의 행보를 누가 막을 까. 어리석은 존재들이여... 길을 비켜라!”
조제현의 무위에 입을 다물 줄 몰랐던 일단의 존재들은 다시금 덮쳐 오는 위압감에 움찔 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더 이상 정도맹이라는 단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단 일수에 격파당한 패잔병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우와... 대단해요. 할아버지!”
“허허허... 그저 사소한 깨달음일 뿐이지... 하늘을 깨달으니... 자연히 알게 되었을 뿐.”
하윤의 호들갑에 제현은 살짝 기분이 좋아졌던지 더 이상 손을 쓰지 않았다. 전의를 상실한 존재를 두고 검을 휘두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래봐야 어린 아해(兒孩)들의 치기어린 장난일 뿐이라고 치부했다.
장난 치고는 과한 손속을 뒀지만, 앞으로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하늘 위에는 또 다른 하늘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 이이!”
제현이 스쳐지나가며 부들부들 떨며 차마 입을 떼지 못하는 사내는 병기를 꽉 움켜쥐며 부들부들 떨어야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자괴감과 동료의 죽음을 눈앞에 봤기 때문이다. 물론, 일정 시간이 흐른다면 되 살아 나겠지만, 참을 수 없었다.
“죽어랏!”
다소 주춤 거리던 사내는 제현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허나... 이미 제현의 오감은 그것을 허용치 않았다. 손에서 뻗어진 붉은 혈수가 널려 있는 피를 움직인 것이다. 흡혈마공(吸血魔功)이었다. 그에 따라 움직이던 피들은 제현의 손짓에 따라 서서히 바람을 일으켰다.
“허허... 진정..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려드는 구나... 광혈난무(狂血亂舞)!”
제현은 광살마검의 두 번째 초식인 광혈난무를 펼쳤다. 이미 깨달음의 극을 얻었으니, 광살마검의 영향은 그렇게 받지 않았다. 흡혈마공으로 유동하던 피들은 광혈난무라는 초식에 따라 운용되기 시작했다.
빠르게, 패도적으로.. 적을 짓밟았다. 가히, 혈풍(血風)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피는 날카로운 칼날이 되었다. 그리고 몰아치는 혈풍에 정도맹의 생존자들은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이것이 진정 흡혈지존의 위용이었다.
누구도 무시 할 수 없으며!
누구도 그를 무릎 꿇게 할 수 없었고!
천지(天地)를 울부짖게 만드는 사내였다.
그를 제외하고 누구를 지존으로 내세워야 한단 말인가! 그는 진정한 지존이었다. 비굴하지도, 겁도 없었다. 그는 강했고 어떤 하늘도 뛰어 넘을 준비가 된 자였기 때문이다.
“하윤아... 자고로 사내는 당당해야 하며, 어떤 존재에게도 무릎을 꿇어선 안 된다.”
“피... 전 여잔데...”
“허허...”
제현의 공허한 웃음이 퍼지자 케실리온의 상념은 끝을 맺었다.
* * *
“나 자신이건만... 이토록 초라해지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사내는 당당해야 하며, 어떤 존재에게도 무릎을 꿇어선 안 되거늘... 하하! 너무 잊고 있었구나... 나의 의지를...”
케실리온은 알파와 레나, 프린의 기묘한 표정에도 어떤 대꾸도 없었다.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 모습에 알파는 두 명의 소녀를 제지하며 뒤로 살짝 물러났다. 지금 케실리온에게는 중요한 순간이 찾아 온 것 같았다.
스르륵...
알파의 행동에 따라, 케실리온은 자리를 잡고 가부좌를 틀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르륵 감기는 두 눈을 보자, 알파는 뒤늦게 무슨 일이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매일 같이 저런 자세를 취하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지금 케실리온의 모습은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다. 그 누구도 오를 수 없는 거대한 산!
마공의 깨달음(피의 각성2)
‘너무 잊고 있었구나... 초심(初審)을...’
케실리온은 가부좌(跏趺坐)를 취했다. 너무나 익숙해져 일상처럼 느껴질 정도의 기나긴 명상. 하지만, 처음 느껴보던 자연의 기운을 잊고 말았다. 기운에 너무 익숙해져 소중함을 잊었으며, 너무 강했기에 나약함을 잊었으며, 검의 극을 보았기에 안일했다.
가부좌를 취한 케실리온의 표정은 너무나 진지해졌다. 어느덧 몸은 극도의 긴장 상태로 도립했다. 평소 하던 심법(心法)과는 차이가 많았다. 마치, 처음 익히는 사람처럼 정신을 집중했다.
단전에 흐르는 기운을 느끼며, 그 흐름을 따라 의지를 보냈다. 온몸을 순행하며, 역행의 연속을 하면서 케실리온의 정신은 점점 맑아졌다. 점점 무아(無我)의 상태로 갈수록, 케실리온은 자신이 지금껏 펼쳐왔던 검술이며, 심법, 보법에 대해 끝없는 깊이를 더했다.
‘과거는 과거일 뿐. 과거에 취해 너무 안일했구나... 지금은 지금일 뿐인 것을...!’
한탄 섞인 마음의 속삭임에 케실리온의 기운들은 점점 기맥(氣脈)을 타고 흘러갔다. 더 정순하게, 더 부드럽게 바뀌어 가는 마기(魔氣)의 농도는 짙어졌다. 그 기운은 가부좌를 취한 케실리온의 몸에서 뿜어지며 유형의 기운을 만들어냈다.
우우웅!
땀구멍처럼 분포해 있는 기공(氣孔)을 통해 케실리온의 기운은 주위로 퍼져 나갔다. 지금 있는 곳이 남부의 어느 평원이라는 점을 볼 때, 자칫 몬스터들을 불러 모을 소지가 있었다. 몬스터는 강한 기운에 이끌리는 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위에는 알파와 레나, 프린이 케실리온을 보호하듯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은 없을 것이다. 물론, 알파가 마족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둘이었기 때문에 약간 어색한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마령(魔靈)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어둠의 영혼? 아니... 마신이다. 어둠을 지배하는 신! 애 초부터 난 스스로를 위해 이 길을 선택했다.’
케실리온은 지금 중요한 순간에 달해 있었다. 몸 주위로 몰아치는 마기와 그 한기에 몰아치는 바람, 그리고 하나 둘씩 떨어지는 눈송이들이 주위로 몰아쳤다. 마령심법! 어둠 닮고자 만든 최고의 심법이다.
자신만을 위해!
파괴하기 위해!
다른 것을 필요 없었다. 오직 파괴와 살육! 당하기 전에 부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기적인 심법! 잊고 있었다. 무엇 때문에 힘을 원했던가. 더 이상 당하지 않기 위해 힘을 길러왔다. 당하기 전에 부수고 죽인다!
이것이 자신이 선택한 길이었다. 왕따에서 절대자로! 약자에서 강자로! 삼류에서 일류로... 자신이 걸어왔던 하류의 길에서 상류로 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심법이다.
‘그럼... 하류는 무엇이란 말인가! 하류가 있기에 상류가 있으며, 삼류가 있기에 일류가 있다. 난 무엇을 위해 힘을 키웠단 말인가...’
몰아치는 기운의 폭풍은 끝도 없이 짙어졌다. 점점 농도의 깊이는 더해갔으며 케실리온의 고뇌와 번뇌는 더해갔다. 그 사념에 따라 기맥을 따라 흐르는 무한의 마기는 케실리온을 차갑게 만들었다.
‘난 더 이상 당하고 살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흡혈마공(吸血魔功)을 만들지 않았던가! 빼앗기기 전에 빼앗는 것! 그것이 나 조제현이다. 아니! 케실리온이다.’
쩌적!
케실리온의 주위는 철옹성과 같은 얼음의 장벽이 생겨났다. 무형(無形)을 넘어 유형(有形)으로 향하는 지고의 기운(氣韻)이었다. 더 이상 가까이 있을 수 없는지 알파와 레나, 프린은 뒤로 몇 걸음 물러 설 수밖에 없었다. 너무나 추웠기 때문이다.
‘빼앗는 것만으로도 성치 않다. 죽기 전에 상대를 죽이는 것! 이것이 나를 이곳에 있게 만들지 않았던가... 만검(萬劍)! 만의 검이라 했다. 하나의 검보다는 만개의 검을... 한 번의 깨달음 보다는 만 가지의 깨달음을...’
지옥에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고뇌와 번뇌를, 사(死)와 생(生)의 길을 걸으며 얻은 엄청난 깨달음을 잊고 있었다. 인생의 깨달음과 자연의 깨달음 그리고 우주의 깨달음을 얻지 않았던가.
어찌 이런 사소한 깨달음에 목을 매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았던가! 왜 과거에 집착하는 가... 처음부터 깨달음의 극에 달해 있으면서... 케실리온은 부수고 싶었다.
지금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과거의 잔재를 부수고 싶었다. 그렇기에 케실리온은 마음의 검을 들었다. 과거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 그것을 깨닫는 순간 케실리온의 눈앞에는 과거의 자신이 눈에 들어왔다.
무아지경이었다. 마령심법의 극을 보여주는 자신과의 싸움!
무아의 경지에 접어들었을 때 케실리온은 붉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무겁게 짓누르는 압력과 서늘하게 불어오는 서풍을 느끼며 천천히 마음의 눈을 떴다. 마음의 눈을 뜨는 순간 케실리온은 지옥에 돌아와 있었다.
“자네는 누군가...?”
흑요석처럼 흩날리는 흑발을 한 소년이 눈에 들어왔다. 허리에 매달려 있는 은빛의 검도 보였다. 마령검이었다. 지옥에서 사용하던 애검(愛劍)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지금처럼 조잡하게 그려져 있는 이상한 문양은 없었다.
“지금... 본좌의 말을 무시하는 건가?”
“넌... 누구지? 과거의 잔재 인가?”
“허허... 과거의 잔재라... 감히 본좌에게 그딴 망발을 하는 자는 처음이로고!”
스스스...
케실리온은 자신에게 뿜어지는 엄청난 살기(殺氣)에 눈살을 찌푸렸다. 감히 마주 설수 없을 정도의 위압감이었다. 다리가 후들거렸으며, 눈은 마주칠 수 없었다. 지금 이대로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케실리온은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어떤 존재에게도 머리를 숙일 수도.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설령 과거의 자신이라도 머리를... 무릎을 꿇을 수 없지 않은가!!
“난! 케실리온이다... 너를 꺾을 존재!”
“하하하! 나 조제현을...? 무모하구나! 검을 뽑으라. 어리석은 생각을 고쳐 주마.”
어느새 케실리온의 허리에는 마령검이 매달려 있었다. 검신에 그려진 기이한 문양과 번뜩이는 예기가 뛰고 있었으며, 붉은 색이 감도는 검이었다. 지금은 마검 다크 드래곤이라고 불리는 검이 되어버렸지만, 케실리온의 애검임에는 틀림없었다.
스르릉!
차라랑!
마주보고 선 두 명!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준비하는 케실리온의 검에는 긴장감이 서리기 시작했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완벽한 자세였다. 빈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느긋하게 서 있는 조제현의 자세는 완벽했다.
“호오... 재미있군. 그대와 난 닮은 점이 많군. 허나! 마지막에 사라질 존재는 정해져 있는 법!”
제현의 말에 케실리온의 검은 파르르 떨려왔다. 그리고 마음을 다 잡았다는 듯이 케실리온의 두 눈에서는 투기와 살기가 번뜩였다. 그리고 뻗어지는 검을 시작으로 제현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캉!
역시 처음은 만검의 1장 1초 낙(落)이었다. 더 없이 빠른 쾌검이 서로를 향해 덮쳤다. 눈으로 쫒을 수 없을 정도의 쾌검에 둘의 표정은 차갑게 식어갔다. 마주선 검의 장력을 장난이 아니었다.
누구도 물러 설수 없는 긴장의 연속에서 조제현의 검이 좌로 움직였다. 쾌에서 부드러움의 초식으로 변한 것인지 케실리온의 검을 흘려 넘기기 위해 검을 감싸 안듯이 검신을 스치며 케실리온을 향해 덮쳐갔다.
스르릉!
조제현의 검에서 검명(劍鳴)이 한차례 울리며 검강이 뿜어졌다. 막힘없이 솟아오른 검강은 차가운 한기를 내뿜으며 케실리온의 가슴으로 그어졌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케실리온은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마영보법(魔影步法)을 사용했다. 구부려진 무릎 중 오른쪽에 무게를 두며 몸을 회전 시킨 것이다.
몸의 중심이 오른발로 향하자, 자연히 몸은 숙여 졌으며, 오른손에 들려 있던 마령검은 만검의 1장 4초인 살(殺)을 펼치기 시작했다. 순간의 기수식이 변하며, 마령검의 검병을 역으로 쥐며 조제현을 향해 덮쳤다.
카캉!
가슴을 향해 베어 오던 검은 케실리온이 펼친 만검의 초식에 가로막혔다. 허나, 변화의 극을 보여주는 4초식은 조제현을 향해 뻗어갔다. 몸의 회전력이 더해졌기 때문에 검의 속도는 엄청났다.
횡으로 그어지는 가 싶으며 찔러 들어갔으며, 세로로 베어지던 검은 대각선으로 베어졌다. 그리고 펼쳐지는 현란한 보법을 따라, 4초식인 살(殺)은 많은 변화를 추구했다.
“하하하! 변(變 : 변할 변)을 추구하면 무얼 하겠는 가! 중(重 : 무거울 중)이 없거늘! 힘이 담기지 않은 검은 나의 보법에 막힐 뿐!”
조제현은 보법과 신법의 극을 보여주는 풍류마신보(風流魔神步)를 펼쳤다. 풍운지의 풍운보와 풍운신법, 자신의 마영보법과 마영신법을 합해 완벽한 보법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내력의 소모도 적거니와 허공과 땅의 구분이 없는 완벽한 보법이었다.
팡팡!
허공을 차며 날아오른 조제현의 신형은 어느새 케실리온의 검 위에 올라가 있었다. 극상의 보법을 구사하며 신기(神技)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 얼마나 황당할 노릇인가. 이 모든 것이 과거의 기상을 보는 듯하여, 기분은 좋았지만 그런 것을 따질 대가 아니었다.
마음과 마음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죽고 하나는 살아남는다. 이것이 지옥의 강자지존(强者至尊)의 법칙이 아니었던가.
휘류류!!
하늘로 날아올라, 마령검위에 신형을 둔 조제현은 왼손에 강한 한기를 모았다. 아마, 소수마공(素手魔功)을 일으켜, 소수신장(素手神掌)을 펼칠 기세였다. 때문에 케실리온 역시 소수마공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오른손에 쥐어져 있던 검은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이기어검이었다. 심장을 향해 날아오는 두 개의 검은 서로의 검과 맞부딪혔다.
캉!
강한 서로의 기운이 부딪히며 마령검은 땅으로 떨어져 내리며 지옥의 흙바닥에 꽂혔다. 그리고 케실리온과 조제현은 서로의 쌍장(雙掌)을 뻗었다.
쾅! 쩌저적!
바닥에 서로의 검이 꽂힌 지점을 중심으로 케실리온과 조제현의 장법이 마주쳤다. 마주친 장법을 통해 기운의 잠력이 뿜어졌다. 주위의 땅은 얼음벌판으로 바뀔 지경이었다. 하지만, 서로의 힘이 틀릴 수밖에 없었다.
펑!
“하하하!”
조제현의 웃음소리와 함께 케실리온은 뒤로 밀려났다. 경지의 차이였다. 그리고 내력의 차이였다. 케실리온의 경지는 고작해야 현경인 혈신의 경지다. 하지만, 조제현은 현경을 뛰어넘은 마신의 경지였다. 이것으로 서로의 역량(力量)차이가 들어난 것이다. 뒤로 튕겨지듯 물러난 케실리온의 입에서는 각혈이 뿜어졌다.
푸웃...
“컥... 제, 젠장!”
쌍장에 맞으며 내상이라도 당한 모양이다. 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다행히 그렇게 큰 내상은 아닌 모양이다.
“어떻게 나의 절기들을 펼치는 것인지 모르나... 내가 이긴 것 같군.”
오만했지만, 오만하게 비춰지지 않았다. 승자의 여유가 저러했을 까? 어느새 제현의 손에는 마령검이 쥐어져 있었다.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검을 가져간 것이다. 물론, 케실리온 역시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마령검을 오른손으로 인도했다.
‘빈틈이... 없다!’
케실리온은 속으로 절망했다. 평범하게 서 있는 자세치고는 빈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치 오를 수 없는 산을 보는 것 같았다. 은은하게 풍기는 기운이며, 눈에서 쏘아지는 살기... 그리고 모든 면에서 뛰어나 있었다.
“무인으로써 예우를 해주마. 내가 펼칠 것은 만검 2장 4초 무살(霧殺)이다. 이 정도라면 너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지!”
케실리온은 만검 2장에 해당하는 초식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특히 무살이라고 한다면 어떤 적수도 피할 수 없는 검법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뛰어난 초식이 가미된 마지막 절초였다. 물론, 다수를 상대 할 때는 2장 2초인 파천이 가장 어울리겠지만, 상대가 한명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최고의 초식은 무살이다.
제현의 오른손이 조금씩 움직였다. 특별한 기수식도 동작도 필요 없었다. 가볍게 휘두를 뿐! 하지만,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자세를 잡으라! 꼴사납군.”
“큭...”
케실리온은 제현의 말에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검을 들어올렸다. 무살을 펼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그에 따라 케실리온은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초식을 떠올렸다. 하지만, 어떤 초식도 무살을 막을 수 없을 듯했다.
그러나... 이대로 허무하게 갈수는 없는 노릇이다. 뛰어넘어야 한다. 과거의 잔재를 뛰어 넘어야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이 열린다. 그것을 잘 아는 케실리온으로 써는 피할 수 없는 한판이었다.
“광살마검(狂殺魔劍)... 2초!”
케실리온은 광살마검을 펼치기로 마음먹었다. 커다란 부작용이 찾아온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력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신이 딸리고 있었다. 그것을 메우기 위해 내력의 증폭을 꾀하려는 것이다.
넓게 자세를 잡은 케실리온은 오른손의 마령검을 휘어잡았다. 검면(劍面)이 앞으로 향하는 특이한 기수식이었다. 그리고 조금씩 흔들리는 검면을 따라, 케실리온의 기운이 솟아올랐다. 하지만 은빛은 아니었다. 붉게 타오르듯 혈기(血氣)가 솟아 오른 것이다.
화아악!
이것이 광살마검이다. 은빛은 점점 붉게 물들어 가더니, 세상을 피로 물들일 것 같이 타올랐다.
“훗... 이번엔 광살마검인가? 쓸 대 없는 짓! 허나... 그 기백만큼은 인정해주마!”
“나야... 말로! 광혈난무(狂血亂舞)!!!”
“하하하! 좋아, 좋아! 무살(霧殺)!!”
짧은 시선의 교차가 이루어지자, 케실리온과 제현의 신형은 어느 한 점에서 마주쳤다. 패검의 극치를 보여주는 케실리온의 광혈난무가 펼쳐지자, 모든 산물을 뒤엎을 것 같은 기운이 퍼져나갔다.
좌를 갈랐으며, 우를 갈랐고 하늘을 갈랐다가도, 지상을 가르는 광혈난무가 펼쳐졌다. 하지만, 제현의 공세도 만만치 않았다. 무수히 많은 검로 속에서 약점을 파고들며 무살을 펼쳐 낸 것이다.
점점 케실리온의 몸에는 무시 할 수 없을 정도로 검상이 생겨났다. 옷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고 지옥의 창백한 대지는 붉게 물들어갔다. 그때, 케실리온의 검초가 약간 변하기 시작했다.
“훗... 파(破)!”
케실리온의 입에서 터져 나온 초식명은 뜻밖이었다. 이 상황에서 동작이 큰 파를 펼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땅으로 꽂힌 마령검은 지옥의 대지를 터뜨렸다.
쿠아아앙!
대지의 파편이 하늘로 비산하기 시작했다. 너무나 큰 폭발이었기 때문에 제현은 일치감치 호신강기를 펼치며 뒤로 물러나 있었다.
“어리석군. 동작이 큰 파를 펼칠 줄이야. 설마... 이렇게 경험이 부족한 애송이 일 줄이야.”
제현은 기분을 잡쳤다는 생각에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진정 자신의 호적수에 맞는 존재는 없다는 듯이 혀를 차며 케실리온을 노려 볼 뿐이었다. 허나, 케실리온의 표정은 웃음으로 물들어갔다.
“과거의 나여! 그만 사라져라! 이젠 나! 케실리온이 세상을 호령할 테니!”
마냥 하늘로 치솟았다고 생각했던 대지의 파편 속에는 케실리온이 흘린 피가 묻어 있었다. 그 모습에 코웃음이라도 치려했던 조제현은 뒤로 급히 물러나며 호신강기를 더욱 끌어 올렸다.
“비록... 내력이 미천하여 만검의 2장을 펼치지 못한다 한들! 나의 깨달음이 어디 가리오! 내력이 부족하면 초식을 그에 맞추면 되면 될 것을! 깨달음이 부족하면 내력으로 매우면 될 것을...나의 어리석음에 한탄할 뿐이다.”
푸슈슈슈!
케실리온은 마령심법으로 운용하던 기운을 흡혈마공으로 대처했다.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는 파편들 속에 묻어 있던 피들이 케실리온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건 흡수가 아니었다.
떨어져 내리는 파편들은 속에서 수백의 강기가 형성되어갔다. 붉게 물든 강기들은 마치, 구슬처럼 둥글게 변해 있었다. 작은 알갱이들이 주위로 포진하자, 제현은 급히 호신강기를 더불어 만검의 2장 2초인 파천을 펼치기 시작했다.
“파천(破天)!!”
케실리온이 펼친 기술을 상쇄하려는 것인지 급히 끌어올린 내력과 케실리온의 내력이 맞부딪혔다. 하지만, 급히 끌어 올린 내력이 이길까! 케실리온의 강기는 여지없이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 모습은 마치, 지옥에서 펼쳤던 파천(破天)과 비슷했다. 하지만, 달랐다. 불게 물들 하늘에서 떨어지는 모습은 마치 혈우(血雨)와 같았기 때문이다.
파파팟!
“크아... 이, 이게! 무, 무슨...”
조제현은 정녕 믿을 수 없는 것인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에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케실리온이 입을 열었다.
“유는 중을 제압하고 유는 쾌가 제압하는 구나... 중은 쾌를 제압하니 어찌 강하다 하리오!”
“.......”
“강자를 알려거든 강자가 되어야 하고, 어둠이 되려거든 어둠이 되어야 하거늘... 눈앞에 이루어 놓은 안일함에 큰 산을 보지 못했구나... 어찌 한탄하지 않을 쏘냐.”
“누, 누구냐!”
“하하하! 어찌 자신을 모를 수가 있을 까. 그대가 나이고 나가 그대이니... 이제 그만 나에게로 돌아오라!”
부들부들...
경지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했던 과거의 잔재가 한없이 작아 보이기 시작했다. 케실리온은 깨달은 것이다. 자신이 정해버린 한계를 넘어 먼 산을 보고 있었다. 비록, 과거의 힘에 비해 약하다고 한들 언젠가 넘을 산이다. 그 한계를 그어버렸던 과오를 벗어나 자유로워 졌다.
“그만... 흡수되어라!”
케실리온은 손을 뻗어 제현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손끝에서 전해지는 엄청난 잠력이 전해져 왔다. 끝도 없이 몰아치는 기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조제현의 목소리는 확실히 들려왔다.
“마...지막에... 펼친 무공은...?”
“혈우(血雨)”
제현과 케실리온은 짧게 대답한 것을 끝으로 마음속의 장벽이 허물어졌다. 너무나 단단한 벽이 허물어지자, 깊숙이 숨어 있던 기억의 구슬이 케실리온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충만해지는 몸속의 기운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태양은 서쪽으로 지고 있었다. 황금처럼 빛나던 태양 사이로 붉은 대지가 눈에 들어왔다. 한결 가벼워 진 몸 상태에 케실리온은 미소가 지어졌다. 마음속에서 정해버렸던 한계에 한걸음 다가선 것이다.
마공의 깨달음(피의 각성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