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워어어!
알파는 주위로 들이닥친 몬스터를 보며 고운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가뜩이나 케실리온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것에 대해 짜증이 치솟은 탓일 것이다. 거기다. 갑작스럽게 몰아치는 한기 때문에 레나와 프린이라는 인간 소녀들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쿵! 쿵!
육중한 무게와 강한 근력을 자랑하는 오우거의 등장에 알파도 자연스럽게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지금 포진해 있는 몬스터들의 숫자가 상상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평원이라는 점을 볼 때, 사방은 몬스터들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어쩌지?”
다행히 두 소녀는 금방 정신을 차린 것인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알파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165정도 되는 알파의 키를 감안할 때 당연한 모습이었다.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레나라는 소녀를 보자 알파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블러드 네일을 뽑아 올렸다.
예전과는 다르게 자연스럽게 뻗어 올라간 손톱은 60센티미터 정도 되는 길이로 커져 있었다. 10가닥의 손톱이 자라나자, 몬스터들도 긴장된 표정을 짓는 것 같았다. 물론, 알파는 케실리온을 보호하겠다는 생각으로 사정거리 내에 들어오는 몬스터들 주살하고 있었다.
“케실리온님은 내가 지킨다!”
알파의 힘찬 목소리에 굳은 의지가 느껴졌다. 언제나 케실리온의 후광에 가려 도움을 줄 수 없었던 것을 한탄했던 알파였다. 이제 자신이 도움을 줄 차례다. 이 순간이 케실리온에게는 중요한 순간이라는 것을 은연중 느낀 알파였다.
후웅!
알파의 블러드 네일에서 묘한 울음이 터져 나오자, 몬스터들은 일제히 알파를 향해 덮쳐갔다. 저급한 오우거의 몽둥이가 알파의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하지만, 알파의 몸놀림은 상상을 초월했다.
머리 위로 스쳐지나간 몽둥이의 후풍을 느낀 알파는 그대로 두꺼운 피부를 향해 손톱을 찔러 넣었다. 철제 무기도 뚫기 어려운 오우거의 피부는 두부조각 처럼 여지 없이 알파에게 잘려버렸다.
순식간에 하나의 오우거가 당하자, 레나와 프린의 얼굴에는 화색이 감돌았다. 의외로 알파가 선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레나도 아카데미에서 배운 검술을 펼치며, 오크를 막아서고 있었지만, 근력차이와 신장 차이 때문인지 몇 번의 공방을 끝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마인드 브레이커!”
다행히 레나의 옆을 지키고 있던 프린이라는 소녀가 정신계 정령을 이용해 오크의 정신을 무너뜨렸다.
“꽤에엑!”
오크는 비명을 지르며 자신의 무기인 글레이브를 노치며 바닥에 주저앉으며 귀와 눈, 입에서 피를 토해냈다. 그 묘한 모습에 레나는 두려움과 살았다는 감정이 교차했다. 꼼짝 없이 오크의 글레이브에 당할 줄 알았던 모양이다.
“괜찮아?”
“아... 응!”
두 소녀의 묘한 흐름을 느낄 세도 없이 알파는 케실리온에게 접근하는 몬스터를 처리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워낙 많은 수의 몬스터들 때문에 쉴 틈이 없었다. 과거에 비해 상승한 마기의 양과 스피드가 없었다면 이정도의 선전은 어려웠을 것이다.
끝도 없이 몰아치는 몬스터들을 보며 알파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잠시 후 새롭게 알게 된 기술을 펼치기 위해 레나와 프린이 있는 곳으로 다가간, 알파는 조용히 정신을 집중했다. 의외로 큰 기술인 모양이다.
“뭐, 뭐하는 거야! 마족!”
레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알파를 향해 소리쳤다. 두 소녀는 알파가 마족이라는 것을 생각에 약간 거부감이 드는 지 평소부터 경계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자신들의 곁으로 다가와 이상한 기운을 퍼뜨리니 긴장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을 해하려는 것이 아닌 것을 확인하고는 주위로 접근하는 몬스터를 막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량을 펼쳐야 했다.
어설픈 검술을 구사해야 하는 레나로써는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 프린이 정신계 정령인 마인더를 이용해 적에게 정신적인 충격을 주는 것으로 몬스터의 활동을 방해했다. 그로부터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 까. 알파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후우웅!
알파의 주위에는 폭풍이 몰아치듯 강력한 마기가 피워 올랐다. 붉게 변한 두 눈은 케실리온 못지않게 살기를 내 뿜었으며, 양손의 블러드 네일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두려움이 아닌, 기운을 조절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케실리온님의 곁에 다가 가지마!”
알파의 의지가 넘치는 목소리를 시작으로 신형은 앞으로 쏘아졌다. 땅에서 떠오를 듯 한 신형은 기척조차 내지 않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눈으로 쫒을 수 없을 정도의 움직임에 레나와 프린이 할 일은 그저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몬스터의 중심으로 뛰어든 알파의 모습은 양떼의 중심에 선 늑대의 모습과 같았다. 도륙되어 가는 몬스터는 더러운 녹색의 피와 ‘꽥 꽤에엑!’거리는 소리를 내며 죽어 갈 뿐이다.
“네일 플로어!”
알파는 발을 구르며 상공으로 뛰어올랐다. 그리고 이상한 기술 명을 말하며 양손의 블러드 네일에 마기를 집중시켰다. 양손가락에 있던 블러드 네일은 작은 구체를 만들어내며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케실리온이 펼치던 파천의 축소판을 보는 듯했다. 알파의 마기가 비가 되어 쏟아지자, 몬스터들의 세는 점점 하락하기 시작했다. 허무하게 죽어가는 몬스터들을 보며 레나와 프린은 놀랍다는 듯이 입을 살짝 벌렸다.
그만큼 충격적인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마족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정도로 강하다는 것은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하급 마족이라고 생각했건만, 알파의 모습을 보니 생각을 바꿔야 했다. 꽤나 상급에 드는 마족 같았기 때문이다.
“크아아!!”
몬스터 중 재생능력이 탁월한 트롤이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알파의 네일 플로어에 당한 것인지 가슴 부위에 큰 상처가 있었다. 하지만, 트롤이라는 이름답게 조금씩이었지만, 회복되어 가고 있었다.
마기에 의한 상처는 치유하기 힘든 모양이다. 하지만, 그것을 보고 가만히 있을 알파가 아니었다. 괴성을 지르는 트롤을 향해 차가운 블러드 네일을 휘둘렀다. 일체의 망설임이 없는 손놀림에 몬스터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야 했다.
그 순간! 알파의 기감에 무시하지 못할 기운이 감지되었다. 너무나 친숙한 기운이었지만, 어딘가 틀렸다.
후우우웅!
강풍이 몰아치듯 주위는 금빛에서 핏빛으로 변하는 것처럼 하늘은 붉게 물들어 갔다. 몰아치는 바람의 중심에는 케실리온이 있었다. 서서히 몸을 일으키는 케실리온의 표정은 한없이 부드러워 져 있었다. 거기다 얼굴에 은근히 머금은 미소가 눈부시게 비춰졌다.
“크아아!!”
그때, 생존해 있던 몇몇의 몬스터들이 케실리온에게 쇄도해갔다. 그 모습에 알파는 헛바람을 급히 들이켜야 했다.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은 케실리온의 모습이 위태로워 보였기 때문이다.
“케, 케실리온님!!!”
급히 몸을 날렸지만, 몬스터와의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미 케실리온의 곁으로 당도한 몬스터들은 몽둥이를 크게 들어올렸다. 이대로 내려찍는 다면 아무리 마룡의 신체를 가지고 있는 케실리온이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 같았다.
후웅!
길게 그어지는 몽둥이의 호선에 알파는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질끈 깨문 입술에서는 붉은 혈기까지 비치고 있었다. 그만큼 세게 입술을 깨문 것이다. 알파는 이것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점점 떨어지는 몽둥이를 보자, 두 눈에서는 뿌연 습막까지 드리웠다.
“방해하지마라!”
이대로 당할 것만 같았던 케실리온의 신형이 움직인 것은 몽둥이가 떨어지기 직전이었다. 무언가에 도취되어 있던 케실리온은 갑작스럽게 들이닥치는 방해꾼들에게 좋은 감정을 품을 리 없었다.
피할 생각도 없는 것인지 무식하게 떨어지는 몽둥이를 향해 케실리온은 주먹을 뻗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주먹과 속까지 꽉 들어찬 몽둥이가 부딪혔다.
퍽!
케실리온의 단조로운 일권의 여파는 대단했다. 무식하게 뻗어오던 몬스터의 몽둥이가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몰아치는 파편의 공격에 몬스터들은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푸슈슈슛!
한 낫 평범한 인간으로 비치던 존재가 더 없이 크게 보였기 때문이다. 범접 할 수 없는 거대한 존재감에 도망이라도 치고 싶었지만 이미 몸은 죽음의 길로 사라지고 있었다. 파편하나하나에 실린 강한 기운에 몬스터들의 몸이 관통당한 것이다.
“어둠이 되려거든 어둠이 될 것을... 어찌 지금 그것을 알았단 말인가...”
케실리온의 공허한 중얼거림을 끝으로 그림자 속에 있던 마령검을 들어 올렸다. 마음속에서 깨달았던 것을 펼쳐보기 위함이었다. 간만에 소환된 마령검은 반가 운 듯 공명음을 토해냈다.
케실리온은 검무를 추듯 만검의 초식들은 연달아 펼치더니, 마지막은 흡혈마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위로 펴지는 흡혈마공은 널려 있는 피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중얼거리는 케실리온의 표정은 진지하게 변했다.
“피는 곧 힘이요. 힘은 곧 기운일 지니...”
휘이잉!
붉은 피들이 하늘로 떠오르며 케실리온을 보호하듯 주위를 맴돌았다. 잠시 후 케실리온의 검은 다시 만검을 펼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처음에 펼쳤던 것과는 다른 모습이다. 언뜻 보이는 검초들은 여러 개와 혼합된 것 같았다.
“쾌는 중이 되고 중은 유는 가되니 어떤 것 하나 놓칠 수 없구나... 이를 어찌 한탄 하리오.”
케실리온은 쾌로 펼치던 검은 어느새 중이 되었고 중으로 펼치던 검은 다시 유가되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렇게 마구 펼치던 검은 어느새 하나의 초식으로 변해갔다. 몸과 검이 하나가 되듯 이리 저리 움직이면서도 검에 대한 어설픈 동작은 사라지고 있었다.
만검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다른 검으로 변한 케실리온의 검은 주위로 흐르는 피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흐름의 끝은 곧 처음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혈우(血雨)이니라!”
케실리온의 검무는 이기어검을 펼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하늘로 치솟은 검에는 많은 기운이 뭉쳐 있었다. 그리고 하늘의 정점에 이르렀을 때, 마령검은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우우우...
마령검의 중심으로 넓게 퍼진 붉은 기운은 어느새 은빛의 기운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비가 쏟아지듯 뿌려지는 수백의 강기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쾅! 콰콰쾅!
그 강기들은 대지를 파괴 할 듯 떨어지며 무차별적으로 부수기 시작했다. 끝도 없이 떨어질 것 같던 강기의 비는 서서히 끝을 맺었다. 케실리온의 손짓과 함께...
“크하하하!! 이게 바로 나의 새로운 무공! 혈우(血雨)!!”
케실리온은 진정 기뻤다. 만검과 맞먹을 정도의 무공을 만들어 낸 것이다. 꿈과 같은 이 현실에 뛸 듯이 기뻤다. 흡혈마공의 응용기인 혈우였다. 상대의 피를 취해 공격 수단으로 이용하는 것!
굳이 검을 이용할 필요가 없는 기술이기 때문에 만검의 2장 2초인 파천과 같이 사용하면 아주 좋을 듯했다. 새롭게 만들어진 무공을 느끼며 만족스럽게 머리를 끄덕였다.
“아... 케실리온님...”
덜썩..
알파는 긴장이 풀린 것인지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케실리온의 엄청난 위용과 대범 할 정도의 공격 방법에 놀란 것도 있었지만, 위기일발의 상황에서 여유를 부리는 모습에 더 놀란 것 같았다.
“알파, 여기서 늦장 부릴 수 없다. 빨리 남부로 가자.”
케실리온의 의지가 담긴 말에 알파는 머리를 끄덕였다. 거기다. 알파는 묘하게 몸을 떨어야 했다. 기억 속에서나 볼 수 있었던, 케실리온의 진실 된 모습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위험한 순간에서 조차, 당당하며, 어느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는 의지가 보였기 때문이다.
알파는 약간 물어 보고 싶은 것도 있었지만, 입을 열수 없었다. 혹여 미움 받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과거에 케실리온이 누구였던, 지금은 케실리온일 뿐이기 때문이다.
남부전쟁(1) - 발록의 강림
란델이라는 찬란한 광명(光名)이 스며든 대지! 서쪽의 패자(覇者)인 란델 제국에도 후지고, 척박하고, 더러운 피 냄새가 진동하는 땅이 있다.
그곳이 바로...
카이룬 폰 류드릭의 이름하에 다스려 지는 두샨베(Dushanbe)라고 불리는 남쪽의 땅이다. 물론 카이룬 공작이 남쪽의 땅을 다스리면서 전쟁은 줄어들었지만, 허울뿐인 냉전(冷戰)이다.
꿈틀거리는 패자의 지배 속에서 피어나는 피의 향연은 줄어 들 수 없는 법! 약자가 있다면 강자가 있을 것이고, 강자가 있다면 지배자가 있는 법이다. 인간은 지배욕이 강하고, 정신적인 안식을 원한다.
그 광경이 여기에 펼쳐져 있다. 벌어질듯 벌어지지 않을 듯하던, 남쪽의 작은 지배자들이 전쟁을 펼치는 것이다. 카이룬 공작의 가신 가문인 하르그 남작 가와 어떤 곳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은 제니어스 남작가간의 영지 전이었다.
남부는 신분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작이든 백작이든... 허울뿐인 허명은 그저 국가가 정해준 위치일 뿐이다. 남부는 병사와 기사가 얼마나 있느냐, 가문의 세가 얼마나 큰지에 따라 신분이 갈린다.
힘이 강하다면 더욱 큰 영지를... 약하다면 작은 영지를 소유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곳이 남부였다. 남부 중에서도 최남단에 속해 있는 두 남작가는 12월이 접어들면서 전쟁을 시작했다.
시간은... 12월 5일, 하르그 남작가의 선전포고대로 제니어스가 소유하고 있는 북단의 마을에 남작가의 기마병들이 몰아닥쳤다.
* * *
“아아아악!”
“크히히! 서랏!”
아비지옥과 규환지옥이 펼쳐진 것만 같았다.
갑주를 차려 입은 병사들의 창칼아래 농기구를 들고 대항하던 제니어스 남작가에 속해 있던 평민들의 덧없는 몸짓과 어린아이와 늙은 노인, 여인네들의 비명이 끝없이 들려왔다. 악마와 같은 그들의 탐욕과 살육의 절대적인 눈빛아래 죽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비정상 적인 풍경이 그려지는 곳.... 바로 중간계 중에서도 남부의 지옥이라고 불리는 전쟁이었다. 대부분이 하르그 가문에 영입된 용병들이었던지, 제각기의 갑옷을 걸쳐 입고 있었다.
그 중 가장 결정권이 높아 보이는 용병이 크게 소리쳤다.
“모조리 불살라라!”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가장 튼실해 보이는 갑옷을 입고 있는 사내는 누가 보아도 이 지옥도를 펼치고 있는 용병과 병사들의 대장임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의 등 뒤로 늘어진 망토 자락에는 ‘다크 크로우’라는 글귀와 함께, 검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거기다. 가슴에 그려져 있는 까마귀의 형상은 지옥의 사자와 같이 두려움으로 비춰지기에 충분했다.
“다... 단자앙!!”
“뭐 그리 헐레벌떡 난리치느냐! 한창 바쁠 때!”
피와 약탈의 광기에 취해 있던 그의 심정을 거슬리게 하는 용병의 부름에 미간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쏘아붙였다. 같은 단원이었던지, 가슴에는 비슷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단장을 부르던 사내는 색깔이 약간 틀렸다.
단장의 표정과는 무관하게 말을 걸어온 사내의 표정은 당혹감과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다급하게 단장에게 입을 열었다.
“단장! 평원 넘어 제니어스 남작가의 기사와 용병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하하하! 고작 제니어스 남작가. 우리와 비견되겠느냐! 그래 숫자는.”
“약 오십여의 용병들과 십여의 기사... 나머지 삼백의 병사들로 보입니다.”
용병의 단장은 가소로 운 듯 웃음을 흘렸다. 이미 이긴 싸움이었다. 제니어스 남작가의 재정 상태는 이미 제니어스 가문에서 들은바 있다.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몰락해 가는 가문이다. 고작 오십의 용병을 모으는 것이 한계일터! 거기다. 의뢰를 받은 용병도 풋내기 일 것이 뻔했다.
물론, 기사들이 마음에 걸렸지만, 몰락해 가는 가문의 기사야 안 봐도 뻔했다. 그저 어디서 굴러먹다온 쓰레기 같은 기사일 것이 뻔했다.
“기껏 사백 남짓의 병사에 당황하는 꼴이란... 어차피 몰락해 가는 가문이다!”
이곳에서 약탈하는 용병들과 기사, 병사들을 포함 약 천여의 병력이 집결하고 있었기에 보고를 올린 용병에 대한 꾸짖음은 당연해 보였다. 그럼에도 용병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 단장! 문제는 그 용병입니다. 실버 울프랍니다! 가슴과 깃발에 그려진 은빛의 늑대, 분명 실버 울프입니다.”
“뭐, 뭐라?! 시... 실버 울프!!”
그제야 눈이 휘둥그레지며 놀라 소리치는 다크 크로우의 단장이었다. 용병계에서 실버 울프를 모른다면 미친놈이나 다름없었다. 날 고긴다는 용병단을 가지고 있는 다크 크로우였지만, 실버 울프의 명성에 비해서 허명일 뿐인 다크 크로우였다.
철걱 철걱 철걱....
히히히히힝!!
일정한 음률, 그리고 말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빛의 갑옷과 용병들이 입을 법한 체인 메일을 덧씌운 갑주 위로 그려진 은빛의 늑대가 요란하게 포효를 터뜨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평원의 언덕에 도착한 삼백의 병사들이 내뿜는 서슬 퍼런 눈빛은 멀리 불사르고 있는 제니어스의 영지를 찹찹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마을의 참상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헬씨, 적 병력은..?”
“말을 탄 용병들만 백오십, 하르그 가문의 문장을 달고 있는 병사만 팔백 이상으로 보입니다. 단장....”
“용병들과 병사들만으로 끝을 낼 속셈인가...?”
언덕위의 무리 중 가장 선두에 선 흑마와 은빛의 늑대처럼 묵직한 기운을 내뿜는 용병단의 단장은 씁쓸한 눈빛이었지만, 살기가 감도는 눈빛으로 마치 절벽아래의 불구덩이를 내려다보는 것처럼 이글거리고 있었다.
“단장... 지시를..!”
이미 기사들은 용병들에게 운명을 맞긴 눈빛이었다. 강자에게는 무한한 존경이 담긴 눈빛을 보내는 남부의 귀족이다. 수도의 썩어빠진 귀족에 비해 이런 눈을 가진 남부의 귀족이 좋았다.
제니어스가 믿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실버 울프뿐이었다. 이미 자포자기한 상태였다. 그때, 나타난 것이 실버 울프들이다. 때문에 기사들은 용병의 행동에 그저 따를 뿐이다.
스르릉!
헬씨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로이젠의 옆구리에서 묵직하게 보이는 바스타드 소드가 날카로운 쇳소리를 울리며 빠져나왔다.
“헬씨는 좌측을 난 정면을... 기사님들은 헬씨와 합세해 좌측을 치다 우회하십시오!”
히히히힝!
“진격(進擊)!! 우린 실버 울프다! 오직 전진!”
그것이 다였다. 잘 통솔된 실버 울프들은 25명씩 반으로 갈라 헬씨와 단장을 따라 진격하기 시작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군마(軍馬)들은 힘차게 앞으로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듯 은빛의 늑대들 중 반은 왼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 제니어스 가문의 병사들과 기사들은 좌측을 통해 우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로 헬씨의 목소리가 전쟁터에 울려 퍼졌다.
“가자! 하르그 개새끼를 사냥하러!”
“우아아아아!!”
“우린!! 실버!”
“울프!!!”
두두두두두!!
천지를 흔드는 육중한 말굽소리가 전장을 향해 짓쳐 들고 있었다. 특별한 진형을 갖추는 것도 아니었지만, 실버 울프 용병단들은 잘 짜인 각본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순식간에 제니어스 가문의 작은 마을에 진입한 실버 울프들은 하르그의 용병들을 휘젓기 시작했다.
물론, 하르그 가문의 용병들은 정신을 차리며 진형을 갖추기 위해 우왕좌왕하던 차에 당해버렸으니, 할 말이 없었다. 다짜고짜 밀고 오기 시작하는 인마들을 보며 동요하기 시작했다.
“용병들은 나를 따르라!”
닥쳐오는 제니어스의 용병대를 맞아, 하르그의 용병들은 육중한 소리를 내며 마을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미 들어온 용병들과 기사들의 힘에 무너져 가는 진형을 보며 입술을 깨물며 용병단원들과 병사들을 닦달했다.
“이놈들아! 우리가 수적으로나 힘으로나 앞서 있다! 우리가 질 리가 없다! 공격! 공격뿐이다!”
다크 크로우의 용병단장의 말 때문이었을 가. 숫자에서 우세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하르그의 용병과 병사들은 자신감을 얻었다. 그 모습에 다크 크로우의 용병단장은 뒤를 향해 소리를 계속 질러대고 있었다.
“몰락해가는 제니어스 가문이다. 이미 우리의 상대가 아니다! 어서 해치우고 우리도 계집이나 주물러야 하지 않겠나! 뭐하느냐! 헉!”
스각!
“시끄럽다. 다크 크로우!”
시끄럽게 떠들고 있던 다크 크로우의 용병단장은 갑작스럽게 날아드는 검에 헛바람을 들이켰다. 갑옷을 이어주던 이음새가 잘려나가며 잘다져진 근육이 드러났다. 갑옷만 잘라버린 모습에 민망한 모습이었지만,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보아하니, 네가 이곳을 통솔하는 녀석인 가보구나! 난, 실버 울프의 단장 로이젠이다.”
“으, 은의 늑대 로이젠!!”
“하하하! 은의 늑대라... 쿠쿡. 죽엇!”
로이젠의 검에 손속을 두지 않았다. 로이젠의 검에서 마나가 일렁거렸다. 소드 익스퍼트를 상징하는 기운이 뭉치자, 순식간에 다크 크로우의 목은 잘려버렸다. 그야 말로 쾌속이었다. 오만하게 소리치던 목이 잘려나가자, 더러운 피가 땅으로 떨어졌다.
“다... 단장!!”
“제, 젠장! 단장이 당했다. 피해!”
“모두 피하라!”
“크아아아!”
죽음의 향연이 시작 되었다. 밀려드는 제니어스의 은빛에... 그리고 제니어스의 병사들에 의해 으르렁 거리는 은빛의 늑대가 마을의 중앙에 꽂혀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용병기는 이미 하르그의 전의를 꺽기 시작했다. 그리고 누군가 떨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 실버 울프!.... 실버 울프다!!”
살아있는 용병들의 눈에 비추어진 은빛의 모습은 공포였다. 주변 동료들은 창칼에 뀌어져 나동그라지는 모습은 이미 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이었다. 거기다. 남부에서 실버 울프를 모르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영지전이 벌어지는 곳이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족속들... 그들이 바로 피에 굶줄인 실버 울프들이다. 그들이 나타난 영지는 피로 물든다. 아니, 반드시 피로 물들게 되어 있다. 상대의 영지는... 그리고 그들은 지옥에서 올라온 늑대들이다. 실버 울프!!
“퇴, 퇴각!! 퇴각하라!!”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전쟁의 귀신들... 실버 울프의 위명에 하르그 가문의 병사들과 용병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을 채,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황량하기 짝이 없는 시체들과 비릿한 향기뿐이었다.
퇴각하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실버 울프의 용병들은 멀리서 비치는 붉은 폭풍에 눈을 부릅떴다. 혹시 새로운 적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붉은 기운... 불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