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전쟁(2) - 일기당천(一騎當千)
대륙력 1911년 1월 1일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제니어스의 허름한 성곽(城郭)에 보초를 서고 있는 두 명이 두서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비록 냉전체제에 도립해 버린 영지 전이었지만 긴장의 끈을 노칠 수 없는 상태였지만 둘은 대화를 즐기고 있었다.
“대단했지... 그때!”
“하하! 잊을 수가 없지! 이 사람아. 누구 때문에 건진 목숨인데.”
제니어스의 몇 없는 병졸이었다. 거의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난 후에도 잊을 수 없는 광경이었던 모양이다. 어둡게 변해버린 제니어스 영지에서는 좁쌀만 한 횃불들이 일렁이는 허름한 마을 형태의 영지였다.
일정 수입도 없으며 영지 내의 세금이라고는 쥐꼬리만 한 영지였기 때문에 국가에 상납하는 세금도 적었다. 그만큼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지금은 전시 상태였다. 거기다. 영지의 주민들이라고 해봐야 어설프게 보초를 서고 있는 병졸들과 그 가족들이 전부였다.
영지의 대략적인 인원은 1천을 겨우 넘기는 도시 규모의 영지다. 전쟁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물자와 인력이었지만, 실버 울프라는 든든한 전쟁 용병 덕분에 지금까지 버텨 온 것이다. 아무튼, 웃고 떠들 수 있는 것도 하르그의 병력정비가 끝을 맺는 순간 일 것이다.
휘이잉!
“으으... 쌀쌀 하구만! 그때와 같아.”
“그때와 비교 할 수 있겠나! 그땐 오줌이라도 지렸다면 그대로 얼어 버렸을 것이야. 하하하!”
둘은 스산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26일전의 생생한 발록의 싸움을 상상했다.
* * *
[푸후! 킁킁! 음무우우!]
화아악!
발록의 거친 숨결이 대지를 불태우기 시작하자, 삼백 가량의 병졸들은 저마다 긴장하며 주춤 주춤 뒤로 물러나기 바빴다. 그나마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용병들과 기사들은 힘겹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화마의 폭풍의 기세에 뒤로 물러나야 했다.
거칠게 도리질 치던 발록은 케실리온을 향해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었다. 살기는 마치 지옥의 불길이 몰아치는 느낌마저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령검을 쥐고 있는 케실리온에게는 그저 더운 온풍(溫風)에 불과했다.
“처음은 역시 기세 싸움인가?! 역시 금수(禽獸)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군. 기운 낭비다. 하지만... 응수해주마!”
파파팍! 쩌적... 쩌어억! 쩌저적!
성인의 모습으로 변해 버린 케실리온의 모습은 소년의 모습 보다는 청년의 모습으로 보였다. 물론, 마령심법(魔靈心法)의 빙마기(氷魔氣)의 영향으로 사내다운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지만 싸늘하리만치 냉기를 내포한 눈매와 꿈틀 거리는 은빛의 눈썹은 어떤 자 보다 날카로웠다.
하나의 잘 벼려진 명검(名劍)아니, 마검(魔劍)을 보는 듯했다. 순식간에 발록의 진지의 화염지대를 냉기의 지대로 변천 시킨 케실리온은 어떠냐라는 표정을 짓듯이 어깨를 으쓱 거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 불량한 태도에 도발 당한 것인지 발록은 콧김을 한번 내뿜고는 파이어 어택을 사용했다.
푸웃!
[죽어!]
두두두두!
몇 백의 군마가 행진하는 소리가 들려오기가 무섭게 케실리온을 향해 들이 닥친 발록은 어깨를 벌리며 들이 박기 시작했다.
“한번 당한 기술... 안 통한다! 날 능멸하는 것이냐!”
팍!
케실리온은 하체에 힘을 주며 주력으로 사용하는 오른팔이 아닌 왼팔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들이닥친 발록의 어깨를 향해 장력을 내뿜었다. 어떤 속성도 실리지 않은 기운은 발록의 속력을 줄이기에 충분했다.
“자비는... 없다!”
푹!
줄어 버린 속력이었지만, 여전히 들이닥치는 파이어 어택을 보며 케실리온은 살며시 어깨에 마기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하체에 힘을 주자, 땅이 푹 꺼지며 케실리온의 하체를 고정시켰다. 천근추였다. 무공의 모든 묘리를 깨우쳤다 해도 과언이 아닌 케실리온에게는 쉬운 일이었다.
퍽!
묵직하게 들려오는 소리! 케실리온의 어깨와 발록의 어깨가 맞물렸다. 덩치가 작은 케실리온이 멀리 나가 떨어져야겠지만, 이상하게도 발록은 힘없이 뒤로 밀려나며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찰나의 순간에 펼쳐낸 기술의 극을 보여준 케실리온의 수법을 제대로 알아차린 존재는 없었다. 있다면, 동체시력과 경지의 상승을 맛본 알파뿐일 것이다. 그리고 멀리서 가슴 졸이며 발록을 응원하고 있을 흑마법사의 존재뿐이다.
“무르다! 장난하지마라! 발록.”
[무어엉! 무우!]
발록은 자신의 기술이 먹히지 않았다는 것이 그렇게 충격인지 고통에 찬 울음을 터뜨렸다. 잠자코 그것을 보고 있지 않을 케실리온은 마령검에 강기를 끌어 올렸다. 눈부시게 펼쳐진 오러 블레이드의 모습에 모두들 황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저것이 오러 블레이드!”
일전에 저 위용을 본적 있던 실버 울프들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오러 블레이드를 처음 보는 제니어스의 기사들은 놀라움과 경외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 경외 어린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케실리온의 신형은 발록의 코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파멸의 군주라더니... 그저 말하는 소였군!”
[가, 감히!]
케실리온은 건방떨고 있는 발록을 향해 일검을 뻗었다. 만검의 낙(落)의 수법으로 내려 그어진 검은 순식간에 발록의 날개 죽지를 향해 찔러갔다.
쉐에에엑!
[어딜!]
팅!
발록은 찔러 들어오는 검을 정확하게 보고는 자신의 무기인 채찍을 거칠게 휘둘렀다. 화염의 길을 연상케 하는 긴 채찍은 정확하게 마령검을 쳐 내며 응수까지 가해왔다. 아까의 어설픈 파이어 어택이라는 것 보다 훨씬 좋은 수법이었기에 케실리온도 나름대로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 지. 만!
고작 그 뿐이다. 쳐 낸 검은 팔의 의지에 따라 뒤로 밀려나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처럼! 물결에 흔들리는 조각배처럼 발록을 향해 되돌아갔다.
만검 유(流)!
부드럽게 제압해 가는 검초에 당황한 것은 발록이었다. 이렇게 되돌아 올 줄은 미처 몰랐다는 듯이 허겁지겁 채찍으로 방어하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두꺼운 발록의 거죽으로 파고드는 차가운 냉기(冷氣)가 피부를 얼려 버렸다.
쩌저적!
[음무우우우!]
채찍을 넘어서며 공기를 가른다! 단순한 생각이었지만 케실리온은 확실히 해냈다. 전보다 완벽해진 초식을 느끼며 만족스러운 미소가 만면이 피어졌다.
[무우우우우! 플러그 레벌(Flog Revel)]
가슴으로 몰아친 한기의 침묵에 발록은 화마를 끝도 없이 끌어 올렸다. 마치 한 여름의 열기를 느끼듯 대지가 검은 색으로 변할 무렵, 녀석의 채찍은 노란빛을 넘어 극화의 상태로 변하며 채찍의 난사를 시작했다.
쫙! 쫘아악! 쫙!
채찍이 닫는 자리는 마그마가 분출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수법, 대단히 위험해 보였지만 케실리온에게는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무렇게나 휘두른다고 맞을 존재가 아니었다. 치열한 공방에서 조차 일격을 허용치 않을 케실리온으로써는 이 황당한 기술에 짜증만 날 뿐이었다.
“장난치지 마란 말이다!”
케실리온은 점점 닥쳐오는 채찍을 보며 검을 역으로 쥐기 시작했다. 앞뒤로 교차한 발 사이로 어마어마한 바람이 몰아쳤다. 풍류마신보였다. 천마의 군림보에서 착안했으며, 풍운지의 보법 신법, 마영보법 신법에서 착안한 최고의 보법이다. 시작은 미약하지만, 모든 방위를 점한다는 보법이다.
쾅!
“사라져라!”
진각을 밟은 케실리온은 흩날리는 돌 조각 사이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몰아치는 채찍질 세례를 향해 만검의 살을 펼쳤다. 역으로 쥐어진 검을 따라 흘러가는 1장 최고의 수법! 케실리온은 일말의 공격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극쾌의 수법으로 녀석의 채찍을 쳐 내며 조금씩 상처를 내기 시작했다.
휘리릭! 파사사삭!
일초, 일분의 시간 동안 만 조각을 낼 듯 한 검법은 순식간에 녀석의 채찍을 조각내며 발록의 가슴과 허벅지, 옆구리 양 팔의 근맥을 잘라 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녀석은 엄청난 회복력을 가졌던지 쉽사리 죽지 않았다.
그것만은 케실리온이 인정해야 할 듯했다. 발록들은 강한 것이 아니라, 무서울 정도의 회복력을 가진 것이라고 판단한 케실리온이다.
“실망이다. 허나! 그 기백만은 인정하지... 그만 죽어라! 낙쾌(落快)!”
촤아아악!
케실리온은 처음으로 만검 2장 1초인 낙쾌를 펼쳤다. 극도의 쾌검이다. 만검의 살과 낙은 비교조차 꺼려지는 최고의 쾌검은 찰나와 찰나 사이에 있는 시간 속에 펼쳐졌다. 그리고 케실리온은 허리 쪽에 있는 허울뿐인 검집에 마령검을 밀어 넣었다.
스르릉... 착!
두벅.. 두벅!
착검을 하고 등을 돌리며 천천히 알파에게로 돌아가는 케실리온의 모습을 뒤로 찬찬히 깔려가는 어둠은 발록의 최후를 알렸다. 소리 소문 없이 어떤 울음도 비명도 고통도 지르지 못한 발록의 시체를 뒤로 한 케실리온은 싸늘한 눈빛으로 흑마법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쓰레기 같은 자식... 제대로 된 놈으로 소환하도록.”
“이... 이! 다음번엔 반드시 네놈의 죽음을 보겠다. 설사 내 목숨이 끝난 다 할지라도! 반드시!”
“그 전에... 도망이나 갈수 있을 까?”
케실리온의 쓰라린 말에 흑마법사는 급히 흑마법의 공간이동 마법인 둠을 펼쳐 사라져 버렸다. 일측 일발의 순간이 끝나자, 용병들과 병졸들, 기사들은 긴장이 풀렸다는 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면서도 몰아치는 추위에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바, 발록을... 저렇게 쉽게...!”
병졸들은 저마다 할 말을 잊었지만, 기사들이나 용병들은 믿을 수 없어했다. 인간으로써 있을 수 없는 일! 그것을 해낸 존재가 눈앞에 있었다. 이야기로만 전해지던 언데드의 존재를 본 것도 잊혀졌다. 발록의 죽음과 케실리온의 존재를 느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