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전쟁(2) - 일기당천(一騎當千)
갈색의 조촐한 휘장이 내리어진 좁달 막한 침대와 거의 다 타버린 촛대가 일렁이며 방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빛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은빛의 눈동자, 케실리온이었다.
“케실리온님, 남작의 약속시간입니다.”
알파의 어설픈 말속에 케실리온은 머리를 몇 번 끄덕였다. 숲속의 수련을 마친 용병과 기사들은 오늘 부로 제니어스 남작가에 입성한 것이다. 성이라고 해봐야 파이어볼 한방이면 부설 질 것 같은 위태위태한 곳이었다.
몰락해가는 영지답게 영주의 저택은 일반 평민과 다를 바가 없는 곳, 아니... 약간 더 큰 규모의 집이라고 해야 할까? 도저히 영주가 살만한 곳은 아니었다. 세금은 제대로 거두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영지를 운영하고 있는 모습이 위태로웠다.
“케실리...”
“그래, 가자!”
케실리온은 미리 배정받았던 방에서 나왔다. 좁은 복도 사이로 여러 개의 벽화가 걸려 있었고, 간간히 어둠을 밝혀주는 촛대들이 어지럽게 빛을 밝히고 있었다. 귀족가 치고는 너무나 초라한 곳.
저벅, 저벅...
태양이 저물어 가고 있었기 때문인지 어둑어둑한 광경을 보고 있는 케실리온은 약간 찹찹한 마음이 들었다. 왠지 모르게 침울해지는 분위기에 애써 밝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알파가 처량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케실리온의 등을 보며 걸어가고 있는 알파는 그의 어깨가 한없이 무겁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강함의 이유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모른다. 그의 과거도, 그리고 앞으로 있을 미래도.
“바람이 선선하군. 적당한 수분... 따스함 까지 느껴지는 군.”
“예, 봄이니까요. 만물이 새롭게 시작하는 계절.”
“오호... 마족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신선해. 알파!”
“케실리온님 역시 마족의 일원으로써.. 어찌.”
“하하하!”
케실리온은 새삼 자신이 마룡이자, 마(魔)에 가까운 존재라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성스럽기 까지 한, 붉은 태양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던 케실리온은 조금씩 창가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휙!
귓가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멀지 않은 곳. 가까운 창가 근처의 소리였다.
“합!”
스각! 떼구르르.
케실리온의 찹찹한 마음만큼이나 구슬프게 들려오는 검의 소리에 자연히 관심이 쏠려갔다. 무언가를 베고 지나간 뒤의 흔적과 그 소리는 케실리온의 관심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러니, 케실리온의 시선은 자연히 창밖으로 향해 있었다.
“......”
귀족가에서 검을 휘두르는 일은 흔치 않다. 물론 훈련을 하는 기사들이 있지만 몰락해가는 귀족가에서는 그것마저 사치스러울 뿐. 하지만, 케실리온은 흥미로운지 턱을 쓰다듬었다.
다다다다. 탓!
짧은 발걸음 소리가 먼지구름을 뚫고 들려오기 시작했다. 짧은 발걸음은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왔고 그 발걸음은 케실리온도 익히 알고 있는 소리였다.
“삼재보!”
앳된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가는 듣기 좋은 목소리였다. 어눌하게 들릴지언정 케실리온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삼재보라고, 저 보법을 가르친 것은 기사들뿐이다. 하지만, 저 꼬마 녀석이 펼쳐내는 보법은 기사들보다 잘했으면 잘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케실리온님... 늦겠습니다.”
“잠시면 된다.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야.”
케실리온이 향한 시선은 삼재보를 펼치고 있는 앳된 얼굴이었다. 구슬땀을 흘리며 펼치고 있는 모습,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모습이 들어왔다.
스르륵.
지켜보고 있던 앳된 녀석의 시선이 2층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케실리온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케실리온의 무표정하던 얼굴에는 약간 희비가 교차했지만 시선을 틀며 알파를 앞장세우며 남작이 기다리고 있을 영접실로 이동했다.
남작이 기다리고 있는 방 앞에는 이미 시종하나가 대기하고 있었다. 여러 사람이 방안에 있는 것인지 약간 시끌시끌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똑똑!
“남작님! 케실리온님 드십니다.”
시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굳게 다쳐 있던 문이 조금씩 열려졌다. 식사를 할 참이었던지 모두들 즐겁게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 중에 실버 울프의 간부급 인물들도 몇몇 있었기에 케실리온도 부담 없이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조촐하겠지만, 마음껏 드시오.”
“그러지.”
남작의 말에 케실리온은 오직 하대를 일관했다. 처연하게 보일 정도로 초췌한 남작의 얼굴은 일말의 동요도 찾을 수 없었지만 이곳에 있는 기사들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아무리 강한 케실리온이었지만, 주군이 되는 남작에게 하대를 하는 것은 썩 좋지 못한 모양이다.
“사치다. 지금 이 순간에도 너의 영지민들은 굶어가고 있으며, 영지전에 대해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줄줄이 나오는 음식들을 보며 케실리온은 이마에 천(川)자를 그려갔다. 지금까지 보아온 남부의 사정은 익히 알고 있다. 영지민들은 그저 전쟁의 도구요. 무기였다. 그리고 착취의 대상일 뿐!
“알고 있소. 이미 진 싸움이었소. 이 영지는... 틀렸소이다.”
“틀린 건 네놈이겠지. 그리고 너의 운영방식까지. 전쟁이 우습나? 좁쌀만 한 영지를 지키기 위해 한곳으로 모여도 모자랄 판에 방관이나 하고 있다니.”
남작의 말을 되받아 치는 케실리온은 웃긴 듯이 조소를 날리며 좌중에 있는 모든 이의 얼굴을 보며 남작을 조롱했다.
쾅!
“아무리 당신이라도... 남작님을 모욕하는 행위는 용서하지 못합니다!”
한 기사가 나서자 나머지 아홉의 기사들도 줄줄이 반발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알파가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케실리온의 제지에 담담히 있을 뿐이었다.
“사기 제로, 병력 제로, 보급 제로... 이미 진 싸움이다. 그나마 있는 것은 허름한 성뿐. 병력이 있다손 치더라도 오합지졸... 그리고 영주의 됨됨이도 제로. 영지는 포기해라. 멍청한 영주여.”
케실리온의 쓰린 말이 이어졌지만 누구도 함부로 입을 열수가 없었다. 틀린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있는 병사들도 그저 농사나 짓고 있던 농민일 뿐. 제대로 된 군인이 있을 턱이 없었다. 무너지는 제니어스 가문에 있는 기사들도 몰락해가는 기사일 뿐. 빛 좋은 개살구가 그러할까?
쾅!
“누가! 누구 마음대로 영지를 포기하래! 이곳은... 나와 어머니, 오라버니가 웃고 즐기던... 소중한 땅이란 말이야!”
거칠게 문이 열리며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찰랑이는 금발의 머리칼 사이로 흘러내리는 굵은 눈물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기사들은 숨을 죽였다.
“소중하면 지켜라. 약한 주제에 말이 많군. 당하기 전에 최고가 되면 될 것이 아닌가.”
“.....”
케실리온의 진리다. 약자는 당하는 자, 강자는 그것을 취하는 자! 케실리온의 입장에서는 이들은 약자요.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일말의 감정도 느껴지지 않은 케실리온의 발언에 눈앞의 꼬마는 두 눈을 크게 흔들어댔다. 눈가에 걸린 눈물만이 슬픔을 대신 할 뿐이었다.
“에레노아! 그분에게 무슨 무례냐. 당장 사죄를!”
“됐소. 남작.... 오랜만이군. 룸메이트”
사실 케실리온은 창가에 비친 꼬마의 모습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 소녀가 에레노아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보법은 아마, 코리안 공작가의 기사에게 배웠을 것이다. 기사가 되겠다고 설치던 에레노아였기에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너, 넌. 케실리온...?”
“에레노아, 그분과 아는 사이더냐.”
“아...”
몰라보게 바뀐 케실리온의 모습에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은 어느 정도 수긍해야 했다. 흑발이었던 머리칼은 차가운 느낌의 은색 머리칼이었다. 거기다 눈동자 역시 은빛이었으니 못알아 보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한 지붕에 살았으니 몰라 볼 리가 없지. 설마 여자일 줄은... 아무튼, 난 별로 내키지 않는 군. 영지전이라는 것.”
케실리온은 어느 정도의 사실과 시치미를 더불어 말을 얼버무렸다. 은연중 영지전의 참전도 꺼리고 있다는 것도 비추고 있었으니, 남작으로써는 답답할 노릇 일 것이다.
“무릇, 영지라고 하면 작은 나라에 해당하는 곳이다. 그런데 그곳을 관리해야 할 주인 될 자가 저러니 누가 나설 것이며, 누가 싸울 것이냐. 전쟁터에 조차 모습을 보이지 않는 꼴이라니.”
케실리온의 속사포 같은 질책에 남작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귀족은 귀족이되 몰락해가는 귀족일 뿐이다. 무신이 아닌, 문신이다. 중앙귀족도 아니요. 일개 지방의 귀족이다. 제국의 황제도 자신의 이름을 모를 것이다. 아마, 이곳에 이런 영지가 있는 것조차 모를 것이다.
“이미... 몰락해가고 있소. 이 영지는...”
“웃기는 군. 몰락해가는 건 남작 당신의 마음일 뿐이다. 왜 저 어린 꼬마 녀석이 기사가 되고 싶다고 설친 것을 모르는 가. 가문의 부흥을 위해서다. 그러는 동안 넌 무엇을 했지?”
“그, 그런...”
“한마디로 넌 쓰레기다.”
케실리온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용기도 기백도 없는 남작의 행동이 과거 1계에 있을 때,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였는지도 모른다. 왕따였으며, 용기도 없었다. 강자에게 굽실거렸으며, 머리를 숙이는 것이 일이었다.
“취소해. 케실리온! 아버님은... 아버지는 그 누구보다도 영지를 생각했어.”
“어떻게 생각했기에 이 모양일까. 이유는 상관없다. 현재가 중요할 뿐.”
“그래서 부탁했잖아. 영지를... 영지를 지켜달라고!”
케실리온의 미간이 순간 꿈틀 거렸다. 이것이 약자의 한계였다. 의지하는 것! 용기도 기백도 없이 강자에게 의존하는 썩어빠진 근성.
“너희가 지켜라. 용기도 기백도 없는 놈들이 생각하면 어쩔 것인가! 이미 죽어 있는 것을... 너희의 영지는 이미 죽어있다.”
“!!!!”
케실리온의 말에 좌중은 다시 한 번 침묵에 들어갔다. 실버 울프도 알고 있다. 지휘자가 망설인다면 수많은 병졸들이 죽어나간다. 지휘자가 바보라면 반드시 진다. 하지만 없어서도 안 될 존재가 바로 지휘자다.
“용기와 기백, 긍지를 보여라. 힘이 되어 줄 터이니!”
케실리온은 그 말을 끝으로 방에서 나가버렸다. 그리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알파는 케실리온의 족적을 따라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말이 길어졌던지 하늘은 이미 붉게 타오르는 스칼렛의 달이 떠 있었다.
“왜 따라왔느냐. 알파...”
“전 당신의 검이며, 방패입니다.”
“말은 잘하는 구나... 알파. 이 세상은 말로는 설명이 안 되는 것이 있다. 용기와 기백 그리고 긍지. 난 뒤늦게 깨달았다. 용기라는 힘을...”
케실리온의 의미모를 말에 알파는 머리를 갸웃거렸다. 마족에게 있어 용기와 기백, 긍지는 불필요성의 단어였다. 파괴와 살육 그리고 승리만이 있을 뿐이다. 마족이 두려움을 느낀 순간, 그 존재의 가치는 이미 사라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알파는 케실리온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새로운 존재 가치를 느꼈다. 알파의 존재 가치는 케실리온으로 부터 비롯된다.
“정말로... 영지전에 참전 할 생각입니까?”
“용기를 보여준다면... 대가를 받고 싸워주지. 나의 이름으로!”
케실리온의 의지를 본 알파는 살며시 웃음을 터뜨렸다. 비웃지도 그렇다고 통쾌하지도 않은 웃음에 케실리온 역시 미미하게 웃음을 터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