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전쟁(2) - 일기당천(一騎當千)
저택 안으로 들어서던 케실리온은 멀리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질주하고 있는 하나의 기마를 볼 수 있었다. 말의 안장 끝에 꽂혀 있는 두 장의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고 있었다. 붉은 깃발과 달의 문양이 그려진 깃발이었다.
두두두두!
“길을 열어라! 하르그의 전령이다.”
저택의 앞까지 질주해온 전령이라는 녀석이 앞을 가로막은 실버 울프의 용병들과 기사들을 보며 일갈을 터뜨렸다. 힘줄이 돋아 있는 목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리고 오만하게 치켜뜬 두 눈은 제니어스 가문의 사람들을 깔보고 있는 모습이다.
“하르그의 개가 여기가 어디라고!”
“제니어스에서는 전령을 이렇게 홀대 하는 가! 썩어도 준치라더니 꼴에 기사라고.”
전령의 당당한 목소리에 당황한 것은 앞서 나섰던 기사였다. 대륙 법으로나, 제국 법으로도 사신이나 전령을 홀대 할 수는 없었다. 지금 그는 하르그를 대표해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전령의 호통에 제니어스의 기사는 다소 담담한 표정으로 저택의 길목을 열었다.
“으드득... 하르그의 전령이다. 길을 열어라!”
따각... 따각
기사의 이를 가는 소리와 길을 열어 라는 소리에 전령은 비웃음을 날리며 천천히 말을 몰아 저택의 입구까지 다가섰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제니어스의 저택을 보며 다시 한 번 비웃음을 날리며 저택으로 들어섰다.
“뭐하고 있나! 남작에게 안내해라.”
“뭐라! 건방진...!”
“난 전령이다. 잊었는가!”
“크으... 따라와라!”
은빛으로 번쩍이는 갑옷에 뭍은 먼지를 털어내며 오만하게 소리치는 전령의 행태에 다시 한 번 기사들은 발끈 거렸지만 참아야 했다. 자칫 일레인 남작에게 누가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저벅... 저벅!
기사는 1층에 마련된 접대실로 전령을 인도했다. 보통 귀족이라면 가장 높은 층에 접대를 하겠지만 일레인 남작은 금전적으로나, 위치적으로 몰락해가고 있는 귀족이었다. 그렇기에 접대실을 따로 마련하지 않았기에 회의실을 겸용으로 한 곳을 이용했다.
툭!
“뭐야. 제니어스는 하녀 교육을 어떻게 시키는 건가! 건방진...!”
전령은 자신과 부딪힌 존재를 보며 호통을 쳤다. 하찮은 평민 하녀가 자신의 갑옷에 부딪힌 것이 못마땅한 모양이다. 하지만 옆에 있던 기사는 얼굴이 새하얗게 변해 버렸다.
“하녀...? 나보고 말 한 건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던 케실리온과 접대실로 이동하던 전령이 서로 부딪힌 것이다. 입구에서부터 모든 것을 보고 있던 케실리온은 어느 정도 의도된 행동에서 전령과 부딪힌 것이다. 물론, 식당이 1층에 있다는 점을 감안해 먹을 것을 챙겨 나오던 중 부딪힌 것이지만 말이다.
“네 이년! 감히 누구에게 눈을 부라리느냐!”
“귀찮군.”
케실리온은 열을 내고 있는 전령을 보며 귀찮다는 표정으로 과일을 입에 베어 물었다. 아카데미에 다니던 시절 즐겨 먹던 과일이 이곳에서 재배된다는 것을 알고부터 줄곧 이 과일을 찾게 된 것이다. 때문에 식당에서 이 과일을 챙겨 나오면서 저 전령과 부딪힌 결과를 만들었다.
“이..이이!”
“꺼져라. 애송아.”
치를 떨고 있는 전령을 보며 무심히 중얼거리듯 말한 케실리온의 결정타에 전령은 검병을 움켜쥐었다. 어지간히도 자존심이 쌘 놈인 모양이다. 길을 안내하던 기사는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케실리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의 케실리온의 모습은 영락없는 15세 정도의 소년으로 보였다.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진정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꺼려하는 케실리온으로써는 가장 편한 모습인 지옥의 모습을 자주했다.
스르릉!
전령의 검집에서 롱 소드가 부드럽게 뽑혀졌다. 굳게 다물어진 입술이 씰룩이며 뭐라고 중얼거리며 붉게 분노를 터뜨렸다.
“무너져 가는 가문 따위가!”
슈아악!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녀석의 검은 케실리온의 미간을 향해 떨어졌다. 하지만, 케실리온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과일을 한입 베어 물고는 그 씨앗을 검을 향해 뱉었다. 입과 씨앗이 해낸 것 치고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떨어지던 검의 면을 때리며 궤도를 바꿔 버린 것이다. 정확히는 케실리온의 위치에서 왼쪽으로 20센티미터나 떨어진 곳을 베어버렸다. 워낙 낡은 건물이었기 때문인지 힘없이 바닥은 베어져 있었다.
“꼴에 기사라고...귀찮다.”
케실리온은 투명한 은빛의 눈동자를 전령의 눈으로 시선을 옮겼다. 몸에서 은은히 번지는 특유의 무심함과 살기가 깃든 눈이 전령을 스치자 녀석의 몸은 살짝 굳어졌다.
화아악!
끈적이는 살기도 아니었다. 차가움을 넘어 뜨거움에 달하는 살기였다. 무형의 살기가 유형으로 비춰질 정도로 케실리온의 살기는 날카로웠다. 마법으로 몸이 터져나가는 것처럼 전령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할 수 없었다.
“꿀꺽...”
침넘어가는 소리가 명확하게 들릴 정도로 전령은 극도의 긴장상태로 바뀌어있었다. 수많은 남부의 전쟁에서 버틴 전령이었다. 그는 이정도의 살기를 내뿜는 존재에 대해 궁색한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내가 잘못했다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말이다.
그 생각이 머릿속에 미치는 순간 케실리온의 살기는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오들오들 떠는 멍청한 기사를 상대할 정도로 케실리온은 바보가 아니었다. 게다가 버러지 같은 녀석의 피를 붙일 정도로 케실리온은 어설프지 않았다.
“이, 일레인 남작에게로...”
“저곳이오! 또 헛소리 한다면 전령이라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아, 알겠소. 얼른...!”
전령은 단단히 두려움을 느낀 모양이다. 케실리온의 무심한 눈길을 받으며 일레인 남작이 기다리고 있는 응접실로 향하자 한결 풀린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 품에 갈무리 되어 있던 양피지를 꺼내들었다.
두 개의 달과 그 그림자가 수 놓여 있는 양피지를 들어 올린 전령은 아까의 일을 잊은 듯이 당당하게 응접실로 들어섰다.
“일레인 남작을 뵙게 되어 영광이오! 하르그의 전령인 비켄이오.”
“비켄 경이구려. 반갑소. 그래, 본 영지에 무슨 볼일이오.”
일레인 남작의 단도직입인 태도에 비켄은 얼굴을 구겼다. 아무리 망해가는 가문이라고 하지만 차 한잔 내어주지 않는 그 무심함에 치를 떨어야 했다. 물론, 차를 내어 온다고 해도 마시지는 않겠지만 의례적으로 내어오는 것이 관례다.
“남작께서 원하시니 저희측이 원하는 바를 말하겠소.”
꿈뜰!
비켄의 말에 일레인 남작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이건 명백한 도발이자 무시였다. 아무리 하르그의 남작을 대신해 온 전령이었지만 이정도로 맞먹는 행동에 화가 나는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제니어스는 하르그에 비해 조족지혈이다. 참아야 할 때였다.
“그럼 전령을 전하겠소. 단 한번만 읽을 테니 똑똑히 알아들으시오!”
[제니어스 남작 지금쯤 이 전서를 보고 있다면 난 군세를 가다듬고 있을 것이오. 신중, 더 신중을 기울여 들으시오. 이건 부탁도 교섭도 아니오. 명령이오! 항복하시오. 항복한다면 그대의 가문의 명맥은 유지 할 수 있을 것이오. 하지만... 거절한다면 그대의 가문과 가문의 역사까지도 모두 없앨 것이오. -차기 가주 자이젠 하르그-]
“똑똑히 들었을 것이오. 신임 영주이신 자이젠 하르그님께서 친히 항복을 권유하고 있소이다. 순순히 항복과 영지의 문을 연다면 가문의 명맥은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오.”
일레인 남작은 머리를 숙였다. 분노에 떨며 주먹을 꽉 쥔 남작의 손바닥은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쓰린 느낌이었지만 왠지 손바닥을 펼 수 없었다. 세게 도리질 치는 남작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분노만이 꽉 들어차 있었다.
으드득!
“고작... 이 말을 하기위해서 온 건가!! 제니어스의 대답은... 거절이다!”
“후후후... 남작! 후회할 것이오. 반드시! 전장에서 봅시다!”
전령인 비켄은 생각할 겨를 도 없이 영접실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이미 예상한 바도 있다. 이것은 선전포고였다. 제니어스 남작이 거절한 시기를 시작으로 하르그와 제니어스는 피할 수 없는 전쟁을 해야 할 것이다.
“나, 남작님...”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 하지 않겠나! 영주로써 명령이네. 마을에 기사를 파견해 이곳을 기점으로 수성전에 도립할 걸세! 그렇게 알게나.”
“예! 하오나... 수성전이라니 가능한 일입니까? 물자와 전력 차이가 확연합니다.”
“방법이 없네. 차라리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는 수밖에... 두려운 자는... 도망가도 좋네.”
남작의 씁쓸한 말에 기사는 머리를 숙이며 물러나야했다. 짧은 냉전을 거치며 드디어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수성전, 성을 지키며 농선 전을 펼쳐야 할 정도로 제니어스의 물자와 군사력은 나약했다.
수성전은 적은 인원으로도 장기간 적을 상대 할 수 있는 최고의 전략이다. 남작이 이 수를 내놓았다면 다른 방법은 없을 것이다. 고작 미약하게 저항하다 당할 뿐이다. 주먹에서 흘러내리는 붉은 피가 일레인 남작의 몸을 뜨겁게 달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