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전쟁(2) - 일기당천(一騎當千)
일레인 남작의 결심과 동시에 제니어스 성이 있는 곳을 중심으로 몇몇의 마을에서 최종 방어선인 영주의 성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래봐야 여타의 영지에 비해 낡고 무너져 가는 성이었지만 바람막이 역할을 하기에는 충분했다.
앙상한 나무로 만든 목책 보다야 돌로 만들어진 성이 안전했다. 거기다 평민과 다를 바 없는 생활을 영위하는 남작의 인품과 동네 아저씨 같은 인상을 주는 남작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세금이라고 해봐야 겨우 영지를 운영할 수 있는 최소의 금액만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영지로 피난하더라도 굶어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도망칠 수 없는 궁지에 몰린 상황이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싸우는 것 외에는 길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앙상한 팔목에 농기구를 쥐고 싸우는 방법 외에는 없다.
철컥 철컥 철컥.
제니어스 영지의 주민들은 모두 모일대로 모여 있었다. 그 틈에서 갑옷의 마찰음이 조용히 울리고 있었다. 낡을 대로 낡아 어설픈 갑옷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갑옷의 가슴 한 구석에는 푸른 매의 형상이 그려져 있었다.
“충!”
열 명의 기사에게 군례를 받으며 걸음을 옮기는 일레인 남작의 표정에는 비장함 까지 감돌고 있었다. 그 주위로 엉거주춤 서 있는 많은 제니어스의 백성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갈색부터 시작해서 적색 노란색 한마디로 형형색색이었다. 하지만 공통적인 모습은 영지전에 대한 공포였다.
저벅... 저벅
급조된 단상 위로 올라서는 일레인 남작의 심정은 찹찹했다. 고작 500이 될까 말까한 오합지졸들이었다. 거기다. 전쟁에 대한 일말의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밑바탕이 된 자들을 대리고 하는 전쟁은 필패나 다름없었다.
“제니어스의 백성들이여!”
단상의 뒤편에서 느껴지는 강직한 두 줄기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일레인 남작은 아랑곳 하지 않고 소리 높여 입을 열었다. 소리를 증폭해주는 마법사도 없었지만 500이나 되는 백성, 군사, 기사, 용병들이 듣기에는 충분히 큰 목소리였다.
솨아아!
“우린 다 죽었다! 하지만!”
한줄기 바람이 일레인 남작의 말을 전하기 시작했다. 따뜻하게 내려쬐지는 태양과 마음 한 구석을 차갑게 식게 만다는 일레인 남작의 말에 백성들은 웅성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린 지켜야 할 것이 있지 않은가! 비록 펜만 쥔 학자인 내가 검을 쥐는 것처럼, 그대들도 농기구 대신 무기를 쥐어야 하지 않겠나! 우린 지켜야 한다. 소중한 가족을... 살아가야 할 터전을! 그렇지 않은가!”
“.....”
일레인 남작의 말에 모두 입을 굳게 다물어 버렸다. 쓰라린 바람만이 일레인 남작에 동조 할 뿐이다. 너무나 고요한 분위기에 굵은 침을 목으로 넘기며 눈알을 좌우로 굴리고 있었다.
“노예가 되겠느냐!”
일레인 남작의 처참한 말에 백성들의 표정과 기사들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무엇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인가! 지키기 위해서 이곳에 온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노예가 되겠느냐니! 그들의 당황스런 표정을 보며 일레인 남작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여기 모인 이유는 우리 영지와 우리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다.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타인에게 맡길 수는 없다! 무엇 때문에 검을 들었는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다! 안 그런가! 대답하라!”
일레인 남작은 그런 말을 하며 뒤에서 느긋하게 태양광을 쬐고 있는 케실리온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 당당한 기백에 케실리온은 살며시 눈웃음을 쳤다.
“이 터전은 너희들만의 것이다! 너희와 나! 우리의 터전은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을 모르는가!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겠느냐! 가족과 친지들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고만 있을 것인가!”
“.......”
일레인의 음성은 흘러나갔고 공포에 떨던 이들은 자신들의 힘이 약함으로 얼마 전 죽어나간 이들을 기억해냈다. 나약함은 분노로 바뀌었다. 그리고 슬픔으로 다가왔다.
“자! 다시 한 번 묻는다. 터전을 빼앗기고 노예가 되어 하르그에 굴복 할 것인가! 아니면 칼을 쥐고 가족을 지키며 이 땅에서 살아가겠느냐!”
일레인 남작의 대담한 음성에 웅성거림은 더욱 커져만 갔다. 그리고 단상에서 내려오는 일레인 남작의 한마디가 더 쏟아져 나왔다.
“칼을 쥔다면! 공포를 잊는다면! 의지를 가진다면 분명 이길 것이다. 너희의 후손이! 사랑하는 가족이 이 땅에서 살아 갈 것이다!”
한쪽에 있던 기사들은 두 눈에서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병사들과 일반 백성들의 가슴에 불을 지르기에 충분했다. 펜만 굴리던 학자인 일레인이 해낸 일은 커다란 용기를 주었다.
“와아아아!”
“까짓것 한 목숨 후손을 위해 바치겠다!”
한 사람 한사람 각오를 다지듯 엉성한 농기구를 굳건히 잡고 있었다. 그 뒤로 쓸쓸히 등을 돌린 일레인 남작의 두 눈에서는 붉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구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케실리온의 한마디가 그의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충분했다.
“쿠쿡, 군주의 자질은 가지고 있군. 내 몸값은 비싸다.”
“....크윽.”
케실리온의 말에 목이 매인 것인지 일레인 남작은 소리죽여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 뒤로 들리는 자신의 백성들이 지르는 함성에 남작은 펜 대신 검을 굳게 쥐며 하늘로 들어 올렸다.
“영지는 우리 손으로 지킨다!”
“와아아아!!”
사람들은 무언가에 이끌리듯 자신들의 농기구를 들며 기사들의 지시를 받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지전이 발발 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기 때문이다. 어설프게나마 훈련을 해야 했다. 남작의 어깨를 두드려준 케실리온은 단상에서 뛰어 내리며 하늘로 손을 뻗어 올렸다.
“섀도우 웨폰!”
촤르륵!
하늘의 구름에 가려 생겨난 그림자로부터 수십 가지의 병기들이 쏟아져 내렸다. 여행을 하며 산적과 들적, 몬스터들이 사용하는 조잡한 무기라도 그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다. 끝도 없이 쏟아져 내리는 무기들을 보며 미약하지만 사람들에게 희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단시간 내로 최고의 병사로 만들어 주마! 일당백(一當百) 아니! 일기당천(一騎當千)의 병사로!”
케실리온은 하늘에 천명하듯 굳은 의지로 오백이나 되는 인원을 보며 소리쳤다. 지금 이 순간만큼 케실리온은 하나의 인간이 되어 있었다. 무시무시한 마룡이 아닌, 진심으로 무언가를 펼쳐내는 인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