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전쟁(3) - 오백의 전설
쏴아아아아아.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는 가운데 하르그 가문의 기사인 비켄을 선두로 1000여명의 병사들이 제니어스에 인접한 숲속으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게다가, 병사들의 중심부에는 소가 끌고 있는 물자수례가 ‘덜컹덜컹’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앞으로 전진 하고 있었다.
뚝... 뚝뚝!
하늘위로 찌를 듯이 올라선 나무들은 자연적인 우산을 만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독이 된 듯이 작은 물방울들이 나뭇잎을 타면서 굵게 변해 병사들의 가죽갑옷위로 굵게 떨어졌다. 스며든 물방울은 체인메일을 차갑게 식게 만들었다.
무겁게 떨어져 내리는 갑옷의 무거움과 불규칙적인 소음을 만들어내는 물방울은 병사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바스락...!
“뭐, 뭐야!?”
“쉿!”
비켄이 이끄는 본대보다 앞으로 나와 척후를 살피던 한 병사가 눈을 빛내며 소리를 내었던 다른 병사의 입을 침묵시켰다. 소리가 난 방향을 살피는 그 병사의 눈에는 노련함이 묻어져 나왔고, 마찬가지로 안정을 되찾은 다른 병사 역시 소리가 난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부스럭!
“누구냐!”
다시금 숲속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척후를 살피던 두 병사는 손도끼를 조심스럽게 겨누며 위협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부스럭!
“....뭐야.”
“휴... 토끼였잖아.”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것은 토끼 한 마리였다. 봄비가 내리는 때에 나타난 것이 의심스러웠지만 적병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 뱉은 두 명의 병사는 겨누었던 손도끼를 내려놓으며 눈가로 흐르는 빗물을 훑어 냈다.
“끼우...”
토끼는 병사들을 눈앞에 두고 수풀에서 웅크린 채 도망갈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심지어 제자리에 털썩 주저 않은 것이었다. 그 모습에 병사들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횡재했다는 듯이 손도끼를 어루만졌다.
“다리를 다쳤나 보네, 이거 횡제다.”
“척후병도 좋은 점이 있었군.”
저벅저벅.
“끼우...”
번들거리는 눈빛을 빛내며 다아고는 병사를 보며 토끼는 다친 다리를 내 저으며 버둥거렸다. 그리고 구슬픈 음성을 뱉어내었다. 그 슬픈 소리에도 두 병사의 동정심을 사로 잡지 못했다.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척후를 위해 선발대 보다 앞서 가야했기 때문에 식사를 할 형편이 되지 못한 것이다.
“이거 맛있겠는데? 그런데 희한하군... 다리가 잘려있다?! 어이! 이리...”
결국 토끼의 코앞까지 당도한 병사가 토끼를 집어 들었다. 축 늘어지는 귀를 시작으로 토끼의 몸통을 쳐다보던 병사는 기어코 토끼의 다친 다리까지 시선이 내려갔다.
스각!
툭!
동료 병사를 부르던 병사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고, 어색한 소음을 내며 병사의 머리통만이 허공을 날아 바닥에 떨어졌다. 죽기 전까지 아무런 느낌도 없었는지 바닥을 구르는 머리통에서는 의혹과 의문만이 남아 있었다. 순식간에 당해 버린 것이다.
잠시후 남은 병사의 비명이 숲속을 울리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스마트!”
퍽!
몸과 머리가 양분된 시체를 밟아 넘긴 일단의 무리는 효과적으로 남은 병사의 목을 치며 기절 시켰다. 그리고 고깃덩어리로 변해 버린 스마트라는 병사는 뜨겁던 육신은 봄비를 맞으며 천천히 식어갔다. 그리고 수풀 속에서 몸을 드러낸 것은 제니어스에서 출정한 실버 울프였다.
“저 시체를 수습하고, 다른 병사를 깨워라.”
“예! 단장!”
로이젠의 명령에 동태를 살피던 한 용병이 기절한 하르그 병사의 등을 향해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그 순간 놀랍게도 기절했던 병사가 두 눈을 파르르 떨며 뒤척였다. 30분쯤 기절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병사가 눈을 뜨자 로이젠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정신차리고 있는 병사의 앞에 섰다.
척!
“병력은? 이동 방향은? 물자의 위치는?”
“아... 아아..”
로이젠의 단도직입 적인 질문에 어안이 벙벙한 병사는 두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구석진 곳으로 질질 끌려가는 동료의 시신이 눈에 들어오자 얼굴이 새파래지기 시작했다.
“사, 살려줘! 살려줘!”
“묻는 말에 답하라. 병력과 이동 방향, 전쟁물자의 위치는?”
“살려줘...!”
“죽고 싶나!”
‘챙!’거리는 소리와 함께 로이젠의 허리에서 뽑힌 바스타드 소드가 병사의 목으로 향했다. 찰나의 순간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에 두려움에 떨던 병사의 가랑이에서는 누런 액체와 함께 뿌연 연기를 만들어냈다.
“정보의 가치에 따라 목숨이 달렸다.”
“꿀꺽...!”
서슬 퍼런 눈빛과 진심어린 말투 때문이었을 까? 미쳐버린 것처럼 보이던 병사는 두서없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비켄 기사님을 중심으로 1000여명의 병사를 대동해... 제, 제니어스로 향하는 중입니다.. 제, 제발...!”
“물자는 어디 있나!”
“가, 가장 후방에...”
로이젠은 잠시 생각 하는 표정을 짓더니 헬씨에게 됐다는 눈빛을 보냈다. 사로잡힌 병사는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머리를 투레질 쳤지만 이미 소용없는 짓이다.
“적병 따위가!”
“저, 정보를 줬잖소! 뭔가 잘못된 게!”
“죽어라!”
쉐에엑!
“크아아아!”
헬씨의 검이 병사를 베어 버리는 순간 병사의 입에서 울리는 기성이 숲에 울려 퍼졌다. 마치 화답하듯 메아리가 되어 돌아온 비명은 스산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하르그의 선발 부대에서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전군 정지!!”
선두 쪽으로 정탐을 나갔던 척후들의 비명이 울려오는 소리는 병사들의 귀로 뚜렷하게 들려왔다. 동요하는 병사들의 모습과는 달리 기사인 비켄은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긴장할 것 없다! 기본대형을 유지하고 검을 뽑아라! 서둘러!”
“예!”
비켄을 중심으로 명령이 퍼지기 시작했다. 각자 무기를 꺼내든 병사들은 긴장된 표정을 지우며 천천히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비켄의 밑으로 직접 명령을 받는 백인장들은 후임병사들을 독려했다.
전쟁에 익숙한 남부지역의 병사들인 만큼 긴장감을 털어버리고 순식간에 방어진을 형성했다.
“거기 너! 척후를 살피고 오라!”
“아이고 기사님, 지금 척후라니요! 희생만 생길 따름입니다. 차라리 이대로 방어진을 형성하며 천천히 전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닥쳐라! 고작 백인장 주제에!”
기사의 왼편에 대기하고 있던 백인장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말했지만 자존심 드높은 귀족에겐 들어올 리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백인장은 부하 한명을 선별해 앞으로 척후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전쟁에서 가장 희생이 따르는 것은 병사들이다. 거기다, 백인장들의 의견을 무시하면서까지 명령을 내리는 귀족에 의해 피해를 보는 것이었다. 때문에 가장 피해를 입는 것이 백인장들이다. 후임의 죽음을 알면서도 보내는 기분을 누가 알까?
“적이 코앞에 있다. 어디에 있는지 눈으로 확인하는 즉시 귀환하도록.”
“예, 백인장!”
젊은 병사가 전방을 향해 뛰어나가는 것으로 백인장은 소임을 다했다. 뒤에서 명령을 내리는 기사 비켄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던 백인장은 멀리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정신이 번쩍드는 것을 느꼈다.
“비켄님! 적입니다.”
“알고 있다. 칫! 궁수대 앞으로!”
처척!
비켄의 목소리가 울리자 넓게 포진해 둘러싼 병사들이 제자리에서 몸을 낮추어 궁수들의 시야를 확보 해 주었다. 일반 병사들의 행동에 사위를 당긴 궁수들은 긴장된 표정으로 기사와 백인장의 명령을 기다렸다.
부스럭!
부스럭 부스럭!
“궁수대! 조준!”
기사 비켄의 얼굴에 심각함이 번져나갔다. 포위당한 것 같았다. 찰나의 순간에 포위당했다는 것을 눈치 챈 백인장의 능수능란한 지휘에 궁수들은 사위를 당기며 경계를 했다.
“도끼를 던져라! 실버 울프!”
“헉! 궁수들은 일제히 쏴라! 각자 조준이다!”
거친 음성이 수풀을 뚫고 들려오자, 백인장은 헛바람을 삼키며 활시위를 놓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팽팽히 당겨져있던 활은 각자 목표를 찾아 사선을 스리며 날아가기 시작했다.
솨아아악!
퍼퍼퍽!
퉁!
투투퉁!
“크아아아!”
손도끼와 활이 교차한 순간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실버 울프가 던진 오십에 이르는 손도끼는 정확하게 화살을 쏜 자들의 미간에 틀어박혀 있었다. 조준을 하고 있던 궁수들은 갑자기 날아오는 도끼에 의해 절명해 버렸고 사위에 걸쳐 있던 화살은 엉뚱한 방향으로 날아가 버렸다.
10미터도 채 되지 않은 거리였기 때문에 화살은 실버 울프를 맞추기는커녕 뒤로 넘어가 버렸다. 사거리를 계산하지 못한 탓이다.
퍼퍽! 퍼퍼퍽!
“실버 울프 돌진이다! 검을 뽑아라! 돌진!”
“제, 젠장! 계속 쏴라! 병사들은 검을 뽑고 녀석들을 막아라!”
하르그 병사들의 비명과 괴성과 빗소리, 그리고 기사의 명령들이 숲의 허공에서 뒤섞인 가운데 실버 울프들은 양을 유린하듯 날뛰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내 팔!!”
“궁수는 뒤로 빠져라! 창과 검을 들어라! 방패병은 적을 막아라!”
순식간에 진지를 점령당한 하르그의 병사들은 우왕좌왕 할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공포를 잊으려는 지 아니면 마음속에서 웅얼거리는 용기를 표출하는 것인지 방패병과 창병 등 여러 병사들의 목소리가 제니어스와 하르그의 경계선인 숲을 뒤흔들었다.
“단장! 수뇌를 찾으시오!”
“일단 적병의 수를 줄여라!”
실버 울프들의 짧은 대화가 오고갔고 로이젠은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하르그의 수뇌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다.
“하아압!”
“창병 거어어창!!! 방패병은 창병을 보호하라!”
“크아아아!”
갖가지 괴성이 오고갔다. 방패병과 창병의 기합소리와 아군이 지르는 비명의 격돌!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콰콰콱!
“아악!”
두 무리가 부딪치자 실버 울프는 약간 주춤 거렸다. 수적으로 밀린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익스퍼트에 달한 고수들이다. 더군다나 로이젠은 마스터 급의 검사다. 아무튼, 두 무리의 돌진에 밀려 쓰러지는 방패병의 비명이 울렸고, 그 이전에 창에 피부를 베인 실버 울프의 비명이 뒤늦게 터져 나왔다. 심한 상처는 없었지만 피부로 느껴지는 고통은 참을 수가 없는 모양이다.
“적은 소수다! 대열을 흐트러뜨리지 마라! 적은 소수다! 수뇌만 처리하면 끝이다!”
캉
“무, 무슨! 일개 병사 따위가!”
병사를 독려하던 기사 비켄은 달려드는 실버 울프의 용병을 보며 검을 휘둘렀다. 머리통을 베어 버렸다고 생각했던 용병의 미소에 당황한 비켄은 자신의 손목으로 전해지는 떨림을 느꼈다.
비켄은 익스퍼트급의 기사다. 그런데 고작 일개 병사로 보이는 용병에게 검이 막혀 버렸으니 얼마나 황당할까? 그는 푸르른 빛의 마나를 검에 씌우며 주위를 살폈다.
“크아아!”
“젠장!”
대열이 흐트러지는 가운데 주춤거리던 침입자들이 거세게 몰아치고 있었다. 기사 비켄은 대등하게 검을 휘두르는 침입자를 피해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지금의 최선책은 후퇴뿐이라는 것을 한탄해야만 했다.
“전군! 후퇴! 후퇴!!”
“퇴각이다! 퇴각하라!”
고개를 돌려 병사를 지위하고 있는 백인장을 보며 퇴각을 명했다. 하지만 퇴각 명령은 끝을 맺지 못했다.
“네놈이 이곳의 수장인가? 난 제니어스에 고용된 실버 울프의 단장 로이젠이다. 순순히 목을 내놔라!”
뒤쪽에서 걸어오는 50여명의 무리가 로이젠의 뒤로 늘어졌다. 이미 뒤쪽은 모두 정리 된 것인지 부들부들 떨며 검을 쥐고 있는 하르그의 병사들은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그 무시무시한 살기와 기백에 하르그의 병사들을 공포에 잠기게 만들었다.
“비, 빌어먹을!”
꼬여가는 상황에 기사 비켄의 입에선 욕설이 튀어나왔다. 고작 오십 명에게 당했다는 생각에 두려움 보다 치욕이 앞선 것이다. 병사들의 주춤거림을 뒤로하고 로이젠의 스산한 음성이 비켄의 귓가에 울렸다.
“물자와 그 목을 내놔라.”
남부전쟁(3) - 오백의 전설
두려웠다. 도망치고 싶었다. 눈에서 뿜어지는 살기(殺氣)!
죽음과 공포의 끝을 본 자만이 가지는 사자(死者)의 눈이었다. 비켄은 제니어스 남작가에서 봤던 소년을 떠올렸다. 죽음을 부르는 눈동자가 재현된 것 같았다.
두벅... 두벅!
그의 일보에 비켄은 오금을 저려야 했다. 아무리 기습이었지만 1000여명에 이르는 하르그의 병사를 제압하는 실력이라면,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자신의 목숨이 좌지우지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목숨을 원하고 있었다.
꿀꺽!
비켄은 마름 침을 삼키며 뽑혀 있는 롱 소드를 움켜쥐며 정면을 향해 거칠게 자세를 잡았다. 이대로 당할 바에는 기사답게 싸우다 죽을 것을 각오하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사내를 조심스럽게 쳐다봤다.
“누, 누구냐!”
비켄은 두려움이 일렁였지만 호기롭게 외쳤다. 비록 상대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세와 주위에 포진한 오십의 무리가 내뿜는 기백에 무릎이라고 꿇고 싶었지만 이대로 물러 설수는 없는 노릇이다.
“난 하르그의 기사 비켄이다. 넌 누구냐!”
“하하! 실버 울프의 로이젠이다. 순순히 목을 내놔라!”
주춤
로이젠의 기백에 기사 비켄은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었지만 50명의 무리들이 내뿜는 기세는 어떤 군대보다도 위협적이었기에 그것으로 자신을 위안했다.
“나 기사 비켄! 실버 울프의 로이젠, 그대에게 명예로운 결투를 신청하오!”
“결투? 하하하! 지금부터 일어날 일은 그저 학살이다! 웃기지마라!”
로이젠의 싸늘한 말에 실버 울프들은 흥분된 기색으로 지축을 밟았다. 고작 50명의 인간이 낸 소리라고는 믿기지 않는 소리였다. 땅이 울린다!
쿵쿵쿵! 쿵쿵!
“약자인 너희들은... 그저 약탈의 대상!”
로이젠의 손동작 하나에 모든 실버 울프들은 거짓말처럼 발 구름을 멈췄다. 진동하던 지축도 멈춰 섰다. 오직 멈추지 않은 것은 두려움에 떠는 하르그의 병사들이다. 1천의 병력이 고작 오십의 무리 앞에서 벌벌 떨고 있다.
“가, 감히! 명예로운 결투 앞에서...!”
“전쟁이다. 어리석은 기사여! 하지만, 그것도 재미있겠군!”
로이젠은 실버 울프들에게 뒤로 물러나가는 지시를 내렸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들었다는 듯이 물러나는 실버 울프였지만, 헬씨는 마음에 들지 않은지 단장인 로이젠에게 항의를 했다.
“단장! 그냥 쓸어버립시다. 어차피 이긴 싸움이 아니오!”
“헬씨, 뒤로 물러나라.”
헬씨의 항의에 로이젠은 미소를 지으며 명령을 내렸다. 시험 해보고 싶었다. 기사와 용병의 한계를 뛰어넘은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 어쩌면 증명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용병이 기사 보다 약하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흥! 마음대로 하시오!”
“와라!”
촤르륵!
헬씨의 콧방귀가 끝나기 무섭게 로이젠은 전투에 앞서 자세를 잡기 시작했다. 분광도법의 기수식이었다. 좌우로 다리를 벌린 후, 하늘을 향해 비스듬히 바스타드를 세운 로이젠은 덤벼라는 표정으로 비켄을 노려봤다.
비켄은 살짝 긴장된 표정을 지으며 검에 오러를 덧씌웠다. 그것은 기사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경지다. 익스퍼트의 경지를 증명하듯 푸른 오러가 일렁이며 로이젠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우웅!
비켄의 검이 요란하게 공명음을 토해내며 찔러 들어왔다. 하지만, 로이젠은 코웃음만 칠뿐이었다. 고작 이딴 검은 케실리온의 쾌검에 비해 느렸으며 검의 무거움도 가지지 못한 조잡한 검술일 뿐이다.
“어리석은...!”
챙!
로이젠은 옆으로 삼재보를 밟았다. 우측으로 피한 로이젠은 그대로 바스타드를 내려치며 비켄의 검을 막아버렸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느린 검에 맞을 정도로 나약하지 않았다. 무엇 때문에 죽을 작정을 하고 수련을 했던가! 강자가 되기 위해!
“기사가 고작 이딴 경지였던가!”
로이젠은 분노의 일갈을 터뜨렸다. 고작 기사가 펼쳐 내는 수법은 이 정도에 불과했다. 어린아이가 휘두르는 수법에 골골 거렸던 자신의 과거가 떠오르자 수치심보다는 분노가 터져 나왔다. 비웃음거리가 되고도 남았다.
고작 저딴 경지에 안주하며 케실리온에게 반항했던 자신이 수치스러워졌다. 그리고 떠올랐다. 케실리온이 처음으로 했던 말이...
‘네가 알고 있는 어설픈 기술은 모두 잊어라.’
지금에서야 공감할 수 있었다. 케실리온에게는 어설픈 기술에 불과했다. 어린아이가 휘두르는 검술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어설픈 기술!
“어리석은... 루인소드!”
로이젠은 분광도법의 첫 번째 초식인 루인소드가 펼쳐졌다. 긴 바스타드에 붉은 오러소드가 맺히자 비켄은 얼굴을 타고 흐르는 땀을 훔칠 세도 없이 몸을 날려 로이젠의 검을 피해야 했다. 검과 검이 부딪힌 것도 아니었다. 그저 도망가야 했다.
‘저 검에 닿는 순간... 죽는 다.’
비켄이 느낀 감정은 그것이었다. 붉은 오러가 맺힌 검에 닫는 순간 반드시 죽을 것만 같았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로이젠의 살기에 압도당한 비켄은 그저 검을 피해 몸을 날리는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것인지도 몰랐다. 루인소드의 진실 된 초식명은 필취파멸도(必取破滅刀)다. 뜻은 반드시 적의 목숨을 취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만큼 무시무시한 초식이다. 단순하지만, 위협적인 초식을 처음 보는 비켄으로 써는 속수무책이다.
“하하하! 기사라는 작자가 도망만 치다니! 대륙의 모든 기사는 그러한가! 개만도 못한 자식... 크하하하!”
“기사를... 모독하지 마라!”
챙!
도망만 치던 비켄은 분노의 일갈을 터뜨리며 로이젠의 검에 마주섰다. 두 눈에 떠오른 분노의 살기에 로이젠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모독? 그건 강자만이 가질 수 있는 단어다. 약자 따위가 입에 담을 말이 아니다! 그건 나를 모독하는 행위! 그리고 그분을 모독하는 행위다!”
분광도법(分鑛刀法) 2초 블러드 라이트닝(Blood Lightning)!
분광도법의 마지막 초식 분뢰우혈도(分雷雨血刀)였다. 섬전과도 같은 쾌도와 패검이 어우러진 최상의 도법(刀法)이다. 하물며, 케실리온에게 배운 숨 쉬는 방법을 이용해 기운을 인도한다면 블러드 라이트닝을 조절하는 것도 문제없었다.
번쩍!
섬전(閃電)이 터졌다. 노란 불꽃이 튀듯 하늘에서 떨어지는 번개에 하르그의 기사 비켄은 두 눈을 부릅떠야했다. 도저히 피할 곳이 없었다. 128개의 검영(劍影)이 펼쳐졌다. 사방을 넘어 팔방을 점한 로이젠의 검은 멍하니 검을 들고 있는 비켄의 목과 가슴, 몸통등, 있는 사혈 없는 사혈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이것이 분뢰우혈도다. 128개의 검영 속에 섞인 실초와 허초가 어우러져 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분뢰우혈도다. 거기다. 번개와 같이 빠르다 하여 분뢰라 하였으며 패도적이며 적을 베었을 때, 주위가 피의 비가 내린다 하여 우혈이라는 뜻이 붙여진 초식이다.
그에 걸맞게 하늘은 봄비와 어우러진 피의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 참혹한 광경을 눈앞에서 목도한 하르그의 병사들은 몸을 부들부들 떨며 뒷걸음질 치는 것이 다였다. 그때, 공포의 주인공인 로이젠이 하늘에 천명(天命)하듯 실버 울프에게 외쳤다.
“빼앗아라! 취하라! 강자들이여... 약자의 모든 것을 취하라!”
“단장의 명에 따릅니다!”
팟!
로이젠의 명에 따라 50명의 실버 울프들은 신형을 날렸다. 더 이상 과거의 실버 울프가 아니었다. 그들은 강자들이다. 마음만이 아닌! 무력으로써 강한 용병들이다.
“사, 살려줘... 살려... 컥!”
스각!
“소용없다! 약자의 것은 모두 빼앗아라!”
목이 잘렸으며, 몸통이 뒹굴었다. 그리고 피의 비가 쏟아졌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살육과 강자와 약자간의 정경이 이어지며 실버 울프들의 살육은 계속 이어졌다. 그 애달픈 싸움을 애도(哀悼)하듯 봄의 하늘은 끝도 없이 울고 있었다.
쏴아아아!
“으어어... 나, 난 기다리는 가족이...!”
촥!
쏟아지는 봄비의 한구석 싸늘한 눈동자를 굴리는 로이젠은 마지막으로 하르그의 병사를 베어버리며 바스타드를 검지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끝도 없이 쏟아지는 봄비의 근원인 하늘을 보며 대소를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하하하하! 빼앗기기 전에 먼저 취하면 될 것이 아닌가! 당하기 전에 강해지면 될 것이 아닌가! 약자의 변명 따위 듣지 않겠다! 그것이 그분의 가르침!”
우르르... 쾅쾅!
노란 번개가 떨어지자 용병들은 약간 움츠려든 표정을 지으며 로이젠에게 다가섰다.
“도망간 자들을 제외한 모든 병사들을 주살했습니다.”
“도망...? 뭐 상관없지.. 우리의 임무는 물자의 탈취니까! 돌아간다.”
로이젠은 질퍽하게 밟히는 붉은 피를 보며 무표정하게 행보를 틀었다. 그 뒤로 늘어진 10대의 마차에는 제니어스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가 들어 있었다. 끝도 없이 쏟아지는 비의 향연에 실버 울프들은 약간 울적한 기분에 접어들어야 했다.
마음은 통쾌했다. 웃고 싶었다.
하지만... 어딘가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만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강해진 만큼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은 느낌. 이것이 힘의 등가교환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