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9화 (209/269)

남부전쟁(3) - 오백의 전설

“총사령관님! 피해가 막심합니다. 후퇴수용을...!”

헤르세인 남작의 옆에 있던 부관이 전쟁의 흐름과 아군의 진형으로 뛰어드는 제니어스의 무리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애초에 숫자로 밀어 붙이려던 것이 오산이었던지, 제니어스의 저력이 만만치 않았다.

“지금이라도 후퇴하셔서, 전력을 제 정비 하시는 것을 요청합니다.”

“닥쳐라 부관. 전쟁을 뭐라고 생각하나! 승기를 반드시 이끌어 승리로 향하는 것이 전쟁이야!”

부관의 말에 헤르세인 남작은 화를 불같이 내며, 입을 열어 후퇴를 요청하는 부관을 쏘아봤다. 그의 옆에는 흑마법사 조안이 입가에 약간의 선혈을 내비치며 하늘로 들어오는 케실리온과 알파를 노려봤다.

점점 수세에 몰려가는 전쟁의 흐름에 부관의 판단은 모두 옳았지만, 헤르세인 남작은 흑마법사와 언데드의 저력을 믿고 전쟁을 종용했다.

“조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그냥 이긴 싸움이 아니었소?!”

“....저들은 모두 익스퍼트급의 기사요! 마스터급도 섞여 있는 기사란 말이오!”

흑마법사 조안은 남작의 말에 불쾌감과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감히 누구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솔직히 조안이 마음만 먹는 다면, 남작은 한순간 썩어 문드러진 시체가 될 것이다.

“그, 그럼! 저들이 모두...”

조안의 말에 헤르세인은 허탈한 표정과 어이없음,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기사 급의 인물들이라고는 하나, 2만에 육박하는 병력을 상대 할 수는 없다. 마치 잘 짜인 각본처럼,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그들은 예술에 가까웠다. 

좌측을 노릴 나치면 그들도 좌측으로 병력을 밀집시켜 수많은 병력을 막아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냥 막아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아군을 죽인다는 것이다. 일말의 마나도 사용하지 않는 그들이 경외롭기까지했다. 마나도 사용하지 않는 그들이 모두 익스퍼트급의 기사라는 말은 충격에 가까웠다.

[항복을 권고한다! 하르그의 병사들이여!]

헤르세인 남작은 그들의 무용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허공에서 들려오는 함성 같은 일갈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총 두 명이었다. 한명은 은빛이 감도는 은발을 하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파란색의 하늘거리는 머리칼을 소유하고 있었다.

둘 다 공통점이 있다면, 검은색의 바탕의 옷을 걸쳤으며, 가슴에는 역십자가의 문양의 쇳조각이 매달려 있었다. 특히 눈여겨 볼만한 것은, 이 대륙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구조의 옷이다. 움직임이 불편함이 없는 구조로 이루어진 옷이었다.

케실리온과 알파가 입고 있는 것은 지옥에서나 즐겨 입던 흑룡의(黑龍衣)였다. 가슴을 제외한 곳곳에 드래곤이 할퀸 듯 은은한 은빛의 실이 수를 놓아 용의 무늬가 그려져 있다. 2계의 용이 아닌, 지옥과 3계인 중원의 용이었다.

“하, 항복?!”

헤르세인 남작은 갑작스런 항복권고에 어안이 벙벙했다. 감히 적진에서 저런 망발을 하는 존재가 심히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옆에는 무려 8서클에 이르는 흑마법사가 존재한다.

“조안, 저들을 어떻게 해 보시오. 감히 이곳에서 항복권고라니!”

“.....”

조안은 말이 없어졌다. 남작의 말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한줄기 살기를 줄기줄기 내뿜으며, 다크 배리어를 뚫고 지상으로 떨어지는 케실리온을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모아둔 제물을 주시오.”

꿀꺽...

“진심이오?! 그걸 불러내겠다는 것이.”

“잔말 말고 제물이나 달란 말이오!”

조안은 불안과 초조한 눈빛으로 제물을 요구했다. 드디어 때가 온 것이라고 직감했다. 자신에게 치욕을 준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다. 은발의 소년! 두 차례나 자신의 소환술이 먹히지 않은 것은 충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를 것이다.

남작은 조안의 짜증에 군말 없이 500명에 이르는 산처녀를 끌고 왔다. 줄과 줄이 연결되어 있었기에 도망은 있을 수 없었다.

부들부들

500명의 여자들은 두려운 듯 부들부들 떨면서도 병사들의 지시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지시를 따라야 살수 있다는 것을 머리보다는 몸으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망은 곧 구타로 이어졌으니, 도망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남작! 시간을 벌어 주시오!”

“아, 알았소.”

흑마법사의 말에 남작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안 그래도 저 멀리 은발의 존재가 무시무시한 살기를 내뿜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기댈 수 있는 곳은 흑마법사 조안뿐이었다. 

“명을 내리겠다! 지금부터 이곳으로 누구도 발걸음을 하지 못하게 막아라!”

남작의 말은 일파만파 퍼졌다. 그의 명 한마디에 하르그의 병사들은 화살에 활을 제며, 창과 방패를 굳게 쥐며 눈앞의 은발을 향해 겨누었다. 조금이라도 접근한다면 공격하겠다는 의사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내심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병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비록, 두려움에 질려 있었지만, 실낱같은 희망이 이곳을 지키는 곳에 있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하르그의 입장에서는 은발의 존재는 마왕과 같았다.

“그렇게 나와야지 재미있겠지.”

하늘에서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던 케실리온은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500명의 여자를 어디에 쓸지는 몰랐지만, 대단한 일을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앞을 사수하기 위해 병사들의 처절한 몸짓을 보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다.

약자를 조롱하는 강자의 기분. 짓누르며 그 모습을 감상하는 것은 오직 강자만의 특권이다. 케실리온의 옆에 있는 알파는 무표정한 얼굴로 빨리 이 귀찮은 전쟁이 끝났으면 하는 것 같은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휘이잉!

한줄기 바람이 몰아치자 케실리온의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잠시 눈을 지그시 감은 케실리온은 바람을 느끼겠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감상에 젖어 들었다. 그리고 바람이 멈추자 당연하다는 듯이 케실리온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눈을 번쩍 떴다.

“항복권고를 무시했다. 지금부터 있는 일은... 학살(虐殺)이다.”

“네, 케실리온님!”

알파는 케실리온의 말에 힘차게 대답했다. 나날이 변해가는 케실리온의 모습에 알파는 약간 흔들리는 눈을 했지만, 미소를 지으며 블러드 네일를 뽑아 올렸다. 뱀파이어의 공격 기술은 블러드 네일로 시작하고, 블러드 네일로 끝을 본다.

기초이면서도 고급기술인 블러드 네일은 알파에게는 어떤 무기보다도 가장 몸에 맞는 무기인 동시에 방어수단이다. 그렇게 블러드 네일은 순식간에 보통 검에 보다는 반도 되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변했다. 약 40센티미터 정도의 크기로 알맞았다.

“너의 성취도 보겠다. 실망시키지 마라.”

“예!”

케실리온은 그 말을 끝으로 지상으로 빠르게 신형을 날렸다. 공기를 박차듯 짧게 내치고는 지상으로 떨어지는 케실리온의 뒤를 따라 알파 역시 허공을 박차며 지상으로 내려섰다. 적진의 중앙으로 떨어졌기에 때문에 알파는 쉴 세도 없이 블러드 네일을 휘둘러야 했다.

촤라라라락-!

불꽃의 향연처럼 붉은 피가 하늘로 치솟았다. 다섯 줄기의 기다란 상흔을 뒤로 하고 넘어지는 짚단처럼 하르그의 병사들은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알파의 깔끔한 수법에 당해버렸다. 여자라고 무시하고 있던 병사들은 긴장의 도가니에 빠져들었다.

주위에 포진해 있는 숫자로 보나, 상황으로 보나 모든 것이 불리해 보였지만, 알파의 존재는 양떼속의 늑대와 같았다. 그들은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며 긴장에 얼룩진 땀방울을 대지에 적실뿐이다.

촤라락... 착! 서걱!

알파의 유연한 몸과 케실리온에게 배운 천마소수는 끊어짐이 없이 적을 베고 또 베었다. 변화무쌍(變化無雙)의 극을 보여주는 듯 알파의 몸짓 하나하나가 예술로 승화되었다. 감히 적은 접근조차 하지 못하고 방어를 위해 죽어나갈 뿐이다.

“이... 이이! 하르그의 병사들이여! 적은 단 둘이다. 궁수는 저 둘을 향해 집중사격을 하라!”

힘한번 써보지 못하고 죽어나가는 병력을 보고 있던 하르그의 남작은 이가 갈리는 소리를 하며, 대기하고 있는 궁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같은 아군이 있었기 때문에 약간 주춤 거렸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자신들이 당한다는 생각에 군말없이 활시위를 놓았다.

푸슝! 슈슈슈슉!

일제히 알파와 케실리온을 향해 쏘아진 화살들은 공기를 가르며 내는 파공음을 토해내며, 알파에게로 날아들었다. 알파는 뱀파이어의 특성상 공기의 매질로 들려오는 파장을 느끼며, 왼쪽의 블러드 네일과 오른족의 블러드 네일을 교차시키며 쉴 새 없이 손을 움직였다.

그것은 일종의 검막과 같은 효과를 내고 있었기 때문에 화살은 그녀의 몸에 접근하기도 전에 허공에서 튕겨나가야 했다. 그 기묘한 수법에 궁수들은 재차 화살을 날렸지만 허사에 불과했다.

티티팅!

“흥! 블러드 와일드(Blood Wild)!”

알파는 코웃음을 치고는 블러드 와일드를 펼쳤다. 이것은 알파가 발견한 그녀만의 절기였다. 이것을 보며 케실리온이 창안한 혈우가 있을 정도로 대단한 수법의 기술이었다. 비록 다량의 마기가 소모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케실리온의 지도로 단점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었다.

스믈스믈!

케실리온이 그녀의 단점을 보완시키기 위해 흡혈마공의 수법 중 피를 불러들이는 흡인(吸引 : 끌어들이다)의 수법을 감이했기 때문에 대지에 떨어진 인간들의 피 속에 들어 있는 미량의 마나를 이용해 블러드 와일드를 펼치게끔 했다.

물론, 그에 따른 패널티가 있었지만 그렇게 신경 쓸 정도의 패널티는 아니었다. 케실리온의 흡혈마공을 보는 듯이 알파의 주위는 자신이 베어 넘긴 적들의 피가 꾸물거리며 몰려들었다. 그리고 알파의 두 눈동자가 파란색에서 차가운 은빛으로 변하며 동공이 좌우로 갈라졌다.

케실리온이 두 번째로 가르친 것은 살기를 이용해 몸의 한계를 끌어 올리는 광살마검을 이용해 알파의 육신을 강화시키는 것이었다. 때문에 알파의 눈동자는 케실리온과 같은 은빛으로 변했고, 육체 곳곳에는 기이할 정도로 핏줄이 솟아올라 있었다.

흉측한 모습으로 보여 졌지만, 핏줄 때문에 흉측 할뿐 외관상으로는 변화가 없었다. 아무튼 케실리온에게 배운 이 두 가지 방법을 통해 블러드 와일드는 거의 완벽한 기술로 탈바꿈 할 수 있었다.

휘우웅!

그 피들은 하늘로 상승하며 압축되어 갔다. 마치 구름이 만들어지듯 하늘로 치솟으며 하나의 구체로 변했다. 축구공정도의 크기로 변한 블러드 와일드는 알파의 의지를 따르듯 조용히... 고요하게 떠올랐다.

2미터 가량 떠올랐던 블러드 와일드는 알파의 손바닥위에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잠시후 10개의 구슬로 변하며 각각의 손가락의 끝에 솟아 있는 블러드 네일의 끝으로 이동했다. 블러드 와일드를 펼쳐낸 시간은 고작 30초가량 소비했기 때문에 적들의 움직임은 다소 긴장과 공격 준비로 갈려 있었다.

“방심하고 있다! 지금이다. 쏴라!”

촤라라라!

“어림없는 소리!”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화살들은 일제히 하늘로 치솟았다. 때마침 알파의 기술도 완성되었기 때문에 전방을 향해 쏘아졌다. 두 가지의 공격이 서로를 교차하는 순간 알파의 표정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크쾅!! 과과쾅!

10개의 마기탄들은 하르그의 적진에 밀집되어 있는 적병들에게로 떨어졌다. 작은 구슬에 불과했지만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마치 융단폭격을 맞은 듯 곳곳에 크리에이터가 생겨나 있었으며, 그곳에는 병사들의 피가 고여 웅덩이가 져 있었다.

쉐에에엑!

알파는 자신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어딘가에서 날아온 화살이 그녀의 기감에 잡혔다. 막기에는 늦은 듯 옆구리를 파고들어오는 섬뜩한 기운에 알파는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계산 착오였다.

큰 기술을 사용한 만큼 방어에 허술해진다는 케실리온의 말을 잊어버린 것이다. 항시 긴장하며, 준비해야 진정한 강자로 거듭난다는 말을 잊은 적 없었던 알파의 단순한 실수였다. 그러나 그 작은 실수는 치명적일 것이다. 단순한 인간 병사의 화살이지만, 뱀파이어도 살과 뼈로 이루어진 생명체일 뿐이다. 생각하며, 두발로 걷고 피가 흐르는 지극히 평범한 존재다.

팟!

순간 알파는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편안한 느낌에 정신이 없었다. 분명 화살이 닿기 직전 눈을 감아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뾰족하고 날카로운 것이 몸속을 침범 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부드럽고 따뜻한 체온이 느껴지자 안도감이 떠올랐다.

알파의 시선이 약간 허공으로 떠오르자, 앞을 노려보며 살기를 줄기줄기 뿌리고 있는 케실리온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어디선가 느껴지는 또 다른 강한 기운에 알파는 몸을 떨어야 했다. 하지만, 케실리온의 말에 얼굴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넌 내소유물이다. 내 허락 없이는 죽지도 다치지도 마라. 알파.”

“....네.”

자칫 케실리온의 발언은 자신을 노예로 본다는 것일 수도 있지만,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알파의 머릿속에는 아까전의 안 좋은 기억을 잊었다는 듯이 케실리온의 말을 곱씹으며 얼굴을 붉히고 있을 뿐이었다.

“대단한걸 보여줄 모양이군. 소환마법은 모르지만, 저 마법진.. 소환진이다.”

케실리온의 품에 안겨 있던 알파를 내려주며 허공에 떠오른 커다란 이중원 안의 8망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는 재물을 상징하는 피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고, 북쪽과 남쪽, 서쪽과 동쪽을 가리키는 4방진이 그려져 있었다. 이건 명백한 소환진을 의미하고 있었다. 거기다 단순히 열린 소환진의 입구에서 뿜어지는 무시무시한 살기와 마기는 케실리온을 즐겁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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