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전쟁(3) - 오백의 전설
북쪽에서 바람이 몰아친다. 너무나 따갑고 혈향(血香)이 짙은 바람이었다.
휘이잉!
녹음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바람의 향기에 케실리온의 정신을 일깨웠다. 소수마공으로 녀석의 급소라고 생각되는 부위를 난타(亂打)하고 있을 무렵 갑작스럽게 찾아온 정적과 반탄력에 몸을 뒤로 뺀 것을 기억한다.
[후웁! 오랜만의 공기, 감촉 즐거워... 거기 너! 재밌었다.]
찌릿!
짙은 잿빛 피부, 붉게 타오르는 두 눈빛, 어딘가 아픈 듯이 연약하게 자리 잡고 있는 이목구비의 모습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이 약해보였지만,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기세와 살기는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케실리온을 가리키며 오만하게 짖고 있는 그의 목소리!
“재미있었다라... 그럼 끝을 내야지. 이런 시시한 싸움.”
[크하하! 네놈이야 말로 끝이다!]
벨즈비트의 거친 목소리가 대지에 퍼지자, 주위에 멍하니 서 있던 병사들은 급히 뒤로 물러나야 했다. 병약하게 생긴 것 치곤 엄청난 목소리와 살기였다. 단순한 행동하나하나에서 조차, 마기가 발산되니 인간이 버티고 서 있을 정도가 아니었다.
[마음에 안 들어!]
구구구구!
벨즈비트의 음성에 대지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거친 마기의 발산과 함께 하늘과 지상에는 커다란 원소마법진이 생겨났다. 뭔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 케실리온은 뒤로 물러나며, 멍하니 서 있는 알파를 안아 들어 올리고는 하늘로 솟아올랐다.
“제니어스! 후퇴하라!”
케실리온은 마왕의 마기에 긴장하며 사자후를 터뜨렸다. 더 이상 인간의 싸움이 아니다. 후퇴만이 저들이 살 길을 여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울부짖는 케실리온의 심정에 제니어스들은 급히 병력을 뒤로 물리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케, 케실리온님... 북쪽의 마왕은 리치이되 리치가 아니며, 인간이되 인간이 아닙니다. 그는... 진정한 마, 마왕입니다.”
“멀리 물러나 있어라. 알파.”
케실리온은 알파의 말에 표정을 굳히고는 알파를 멀리 내던졌다. 아마, 그녀라면 무사히 멀리 빠질 수 있을 것이다. 방해꾼들이 사라지자, 케실리온은 마음을 다시 잡으며 녀석의 마법을 주시했다.
[어둠의 율법에 따라 나를 따르라,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독, 절망! 빛의 신을 찌르는 어둠의 빙하가 되어, 빛의 섬광을 가르며, 마의 적을 적대시 하리라! 나, 벨즈비트의 적에게 영원한 고통과 절망을 안겨다오! 마왕의 이름으로... 징벌! 다크 퍼니쉬먼트 (Dark Punishment)]
마법으로 마왕을 이룩한 벨즈비트 마저, 긴 캐스팅과 수인을 필요로 하는 마법이다. 왠지 익숙한 마법! 천지를 뒤흔드는 파멸의 마법이다. 다크 퍼니쉬먼트! 감히 누가 사용할 수 있을 까!
“다, 다크 퍼니쉬먼트!”
케실리온은 심히 목소리가 떨렸다. 8서클도 아니었다. 무려 9서클이다. 그것도 최고의 살상력과 범위 공격 마법인 다크 퍼니쉬먼트다. 1계와 명계에서 조차, 별로 사용하지 않았던 궁극의 마법인 만큼 긴장감은 높아졌다.
쿠쿠쿵!
어스퀘이크라도 걸린 듯이 대지가 출렁이다. 하늘은 자연이 미쳤다는 듯이 거대한 기류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축이 되는 중심은 벨즈비트의 손에 의해 장악되었다. 끝도 없이 불어나는 마기의 구체. 그 모습을 보며 케실리온의 머릿속은 차갑게 식어갔다.
[똑똑히 봐라! 나의 위용을! 내가 인간이라고? 웃기지마라! 난 마왕이다. 마계의 절대제왕 벨즈비트란 말이다!]
벨즈비트의 목소리에 케실리온은 마령검을 땅에 박아 넣었다. 이번에는 무공이 아니다. 녀석의 마법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마법뿐이라는 것은 은연중 느끼고 있다. 마법에는 마법이 필요한 것이다.
푹!
“지배자인 나를 따르라. 너희들의 주인. 영원히 끝나지 않는 나의 행보를 가로막는 나의 적을 부셔다오! 빛의 장막을 뚫으며, 어둠마저 꿰뚫는 하나의 섬광이 되어. 나, 케실리온의 이름아래, 너희들은 지배 받으리라! 적에게 강철의 철퇴를 내릴 지니! 위용을 보여라! 어둠의 징벌, 다크 퍼니쉬먼트 (Dark Punishment)”
‘우우웅’거리며 하늘과 지상에 커다란 마법진이 생겨났다. 벨즈비트와 케실리온의 같은 속성이 마법이 펼쳐지자, 서로의 영역을 집어삼키며 힘과 힘의 대결이 펼쳐졌다. 하지만, 뒤늦게 펼친 케실리온에 비해 커져 버린 마법은 막바지에 달해 버렸고 벨즈비트의 손짓에 따라 마법이 발현되었다.
[울부짖어라!]
벨즈비트의 마지막 일갈에 케실리온은 이를 갈아야 했다. 자신의 마법이 상쇄되며 벨즈비트의 마법이 직격으로 날아들었다. 커다란 마법진에서 뿜어진 한줄기의 마기가 몸에 닿았다.
펑!
커다란 충격이 전해진다. 기혈이 뒤틀린다. 다리가 휘청거린다. 눈앞이 새하얗게 변해간다.
쿠쾅! 쿠르르릉!
“크아아아!”
케실리온의 커다란 비명이 다크 퍼니쉬먼트의 아래 울려 퍼졌다.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알파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벌벌 떨며 두 손을 꼭 잡았다. 대지를 지탱하던 힘의 축으로 인해 지진을 동반한 위력은 대지를 갈라놓기에 충분했다.
쩌저적!
“제, 젠장... 울컥!”
케실리온의 기혈이 뒤틀리며 내상을 입어버렸다. 입에서는 꾸역꾸역 검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다행히 막바지에 마령검을 부여잡으며 다크 퍼니쉬먼트의 약화 시킨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 일 것이다. 만약 마지막에 포기했다면, 자신의 몸은 다크 퍼니쉬먼트에 의해 갈가리 찢어 졌을 것이다.
[호오... 아직도 살아 있는 가? 보아하니, 마나 임펙트를 당한 모양이군. 크하하!]
마나 임펙트, 명계와 3계의 말로는 내상을 입었다는 소리였다. 벨즈비트는 마지막이라는 듯이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하지만, 순간 떠오른 생각에 미소를 지으며 케실리온의 곁으로 다가섰다.
[아무래도... 널 가지고 놀아야겠다. 다 이긴 싸움. 쉽게 끝내는 것도 예의가 아니겠지. 마왕의 권능으로... 널 가지고 놀겠다!]
마왕의 권능! 오직 마왕의 권위를 보여주는 권능이다. 서열에 따라 권능의 숫자도 달라지듯 최고의 마왕인 벨즈비트는 4가지의 권능을 가지고 있다. 비록 중간계라는 패널티가 존재하지만, 1가지 권능은 펼쳐 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1가지 권능밖에 사용 할 수 없겠지만. 너에게 가장 어울리는 권능이 존재하지!]
케실리온은 피를 게워내며 벨즈비트의 행동에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이미 몸은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분했다. 정신은 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몸과 속은 어쩔 수 없는 것인지 생리에 따라 피를 게워내야 했다.
“아, 안 돼! 케실리온님!”
멀리서 달려오는 알파가 눈에 들어온다. 유일하게 2계에서 믿을 수 있는 심복의 다급한 모습에 왠지 미소가 그려진다. 피를 게워내는 모습이었지만, 미소를 지어주고 싶었다.
“울컥... 하하.. 하하하! 꼴이 말이 아니군. 내가 이렇게 약해 빠진 놈이었나?”
[크크크.]
케실리온의 말에 벨즈비트는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추잡하게 목숨을 연맹하고 싶은 생각 없다. 지금껏 생을 살아오며 이정도로 분한 적은 없다. 패배, 그것만이 케실리온의 머릿속에 떠오를 뿐이다.
[네놈도 알 텐데. 크크크, 이것이 강자의 권리다. 가지고 놀다 죽여주지. 너와 뱀파이어 년도 크크큭.]
벨즈비트의 말에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언제나 군림 자로써 살아오던 케실리온이 이정도의 굴욕을 받아 본 적이 있던가. 누구보다 강해지기 위해, 풍운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무공을 갈고 닦았다.
[슬슬 권능을...]
“아, 안 돼! 케실리온님은 내가...!”
언제 온 것인지 알파가 케실리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케실리온은 살며시 웃음 띤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마왕을 두려워하면서 대적이나 할 수 있을 까? 차라리 지금을 틈타 도망이나 가면 괜찮을 것이다.
“됐...다. 강자에게 죽는 것도...”
[귀찮다! 네년도 천천히 가지고 놀다 죽여줄 테니 순번이나 지켜라! 크크크!]
퍽!
벨즈비트는 알파를 멀리 쳐 내고는 케실리온의 머리를 세게 잡았다. 그리고 마기가 뿜어졌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마기에 케실리온은 묵묵부답으로 힘을 뺐다. 이것이 벨즈비트의 진정한 힘이라는 것을 느끼며 한줄기 미소를 지을 뿐이다.
[버러지 같은 마룡! 약자에게는 약자다운 죽음이 어울리겠지!]
벨즈비트는 마왕의 권능이라는 것을 펼쳤다. 그 순간, 케실리온을 중심으로 마법진이 펼쳐졌다. 생전 처음 보는 마법진이었지만, 두려움보다는 편안함을 느꼈다. 몸이 치유되어갔다. 내상이 잦아들었다.
[크크큭, 4가지 권능 중. 네놈에게 가장 어울리는 권능이다. 리버스 타임! 너는 전생으로 돌아가 나약하게 죽어갈 것이다.]
벨즈비트의 권능이 펼쳐진 순간, 케실리온의 머리칼은 검은색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눈동자 역시 검은 색으로 변해버렸다. 또한, 피부는 2계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얀 피부가 아닌, 약간 그을린 피부로 변했다.
두근! 두근!
케실리온은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하단전의 차가운 기운은 사라져 있었다. 오직 중단전의 기운이 세차게 움직였다. 두 눈은 타오르듯 뜨거웠다. 하지만 머릿속은 더 없이 맑아졌다.
정제되지 않은 힘이 느껴졌다. 지금껏 수련을 통해 절제해오던 모든 것이 폭발한 느낌이다. 뭔가를 죽이고 싶은 느낌이 든다. 과거 지옥에서의 수련을 거치지 않고 1계에서 종행무진했던 시절에서나 느껴보던 광기(狂氣)가 되살아 난 것 같았다.
[호오! 그 모습이 전생의 모습인가?! 버러지 같이 생겼군.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아. 평범함 그 자체. 크크크! 죽여주지!]
“날... 죽여?! 잘도 지껄이는 군... 넌 실수했다.”
케실리온의 모습은 완벽하게 과거, 900년 전의 모습을 재현해냈다. 오직 광기와 살육에 집착하던 과거의 모습으로 변했다. 절정의 마법을 펼쳐내던 시기로 돌아간 것이다. 절대무적이라는 단어가 새록새록 떠오르던 시절의 모습으로!
[실수? 내가? 크하하! 실성했구나. 미쳤군. 미쳤어!]
“넌 실수했다. 나의 숨은 모습을 깨웠다는 것만으로도! 비록, 잠시 뿐이지만... 마성에 젖어 들겠다! 나, 조제현의 이름으로!”
케실리온, 아니, 과거의 조제현으로 변해버린 존재! 절대강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1계의 모습으로 변했다. 어떤 제약도 없는 그리고 절제된 모습도 필요 없다. 오직 살육을 위해 움직이는 조제현이 되겠다.
“현신!”
쿠와아아앙!
1계에서 펼쳤던 현신의 모습이 들어났다. 물론, 케실리온도 펼쳐 낼 수 있지만, 격이 다르다. 전신을 보호 할 수 있는 망토가 펼쳐졌다. 그리고 양손은 블러드 네일이 자리를 잡았다. 코앞에 있는 마령검은 알파에게 던져 주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잘 보관하고 있도록.”
거칠게 나부끼는 마기에 알파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감도 잡지 못한 표정이다. 다 죽어가던 모습은 온대간데 없었다. 갑작스럽게 다른 존재로 변해 버린 케실리온의 말을 따를 뿐이다.
휙!
케실리온... 그러니까 조제현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바로 벨즈비트가 있는 곳! 그곳으로 향한 조제현은 광기에 젖은 얼굴을 하며 입을 열었다. 마왕보다도 짙은 살기. 오직 살기에 집착하는 모습이었다.
“벨즈비트, 너의 실수가 뭔지 알고 있나? 바로 날...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렸다는 것이다.”
쾅!
조제현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작은 발돋움이었지만, 바닥은 처참하게 함몰되었다. 마기를 주체하지 못하는 제현은 밖으로 끊임없이 뿜어 낼 뿐이다. 무한의 마기! 그것이 조제현을 주체할 수 없게 만드는 원인이다. 마왕의 권능!
리버스 타임, 1시간 동안 적을 전생의 모습으로 되돌리는 마왕의 권능이다. 하지만, 그것은 케실리온을 회생시키는 기회를 만든 권능일 뿐이다. 케실리온은 과거도 지금도 지존이며, 절대자다.
[마, 말도 안 돼! 거짓말!]
“나의 숨겨진 이름! 조제현의 이름으로! 널 배제시키겠다. 벨즈비트!!”
제현의 블러드 네일이 번뜩이며 거칠게 몰아쳤다. 그리고 몸에서 뿜어지는 마기의 잔재는 마탄으로 변하며 벨즈비트의 활로를 차단했으며, 붉게 빛나는 마안과 드래곤 피어는 그를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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