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5화 (215/269)

남부전쟁(3) - 오백의 전설

쪽!

부드러운 감촉이 침대위에 누워 있는 소년의 볼로 전해졌다. 따스로이 전해지는 창밖의 따뜻한 공기는 소년을 깨우기에는 충분한 느낌이다. 그 따뜻한 빛이 소년의 얼굴을 비추자, 입을 맞추었던 존재는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따뜻한 눈빛으로 소년을 내려다 봤다.

“케실리온님…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습니다.”

매일 같이 잠만 자는 소년을 내려다보는 알파의 심정은 찹찹했다. 누구보다도 강하며 무적이라고 칭해지는 그녀의 마스터다. 하물며, 마왕마저 쓰러뜨리지 않았던가.

“윽!”

신음이 흘러나온다. 일주일이나 지났건만, 몸의 상처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강한 마기로 인해 몸 전체는 시퍼런 멍이 찍혀 있었다. 더욱이, 창백해 보이는 얼굴은 평소 보아오던 케실리온의 모습이 아니었다.

스르륵…

단순한 신음이 아니었던지, 케실리온은 부스스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무려 일주일 만에 눈을 뜬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고통에 머리를 부여잡은 케실리온은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느낌에 오른손으로 입을 가렸다.

울컥… 투투툭! 투투툭!

손으로 입을 가렸건만, 소용없었다. 오른손을 타고 흐르는 붉은 피가 침대 시트는 물론, 이불까지 적셨다. 애처롭게 몸을 떠는 케실리온을 보며 알파는 살짝 눈시울을 붉혔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모습이다.

“케실리온님… 도대체!?”

“알… 파인가?”

급히 케실리온의 곁으로 다가선 알파는 몸을 부축하며 케실리온을 눕히려 했지만, 차갑게 식어버린 손으로 알파의 손을 살짝 쳐내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몇 걸음 움직이기도 전에 휘청거리는 모습에 알파의 손길에 기대는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군.”

“미안하다니요. 전, 전 케실리온님…”

알파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차마 입으로 말하기 껄끄러운지 발로 바닥을 살짝 긁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것”

알파의 싱그러운 목소리에 케실리온은 알파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건만, 이렇게 생각해주는 마음을 느끼니 자연히 무관심하던 케실리온의 마음을 녹이는 것 같았다.

멍한 눈동자가 하염없이 주변을 응시했다. 침대와 창문, 알맞게 장식되어 있는 장식품, 제니어스 남작가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알파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에 차갑고 무표정한 케실리온의 입가가 살짝 벌어지며 어색한 미소를 만들었다.

두근!

알파는 평소 보던 거짓 웃음보다도 지금 느껴보는 어색한 미소에 더욱 마음이 두근거렸다. 얼핏 본다면 웃는 것 같기도 했지만 반대로 우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표정이었지만, 알파에게는 따뜻한 웃음이었다.

‘아… 설마, 케실리온님이 듣고 있는 건 아니겠지!?’

심장이 너무 두근거려 알파의 심정은 죽을 맛이었다. 케실리온에게 들킬까봐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하면서 창가로 안내했다.

끼릿!

몰락해가는 제니어스였던 것만큼, 창문을 여는 데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뒤늦게 몰아치는 싱그러운 냄새가 코끝을 간질거리자 케실리온은 눈을 살며시 감았다.

“알파… 전쟁은?”

“아! 그것이… 끝났습니다. 승리로.”

내상은 입었지만, 주위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케실리온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슬픈 듯 일렁이는 기운이었다. 때문에 알파도 덩달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변했다.

“소상히 말해 보거라.”

“그것이. 예…”

케실리온의 집요한 독촉에 알파는 머리를 살짝 숙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마룡과 마왕의 싸움이 끝났다.

휘이잉-!

죽음의 향기를 물씬 머금은 바람이 제니어스와 하르그의 진형에 드리웠다. 마왕이 펼쳐 놓은 한 가지 권능 중간계의 지상을 마계의 땅으로 변환 시키는 무시무시한 권능. 하지만, 두 절대자의 싸움으로 그 땅은 끝도 없이 펼쳐진 낭떠러지를 만들어냈다.

“크크큭! 마왕도 죽고, 버러지 같은 녀석도 끝났구나!”

숨어서 전황을 지켜보고 있던 흑마법사 조안은 숨을 헐떡이고 있는 케실리온의 모습을 지켜보며 조소를 지었다. 마왕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보여준 싸움에서 살아남은 것이 기적이었다는 듯이 숨을 쉬고 있는 존재를 내려다보는 조안의 모습은 차가웠다.

“죽여주지! 네놈에겐 이 마법이 어울린다!”

우웅!

뱀파이어릭 터치(Vampireric Touch)였다. 녀석의 오른손에서 뿜어지는 어둠의 향연이 몰아치는 순간, 가장 근방에 있던 알파는 그 모습을 똑똑히 지켜봤다.

“감히! 그분께 손을…”

팟!

알파는 흑마법사의 작태에 신형을 뽑아 올리며 케실리온이 보관하라고 했던 마령검을 움켜쥐었다. 허락받지 않은 존재는 절대 만질 수 없는 검이 하늘을 비산했다. 그리고 비도를 날리듯 마령검은 공기를 가르며 흑마법사를 향해 날아갔다.

투왕… 푹!

“크아악!”

마령검은 마법을 펼쳐내고 있는 흑마법사의 양손을 꿰뚫고 지상에 박혀 버렸다. 알파의 분노를 볼 수 있듯, 마령검은 지상에 박히고도 진동에 진동을 거듭했다. 기어코 케실리온의 곁으로 다가선 알파는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케실리온을 안아 들었다.

“이 분에게 누구도 손대지 못한다!”

스슷!

표독스럽게 쏘아보는 알파의 눈길에 흑마법사는 몸을 떨어야 했다. 끝도 없이 치솟는 살기는 아까의 전투보다는 떨어졌지만 그 누구보다도 강한 살기를 내뿜었다. 살기를 내뿜는 순간 알파의 왼손에는 다섯 줄기의 블러드 네일이 생성되었다.

블러드 네일이 생성되는 순간 ‘콰자작’ 하는 소리와 함께 마령검에 꿰여 있던 흑마법사의 머리를 시작으로 하체에 이르기 까지 거칠게 잘려나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묘한 파육음과 함께 피떡이 되어 지상에 떨어지는 흑마법사. 

철퍼덕!

흑마법사의 육체는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단 일수에 당한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눈알이 튀어나오고, 허연 뇌수가 붉은 핏물과 함께 비산했다. 그 피를 온전히 막아서고 있는 알파의 모습은 괴기스러웠다.

“너의 더러운 피를… 이분께 튀기지 마라.”

팟!

알파의 눈에는 묘하게 청아하게 맑은 물기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간신히 목숨의 끈을 이어가는 케실리온을 꽉 끌어안으며 제니어스의 후방으로 물러났다. 물론, 마령검을 챙기는 것은 잊지 않았다.

“알파님… 케실리온님은!?”

“괜찮아.”

일레인 남작은 케실리온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알파에게 물었지만, 들려오는 목소리는 싸늘했다. 하지만, 일레인도 그렇게 기분은 나쁘지 않은지 시선을 돌리며 멀리 무기를 챙기고 있는 하르그를 보며 이를 갈았다.

으드득!

“제니어스여! 모두 보았는가? 저 간악한 저들의 작태를… 승리를 위해서라면 마왕마저 서슴없이 소환하는 악의 무리를 보았는가!”

“보았습니다!”

일레인 남작의 말에 모두들 머리를 끄덕이며 분노를 표출했다.

“저 간악한 존재들이 감히 케실리온님을 다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바로 전쟁을 끝내는 것이다. 저 간악한 무리를 척살하는 것이야 말로 우리가 그분께 보답하는 것이 아니더냐!”

“맞습니다!”

“이젠 우리가 보답할 차례다! 적을… 참수하라! 돌격!”

“전군 돌겨어억!”

일레인 남작의 일장연설에 모두들 머리를 끄덕이며 무기를 들었다. 오랜 전투로 피로가 몰려왔지만, 저 간악한 무리를 척결하기 위해서는 힘을 내야 했다. 그들은 커다란 함성과 함께 하르그를 향해 돌격을 시작했다.

하르그 측의 남작은 온몸을 꿰뚫을 것 같은 시선에 화들짝 놀랐다. 전방에서 뿜어지는 무시무시한 단결력과 살기에 흠칫 몸을 떨며 자신의 병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뭐하고 있는가! 돌격하라!”

“하오나, 각하! 이미 병력의 반이 희생되었습니다.”

“닥쳐라! 돌격해! 저들을 막으란 말이다.”

“큭… 명을 따릅니다.”

남작의 독촉에 백인장들은 침음성을 터뜨리며 휘하에 있는 병사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전쟁이라곤 눈곱만치도 알지 못하는 남작을 대리고 전쟁터에 나온 것이 불찰이다. 아무리 병력이 많다고 한들, 저렇게 단결력이 좋은 부대를 이길 리가 없다.

기어코 두 진형의 군대가 부딪혔다. 564명이 검을 뽑아 들며 하르그의 병력과 맞섰다. 기묘한 수법의 검술이 몰아치자 가장 전방에 있던 하르그의 병사들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전사에 전사를 거듭했다.

챙챙!

처음 보는 검술이었다. 오른쪽에서 공격 해 올 것 같으면 왼쪽에서 오는 기묘한 수법, 힘으로 밀어 붙이는 검술과는 차원이 달랐다. 스피드와 힘이 조화를 이루는 제니어스의 검을 이길 수가 없다.

“마인드 브레이커!”

핑크빛의 머리칼을 가진 어린 소녀마저 강했다. 하늘에 떠 있는 투명한 물체가 움직이는 순간, 많은 병사들이 머리를 부여잡으며 죽어가는 모습은 참혹했다. 정령술을 전공하는 프린에게는 이정도의 광범위는 힘든 방법이었지만, 케실리온에게서 배운 특별한 운용방법으로 적은 양의 마나로 광범위 공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딱히 공격 계열로 정령을 다루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때가 때인 만큼 공격 계열에 치중한 것이다. 프린의 존재는 제국 측에서도 중요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케실리온의 감시 역으로 파견 된 것이었지만, 아카데미 친구인 에레노아를 모르는 척 할 수는 없다. 게다가, 매일 케실리온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당연시 되었고, 레나 역시 동의했기에 묵묵히 전쟁에 참여했다.

펑! 퍼엉-!

전쟁이 계속 될수록 양측의 사상자도 늘어갔다. 아무리 익스퍼트 급이 병력이라고는 하나, 인간은 인간이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이상, 육체의 피로를 감당하기에는 오랜 싸움이다. 때문에 일레인 남작은 하르그의 수뇌를 먼저 잡는 것으로 전쟁을 빠르게 종결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적진을 뚫고 돌진하는 것은 용병인 실버 울프들이 담당했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제니어스의 기사들이다. 그들은 케실리온에게 특별한(?) 수련을 거쳤기에 그 정도는 문제없을 것이다.

두두두두!

실버 울프들은 완벽하게 전쟁을 수행해냈다. 적진의 중앙을 돌파하며, 수뇌가 있는 후방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뒤를 따라 기사들이 몰려가자 수뇌들은 항복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이없게 기나긴 남부의 전쟁은 끝을 알렸다.

“살고자 하는 자는 투항하라! 너희들의 수뇌는 모두 우리 손으로 떨어졌다.”

*    *    *

“총 566명 중 100명이 사망, 나머지는 경상과 중상을 입었습니다. 생존자 466명…”

알파의 이야기는 생존자와 사망자를 다루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리고 하르그의 영지는 제니어스로 떨어졌고, 실버 울프의 전쟁 참여의 보수는 하르그에 있는 귀중품이나, 여러 가지 돈이 될 만한 것을 주기로 약속되었다. 그리고 남은 것은 케실리온의 보수 문제일 것이다.

똑똑!

“일레인입니다. 깨어나셨다고 해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상을 입었기에 두통과 가슴이 답답한 것을 느꼈지만, 알파가 있기에 케실리온은 느긋하게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으며 일레인이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남부전쟁(3) - 오백의 전설

“그래, 모두 끝났겠군.”

“예…”

일레인이 들어오자 케실리온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단편적으로 대답했다. 566명으로 무려 1만이 넘는 병력을 대패시킨 전설적인 병사들이다. 모르긴 몰라도 먼 훗날 역사책에 기록 될 정도로 대단한 전투였다.

몇 천 년에 한 번 강림할까 말까한 마왕도 나왔으며, 흑마법사에 언데드 까지, 영웅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의 끝이 여기에 있다. 케실리온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일레인을 올려다봤다.

“보수…”

“예!?”

“싸워준 대가.”

“당연 하지요! 영지를 달라고 하셔도 드릴 겁니다.”

케실리온은 일레인의 호들갑에 ‘피식’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싱그럽게 불어오는 바람의 느낌에 머리를 뒤로 쓰러 넘긴 케실리온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물론, 알파에게 몸을 부축 받으며 일어난 것이지만 그렇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가자!”

“어디로…”

“내가 원하는 것은 밖에 있다.”

케실리온의 말에 일레인은 말끝을 흐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하는 것이 밖에 있으니 당연히 밖으로 나가야 했다. 케실리온의 존재는 제니어스에서 영웅과도 비교된다. 아니, 그들에게 있어서 케실리온은 신과 같은 존재다.

2층에 배치되어 있던 케실리온의 방을 나서, 천천히 1층의 복도 쪽으로 걸어 나갔다. 워낙 좁아터진 영지였기 때문에 일반 평민들이 생활하는 모습을 훤히 볼 수 있는 곳이다. 영지의 정중앙에 위치한 일레인 남작가의 저택은 그런 곳이다.

“핫!”

사라랑-

전쟁이 끝났음에도 많은 이들이 영주의 저택에 남아 훈련을 하고 있었다. 대부분이 농사를 짓는 농부였기 때문에 대다수는 떠났지만, 가족을 잃은 자들은 영주의 저택에 남아 병사를 자처했다.

깨끗하게 공기를 가르는 검이 보였다. 청량한 공기를 토해내듯, 구름에 흘러가듯 수를 잊는 검의 모습이 눈에 익었다. 몇 백 년이나 지났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검의 움직임에 케실리온은 약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스악-

낯익은 검로, 낯익은 검초, 낯익은 허초, 몇 번을 쳐다봐도 똑 같은 수법이었다.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것을 똑 같이 펼쳐 낼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보법과 검의 무게감 까지 살려내는 모습에 케실리온은 자연히 감탄을 터뜨렸다.

“대단하군.”

“어!? 케실리온!”

케실리온의 짧은 감탄을 들었던지 멀리서 수련을 하고 있던 에레노아가 검을 회수하며 뛰어온다. 뛰어오던 에레노아는 부축 받고 있는 케실리온의 모습에 약간 주춤 거렸지만 곧장 뛰어왔다.

“몸은 괜찮아?”

“뭐…”

에레노아의 질문에 케실리온은 대충 얼버무렸다. 옆에서는 ‘흠흠’거리며 에레노아를 살짝 흘겨보는 알파가 서 있었다.

“에레노아! 케실리온님께 무슨 무례를…”

스륵!

일레인 남작의 호통에 케실리온은 손을 살짝 들며 제지했다. 케실리온의 입장에서는 상관없다는 모습이었다. 누가 반말을 하든, 존재를 하든 상관없었다.

“그건 그렇고… 나의 보수는 이미 정했네.”

“말씀만 하십시오.”

일레인 남작의 말에 케실리온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보수를 위해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가. 케실리온은 하르그가 있는 방향으로 손가락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남서쪽을 향하고 있었지만.

“하… 하르그 영지를 달라는 말씀입니까?”

“아니, 남작이 연구하던 던전을 보수로 정했네.”

이미 지저스의 신전 측에서도 남부의 던전을 탐색하기를 원했다. 때문에 추기경인 케실리온을 파견하지 않았던가. 이유가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 던전을 수색 할 수 있게 되었으니 잘 된 것이다.

“케실리온님. 던전에는 쓸 만한 물건은 없습니다. 이미 몇 번이나 확인한 결과…”

“그만! 애초부터 이곳에 온 목적은 던전 때문이었다.”

“예…”

케실리온의 일갈에 남작은 뒤로 물러나며 머리를 숙였다. 케실리온의 강경한 말투에서 느꼈듯이 재고할 방법은 없었다. 일레인 남작은 마음 같아서는 이 영지라도 주고 싶었다.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충언(?)을 무시하는 케실리온이 야속했다.

“흠흠! 알겠습니다. 하지만 천천히 가시지요. 영지를 위해 싸워준 전사의 영결식과 축제를 할 예정입니다.”

일레인 남작의 말에 케실리온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으며 알파를 쳐다봤다. 물론 쳐다본다고 한들, 무조건 케실리온 자신이 좋다면 한다고 하는 알파의 의견을 들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지 말고 축제 때 까지 있지 그래.”

“에레노아! 케실리온님에게 무슨…”

“아버님… 케실리온은 친구예요. 친구!”

부녀간의 티격태격 거리는 싸움에 케실리온을 보며 머리를 살짝 끄덕였다. 내상을 회복하고 던전에 들어갈 생각이었기에 별 거부감을 들지 않았다.

“어차피 몸 상태도 그러니 며칠 쉬다가 가지…”

케실리온은 그런 말을 남기고 근처에 있는 그늘로 자리를 옮겼다. 봄이라 그런지 싱그러운 태양 빛이었지만, 내상을 당한 지금 너무 오랫동안 태양빛에 노출 되는 것은 내상에 좋지 못했다.

케실리온이 그늘로 들어가는 모습을 본, 알파와 에레노아는 살며시 케실리온의 곁으로 다가섰다. 약간 범접하기 어려운 면은 있었지만, 마음은 의외로 따뜻하다는 것을 아는 둘이었기에 별 거부감은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친 상태! 병이 든 자라면 마음이 약해지기 마련이다.

“여! 에레노아. 우리 왔어.”

“으응… 레나, 프린 어서와.”

케실리온에게 점수(?)를 따려고 생각했던 에레오나는 멀리서 걸어오고 있는 레나와 프린을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아카데미에서는 몰랐지만, 요즘 들어 부쩍 밝은 표정을 짓는 에레노아였다.

“케실리온 일어났다며?”

“뭐… 보는 대로.”

레나의 말에 에레노아는 그늘에 정좌를 취하며 눈을 감고 있는 케실리온을 가리켰다. 그동안 케실리온에게 많은 것을 배웠기 때문에 저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다. 마나를 다스리는 행동이었기에 4명의 여자들은 케실리온의 근처에서 맴돌 뿐이다.

“쳇! 저 상태면 말도 못하겠네.”

레나는 케실리온의 모습에 약간 실망감을 안고 알파와 프린, 에레노아를 잡아끌며 근방에 있는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전쟁 때문에 이야기도 잘 할 수 없었기에 잘됐다는 듯이 여자들은 그늘에 앉았다. 하지만, 입을 열수 없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묘하게 모든 여자들의 시선이 케실리온에게 향하고 있었다.

“이봐요. 아줌마… 물어 볼게 있는데.”

스윽-

어색했던 분위기에서 가장 처음 말을 꺼낸 이는 레나였다. 검지를 빳빳하게 세우며 알파를 향해 가리키고 있었다.

“…나 말하는 건가요?”

알파의 표정이 굳어졌다. 알파는 고작 200살 먹은 뱀파이어일 뿐이다. 아직 죽을 날 보다 살아갈 날이 많은 엄연한 처녀 뱀파이어! 누구 보고 아줌마라는 말발을 내뱉는 것인가. 하지만, 알파는 레나가 케실리온의 친구라는 것을 생각해서 침착하게 회피 할 뿐이다.

“그럼, 여기 당신 말고 아줌마가 있나요?”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확실히 이곳에 있는 여자들은 11살이었다. 그리고 케실리온의 나이도 11살, 오직 자신만 200살이라는 것을 생각 할 때 가장 늙었다고 할 수 있지만, 케실리온은 무려 900살이나 먹었다. 그러므로 나이를 따지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어머! 참고로 케실리온님은 900살이랍니다. 마룡이시니 더 많으실 지도 모르겠네요.”

“흐흥! 나이차 따위…”

“모순입니다. 모순! 레나님”

알파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물론, 겉으로는 무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부를 정도였다.

“그래봐야 난 케실리온과 가장 처음 만났을 걸? 아카데미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

“......”

레나의 일격에 할 말이 없어진 알파는 애꿎은 땅만 후빌 뿐이다. 그때, 잠자코 있던 에레노아가 나섰다.

“흐음… 난 케실리온과 같은 방을 썼는데?”

“헉!”

에레노아의 외통수에 레나는 좌절모드에 빠져 버렸다. 케실리온과 같은 방을 썼다는 것만으로도 큰 충격이다. 프린은 그렇게 관심 없는 지 매일 같이 보는 정령에 관해서라는 책만을 읽을 뿐이었다.

“음우후후! 어린애들은 모르겠군요. 전 케실리온과 같은 침대, 목욕 까지 같이 한 사이랍니다.”

알파의 음침하고도 날카로운 수법에 에레노아와 레나를 침몰시키기에 충분했다. 역시 어른과 아이의 벽은 엄청났다. 그녀들의 이야기가 계속 될수록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지속되었지만, 여자 세 명의 자존심 싸움은 계속 되었다.

“흐흥! 아줌마주제에.”

“어린애 주제에…”

“난 케실리온에게 인정받았다고 검술로…”

“정령의 기초는 정신력에서부터 시작된다. …인가?”

여자 네 명의 수다가 지속 될수록 하늘은 붉어져 갔다. 그만큼 오랫동안 수다가 지속 되었고, 시간은 가고 있었다. 그때, 케실리온의 혈색은 조금씩 홍조를 띄기 시작했다. 기혈을 따라 움직이는 기운이 부상을 당한 부위를 어루만지며 치유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뭐지…? 주위가 시끄럽군.’

케실리온은 주위가 시끄러워 지자, 마령심법(魔靈心法)을 중단하며 눈을 번쩍 떴다. 아까 보다 확실히 낳아진 모습이었다. 은빛의 눈동자가 가까운 나무아래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는 여자들을 보며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이 아줌마가!”

“누가 아줌마야!”

“…….”

왜 저렇게 말싸움을 하는지 몰랐지만, 케실리온은 입을 굳게 다물고는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가까이 있어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다.

“뭐… 괜찮겠지.”

*     *     *

란델 제국의 최남단 통합 제니어스에서는 영결식 준비에 한창이었다. 더불어 케실리온이 깨어닌지 이틀째 되는 날이다.

“남작님. 장작을 다 쌓았습니다.”

영지민들이 하나가 되어 장작을 높게 쌓았다. 전쟁을 통해 사망한 100명의 영결식이다. 그 누구도 이보다 더 성대한 영결식은 없을 것이다. 비록 좁쌀만 한 영지였지만, 거대한 하르그라는 영지를 격퇴시킨 무적의 영지다. 그리고 무적의 병사들이 있다.

물론, 이젠 훈련과 병장기에 손을 뗐지만, 죽을 때 까지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전사의 혼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익스퍼트급의 농사꾼과 아녀자가 거주하는 최고의 영지로 거듭날 제니어스. 하지만, 그 뒤에는 100명의 희생과 절대자가 버티고 서 있다.

“실버 울프가 도착했습니다.”

“드디어… 케실리온님께 영결식이 시작된다고 전하게.”

“예! 주군!”

한 기사가 일레인 남작에게 짧은 보고를 했다. 그에 화색을 뛴 일레인 남작은 급히 케실리온에게 이 사실을 보고 할 것을 명했다. 실버 울프가 온다면 영결식을 시작 할 수 있을 것이다.

케실리온은 영지의 기사에게서 대충 설명을 듣고 영결식이 벌어질 곳으로 향했다. 영지의 모든 이들이 검은색계통의 옷을 입고 있었다. 물론, 케실리온은 곧잘 검은 의복을 자주 입었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었다.

“근 일주일이나 미뤄왔던 영웅들의 영결식을 시작하겠습니다.”

10명의 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은빛으로 빛나는 롱소드가 검집에서 뽑히며 찬란한 기운이 검에서 뿜어졌다. 푸른빛이 일렁이자 영지민들도 검을 들어 올렸다. 영웅들의 영결식인 만큼 영웅에게 어울리는 위용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영웅에게… 맹세의 검을…!”

우우웅!

일제히 뽑혀 올라간 검은 마나를 내뿜었다. 맹세의 검, 죽은 영웅을 대신해 지키고자 하는 것을 지키겠다는 맹세다. 망자와 생자의 약속! 그것을 이어주는 영결식, 영원히 떠나보내는 망자의 한을 풀어주기 위한 자리인 만큼 케실리온 역시, 마령검에 기운을 불어 넣었다.

찬란하게 빛을 내뿜는 검강이 하늘로 치솟았다. 구름에 닿을 듯이 치솟는 검은 모든 이로 하여금 감동의 물결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영웅이었습니다.”

일레인 남작의 말이 잔잔하게 영지에 울려 퍼진다. 마법을 쓴 것은 아니었지만, 모든 이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그의 말이 시작 되자, 기운을 내뿜던 검은 납검되어 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미래의 자손을 위해 싸워온 100명의 영웅이 제니어스의 품에서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둥- 둥- 둥-

천천히, 고요하게 진군의 북이 울린다.

둥- 둥- 둥-

“진군! 그들은 죽어서도 진군을 하고 있습니다. 이 제니어스를 위해! 가족을 위해! 1만이 넘는 적군을 향해 불나방처럼 뛰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해냈습니다. 아니, 우리 모두 해냈습니다. 지켜냈으며, 이겼습니다.”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일레인 남작의 영결식은 계속되었다. 흐느끼는 가족들과 영지민들… 하지만 모두 한마음이 되었다. 떠나보낸 자들은 진정한 영웅이다. 그리고 전설이다.

“566명의 전설은 후손들에게 영원히 기억 될 것입니다. 망자와 생자의 마음에 들리도록…”

일레인 남작은 잠시 묵념을 했다. 그 모습에 모든 이들 역시 서서히 타오르기 시작하는 장작 불을 향해 묵념을 하기 시작했다.

화르륵!

“제니어스의 아들이여, 딸이여! 검을 들어라!”

챙-

짧은 묵념이 끝나자 일레인 남작을 시작으로 납검되어 있던 검이 발검 되어갔다.

“우린 소중한 100명의 영웅을 잃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것이 있다. 바로 오백의 전설이다! 울부짖어라! 전설이여!”

화르륵- 우우웅!

장엄한 일갈과 함께 불꽃과 검에 덮씌워진 마나가 어우러졌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는 그들의 마나가 망자에게 축복을 내리듯 끝도 없이 뜨거운 불길은 울부짖었다. 이로써 그들은 진정한 전설을 만들어냈다. 1만도 아닌, 2만을 대패 시킨 오백의 전설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리 기억 될 것이다. 그들은 오백의 전설이다.

오백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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