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6화 (216/269)

에리스의 던전(1) - 비밀의 문

‘페덜의 돌’의 기원은 프리시아 왕가에서부터 내려온다. 이미 사라져 버린 정복왕 페덜의 저주 받은 인장(印章)이며 옥쇄이다. 과거의 서대륙을 통일한 ‘페덜 폰 프리시아’의 부인이자, 마탑의 주인이며, 마왕을 최초로 불러낸 에리스의 던전이 바로 제니어스의 최남단에 위치하고 있다.

“제가 발견 한 것이 바로, 정복왕의 후궁인 에리스의 던전입니다.”

“호오… 왕후와 후궁이 같은 이름이었다지?”

“예, 왕후인 에리스는 성녀였으며, 후궁인 에리스는 마탑의 주인이었습니다. 때문에 마녀라고 불렸지요.”

늦은 밤, 케실리온과 일레인 남작은 서재에서 보수로 받기로 한 에리스의 던전에 관해서 듣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목적이 에리스의 던전이었던 만큼 케실리온의 관심은 온통 에리스의 던전으로 쏠렸다.

“이미 말씀 드렸겠지만, 에리스의 던전에는 남아 있는 물건은 없습니다. 페덜의 돌은 도난당했으며, 여러 가지 보물 역시…”

케실리온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힘이 없는 영지가 가지기에는 너무 과한 던전이었다. ‘페덜의 돌’은 이미 케실리온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그곳에 유색의 비드가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다.

반짝- 반짝!

“그것은…?”

케실리온의 가슴에서 빛이 뿜어졌다. 역 십자가의 문양에서 뿜어지는 빛은 어두운 방안에 촛불에 의존하고 있는 일레인 남작에는 밝은 빛이었다. 뒤늦게 눈치 챈 케실리온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틀었다.

“뭐, 내일 떠나기로 했으니 일정에는 차질이 없을 거야.”

“예. 내일 뵙지요.”

일레인 남작과 헤어진 케실리온은 2층에 위치한 방으로 방향을 틀었다. 처음으로 호출명령이 떨어졌다. 물론, 명령에 움직이는 케실리온은 아니었지만, 일단 교단에 몸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응답은 해야 할 것이다.

반짝-

“알파! 부탁한다.”

“예!”

케실리온은 익숙하게 문을 열며 알파에게 명령을 내렸다. 간혹 밤중에 찾아오는 레나 덕분에 한시도 쉴 수 없는 알파였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 레나의 침입은 매일 벌어지는 일이었다.

뚝!

케실리온은 가슴에서 요란하게 빛을 내뿜는 은빛의 추기경, 즉 퍼니쉬의 마크라고 할 수 있는 역십자가를 떼어내며 기운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펼쳐지는 환상마법과 통신마법의 조합되며 주위의 광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원탁의 테이블과 그 중앙에서 뿜어지는 신성한 빛이 하늘로 치솟자, 11명의 추기경이 각자 자리에 앉으며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흠흠! 오랜만이오. 경들께서는 잘 지내셨소.”

“흥! 교황. 너무 자주 부르는 건 아닌가요? 1년에 한번 있을 까 말까한 원탁회의를…”

“허허! 3 추기경인 루즈(Rouge)경께서 화가 단단히 나셨소. 지금 대륙력은 1911년이오. 신년이란 말이오. 허허, 처음이 아니겠소?”

“그, 그런!”

교황이 인사말을 건넸지만, 3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매혹(魅惑)의 루즈(Rouge)라는 이름을 가진 추기경이 교황을 쏘아보며 화를 냈다. 뭐, 그래봐야 본전도 찾지 못하고 꼬리를 내려버렸지만…

“경들을 소집한 이유는 익히 알 것이라 믿고 있소. 신의 목소리… 즉, 신탁의 이행에 관해서요. 각자 노력은 하고 있겠지만, 성과를 들었으면 하오.”

교황은 인자한 웃음과 함께 여러 추기경을 둘러보며 성력을 흘렸다. 은은하게 퍼지는 성력이 온 공간을 메우자 은빛으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누구도 표정을 굳히지도, 찌푸리지도 않았다.

“먼저… 12 추기경인 퍼니쉬경의 성과를 듣고 싶소만…”

레딕의 옆에 앉아 있는 카이룬 공작, 아니 2추기경인 러그라고 불러야 할 존재가 입을 열었다. 케실리온은 카이룬 공작의 말에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카이룬과 레딕이었기에 묘한 미소가 지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카이룬 공작… 네놈이 더 잘 알거라고 생각하는데?”

쾅!

“카이룬 공작이라니! 신성한 교단 내에서 신분을 가르는 언행은 삼가시오! 퍼니쉬경!”

“누구냐 넌…”

케실리온의 말에 발끈 한 것은 여섯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녀석이었다. 벌레 같이 생겨서는 원탁을 내려치며 케실리온에게 눈을 부라렸다. 상당히 건방진 녀석이라고 느낀 케실리온이다. 아마 행동을 보건데 카이룬의 심복일 가능성이 컸다.

“란델 제국의 서쪽을 담당하고 있는 고독(蠱毒)의 벌민(Vermin)이다.”

“그래서…”

케실리온의 짧은 답변에 순간 주위는 조용해졌다. 하지만, 단 한명만은 웃음을 터뜨렸다.

“쿠쿡, 역시 퍼니쉬 경입니다.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근 500명의 군대로 2만에 달하는 군대를 이겼다고요?”

“알고 있을 텐데? 그곳에 언데드와 마왕이 강림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케실리온의 말에 교황과 성녀는 크게 눈을 떴다. 그런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마왕이 강림하는 일은 그렇게 흔하지 않다. 겨우 역사책에서나 나오는 이야기 일 뿐, 지금에 이르러서는 마왕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는 형국이다.

“마왕!”

“그런 이야기는 못 들었는데…”

모두들 수군거리며 케실리온을 주시했다. 마왕이 강림했다는 것은 보통 큰 일이 아니었다.

“마왕과 무려 1만에 달하는 언데드들이었다. 너희처럼 편안하게 일하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느끼지 못했던 건가? 대륙이 진동할 정도의 마기를…”

“후… 퍼니쉬경 저희 측에서도 익히 알고 있는 일이었습니다.”

“원군도 없더군?”

“그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교단과 인접한 란델 제국의 서부에서 출현한 곤충형 마물들의 난입으로 커다란 피해를 입었습니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호오…?”

성녀의 말에 케실리온은 미처 몰랐다는 듯이 대꾸했다. 곤충형 마물이라고 한다면 대단히 위험한 족속들이다. 개개인은 별 볼일 없는 마물들이지만, 일단 뭉치면 끝도 없이 몰아치는 족속인 만큼 교단의 모든 인원이 그곳으로 몰렸다는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이번 원탁회의는 유색의 비드뿐만 아니라. 대륙 곳곳에서 벌어지는 어둠의 종족이 출현하는 것에 대한 방안입니다. 가장 먼저, 퍼니쉬 경의 성과를 듣고 싶군요.”

성녀 크리엘의 말에 케실리온은 좌중을 한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약 500명의 전사 육성, 1만의 언데드와 1만의 인간 병력, 그리고 마왕 격퇴. 그리고 유색의 비드가 있다고 알려진 던전을 보상금으로 받음. 내일부터 그 던전 조사에 착수. 이상.”

케실리온의 일목요연한 보고에 성녀와 교황마저 입을 크게 벌렸다. 마왕격퇴! 500명의 병력으로 2만에 이르는 병력을 이긴 것. 모두 기적에 가까웠다. 누가 이런 성과를 올릴 수 있을 까!

“대, 대단하군요.”

성녀는 놀랍다는 표정으로 케실리온을 쳐다봤다. 성녀의 옆자리가 케실리온이었기에 멀리 찾을 필요도 없었다.

“그럼, 아티팩트의 불빛이 순간 꺼졌다는 것은…?”

“아티팩트? 아… 아티팩트가 생명과 위치를 나타내 준다고 했던가? 마왕에게 당해 내상을 입었을 때 같군.”

케실리온의 간단한 설명에 성녀는 알겠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였다.

“흠흠… 퍼니쉬 경의 성과는 들었으니. 각자 유색의 비드에 관한 보고를 해주셨으면 하오.”

교황이 원탁회의를 진행시켰다. 하지만, 그렇다할 성과는 찾을 수 없었다. 지금 교단에서 보유하고 있는 유색의 비드는 그린 드래곤의 하트 하나뿐이었다. 남은 것은 다섯. 대륙 곳곳에 있을 유색의 비드를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잘 들었습니다. 유색의 비드가 있는 곳은 정확하게 란델 제국의 황실이 보유하고 있는 금빛의 비드하나. 나머지는 아직도 추적중이군요.”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겠소. 서대륙 곳곳에서 벌어지는 마물의 활동이오. 대표적으로 란델 제국의 서부와 남부에서 일어났다고 할 수 있소이다.”

성녀의 말이 끝나자, 교황이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남부는 케실리온이 겪었기에 상관없었지만, 서부에서 일어났다는 일에는 약간 관심이 갔다. 란델 제국은 케실리온을 제외하고 4명의 추기경이 있다. 그들이 무슨 일을 꾸미건 상관없지만, 방해한다면 없애 버려야 할 족속들이다.

“1추기경 크래센트경 말씀하시지요.”

“요즘 동쪽의 대륙, 테라스 제국 측에서 서대륙으로 조금씩 진출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을 것이오. 마물의 출현 역시 그들과 비슷한 시기부터 출현하기 시작했으니, 그들이 원인이라고 추측 할 수 있소.”

“그 말씀은…?”

“애초부터 그들은 교단의 의지를 배반한 족속들이오. 교단의 순구한 의지를 저버리는 존재들이니 란델 제국을 도와 토벌하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오. 그리고 서쪽에 유색의 비드가 없다면 동쪽에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오?”

레딕의 일목요연한 말에 모두들 머리를 끄덕였다. 케실리온 마저 수긍하는 눈치였다. 어차피 목적을 위해서는 동쪽으로 진출해야할 케실리온이다.

“의견은 잘 들었소이다. 이번 서부와 남부의 일을 교훈삼아 각국의 추기경들은 대비해 주시기 바라오. 그럼 퍼니쉬 경을 제외한 다른 추기경들은 가셔도 무방하오.”

피핏!

교황의 말에 각국의 추기경들은 하나둘씩 사라져 갔다. 마지막으로 레딕이 사라지고 나서야 교황과 성녀는 케실리온에게 시선을 주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부탁했던 조사는 완료되었나요?”

“조사…? 아! 이단을 말하는 건가? 시간은 무제한 일 텐데… 한 가지 충고만 해주지. 아무도 믿지 마라. 제일 조심해야 할 것은 1 추기경과 2 추기경. 아, 6추기경도 포함되겠군.”

케실리온은 성녀와 교황을 쳐다보며 흔들림 없이 이야기 했다. 지금은 밝히고 싶지 않았다. 이 교단의 추기경 전원이 마족이라고 한다면 어떤 혼란이 벌어질지 몰랐다. 일단, 유색의 비드를 다 찾고 이야기해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나도 이만 가보지… 참고로, 요즘 들어 흑마법사의 활동이 잦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동대륙과 연관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팟!

케실리온의 말이 교단에 위치한 원탁회의장에 울렸고, 곧 케실리온은 사라졌다. 제니어스의 2층 침실에서는 누군가의 침입을 막기 위한 사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에리스의 던전(1) - 비밀의 문

깊은 어둠은 빛을 삼키고 고요함이라는 평온을 가져온다. 나아가면 나아 갈수록 더 깊고 넓은 공간을 만들어 내는 어둠이라는 깨달음을. 이미 극한까지 채워 버린 깨달음의 벽은 깊고 넓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앞을 가로막는 벽이 보이는 것이…’

새벽부터 이어진 명상은 주위에서부터 느껴지는 요란한 기척과 함께 끝나 버렸다. 귀가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와 앙칼진 목소리들이 어우러져 외이를 통해 내이로 통하며, 달팽이관을 끝도 없이 진동 시켰다.

“이 아줌마가!”

“…….”

명상에 빠진지 2시간이 될 무렵, 티격태격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마침내 케실리온이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고 새하얀 배경과 파란색 머리칼과 보라색 머리칼의 여자들이 대화(?)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가 지끈 거리는 군.’

케실리온은 지끈 거리는 머리를 흔들며 가까운 곳에 있을 욕실로 살며시 들어섰다. 욕실이라고 해봐야, 직접 물을 끓여 하는 곳이었기에 따뜻한 물은 구할 수 없다. 하지만, 차가운 물은 널려 있었기에 케실리온은 내공을 끌어올리며 물을 하늘로 끌어 올렸다.

스멀스멀…

옷이 하나 둘씩 벗겨지고 알몸으로 물을 받아 들일 준비를 한 케실리온은 오른손을 살짝 뻗어 물통을 향해 무형의 기운을 날렸다. 놀랍게도 물은 덩어리가 져 하늘로 치솟았다. 그리고 쏟아지는 물줄기를 느끼며 케실리온은 눈을 감았다.

솨아아아

살결이 떨려왔지만, 차갑지 않은 느낌, 이미 인간의 육신이 아니게 되어버린 지금, 차갑고 뜨거운 느낌은 많이 무뎌졌다. 인간으로써 느껴야 할 고통의 잔재와 즐거움과 같은 감정이 점차 묻혀 가는 깨달음의 길…

깨달음의 끝은 언제나 고독하다. 점점 없어져 가는 허전함, 인간이라면 느껴야 할 고통마저 사라지며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마룡이되 마룡이 아닌 존재가 되어가는 자신을 느끼며 케실리온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전혀 즐겁지 않은 상황임에도 표정은 웃고 있었다.

후두둑-

케실리온은 짧게 물을 끼얹는 것으로 샤워를 마쳤다. 내공의 존재는 참 편하다. 더러우면 내공으로 태우면 되고, 고통을 느끼면 내공으로 보호한다. 만능을 넘어 전능으로 치닫는 자신의 무위를 느끼며 욕실을 나섰다.

“아줌마란 말은 삼가 해주시죠. 인간의 나이로 치자면 겨우 19세가 되었을 나이입니다.”

“아줌마 맞네!”

아까부터 말싸움을 하고 있던 알파와 레나다. 이런 생활도 며칠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케실리온은 앙칼지게 대답하는 레나를 보며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검은색의 의복을 입었다. 은색으로 수 놓여 있는 용의 그림과 가슴에 걸려 있는 엠블럼이 착용되자, 케실리온은 어깨까지 내려온 은발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길…군.”

“아줌마!”

“상대를 말아야겠군요. 당신이라는 인간은…”

케실리온의 짧은 말과 함께, 두 여자의 앙칼진 음성이 2층의 방안에 울렸다. 케실리온은 왠지 울컥 거리는 마음을 다독이며 무표정한 얼굴로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작은 테이블에 앉아 말싸움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머리가 다시 지끈 거려왔다.

“시끄럽다.”

내상회복시간까지 합해, 두 여자가 건방떨고 있는 시간까지 계산한 결과 무려 한 달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케실리온은 그동안 참아왔던 대답을 입 밖으로 분출했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평소보다 싸늘하게 보인다.

“왜… 내 방에서 그딴 짓을 하는 거지? 설마, 죽고 싶은 건가?”

후웅-

케실리온의 점잖은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의 주위에는 뿌연 기운이 점차 은빛으로 변하며 회오리가 치듯 바람을 일으켰다. 짧은 기의 폭풍에 알파와 레나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내상의 회복은 내력의 상승과 일맥상통한다. 한차례의 고통은 더욱 성숙하게 만든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것과 마찬가지로 고생을 했으니, 내력의 상승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물론, 케실리온의 입장에서만 통용되는 일이었다.

마령심법(魔靈心法)의 특성상 내상의 치유와 육체의 회복에 탁월하다. 순행과 역행의 심법인 만큼 죽을 고비를 넘기는 것은 내력의 상승을 불러일으킨다. 가령 평범한 인간이 위기의 순간 힘이 몇 배로 강해지는 이치다. 물론, 케실리온의 경우는 영구적으로 내력의 상승을 불러일으킨 것일 뿐이다.

“흥! 지금 나에게 그럴…”

“쉿! 조용히 하세요.”

레나는 케실리온에게 따지려는 순간 알파가 나서며 그녀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거친 방법이었지만, 턱을 억지로 끌어올려 버린 것이다. 인간이 뱀파이어의 근력을 따라 올 수 있을 리가 없다.

“죄송합니다. 케실리온님.”

꾸벅-

알파는 허리를 숙이며 레나를 억지로 잡아끌며 방을 나섰다. 더 이상 케실리온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잠깐. 알파는 남아서 머리칼 좀 다듬어 다오.”

막 방을 나서려던 알파는 케실리온의 말에 기쁜 표정을 지으며 레나를 문밖으로 밀어내며 문을 닫아 버렸다.

쿵쿵!

“뭐야! 종족 차별하는 거야!?”

“후훗!”

문 밖에서 들리는 레나의 목소리에 알파는 살짝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의 의미는 몰랐지만, 케실리온은 알파의 웃음을 들을 수 있었다. 뭐, 별 상관은 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할까요?”

“전투에 거치적거리지 않을 정도로 쳐라.”

우우웅!

케실리온의 말에 알파는 검지와 중지에 블러드 네일을 사용했다. 어깨까지 닿아 있는 케실리온의 탐스러운 은발을 쳐내며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였다. 혹여 눈앞에 있는 케실리온이 다치지 않을 까. 조심하는 행동이 역력했다.

사각, 사각-

“질문하나 해도 될까요?”

“…….”

길이 조절을 끝마치고 삐치지 안 토록 다듬고 있는 알파가 입을 열었다. 워낙 조심스러운 말투였기에 케실리온은 무심결에 머리를 끄덕였다. 무언의 허락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 교단에 집착하시는 지. 아니, 유색의 비드에…”

“…왜냐고?”

케실리온은 알파의 뜻밖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글세…”

‘계약 때문에? 아니…’

‘이 세계를 구해달라고, 드래곤을 부활시켜 달라고. 나를 이끌어준 자와의 약속.’

케실리온은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할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처음으로 인정받은 존재, 나약하기만 하던 자신을 필요로 하는 존재에 대한 보답 일 것이다. 케실리온은 대답을 회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괜한… 질문이었군요. 죄송합니다.”

“됐다. 슬슬 출발하지…”

“아!”

알파의 사과에 케실리온은 몸을 일으키며 떠날 채비를 갖추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는 없다. 제니어스를 떠나, 세상 어딘가에 숨어 있을 유색의 비드를 찾아 떠나야 한다. 교단을 위해서든, 다른 존재를 위해서든, 반드시 유색의 비드를 이용해 용족을 깨워야 한다.

덜컹-

“어맛!”

쿵!

케실리온이 문을 열자 누군가 케실리온의 발치로 넘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헤헤헤…”

“…….”

실실 웃으며 회피하는 레나를 보며 케실리온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프린에게 시선을 보내며 머리를 끄덕였다. 무언의 동정을 보낸 케실리온은 알파에게서 마령검을 받으며 허리에 찼다. 그리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제니어스의 저택에서 빠져나왔다.

대륙력 1911년 4월 1일

제니어스의 축제가 끝 난지 한 달이 지난 시간이며, 케실리온의 행보가 이어갈 시간이다. 내상의 회복을 끝으로 케실리온의 멈춰 있던 행보는 시작 된다. 그것은 제니어스의 시작이며, 역사의 시작이다.

발전이 없던, 제니어스의 앞에 놓인 하르그의 문물과 부흥을 이어 받아 통합 제니어스로 명명된 자작과 백작 정도의 영지를 보유하게 된 제니어스는 커다란 대 영지로 발전 할 것이다. 거기다 500명에 이르는 대 군단과 50명에 이르는 최강의 기사단, 즉 실버 울프가 있기에 그들은 끝도 없이 강해질 것이다.

휘이잉-

케실리온의 저택에서 나오자, 시원하고 경쾌한 바람이 몰아쳤다. 짧게 잘린 은발이 부스스 바람을 따라 춤을 추기 시작하자, 양옆에 서 있는 레나와 알파, 그리고 프린의 머리칼이 따라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빰빠라- 빰빰!

금빛으로 도금된 나팔이 요란하게 울리며, 어디선가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온다. 하늘에서는 언제 준비 한 것인지 꽃잎이 떨어지며 케실리온의 걸음걸음 마다 뿌려진다. 머리색은 모두 달랐지만, 해맑은 표정은 같았다.

“케실리온님이다!”

어린 아이들을 시작으로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 까지, 나서며 케실리온의 앞길에 축복을 기원했다. 그리고 제니어스의 기사단이 되어버린 실버 울프들이 앞으로 나서며 열 맞춰 길을 만들었다.

“발검(拔劍)”

채챙!

하늘로 치솟은 검에서 파란 오라가 치솟으며 케실리온에게 길을 열었다. 진한 감동이 몰려왔지만, 케실리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인간들의 행렬과 줄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영지의 해자까지 도달했다.

도르래를 따라 내려오는 해자를 보며 케실리온은 살짝 뒤로 몸을 돌렸다. 뒤에서 급히 뛰어오며 소리치는 소녀가 보였다. 평소 잘 입지도 않던, 파란색 드래스를 입고 있었다. 얼굴에는 약간의 홍조가 드리워 있었기에 귀여움과 아름다움이 어우러졌다.

“케실리온! 고마워-”

휘이잉-

에레노아의 목소리에 어디선가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그녀의 주위에 맴돌았다. 그 순간, 그녀의 뒤에 나풀거리는 꽃잎 사이로 긴 흑발을 나부끼며 청의를 입고 있는 사내가 눈에 들어왔다.

“풍…운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에레노아의 후광에 비치는 풍운지의 모습에 케실리온은 머리를 살짝 숙였다. 태양이 만들어내는 환상에 케실리온은 한차례 떨리는 마음을 진정 시키며 다시 에레노아에게 시선을 주었다.

더 이상 보이지 않는 풍운지의 모습, 하지만 확신 할 수 있었다. 에레노아는 풍운지의 환생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솨아아-

꽃잎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음율에 정신을 차린 케실리온은 무심하게도 몸을 틀며 제니어스의 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거지? 케실리온! 그땐… 난 정말로 널…”

에레노아의 음성이 아련하게 들려왔지만, 마지막 말을 들리지 않았다. 심하게 몰아치는 봄바람에 묻혀 버린 것이다. 케실리온의 청력으로도 들리지 않은 음성은 제니어스에 머물렀다.

‘다시 온다면… 나의 친우(親友)이자 사부(師父)를 만날 수 있기를…’

케실리온의 아련한 소망은 에레노아의 들리지 않을 말과 어우러져 사라져 버렸다.

“흑…”

“따라가지 그랬느냐. 아무도 널 말리지 않았을 게다.”

“아버님… 하지만, 하지만…”

케실리온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금빛의 태양이 모든 것을 앞을 가려버렸다. 실버 울프들은 그림자마저 사라질 때까지, 오라를 내뿜을 생각인지, 푸른 오러가 일렁이고 있었다. 오직, 에레노아만이 슬피 울며 일레인 남작의 품에서 눈물을 삼켜야 했다.

“다음에 온다면 반드시, 바뀐 영지를 보여주겠어요.”

“하하하! 그래, 그래… 반드시 그분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위대한 영지를 만들어 보자꾸나. 안 그렇소? 실버 울프 단장!”

“하하하! 아가씨, 반드시 명성이 하늘을 찌를 듯한 영지를 만들겠소. 이 로이젠 약속하오!”

일레인 남작과 로이젠 단장의 말에 에레노아는 굳게 주먹을 쥐었다. 도움을 받은 만큼, 몇 십 배로 돌려주겠다는 의지가 바람을 따라 흘러갔다. 그 순간, 에레노아의 귓가에 아련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리고 펼쳐진 환상 속 인물을 보며 아릿한 마음이 전해졌다.

[바람은 자유를 상징하니… 나의 의지 역시 자유롭구나. 바람이 하늘을 떠도니… 나의 영혼조차 자유롭구나.]

바람이 몰아친다. 그 바람에 한 사내의 몸이 가루로 흩날린다. 어떤 빛보다 청아한 느낌의 색감이 바람에 따라 흩날리자, 옆에 있던 검마저 주인을 따라 사라지듯 흩날리는 가루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휘이잉-

“제니어스를 최고의 영지로!”

“와아아아!”

갑작스럽게 꽃잎과 거센 바람이 몰아치자, 영지민들의 함성이 영지 전체에 울려퍼졌다. 그리고 멀리 보이는 하르그의 영지에서도 일레인 남작과 케실리온은 연호하는 음성이 떠나갈듯 울렸다.

“누구지… 풍운지라니?”

에레노아 꽃다운 방년 11세, 갑작스런 자아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왔다. 그 혼란이 그녀를 어떻게 이끌어 줄지는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 그리고 케실리온의 행보는 끝이 없을 것이다. 약속이 이행되는 그날 까지…

에리스의 던전(1) - 비밀의 문

쾅-

옥좌가 흔들린다. 태양의 보은을 받지 못한 듯, 칙칙하고 차가운 느낌의 성은 바람에 흔들린다. 황금빛 옥좌에 앉아 있는 백색의 로브를 입은 남자는 옥좌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검은 흑발의 여인을 쓰다듬었다.

백색의 로브사이로 비치는 창백한 피부와 화상의 흔적, 그리고 기이하게 뒤틀린 얼굴은 흉측하게 보였다. 과거 대단한 전투가 있었던 것인지 벌어진 입 사이로 혈향이 가득 뿜어졌다.

“조안… 그녀석이 실패 했다고!?”

“예! 교주 실베르트…”

“그만!”

실베르트라고 불린 교주는 오른팔을 쓰다듬고 있는 여인을 뿌리치며 옥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백색의 로브로 가려진 얼굴이 미세하게 들어오는 태양빛에 비춰졌다. 백금발의 머리칼이 나타나자, 주위에 있던 자들은 머리를 숙였다.

“언제나 방해하지! 보옥도! 유색의 비드도!”

짜증이 섞인 목소리, 과거의 울분을 참지 못하는 것인지 그는 마나를 끌어 올리며 주위를 긴장 시켰다. 이곳은 동쪽의 제국, 테라스였다. 그 중심부에 위치한 황성, 그리고 옥좌가 있는 중앙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는 불사교의 교주였다.

으드득!

“이번에는 반드시 취해야 할 것이야! 나의 젊음을… 힘을 위하여! 테라스의 교리를 저버리는 족속을 처단하기 위해!”

“우리들의 신 실베르트의 명에 따라, 이루어 질것이옵니다!”

불사교의 다른 이름, 테라스, 조제현과의 마지막 일전 속에서 우연히 2계로 진입해 버린 불사교의 교주다. 괴물 같은 모습은 차원이동의 분해 작용에 의해 과거의 모습을 찾았지만, 전투의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

씻을 수 없는 치욕과 고통! 보옥을 노린 자의 대가와 말로라는 생각 보다, 복수와 분노만이 그를 이끌었다. 그 녀석만 없었다면, 지금쯤 지구를 지배하며 편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쾅!

“시그널, 너를 믿어 보겠다. 유색의 비드를 취해 마신에게 소원을 빌겠다. 반드시!”

“예, 나의 신이여… 조안과는 다를 것입니다.”

실베르트의 명에 푸른빛과 어두운 빛이 감도는 로브를 입은 사내가 조용히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그 사내는 조용히 엡솔루트 가든으로 텔레포트를 사용했고, 황성에서 사라졌다. 불필요한 마나도 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의 몸처럼 쉽게 이동할 뿐이다.

“이리와라, 나의 노예.”

시그널이 떠나자, 실베르트는 멀리 떨어져 있는 검은 머리의 여자를 향해 손짓했다. 그녀의 표정은 무표정했으며, 일체의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감정도 느낄 수 없는 얼굴이었지만, 마치 조각된 얼굴처럼 아름다웠다. 그녀는 테라스 제국의 하프 드래곤, 그녀의 이름은…

“멜리스(Malice : 증오)”

“예, 주인님…”

“벗어라.”

치이익-

간단한 수식어들, 하지만 내용은 범상치 않았다. 조금씩 벗겨지는 옷자락과 실베르트의 손에 들려 있는 인두와 채찍, 교주는 멜리스라는 하프 드래곤을 상대로 과거의 상처를 씻기 위한 원한의 도구였다.

조제현에게 당한 만큼 돌려주고 싶은 인간의 욕망, 그것은 분노였고, 쾌락이었다. 붉게 타오르는 인두는 점점 멜리스의 등과 얼굴에 닿으며 타는 냄새가 퍼져나갔다. 가녀린 여자가 견디기에는 고통스러웠지만, 멜리스의 얼굴에는 일말의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하프 드래곤이라는 특성상, 블랙드래곤의 마나가 그녀를 지켜 줄 뿐이다.

아무리 감정이 없는 멜리스라고 할지라도, 마음속에는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있을 지, 없을 지도 모르는 마음속의 영웅…

‘나의 왕이시여, 부디 저에게도 시련을 견딜힘을 주소서. 저 더러운 인간을 처단할…’

*    *    *

엡솔루트 가든

절대자의 정원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산맥은 란델 제국과 테라스 제국을 가르는 영토 분기점이 된다. 동쪽과 서쪽,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중앙선. 과거 드래곤의 보금자리였지만, 이제는 몬스터들의 보금자리로 전락해버린 정원!

그 정원은 대륙의 중심을 시작으로 남쪽으로 뻗어가는 산맥의 허리는 란델 쪽으로 기울어졌고, 북쪽으로 뻗어가는 산맥의 허리는 테라스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마치, 하나의 방파제 역할을 하는 것인지 남쪽으로 기울어져 가는 산맥은 제니어스를 보호하는 형국이다.

마침, 제니어스로 향하는 청암색 로브를 입고 있는 사내가 거친 숨결을 토해내며 앞으로 전진 하고 있다. 이상하게도 산맥의 주위에는 눈보라라 몰아친다. 마치, 블리자드(Blizard)라는 마법이 펼쳐진 것처럼 끝도 없이 몰아친다.

허억- 허억-

인간의 피부를 얼게 만드는 눈보라를 헤집고, 로브의 사내는 점점 제니어스로 향한다. 발 목 까지 차오르는 눈밭 위를 미끄러지듯 움직이는 신기까지 보여주며 전진하는 사내였다. 엄청난 바람에 뒤섞인 얼음덩이가 사내를 향해 뛰어들었다.

“방해하지 마. 실드(Shield)!”

캉-

방심도, 어설픈 동작도 없다. 정확하게 날아오는 얼음덩이를 향해 투명한 지팡이를 휘둘렀다. 얇지만, 넓게 퍼지는 실드는 어떤 방어마법 보다도 견고했다. 그는 테라스 제국을 떠나, 머나먼 타국에 위치한 제니어스로 향하고 있다. 목적지는 바로, 에리스의 던전!

“나의 신이시여. 전, 조안과 다릅니다.”

에리스의 던전으로 향하는 자는 테라스 제국의 마법사 시그너였다. 테라스 제국은 기사보다도, 마법사가 많은 나라다. 추위와 식량이 부족하며, 대륙간의 이동이 불편한 곳인 만큼 약탈은 필수다. 때문에 마법사의 육성은 필수적이다.

그 정도로 마법사의 육성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존재는 다름 아닌, 테라스 제국의 황제이며, 교주이자, 신인 실베르트다. 그가 가장 처음 테라스 제국에 출현 한 것은 100년 전, 허름한 옷차림에 흉측한 외모를 한 사내였다.

언어도 통하지 않았으며, 누구에게도 허리를 숙이지 않았다. 그가 가장 처음 한 일은 이상한 교리를 테라스 제국에 널리 퍼뜨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차츰 테라스 제국의 종교를 장악하는 일, 마침내 그는 교주가 되었으며, 테라스 제국의 신이 되었다. 

그의 나이는 짐작으로 160세, 100년 이상을 살고 있는 그는 신적인 존재다. 더 이상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다. 그 존재를 떠올린 시그너는 지팡이를 굳게 쥐었다.

“빙염의 마법사 시그너, 당신을 만족시켜 드리겠습니다.”

빙염의 마법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는 추위를 타지 않는다. 만년설의 강한 추위에도, 설원지대의 차가운 대지도 그를 막을 수는 없다. 남부로 향해, 그의 명을 완수해야 한다. 어떤 적이라도 물리칠 자신이 있다. 어떤 방해도 이겨낼 자신이 있다.

에리스의 던전 속에 있을 유색의 비드를 찾아 회수하는 것이 시그너의 임무이자, 목표다. 이유는 자신의 신이 시킨 일이며, 그가 기뻐할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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