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스의 던전(1) - 비밀의 문
언제나 안개가 가득한 곳… 속고 속이는 양육강식의 세계가 펼쳐진 험준한 산. 일명 ‘포그 마운틴’이라고 불리는 산의 중턱에 묘한 일행이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포그 마운틴이었지만, 선두에 서서 걸어가는 소년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아… 힘들어. 천천히 좀 가.”
보라색 머리칼을 한 소녀가 땀을 훔치며 선두의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차가울 정도로 시린 눈동자가 안개를 뚫고 선명한 안광을 터뜨리며 소녀를 내려다 봤다. 주위는 서늘한 기운의 영향인지 한기가 몰아친다.
“분명, 내가 그 마을에 대기하라고 했을 텐데?”
“뿌- 심심하다 뭐!”
볼을 부풀리며 혀를 내미는 레나의 모습에 케실리온의 표정이 살짝 흔들리며 눈을 부라렸다. 원래 케실리온의 의도는 레나와 프린을 마을에 맞기며 알파와 오르기로 생각했다. 엄연히 유색의 비드는 자신과 신전의 일이다.
타인이 끼어들 입장이 아닌 것이다. 물론, 그것의 생각은 케실리온의 주관이다. 포그 마운틴은 약한 몬스터가 주로 살고 있지만, 사람을 속이며 몬스터를 속이는 영악한 몬스터가 주를 이루고 있다. 자칫, 함정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케실리온의 고생이 이만저만 아닐 것이다.
버려두고 가기에는 왠지 꺼림칙하며, 일일이 말대꾸하기에도 뭔가 어색한 상황이었다. 더욱이 알파와 레나간의 이상한 신경전은 케실리온을 예민하게 만들었다. 프린이야 워낙 말이 없으며, 정령에 관한 책을 탐독하고 있었기에 가장 편한 상대(?)였다.
부스럭-
“좀 쉬다가…”
“쉿!”
케실리온의 기감에 뭔가 걸렸다. 바닥의 나뭇가지를 밟은 것인지 가까운 곳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케실리온은 능숙하게 레나의 입을 틀어막으며 주위를 향해 마기를 분출했다.
파팟!
넓게 퍼지듯 사라져 가는 마기는 주위의 탐색하는 디텍트(Detect) 마법을 응용해 기운을 퍼트리는 것으로 마기가 스쳐지나가면서 닿는 생명체를 탐색하는 것이다. 물론 케실리온의 예민한 기감도 있지만, 빠른 시간 안에 찾아내는 방법으로는 마기를 분출하는 것 외에는 딱히 없다.
느껴지는 파장의 감촉에 케실리온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요즘 잦은 전투를 치르고 있었기에 그림자 속에 검을 넣는 것은 사치였다. 물론 검을 허리에 차고 있으면 심적 안정을 찾을 수 있지만 거추장스러운 것은 피 할 수 없다.
스르릉-
잔잔하게 퍼지는 발검에 알파와 레나, 프린 역시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케실리온 혼자라도 다 처리 할 수 있겠지만, 주위의 지형과 환경은 저절로 전투태세를 갖추게 만들었다.
“찝찝해.”
레나는 안개 때문에 느껴지는 한기와 물기에 미간을 찌푸리며 레이피어를 들어올렸다. 아직 11살의 나이 때문에 근력이 고르게 발달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무게가 가장 가벼우며, 어린이 용(?)으로 만들어진 아주 가벼운 레이피어를 애검으로 사용했다.
보통의 레이피어보다도 가벼웠기 때문에 자칫 강도가 약해 질수 있지만, 케실리온의 강화 마법 덕분에 부러질 걱정은 없었다. 거기다. 케실리온이 전수해준 검법은 레나의 수련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저벅-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멀리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에 케실리온은 그곳을 향해 살기를 뿜어내며 경계했다. 안개로 비치는 모습과는 다르게 가벼운 걸음이었다.
“인…간?”
알파의 말에 긴장을 푼 것인지 레나, 프린, 알파 순으로 전투태세를 풀었다. 하지만, 긴장을 푼 것이 잘못 된 것일까? 갑작스럽게 안개로 비친 인간의 모습은 거대한 크기로 불어났다. 거기다 흉포함 까지 더해 거대한 포효가 울려 퍼졌다.
“크와아!”
쿵쿵!
가까이와 있다고 생각했던 존재는 멀리서 묵직한 소리를 내며 이곳을 향해 뛰어들었다. 케실리온의 눈에 비치는 존재의 모습은 녹색의 피부에 조잡하게 만들어진 거대한 클럽(Club)을 들고 있었다. 전형적인 오우거의 모습이다.
“멍청한 것들!”
스슷- 푸확!
녹색의 강철 같은 피부. 상체가 잘 발달한 육중한 몸을 가진 오우거가 단 일수에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어깨에 있는 쇠골을 시작으로 옆구리의 2번 갈비뼈를 가르고 지나간 자리에는 선명한 검흔(劍痕)과 마기의 흔적이 돋보인다.
쿵!
몬스터의 제왕으로 불리는 오우거가 단 일수에 뒤로 쓰러지자 레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프린이야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실책에 대해 생각하는지 얼굴을 구기고 있었다. 그리고 대지를 적시는 눅눅하고 끈적이는 녹색 피는 비릿한 향을 내뿜으며 땅속으로 스며들어갔다. 순간 찾아오는 정적과 산의 고요함에 일행들은 어정쩡한 자세를 취했다.
“멍청한 것들… 정도껏해라.”
꾸벅-
“죄송합니다. 케실리온님.”
“미안해…”
“미안하다. 나의 실책.”
알파와 레나, 프린 순으로 케실리온에게 머리를 숙이고 있었다. 확실히 케실리온의 지적은 옳았다. 아무리 안개로 인해 벌어 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고는 하지만, 피아구분은 확실히 해야 한다. 설사 인간이었다고 할지라도 적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무기에 손을 떼는 것은 자살행위다.
휙!
케실리온은 마령검을 거칠게 휘두르면서 오우거의 피를 털어냈다. 길게 뻗어가는 녹색 핏줄기는 세 명의 여자 앞에 흩뿌려 지며 고약한 냄새를 뿜어냈다. 그 세명은 순간 움찔했으며, 그 모습을 보며 케실리온은 마령검을 납검했다.
“나의 무력이 평범했다면 피를 흘리고 있을 자는 너희와 나다.”
케실리온은 그 말을 남기고는 갈 길을 재촉했다. 2일이다. 제니어스를 출발해 가까운 마을을 들려 ‘포그 마운틴’의 정보를 얻고 산행을 한지 꼬박 2일… 11살 꼬마 여자애 두 명과 200살 뱀파이어가 걸어온 길은 고작 목적지의 반 밖에 오지 못했다.
평지에 비해 걸음이 늦어지는 곳이라곤 하지만, 너무 늦다. 분명 케실리온은 모든 이에게 가벼운 보법을 가르쳤다. 그 보법만 하더라도 산행은 충분 할 터였다. 하지만 좀처럼 걸음의 페이스와 길이 좀처럼 보이지 않자 짜증이 치솟았다.
“멍청한 것인지… 겁이 없는 건지.”
케실리온의 쓴 소리에 괜히 미안해진 알파와 레나는 뒤에서 투닥 거리는 것을 중단하고는 조용히 뒤를 따랐다. 불똥이 튈 것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생각이다.
“아줌마… 당분간은 휴전.”
“…아줌마라는 소리는 듣기 거북하군요.”
우뚝!
둘의 목소리가 퍼지기 무섭게 케실리온의 걸음이 멈췄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알파와 레나는 몸을 살짝 떨었고, 케실리온을 주시했다. 혹여 쓴 소리를 한다면 어쩌나 하는 얼굴들이었다.
“모두 뒤로 물러난다!”
“에…!?”
케실리온의 다급한 목소리에 말수가 적은 프린 까지 의문어린 목소리를 터트렸다. 그 순간 ‘포그 마운틴’의 중턱에는 거대한 폭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