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스의 던전(1) - 비밀의 문
직사각형의 흑색(黑色) 제단이었다.
정확하게 성인 두 사람이 동시에 누울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제단이었다. 그리고 제단의 벽면은 바람, 물, 땅, 불, 어둠, 빛을 뜻하는 문양들이 음각되어 있었다. 제단의 양 옆에 튀어나와 있는 여섯 개의 구슬은 투명하면서도 오연히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회상과 같은 표정으로 제단을 보고 있던 케실리온은 천천히 앞으로 손을 뻗었다. 금방이라도 무언가 튀어 나올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 무간지옥에 발을 딛었을 때 보았던 환상이 오버랩 되며 앞으로 뻗던 손을 거두어드렸다.
“으음…”
케실리온은 눈썹을 중앙으로 모으며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과거의 회상에 안좋은 기억이라도 떠오른 것인지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다. 그렇게 거두어들였던 손을 다시 뻗으며 제단의 중앙에 손을 올렸다.
빠직-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한기와 거친 표면의 느낌보다. 갑작스럽게 정전기라고 일어난 것처럼 따끔한 느낌이 전해졌다. 하지만, 그 현상은 단순한 생각이었던지 실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잠시 제단의 온도를 느끼고 있던 케실리온은 무언가를 찾기 위해 몸을 굽히거나 제단 주위를 서성거렸다.
“아마 이곳이 페덜의 돌과 보물이 있었던 장소 같습니다.”
케실리온의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알파는 목을 가다듬으며 맑고 청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고운 미성이 흘러나오자 케실리온은 굽혔던 허리를 펴며 제단 위의 흔적을 살펴보고는 머리를 끄덕였다.
“확실히… 다른 곳에 비해 제단의 중앙부가 밝은 색을 띠는 군.”
케실리온이 가리킨 곳은 ‘페덜의 돌’이 있던 곳이라고 추정되는 원형의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또한, 주위에 널려 있는 음영들을 보건데 각가지 보물들이거나, 어떤 장치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마나석을 두었던 장소 일 것이다.
저벅, 저벅
던전에 관심이 가는 것인지 프린은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정령을 이용해 마나가 깃든 장소를 찾고 있었다. 케실리온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었기에 그녀의 행동을 묵과한 케실리온이다.
“이곳, 저곳… 그리고 동굴의 천장에서 마나의 흔적을 찾았어. 그리고 제단의 바닥을 이루고 있는 석재를 보건데. 단순히 제단을 지탱하기 위해 만들어진 바닥이 아니야.”
“호오…”
케실리온은 프린을 보며 감탄어린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안력과 판단력으로도 찾아내지 못한 제단의 바닥에 대한 비밀을 하나하나 풀어내는 능력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평소에는 말이 없지만, 이런 두뇌활동과 같은 일에는 의외로 활동력을 보이는 프린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움직이는 지도 알고 있겠군!?”
짧은 소견으로 이정도의 정보를 파악하는 프린의 능력을 크게 사서 케실리온은 더 큰 기대를 걸었다.
“마법전기에 있는 내용 중. 마법사의 던전 편에 의하면 문을 여는 키워드로 움직이거나 일정패턴의 마나를 불어 넣는 것으로 움직인다고 했다.”
마법전기는 역사와 현존하는 대마법사의 지식을 첨가해 현자의 서라고 불리는 책이다. 물론, 일반적으로 구하기 어려운 최고가의 서적이었다. 서대륙에서 100권이 채 되지 않은 희귀 도서였다.
그 책이 란델 제국 아카데미가 있는 중앙수도 미스텔의 도서관에 있는 서적으로 아카데미의 학생과 귀족 중에서도 마법사 계열의 존재만이 탐독 할 수 있는 서적이다. 그 서적에는 마법사에 관한 내용은 필두로 담고 있다.
심지어 란델 제국, 불꽃의 대마법사이자, 페이린 후작이라고 불리는 그녀가 펼쳐낸 마법고찰도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방대한 서적이다.
“마법전기라…”
케실리온은 프린의 말에 지금껏 잘 사용하지 않았던 마법을 떠올렸다. 지옥에서 무공을 배우면서 오직 무공을 위해, 무공을 위한 수련만 해오던 케실리온은 마법에 대한 효과를 그렇게 보지 못했다. 때문에 마법을 등한시 했기에 무공만을 이용해 적을 상대 했다.
그러나!
아크리치 벨즈비트를 상대하면서 알게 되었다. 2계의 존재는 무공만으로 처리 할 수 없는 녀석도 있다.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마법에 대한 수련도 같이 병행하기로 마음먹은 지 근 한 달이 되어 가는 상황이다.
“딱히 떠오르지 않는 군.”
케실리온은 이 상황을 타개할 마법을 떠올렸지만 딱히 떠오르는 마법은 없었다.
“키워드도 몰라. 마나 패턴도 알 수 없어. 방법은 강제로 여는 것 뿐.”
“과연…”
케실리온은 프린의 짧은 조언에 머리를 살짝 끄덕였다. 잠시 학문적인(?) 이야기가 오가자 알파와 레나는 침묵을 유지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솔직히 자신들이 끼어 들 정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확실히… 혈도를 뚫는 방법과 같군. 깨달음이 없다면 강제로 기문을 여는 수밖에…”
주억주억
케실리온은 긍정하면서 제단 앞에 섰다. 정공법이 통하지 않는 다면 속성법으로 빨리 처리하는 것이 좋다.
“1미터 떨어지고 주위를 경계해라.”
케실리온은 짧게 말하고는 제단 위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양쪽 눈을 감으며 제단을 향해 천천히, 아주 천천히 기운을 불어넣으며 마나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하아- 이제 끝난 거야!?”
“케실리온님의 말씀을 못 들으셨습니까? 1미터 떨어지라고 하셨습니다.”
“하아?”
레나가 케실리온의 말을 무시하며 나서려 하자, 알파가 그녀를 붙잡았다. 알파의 말이 잔소리로 들렸던지 레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순간, 레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존재가 있었다.
“프린…?”
절래
“아, 알았어. 칫! 나만 미워해.”
레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머리를 좌우로 젖는 그녀의 행동에 레나는 힘없이 어깨를 떨어트리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케실리온의 의도대로 1미터 가량 떨어진 후, 제단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시했다.
우웅!
짧게 진동을 거친 제단은 케실리온을 중심으로 겹겹이 마나의 층을 만들어냈다. 처음 마나의 흔적을 찾았던 프린은 자신이 찾은 흔적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마나의 층에 다소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혹시 케실리온의 무시무시한 마나에 던전이 무너지지 않을 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불안은 기우에 불과했던지 케실리온을 중심으로 점차 고른 마나의 기운이 퍼지며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편, 케실리온의 입장에서는 약간 다른 상황이었다.
‘제단이 마치, 인체의 단전과 같다.’
케실리온은 그렇게 느꼈다. 제단이 단전이라면 주위에 퍼져 있는 마나의 흔적들은 기혈들이다. 그 기혈을 통해 제단의 양옆에 붙어 있는 묵색 구슬로 유입되고 있었다. 그 양이 어마어마했기에 케실리온의 이마도 흥건히 땀이 맺힐 정도였다. 케실리온은 전력을 다해 기운을 불어 넣고 있었지만, 떨어져 있는 알파와 레나, 프린 등은 가볍게(?) 행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쭈우욱!
케실리온이 체감으로 느끼기에 ‘쭈우욱’이라는 느낌이들 정도로 기운을 불어넣자 제단의 여섯 개의 구체는 그린, 블루, 골드, 레드, 블랙, 실버의 색을 채워가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에 떠오른 색깔은 단영 실버였다. 그렇게 여섯 개의 구슬에 불이 켜지자, 제단은 천천히 부드럽게 열리기 시작했다.
크그긍! 스르르릉-
처음에는 억지로 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 다음 부터는 기름칠이 잘된 문처럼 부드럽게 제단이 빗겨지며 열리기 시작했다. 곧 제단의 아래는 칠흑처럼 어두웠다. 하지만 케실리온이 계단에 발을 딛는 순간 거짓말처럼 횃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팟- 팟- 파파팟-
연이어 켜지는 소리에 케실리온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제단 아래에는 다른 공간이 있었다. 케실리온은 뒤쪽에 서 있는 3명의 여자들을 불러들이며 비밀의 문으로 걸어들어갔다.
툭!
“음!?”
케실리온은 위쪽 제단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잠깐 걸음을 멈추며 구멍 위를 쳐다봤다.
“케실리온님, 뭔가 문제라도…?”
“…착각인가? 출발하지.”
케실리온은 미세한 기척에 잠깐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였지만, 알파의 재촉에 던전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케실리온의 감은 틀리지 않았다. 멀리서 은신을 하고 있던 존재가 마법을 캔슬 시키며 제단 위에 올라서 있었다.
“크크큭… 의외로 감이 좋은 놈이군. 이 빙염의 마법사 시그너의 기척을 읽다니. 하지만, 주위의 온도가 차가운 이상 허공으로 보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의문의 존재는 테라스 제국에서 파견된 빙염의 마법사 시그너다. 흑마법사 조안의 실패로 유색의 비드를 얻는데 실패한 이래, 그를 유색의 비드에 가장 근접하다고 알려진 에리스의 던전으로 파견된 것이다.
그리고 그의 특기는 칭호와 같은 빙염계 마법이다. 자신의 체온을 주위의 온도에 맞게 변화시키는 것은 특기중의 특기다. 그렇기에 그의 은신 능력은 주위의 추위와 맞물려 케실리온의 감을 흩트리게 할 정도로 특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케실리온이 어디 보통의 존재던가.
그의 발자국소리와 미세하게 퍼지는 심장의 파장은 케실리온을 피해 갈 수 없다. 그렇기에 케실리온이 한 순간 위를 올려다 보며 의심했던 것이다. 만약 알파만 아니었다면, 시그너가 발각 되는 것은 수초의 시간이 흐르지 않더라고 충분했을 것이다.
“멍청한 조안 녀석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겠습니다. …나의 신이여!”
시그너는 차갑지만 비장한 표정으로 케실리온이 사라진 비밀의 문을 통해 들어섰다. 통로는 붉게 타오르는 횃불이 일렁이고 있었고, 멀리서 강한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제각각의 발소리가 전방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