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3화 (223/269)

에리스의 던전(2) - 넌 누구지?

휘이잉-

거센 바람이 몰아친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공터의 끝자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바람의 영향으로 케실리온의 은발이 흩날렸고,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을 느꼈다. 단전에서부터 무언가 들끓는 느낌처럼 케실리온은 두근거리게 했다.

저벅, 저벅!

케실리온은 바람이 불어오는 곳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기척을 최대한 줄였음에도 발걸음은 커다랗게 들려왔다. 풍향은 앞에서 뒤로 불어오고 있었기에 기감을 최대한 뒤로 돌렸다. 혹시 있을지 모를 암습에 대비한 것이다.

왠지 모르게 뒤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고 있었기에 케실리온은 차분하게 걸음을 겼다. 자신의 감이 틀렸다 할지라도 손해는 없다. 풍향의 영향으로 뒤쪽에서 들려오는 걸음과 냄새는 전혀 알아차릴 수 없다. 이럴 때일수록 주위를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다.

저벅, 저벅- 우뚝!

상층부에서 내려온 입구를 중심으로 케실리온의 걸음이 정확하게 100보에 이르렀을 때, 묘한 느낌을 받은 케실리온은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이질적인 기운이었다. 발에서부터 시작된 기운에 케실리온은 급히 뒤로 10보 이상 물러났다.

팟!

‘지금까지 함정들은 단순했다. 넓은 공터에 무슨 기관이 있을지 모른다.’

케실리온이 밟았던 장소에서 푸른색 마나가 하늘로 치솟았다. 원기둥을 만들어내며 치솟은 푸른 마나는 웅장하기 그지없었다.

우웅!

공터의 바닥이 진동하며 원기둥에서 뿜어진 푸른 마나가 주위를 감싸는 순간 케실리온은 아찔하게 퍼지는 빛에 호신강기와 실드를 펼치며 시력을 보호했다. 강한 빛으로 시력을 잃는 순간 가장 무력해 지기 때문이다.

빛이 퍼지기도 전에 모든 준비를 마친 케실리온은 주위를 경계하며 허리춤에 매달려 있던 마령검을 뽑아들었다. 몇 번이고 연습했다는 듯이 케실리온의 발검(拔劍)은 신기에 달해 있었다.

팟- 팟- 팟!

케실리온을 우습게 보 듯 그 빛은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어두운 공터를 밝히는 빛일 뿐이었다. 괜히 심력 소모를 한 케실리온은 마령검을 다시 허리춤에 꽂아 넣으며 눈을 메우기 시작하는 건물을 쳐다봤다.

순백의 색인 흰색을 바탕으로 한 웅장한 신전모양의 건물이다. 건물로 들어서는 부분은 계단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건물을 지탱하는 커다란 기둥은 그 건물은 웅장하면서도 고풍스럽게 보이게 하고 있었다. 내부가 훤히 보이는 신전 내부에는 많은 수의 기둥이 줄지어 서 있었다.

“저건… 뭐지?”

신전은 1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1층은 그저 2층을 이어주는 장소였던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이 보였다. 그리고 케실리온의 시각을 잡아끄는 하나의 물체는 2층은 커다란 벽과 하나의 제단이 놓여 있었다.

비밀의 문을 열게 해준 제단과 같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케실리온의 시각을 잡아끄는 것은 제단이 아니었다. 바로, 2층 석벽에 그려진 벽화였다. 

드래곤과 뿔이 달린 인간과 싸우고 있다. 운석이 떨어지며 불기둥이 치솟는다. 구름은 검은색으로 표기되어 있었고 멀리서 절벽 아래를 굽어보는 존재는 무심히 드래곤과 뿔이 달린 인간과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다.

먹구름에서는 빗방울이 떨어졌고, 주위의 산들은 불인지 안개인지 연기가 자욱했다. 그리고 동굴 입구에서 보았던 그림과 이어지듯 드래곤 한 마리가 동굴을 쳐다보고 있었고, 동굴 속으로 들어서는 여인의 손에는 지팡이와 벌레모양의 구슬이 쥐어져 있었다.

다음 그림은 제단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케실리온의 걸음은 신전을 향해 방향을 바꾸었다. 그 순간 케실리온의 감각에 누군가 걸렸다. 케실리온의 걸음으로 100보 밖이다.

“누구냐! 썩 나오지 못할까!”

스슷!

케실리온의 몸에서 강한 살기가 뿜어졌다. 기운을 조절할 수 없는 존재들은 오줌을 지리거나 넋을 잃을 것이다. 마나로 몸을 보호하지 않는 이상 케실리온의 위압감을 견딜 수 없다.

*    *    *

시그너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정확히 100보 밖의 허공에 있는 자는 시그너 자신 외에는 없었다. 하물며 자신의 뒤를 미행하는 자는 눈을 씻어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발각 당하다니,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됐다.

“나오지 않는 다면 내가 가마!”

시그너는 갈등에 휩싸였다. 이대로 나서 접전을 치르거나, 후퇴밖에 없었다. 아주 희박한 확률이겠지만 다른 존재가 발각당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지금껏 왜 이 고생을 했던가. 이 순간 발각당한다면 자신의 계략이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빙염의 마법사 시그너, 160살이나 실전을 치르지 않았더냐! 침착하라. 완벽한 투명화 마법이다. 기척도 죽였다. 냄새도 차단했다. 진실의 눈을 가진 엘프라도 찾지 못한다. 침착해라. 시그너.’

시그너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시그너의 말처럼 진실의 눈을 가진 엘프라도 시그너를 찾기란 어려울 것이다. 투명화 마법에 기척을 줄이는 마법과 체취가 흘러나가는 것을 차단했다. 완벽한 은신 술을 구사하고 있었으며, 거기다 발각되기 가장 어려운 곳인 허공에 있다.

“오냐! 네놈이 나오지 않는다면 내가 가마!”

스르릉!

검이 검집에서 뽑히자 시그너는 급히 기운을 끌어올렸다. 방어와 공격을 한꺼번에 펼쳐 낼 수 있는 4서클의 아이스 월(Ice Wall)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분명히 발각당한 것이 분명했다.

‘먼저 공격한다!’

시그너는 은밀하게 마나를 끌어올리며 케실리온을 향해 마법을 조준했다. 완벽한 마법 운용이다.

스팟-

시그너가 마법을 펼치기 위해 지팡이를 휘두르려는 순간 케실리온의 신형이 시그너의 아래로 향했다. 검이 허공을 가르며 공간을 베어버렸다.

스악- 카앙!

시그너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다. 분명히 자신에게로 날아올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자신의 아래, 정확히 뒤쪽 아래의 허공에 검을 휘두르는 케실리온을 보며 어이없어했다. 한편으로는 안심했다.

눈으로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의 속력이었다. 만약 자신을 타깃으로 정했다면 마법을 펼치기 전에 죽었으리라. 흑마법사 조안이 왜 당했는지 이해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의 마법을 동시에 사용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침입자… 제단에서 떨어져라. 마탑의 맹약에 따라 이곳은 금역(禁域)에 해당하는 곳.”

“까불지 마라.”

허름한 옷차림, 낡을 대로 낡아 있었다. 두 눈은 천으로 가렸으며, 머리칼은 때가 탔지만 붉게 타오르는 모습이었다. 상체와 하체를 잘 단련해 검을 잡기에는 충분해 보이는 모습이다. 붉은 머리칼의 존재가 잡고 있는 검은 대검이다.

길이는 2미터, 검 폭은 무려 6센티미터였다. 무게도 만만치 않은지 팔의 근육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반면 케실리온의 마령검은 롱 소드 보다 긴 1미터정도였고, 검 폭은 3센티미터로 알맞은 크기였다.

“돌아가라.”

“거절하지.”

녀석은 케실리온의 말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창조주인 에리스의 명에 따라 침입자를 섬멸한다.”

아무래도 녀석은 호문쿨루스거나 키메라 일 것이다. 이 던전의 주인인 에리스를 창조주라고 하는 것을 보니 녀석은 과거의 마도병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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