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스의 던전(2) - 넌 누구지?
“휴- 다행히 같이 빨려 들어가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알파는 한숨을 내쉬었다. 레나와 프린은 기절해 있었기에 알파는 레나를 등에 업고 프린을 안았다. 둘의 몸무게가 의외로 가벼웠기에 움직이기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하지만 큰 동작은 못할 것 같았다.
블러드 와일드에 의해 뚫린 바닥을 통해 빠져 나온 곳은 어둡고 칙칙한 공간이었다. 만약 뱀파이어가 아니었다면 한 치 않고 볼 수 없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알파는 발목까지 닿는 물줄기를 따라 천천히 앞으로 전진 했다.
발목까지 오는 물줄기의 물살이 그렇게 빠르지 않았기에 알파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트랩이 있을 지도 모르기에 주위의 기척과 이상한 곳을 몇 번이고 확인한 다음 걸음을 옮겼다.
“으음-”
“콜록- 콜록-”
“아! 정신이 드셨군요?”
알파는 등과 팔에서 움찔 거리며 몸을 떠는 두 소녀를 보며 안심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 어? 앞이 안보여!”
“빛이 들어오지 않는 공간이기에 그렇습니다.”
버둥버둥-
“뭐, 뭐야!”
“가만히 계십시오. 이 어둠에서 앞도 보지 못하는데 방해만 됩니다.”
“윽!”
레나의 행동에 알파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엄포를 놓았다. 프린은 대강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기에 얌전히 알파의 품에 안겨있었다. 약간 불편한 것인지 움찔 거렸지만 알파가 약간 자세를 바꾸자 버둥거리는 것을 멈췄다.
“누구 때문에 물에 빠졌지만 이렇게 살아 있으니 다행입니다.”
“…….”
알파의 말에 레나는 침묵을 지켰다. 레나도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다행히 물을 따라 가면 길이 나올 겁니다. 물줄기가 아래로 향하는 것을 보니.”
알파의 말에 대화는 완전히 끊겼다. 언제 이런 황당한 일을 당해 봤던가. 아마 지금이 처음 일 것이다.
쏴아아-
알파는 물길을 따라 한참을 걸어왔다. 아무리 뱀파이어에다 높은 경지를 지니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은 피로가 누적되었다. 때문에 약간 한숨 섞인 목소리로 레나와 프린에게 말했다.
“하아- 아래로 향하는 구멍입니다. 계속 앞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빛이 보이는 아래로 향하겠습니까.”
“음… 난 아래!”
“아래.”
알파의 말에 레나와 프린은 아래를 선택했다. 어둡고 칙칙한 공간 보다는 빛이 들어오는 곳이 역시 좋은 모양이다. 알파는 둘의 의견을 존중에 아래로 향하는 통로를 향해 폴짝 뛰어내렸다.
탁-
아래로 향하는 통로로 뛰어내리자 레나와 프린은 알파의 품에서 떨어졌다. 장시간 걸었기 때문인지 젖어 있던 의복은 그런대로 말라 있었다. 다만, 모두 피곤한 표정이 역력했다. 빛도 들어오지 않는 공간을 걸어온 것이 정신적으로 피로했던 모양이다.
막상 아래로 내려오니 방향감각을 잃었다. 오직 앞과 뒤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었기에 선택지는 두 가지였지만 한 곳만 선택해야 한다. 자칫 막무가내로 간다면 영원히 길을 찾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휘이잉
방향감각을 잃었던 세 명은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희망을 걸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간다면 길이 나올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도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쳤어…”
“영원히 이곳에 있어야 할지도.”
레나의 말에 프린이 짧게 대꾸했다. 프린의 말 때문인지 약간 어색한 분위기가 되 버렸다.
“…역시 지금 가야겠지?”
“그럴지도.”
“흠흠, 역시 움직이죠.”
레나와 프린의 말에 알파는 헛기침을 몇 번 하고는 바람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어둠을 뚫고 왔던 곳이 오른쪽 방향이었다면 지금은 왼쪽으로 되돌아 가야한다. 바람이 향한 곳이 왼쪽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고통스러울 지라도 바람의 끝자락에 닿는 다면 좋은 일이 있을 겁니다.”
알파의 희망적인 말에 힘을 낸 레나는 가장 앞서 걸어갔다. 다행히 이곳은 길이 꼬여 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무조건 앞으로 향한다면 끝이 보일 것이다.
1시간 후
“좋은 일? 이게 좋은 일이야!?”
레나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짜증과 분노가 치솟은 모양이다. 그 분노는 당연히 알파에게 향해 있었다. 바람을 따라 향한 곳의 종착지에 도착했지만 구멍은커녕 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아아-”
절망어린 표정으로 벽을 쓰다듬는 레나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알파 역시 지쳤다는 표정으로 가로막힌 벽 앞에 서 있었다. 프린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주위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었다.
휘이잉!
“흥! 바람? 또 따라가? 이젠 벽이라고!”
“자, 잠깐! 미세하지만 구멍이 보입니다.”
다시 불어오는 바람에 레나는 짜증을 냈고, 알파와 프린은 눈을 크게 떴다. 미세했지만 벽에서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쿵쿵!
“벽 뒤가 커다란 동굴인 모양입니다. 벽이 얇아요.”
“아까의 바람으로 설명이 되…”
알파와 프린의 말에 레나의 표정은 밝아졌다. 마치 ‘살았다’라는 말을 표정으로 표현한 것 같았다.
“뒤로 물러나 주십시오. 벽을 부수겠습니다.”
“응응! 이제 살았다!”
“피해는 최소한으로…”
알파, 레나, 프린 순으로 말이 오갔고, 알파의 손에는 마기가 어렸다. 잠시 후면 앞을 가로막는 벽이 부셔지리라!
* * *
‘없어…? 내가 왜 그 고생을 했는데. 왜!’
시그너는 제단 앞에 섰다. 그 위에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 구슬이 여섯 개 정도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본 시그너는 왈칵 분노가 치솟았다.
‘진정하자. 중요한 것을 쉽게 줄 리가 없지.’
마음을 가다듬고 있던 시그너는 제단 뒤쪽에 있는 벽화를 보고 눈을 빛냈다. 던전이라는 특성상 중요한 보물은 쉽게 가져가지 못하게 장치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저 벽화가 힌트라는 생각에 뚫어지게 벽화를 쳐다봤다.
‘저 여자가 에리스 인가?’
땅에 끌릴 정도의 회색 망토, 하얀 블라우스와 벨벳 프리츠 스커트를 입고 있는 여자였다. 왕실의 여자가 저런 천박한 옷을 입었다는 것이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허리 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머리칼이 그녀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금발의 머리칼과는 다르게 눈동자는 은빛을 띠고 있었다. 거기다 창백해 보이는 피부였지만 푸석푸석한 느낌이라고는 없는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마냥 본다면 왕의 여인을 그린 모습 같았지만, 양손에 쥐어진 물건이 그녀를 다르게 보이게 만들었다.
투명한 구슬 속 벌레를 쥐고 있는 왼손과 붉은 마나석이 박힌 지팡이를 쥐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녀였다. 그녀가 서 있는 장소는 시그너가 서 있는 곳과 같았다.
‘마지막 벽화는…’
시그너는 마지막 벽화에 시선을 주었다. 마지막 벽화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마법 지팡이를 이용해 제단에 마나를 흘리고 있었다. 어둠의 기운을 잔뜩 머금은 기운을 제단에 주입하자 제단 위 허공에는 기이한 형상의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마지막 벽화까지 쳐다본 시그너는 미소를 지었다. 에리스라는 여자가 한 것처럼 마나만 불어 넣으면 유색의 비드를 손에 넣을 수 있다. 자칫 기운을 방출해 뒤에서 싸우고 있는 녀석들에게 들킬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상관없다.
쿵쿵!
‘뭐, 뭐야! 설마 들켰나?’
시그너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소리에 긴장했다. 설마 정신없이 싸우고 있는 두 명이 자신의 기운을 느끼고 이곳으로 향하는 소리 같았다. 시그너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기운을 불어 넣으며 뒤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휴- 착각이었군.’
정신없이 싸우는 둘의 모습에 안도한 시그너는 허공에서 미세한 문이 열리는 것을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1분 정도면 벽화에서처럼 문이 열릴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