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스의 던전(2) - 넌 누구지?
울컥!
“컥- 역시 무리였던가?”
엔드라는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복부와 입에서 연신 선혈을 뱉어 내고 있었다. 케실리온의 앞에서는 태연한척 하고 있었지만 속과 겉은 만신창이었다. 비록 내부 장기 같은 것이 없는 마도병기었기에 망정이지 인간이었다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
“크하하! 이제 상관없어! 둘 다 지쳤다는 것은 이미 짐작하고 있다.”
“다, 당했군. … 쿨럭- 저, 정신이…”
시그너의 마법에 튕겨져 나간 엔드라는 가물가물 거리는 정신을 간신히 붙잡았다. 제단에서 끝없이 마나를 집어넣고 있는 녀석이 펼친 마법은 엔드라에게 치명적인 작용을 했다. 마도병기인 그에게 있어서 그 마법은 위험한 마법이었다.
“하필이면 …자아해방마법이라니!”
엔드라는 점점 무거워지는 육체를 느끼며 과거 창조주가 존재했던 과거가 떠올랐다. 단 1시간이었지만 세상에 깨어나 처음 만나본 존재. 그리고 사랑한 했던 존재를 떠올렸다.
* * *
대륙력 999년 정복왕 페덜 즉위년 20년 이자, 에리스의 섭정 15년이 되던 해다.
왕국 프리시아가 ‘페덜 왕국’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된 날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시기가 좋지 않았고 대륙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신의 분노로 대륙의 절대자 드래곤이 사라진다.’라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더군다나 왕국의 실질적 지배자이자 어둠의 탑을 소유한 주인 에리스는 마왕을 소환해 정복왕을 해한 것은 물론 왕후인 에리스를 시해했다. 그리고 마족이 발호했다.
동명이인인 에리스라는 점으로 쉽게 무마되었지만 에리스가 소환한 마왕이 말썽을 일으켰다. 신의 분노로 대륙의 절대자가 점점 사라져 가는 형국에 마왕의 발호는 중간계를 어지럽혔다. 그때, 나선 것이 의외의 인물이었다.
쾅!
“흥! 그깟 소문 때문에 왕후이자 마탑의 주인인 내가 움직여야 하는 가!”
“대륙의 주인이며 군주의 섭정이신 에리스님이 나서야 할 일이라고 아옵니다.”
에리스의 앙칼진 목소리에 왕실의 대신들과 관료들이 통촉을 요구했다. 왕좌에 앉아 있는 페덜은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마왕의 소환해 사이한 구슬을 이용해 왕을 주무르고 있는 에리스였다.
그 결과가 팔과 다리, 눈과 혀를 잃어버린 ‘페덜 폰 프리시아’는 비운의 군주이며 비운의 영웅이다. 대륙을 질타하던 시절의 위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왕좌 뒤에서 귀족들의 말을 듣는 에리스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고통이 엄습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륙을 정벌한지 20년… 나의 과오로 왕국의 힘이 기우는 구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대륙의 사활이 걸린 문제 옵니다. 섭정왕이시여! 통촉을…”
“통총하여주시옵소서!”
에리스의 생각이 깊어질수록 귀족들의 말을 커져만 갔다. 이윽고 에리스는 결단이 섰는지 왕좌 뒤에 쳐져 있던 커다란 커튼을 열어 젖혔다.
“대신관료들은 들으라. 섭정인 나 에리스의 명에 따라 대륙 곳곳에 출몰하는 마족을 정벌할 것이며 15년간 준비해온 소환마법을 시행 할 것이니라.”
“그, 그것은 철회된 사안이 아니었습니까! 소환마법이라니… 대륙법에 위배되옵니다. 15년 전 그 일… 헉!”
쾅!
“닥치지 못할까! 이번일은 그냥 넘어가겠다만 또 다시 금구를 입에 올린다면 멸족을 면치 못할 것이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에리스의 발언에 귀족들 중 발언권이 강한 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지만 본전도 찾지 못하고 뒤로 물러나야 했다. 소환마법이 금지 된 것은 15년 전, 그러니까. 페덜 왕을 저렇게 만든 시기가 그 시기였기 때문이다.
본처인 왕후를 시해했으며, 왕을 저 지경으로 만들었으니 뒤늦게 후회한 후궁 에리스가 섭정에 오르면서 만든 법이었다. 대륙의 모든 마법사는 소환마법을 금지로 지정했다. 특히 생명체를 소환하는 마법은 특별히 금지였다.
“섭정의 징표인 이 ‘팔던 완드’로 명한다.”
“섭정의 명을 따릅니다.”
그 발언이 에리스의 두 번째로 잘못된 행동이었다. 그의 행동으로 대륙은 피로 물들었다. 그리고 대륙의 절대자였던 드래곤도 자취를 감췄다. 또한, 페덜 왕국의 끝을 알리는 계기가 된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소환마법이 펼쳐지고 1년이 지난 시점…
찬란하게 대륙을 지배하던 페덜 왕조가 지배하던 왕궁은 함몰되었고 작은 동굴이 하나 자리 잡고 있었다.
대륙을 피로 물들였으며, 마족을 마계로 몰아내며 스스로 마계로 들어간 존재!
마족보다도 더 잔악하며, 마왕보다도 더 강한 존재 그리고 자신을 ‘Chunma’ 명명한 존재의 시작이 된 곳으로 에리스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1년 전 보다 더 늙어 보였으며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잿빛을 띄고 있었다. 그 전쟁으로 왕국은 멸망했으며 대륙은 피로 물들었다. 하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오직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 남아 있을 뿐이다.
[욕망으로 인해 대륙은 더럽혀 졌다. 하찮은 욕망으로, 알고 있는가. 인간이여]
“미천한 존재, 거듭 죄송합니다. 드래곤 로드시여”
금빛으로 꿈틀거리는 드래곤이 사라져 버린 왕국의 땅위에 섰다. 결벽으로 변해 버린 곳을 내려다보는 드래곤의 눈은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너의 욕망과 신의 의지로 소중한 일족의 아이를 마계로 보냈다. 허나 이것도 신의 뜻. 너의 알량한 목숨으로 대륙의 폭주를 막는 것을 영광으로 알라!]
“그럼…”
에리스는 금빛의 드래곤의 눈길을 받으며 동굴로 들어갔다. 애초에 개인 마법 실험실로 내정되어 있던 곳이다. 하지만, 드래곤의 도움으로 번듯한 던전이 되었으며 자신의 무덤이 될 곳을 만들게 되었다.
천천히 동굴로 지나가는 에리스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지팡이를 꽉 움켜쥐며 던전 입구와 가까운 곳에 마지막으로 남길 유서와 같은 것을 쓰기 시작했다.
“풋… 어차피 죽을 목숨. 하찮게 남길 것이 뭐 있다고. 나의 지팡이 팔던. 마지막이겠구나.”
에리스는 벽에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과오를 적은 그림 하지만,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죽어가는 순간 미래를 본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입구와 던전의 마지막 장소에 까지 벽화를 그린 에리스는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스페이스(Space)!”
마지막 마법이 될지 모르는 아공간 마법을 에리스는 펼쳤다. 이미 던전의 마지막 장소에 도착해 펼쳐낸 마법이었다. 검은색 공간이 일렁이자 하나의 공간이 생겨났다. 그곳에 손을 뻗어 하나의 생명체를 꺼냈다. 잠든 듯, 죽은 듯 자고 있는 하나의 생명체였다.
“탐스러운 붉은 머리가 페덜을 닮았구나.”
온기라고는 느껴지지 않은 존재였지만 에리스는 따스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곧 시간이 없다는 것을 느끼고 에리스는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오늘부터 너의 이름은 ‘엔드라Endeura’ 잊혀진 언어로 사죄라는 뜻이다.”
우우웅!
에리스는 ‘엔드라’라고 명명된 존재의 이마에 자신의 기운을 모조리 불어 넣으며 끝도 없이 중얼거렸다. 과도한 주입과 캐스팅에 에리스의 입에서는 피가 울컥 뿜어지며 엔드라의 얼굴에 떨어졌다.
“나의 피를 더해. 하나의 존재를 창조하나니!!”
뚝뚝
에리스는 마법의 마지막인 피의 인장을 세기고 있었다. 이마에 세겨진 피의 마법진이 그려지자 누워 있는 붉은 머리의 존재는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나의 부름에 깨어나라! 엔드라Endeura!”
벌떡!
“아아!”
“창조주를 뵈옵니다.”
에리스의 마법에 생기라곤 없던 존재는 생기를 찾았다. 엔드라는 입을 벌리며 몸을 떨고 있는 창조주를 보며 머리를 갸웃 거렸다. 그의 눈에는 창조주가 두려움에 떨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입된 지식 내에서 창조주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존재는 마왕과 드래곤 등 상위의 존재입니다. 저의 적입니까?”
“호호! 농담이니?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게 아니라 기뻐서야. 기쁨! 엔드라”
“기쁨? 주입된 지식 한도 내에서 이해하기 힘든 부분입니다.”
“호호, 너 재밌구나.”
에리스는 엔드라의 존재를 보며 웃음을 띠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나눌 상대가 마도병기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저 존재가 자신의 명에 따라 몇 년, 몇 십 년, 아니 던전이 존재 하는 한 끝까지 있을 존재였기 때문이다.
“내가 너에게 명령 한 것은 딱 한 가지. 제단의 발동을 막아라. 하나 뿐이야. 주입된 지식으로 알겠지? 내가 저지른 일을…”
엔드라는 침묵을 지키며 에리스의 말을 끝까지 들으며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듣고 말하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1시간가량이 지나서 에리스는 아쉬운 얼굴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단의 발동 억제. 명을 받듭니다.”
“페덜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 왜일 까? 이게 죽음?”
주르륵
에리스의 육신은 흩날리기 시작했다. 약속된 목숨, 그것은 바로 엔드라를 창조하며 모든 생명력과 마나를 소비하며 먼지로 변해가는 것이었다. 엔드라도 그것을 은연중 느꼈던지 에리스의 당부를 읊조리고 있었다.
기어코 모든 육신이 먼지로 날리자 엔드라는 에리스의 모든 모습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엔드라는 결심했다. 창조주의 모습을 끝까지 기억하리라. 기능이 멈추는 순간 그녀의 존재를 떠올리리라.
“창조주여… 영원한 안식을”
* * *
“떠오르지 않아…”
엔드라의 눈동자는 거칠게 흔들렸다. 창조주의 얼굴이 이 순간 떠오르지 않았다. 비록 1시간이었지만 던전을 지키며 한시도 잊어 보지 못한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고통도 눈물도 흐르지 않았다. 자신은 인간이 아니었다.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진 마도병기다. 다만, 공격을 당하면 뿜어지는 액체에 의해 소리를 내며 고통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다. 창조주에 의해 주입된 지식에 의해 나타나는 습관적인 행동일 뿐이다.
“푸하하! 하찮은 마도병기주제에 감히 시그너님에게 달려들다니! 애초에 넌 자아해체마법으로 끝날 운명이었다.”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 창조주의”
엔드라의 귀에는 웃음을 터뜨리며 좋아하는 시그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아련하게 들리는 에리스의 목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페덜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 왜일 까? 이게 죽음?’
“창조주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 왜일 까? 이게 죽음?”
엔드라는 에리스와 같은 마지막을 느끼고 있었다. 첫머리 말만 바뀌었을 뿐, 모든 게 같은 말이었다. 모든 기억이 사라지고 있었지만, 에리스의 마지막 모습은 끝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창… 조주… 여, 여엉워언한 …안식을…”
엔드라는 그것을 끝으로 장장 911년간 에리스의 명령을 이행했고 기능이 정지했다. 끝내 창조주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한 채…
“하하하! 드디어, 드디어! 유색의 비드여! 나타나라!”
고오오오오- 스팟!
시그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검은색의 게이트는 눈도 뜨지 못할 정도의 밝은 빛과 기염을 토해내며 던전 지하를 후끈하게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케실리온은 눈살을 찌푸리며 눈이 상하지 않게 마나로 눈을 보호했고, 알파와 레나, 프린은 최대한 마나를 눈에 집중하며 눈을 보호했다. 미리 언질해준 케실리온 덕택에 시각을 잃을 일은 없었다.
“크하하하! 유색의 비드는 내차지다!”
급히 눈을 보호했던 시그너는 점점 빛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눈을 번쩍 떴다. 일체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은 동공(洞空 : 동굴의 빈 공터)을 보자 소환마법이 완성됐다는 것을 알고 유색의 비드로 추정되는 물체를 찾기에 바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구슬 같은 것은 없었다.
“서, 설마 실패란 말인가?”
시그너는 설마 하는 심정으로 다시 주위를 둘러봤다. 그때, 처음 보는 존재가 그곳에 서 있었다. 비단결처럼 흩날리는 검은색 머리카락을 시작으로 잡티 한 점 없고 뽀얀 피부가 자리 잡고 있는 얼굴이 나타났다.
들어갈 대 들어가고 나올 데 나온 몸의 굴곡에 160살이나 먹은 시그너가 침을 삼킬 정도의 몸매를 소유한 여자였다. 거기다 잘록한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검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리고 미처 느끼지 못했지만 은연중 풍기는 기운이 장난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강해면 강했지 모자라지 않은 실력이었다. 저 강자의 등장에 시그너는 마른 침을 삼켰다. 시그너는 문뜩 제단의 마법진이 저 존재를 소환하는 마법진이 아닐 까라고 생각했지만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분명, 벽화에 그려진 그림을 유추한다면 분명 유색의 비드가 소환되어야 정상이다. 점점 밀려오는 궁금증에 시그너는 입을 열었다.
“네년은 누구냐! 유색의 비드가 아니라 왜 네년이 소환된 것이지?”
“이번엔 2계인가요? 언어를 종합해 볼 때 적의를 가지고 있군요.”
시그너는 헛소리를 나열하는 여자의 모습에 분노했다. 유색의 비드는커녕 미친년이 소환된 것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건만 헛소리 까지 하니 분노가 치솟았다. 자신의 마법이라면 저년을 찢어 죽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시그너는 마나를 한껏 끌어 모았다.
“살기가 담긴 기운이군요. 당신을 적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스르릉- 팟!
비단결 같은 머리칼을 흩날리며 검을 뽑아든 여자는 검을 앞세우며 자세를 잡았다. 그 자세는 1계와 2계 3계, 지옥을 통틀어도 없는 기묘한 기수식이었다. 기수식을 잡는 순간 그녀의 신형은 시그너의 우측을 점하며 오른쪽 허리를 베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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