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8화 (228/269)

이 전편 462편 다시 보세요.

완전 내용이 바뀌었습니다. 번거롭더라도 다시 보시길...

2008년 2월 13일 오전 11시 경 수정해 올렸습니다.

외전 - 조하은! 제현을 만나다.

인간의 생각과 행동은 가지각색이다. 한 인간이 1초에 생각하는 양은 셀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들어내는 공백의 차원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무한하다. 인간이 죽어서 업을 청산하는 명계 역시 차원의 법칙에서 벗어 날 수 없다.

1계, 2계, 3계로부터 파생되는 충격을 완화 하는 곳이 명계다. 하지만,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차원의 법칙에 어긋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현상은 무려 4건이나 벌어졌다. 그것도 중복되는 차원이 있었다.

1계에서 두 번, 명계에서 두 번이었다. 염라대왕은 자신이 관장하는 차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심각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승사자들은 뭘 하고 있느냐! 차원이동이라니!”

붉게 타오르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염라대왕은 크게 호통 쳤다. 그 호통이 얼마나 컸으면 명계가 울릴 정도였다. 그만큼 염라대왕의 힘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가장 힘든 일을 하고 있지만 그는 한 차원의 신이다.

“그것도 이 염라가 관장하는 명계에서 두 번 씩이나 벌어지다니! 그것도 무간지옥에서!”

“그, 그것이…”

“이실직고 말하지 못할까!”

쩌렁쩌렁!

검은색 사령의(死岺衣)를 차려 입은 저승사자가 움찔거리며 낮게 읊조렸다. 염라대왕의 음성이 컸기 때문에 입을 제대로 뗄 수가 없었다.

“무간지옥에서 큰 전쟁이 벌어진 것을 알 것이옵니다. 그 일로 천마가 이계로 소환당한 것을 아실 것이옵니다.”

“네놈에게 들어서 알고 있느니라. 어떻게 무간지옥을 관리 했기에… 쯧쯧!”

“그것이… 이번엔 우연이 아닌 스스로 뛰어넘어버렸습니다.”

“무어? 뭣이!”

염라대왕은 뒷골이 당겨오는 것을 느꼈다. 설마 스스로 뛰어넘었다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간지옥에는 특별한 장치가 없다.

“설마 2계 놈들이 말썽을 부렸느냐!”

“그게 아니옵고… 업을 청산한 존재를 명계로 불러들이는 장치의 오작동으로 1계로 날려 버린 것 같사옵니다.”

“허, 어찌 이런 일이! 그래서 대책은 있느냐! 날아간 녀석의 명부첩은…”

염라대왕은 무간지옥으로 떨어진 존재의 명부첩을 확인 할 것을 명했지만 저승사자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우물쭈물 거리던 저승사자는 염라의 호통을 받고서 다시 입을 열었다.

“어허!”

“1계로 이동한 것이 하필이면… 원주민… 입니다.”

“원주민!? 헉-”

쿵!

저승사자의 일침에 염라대왕은 뒷목을 움켜쥐며 뒤로 쓰러졌다. 그 모습에 다급히 주위에 있던 사신들과 신장들이 염라대왕을 부축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원주민을 다시 명계 불러드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끄응- 할 수 없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니… 무간지옥을 관리하는 저승사자와 사신, 신장은 들으라.”

“대왕의 명을 받듭니다!”

“업의 청산을 관장하는 제단을 파괴해 더 이상의 차원이동을 막으라. 그리고 업을 청산한 이를 저승사자와 사신, 신장이 한조를 이루어 이끌어 올 것을 명한다!”

“대왕의 뜻대로!”

염라대왕은 힘들다는 듯이 저승사자, 사신, 신장들을 물리치며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중단되었던 영혼들의 죄의 무게를 처리하는 업무에 들어가야 했다. 같은 시각 1계 공백의 차원이 거세게 진동하고 있었다.

고오오오!

공백의 차원이 진동하자 수많은 차원이 엮이며 하나의 차원을 이루어가고 있었다. 그 중 하나의 차원에 무간지옥으로부터 탈출한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원이동은 그 누구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이루어졌다.

“여기가… 아버지가 말하던 1계!?”

비단결처럼 고운 머리카락, 커다란 눈망울, 터질 것 같은 입술이 얼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다 여자라면 갖고 싶어 하는 S라인 몸매가 보였다. 허리에 매달려 있는 검이 그녀를 무인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1계의 존재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학교였다. 옥상에는 잔잔한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태극기가 눈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지옥이 아닌 공기를 느껴보는 그녀는 싱그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퍽!

‘개새끼! 뒈지고 싶어?’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살기어린 목소리에 그녀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의 말로는 이곳의 존재들은 그렇다 할 힘이 없다고 했다. 오직 무기에 의존하는 존재들이라고 했다. 가끔 특이한 능력을 사용하는 존재도 있다고 했기에 호기심이 동했다.

“기척을 죽이고…”

그녀는 어둠을 엄폐물로 삼으며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좆같은 새끼. 앵가니 엉겨라. 싸움도 젖도 못하는 새끼가. 야, 가자.”

“병신… 조제현 주제에 다음에 또 덤비면 골로 갈 줄 알아!”

그녀는 종료된 상황을 보며 이마를 찌푸렸다. 벌써 싸움이 끝났다는 것에 약간 힘이 빠진 모양이다. 하지만, 마지막에 ‘조제현’이라는 이름이 거슬렸다.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한 번 나가 볼까? 아니! 아닐 거야. 하지만…’

그녀는 몇 번을 고심한 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움직임이었기에 바닥에 쓰러져 피를 뱉어내는 존재에게 다가가는 것은 쉬웠다.

“저기요.”

“꺼져.”

“저기, 다치 신거 같은데. 도와드릴 까요?”

눈앞의 상대는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인지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주저앉기를 여러 번 반복하고 있었다. 보다 못한 그녀가 친근하게 말을 건넸지만 다시 들려온 대답은 싸늘했다.

“꺼지라고 했다. 동정 따위는 필요 없어!”

“…….”

그녀의 눈에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존재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다만 이유 없이 건방졌다. 거기다 그렇게 잘생긴 외모도 아니었으며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평범한 일반인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녀의 기준에서는 손가락 하나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상대였다.

휘청!

걸음을 옮기기 전에 휘청거리며 쓰러지는 남자를 보며 그녀는 몸을 날려 부축했다. 처음에는 그냥 가려고 했지만 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기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딱!

“그 손 치워라. 내 곁에 다가오지 마!”

“흥! 감히 제 호의를 무시하는 건가요? 약한 주제에…”

제현이라고 불린 소년은 눈을 부라렸다. 그녀는 소년의 섬뜩한 눈빛에 약간 움츠려 들었다. 아무런 기운도 없는 존재였지만 눈빛만큼은 무서웠다. 지금껏 저런 눈빛을 본 것은 딱 한 번 이었다. 어릴 때 딱 한번 봤던 눈빛, 아버지의 눈빛이었다.

“아아…”

“떨어져.”

손이 떨리는 것인지 그녀는 뒤로 한걸음 물러나며 두 손을 포갰다. 눈도 세차게 떨렸다. 그 어떤 적도 자신을 떨리게 만들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그런데 평범한 존재의 눈빛  만으로도 두려움이 생겨났다. 하지만, 약간 다른 느낌이다.

그리움이었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아버지의 향기를 저 소년에게서 느꼈다. 아무런 기운도 없고 나약하고 건방지며, 여자를 대할 줄 모르는 존재였지만 호감이 갔다.

“저, 저의 이름은 하은이예요. 조하은!”

“그래서 어쩌란 거냐.”

주르륵-

그것이 지옥에서 찾아 헤매던 아버지이며, 나약하고 건방진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가장 강하지만 가장 약한 시절, 아버지의 모습이다. 하은의 눈에는 쉴 새 없이 눈물이 흘러내렸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조제현이라는 소년도 약간 움찔거리며 다가왔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미안하군. 난 돌아가겠다.”

저벅- 휘청, 저벅

제현은 한쪽 다리를 절며 어두운 세상을 뚫고 걸어가고 있었다. 하은은 눈물을 그치며 힘없이 걸음을 옮기는 소년을 뒤따랐다. 그녀의 눈에 비친 소년의 모습은 다친 맹수의 모습이었다. 소년은 5분 정도를 걸어서야 목적지에 도착 한 것인지 침묵만 도는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살색 빛이 살짝 감도는 아이보리색의 건물이었다. 이렇게 큰 건물을 처음 보는 하은은 입을 크게 벌리며 그 건물로 들어간 소년의 뒤를 급히 따르며 주위를 살폈다. 처음 보는 세상과 문명에 감탄 한 것이다.

“와아-”

어린아이처럼 감탄하는 하은은 제현에게 기척을 들킨 것도 모르고 걸어가고 있었다. 제현은 짐짓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6층까지 계단을 이용해 걸어 올라갔다. 그 뒤를 따라 계속 올라가는 하은은 기어코 제현의 집 앞까지 도달해 있었다. 그리고 제현은 하은을 보며 소리쳤다.

“너! 뭐야… 왜 따라오는 거지?”

“그, 그게… 뭐라고… 헤헤, 그게…”

하은은 제현의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어설픈 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차마 ‘당신의 딸입니다.’라고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엄연히 이곳은 아버지의 과거라고 생각한 그녀였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었다.

이곳은 공백의 차원이다. 이곳에 있는 제현은 현실의 제현이 될 수 있으며, 과거의 제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곳은 현재진행형의 공간이다. 즉, 그는 누가 뭐라고 한들 조제현이었다.

“…….”

쾅!

그렇게 무심하게도 제현은 자신의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모습에 하은은 한숨을 내쉬며 ‘609호’라고 적힌 숫자와 글자를 하염없이 보며 문 앞을 지켰다. 그녀는 의외로 노숙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찾아다니며 밝혀지지 않은 지옥의 땅을 헤집고 다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꼬박 밤을 샌 것은 말 할 필요가 없었다.

꾸벅- 꾸벅-

철컹-

“학교가기 귀찮군. 응? 넌 어제 그…”

“앗! 헤헤 잠깐 졸았네요. 하은이요! 조하은!”

“…….”

제현은 하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걸어가 버렸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계단을 이용하는 제현의 뒤를 따라 움직이는 하은이었다. 어떤 말을 하든 상관없다는 모습이었다.

저벅, 저벅-

아파트를 나선 제현은 익숙한 등굣길에 올랐다. 언제나 반복되는 일상의 연속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바쁜 현실에 안주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은 이상했다. 웅성이는 사람들이나 길이 좌우로 갈리고 있었다.

마치 다른 세상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제야 제현은 뒤를 돌아봤다. 하늘거리는 옷에 허리에는 검을 차고 있었다. 처음 보는 의복에 제현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하지만, 제현의 관점에서야 그 정도였지 다른 이의 시각에는 그것이 아니었다.

“야야, 얼굴 죽이지 않냐?”

“코스프래?”

등등 그녀의 미모를 찬양하거나 특이한 복장에 대해 수선을 떠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제현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 여자건 뭐건, 세상이 어떻게 되던 상관없다는 표정과 행동이다.

등교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았기에 제현은 금방 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뒤를 따르는 하은의 존재는 거추장스러웠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저 여자가 누군지 모른다. 그런데 남의 집 앞에 눌러 앉아 잠을 자지 않나 귀찮게 따라다니고 있었다.

“야!”

쪼르르

제현의 부름에 하은은 빠르게 다가왔다. 보통 인간이 낼 속도가 아닌 만큼 제현의 눈이 커지는 것은 물론 주위에서 그녀를 지켜보고 있던 많은 이들이 놀라워하는 표정이었다.

“부르셨어요?”

“꺼져. 귀찮아.”

하은은 기쁜 표정으로 다가섰지만 제현의 싸늘하고 냉정한 말에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남자라면 하은의 미모에 혹해야 정상이건만 제현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 순간 하은의 뇌리에 과거의 아버지는 여자혐오증에 걸린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까지 하고 있었다.

“그, 그런…”

“누구야 너, 왜 나를 귀찮게 하는 거지?”

제현의 단도직입적인 말투에 움찔거린 하은은 손을 꼼지락 거리며 머뭇거렸다. 그리고 결심했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언뜻 비장함이 감돌고 있었다.

“찾아다녔어요! 제 인생을 걸고… 피의 반쪽을…”

꾹-

하은은 주먹을 꽉 쥐며 소리쳤다. 등교하던 학생들은 자연히 미모의 여자 아이가 소리치는 말에 흥미가 생겼고 곧 몰려들었다.

“어머, 고백하나봐, 반쪽이래.”

“아깝다. 아까워…”

“응? 뭐가?”

“뭐긴 뭐야, 여자애의 미모가 아깝다고… 평범하게 생긴 애가 뭐가 좋다고.”

수군수군

하은은 주위의 말에 얼굴을 붉혔다. 본뜻은 그것이 아니었는데 자신이 전한 말이 이상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뜻은 제대로 전했으니 제현의 대답만 들으면 끝이었다.

“…귀찮군. 사라져라.”

제현은 그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감돌아 있었다.

“별꼴이야 정말… 지가 뭐가 잘났다고.”

“차라리 잘됐네. 저런 남자애랑 사귀는 거 손해로 보이잖아.”

각자 이런 저런 말을 하며 교내로 들어가고 있었다. 대부분 제현을 씹는 말이 대부분이었지만 하은은 살짝 실망한 표정으로 학교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    *    *

제현은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끝을 보며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머리가 복잡한지 얼굴은 구겨져 있었다. 아마 아침의 일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아직 초여름이었기 때문에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몸이 끈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꾹!

지끈 거리는 머리를 꾹꾹 누르던 제현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서며 ‘6’이라는 숫자를 눌렀다. 잠시 후 기계음 섞인 음성이 울렸고, 빠르게 6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어이없군. 피의 반쪽이라니… 웃기지도 않아. 찾아다녔다고? 엿먹으라해!”

띵!

육층입니다.

곧 익숙한 6층이라는 신호에 제현은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는 즉시 내렸다. 엘리베이터를 나선 순간 제현은 그 자리에 굳은 것처럼 멈춰 섰다. 문 앞에 쪼그려 앉아 졸고 있는 하은이라는 여자가 보였다.

“아버지… 절 버리지 마세요. 으음, 몇 년 이나 찾아 헤맸는데…”

잠꼬대를 하는 모양이다. 마치 아버지를 찾아 헤맸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하은이라는 여자를 보자 묘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그 상념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녀가 가로막고 있는 곳은 자신의 집 앞이다.

툭!

“이봐, 비켜. 귀찮게 하지 말고……. 뭐, 뭐야.”

털석-

제현은 순간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은이라는 여자의 몸 주위로 뜨거운 기운이 몰아치고 있었다.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가방을 둘러매고 있던 오른손을 급히 여자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열이 심하잖아! 젠장, 귀찮게…”

제현은 괜히 자신 때문에 아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난 것과 대화를 종합해도 채 30분을 넘기지 않았지만 왠지 몇 년을 같이 있었던 것처럼 익숙한 느낌이었다. 옆으로 치우기도 뭣했기에 제현은 하은을 번쩍 안아 들고는 문을 열어 자신의 침대에 올려놓았다.

“아프다는 것을 운으로 알아라. 열이 내리면 즉시 버릴 테다.”

“아, 아버지…”

“헛소리까지 하는 군. 더위 먹었나. 얼음이라도 사와야겠군.”

제현은 차마 그대로 버리기에도 뭣했기에 지갑을 챙겨들고 집을 나섰다. 간단히 물수건을 올려놓고 왔기에 약간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의사도 아니었기에 뭐라고 처방 할 수 없기에 얼음찜질로 만족하기로 했다.

쾅!

“으음…”

하은은 신음을 흘리며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희미한 정신 속에서 들리던 아버지의 목소리에 정신이 든 것이다. 뭐라고 말하며 물수건을 이마에 올리던 것이 떠올랐다. 그렇게 눈을 굴리던 하은은 이곳이 아버지의 집이라는 것을 알고 눈을 살며시 감았다. 왠지 입가에는 미소가 지어져 있는 것 같았다.

“허억- 허억, 대충 수건으로 얼음 팩을 만들면 되겠지?”

멀리 나가 얼음을 사왔던지 제현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그렇게 숨을 고르던 제현은 짧게 부서진 얼음을 몇 개로 나눠 얼음 팩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마에 살며시 올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옷을 그딴 식으로 입고 다니니 더위를 안 먹을 리가 있나. 도대체 몇 겹이나 껴입은 건지…”

제현은 하은의 의복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제현은 알지 못했지만, 지옥의 온도는 보통 온도보다 차갑거나 뜨겁다. 기온의 차이가 심했기에 자연히 하은의 의복은 그렇게 변한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무인들이었기에 추위와 더위에 강한 것도 있겠지만 보통 저런 차림으로 지옥을 주유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아무튼, 하은은 소매가 아래로 쳐지는 의복에 약간 하늘거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움직이기 편하게 관절부위를 제외한 곳에 몇 겹의 옷을 덫 되어 입었기에 보통 의복보다 두꺼웠다. 하지만, 그것으로 하은의 열병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은의 병은 단순한 몸살증상이었다. 이곳은 지옥과 다른 공기를 띠고 있으며, 중력차도 있다. 또한 지옥에 없는 바이러스며, 여러 가지 질병이 나돌고 있기에 면역력이 약한 하은은 자연히 열병에 걸린 것이다.

“나도 이런 취미는 없다면 겉옷 정도는 벗겨 주마.”

제현은 두꺼운 겉옷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어떻게 둘렀는지 푸는 방법도 복잡했지만 금방 벗겨 낼 수 있었다. 한결 가벼워진 옷에 하은은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제현의 간호는 새벽까지 이어졌다.

새벽이 되어서 하은의 열병은 사라졌다. 자신의 육체를 보호하기 위해 기운이 몸속으로 침투한 병을 몰아낸 것이다. 그렇게 정신을 차린 하은은 자신의 곁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제현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싱긋

미소를 지으며 하은의 손이 제현의 얼굴을 건드렸다.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건드렸기에 잠에서 깨지 않을 것이다. 잠시 몸을 떨던 하은은 다시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음…”

“읏, 큰일 날 뻔했다.”

제현의 뒤척임에 하은은 어떤 상황보다 심장이 뛰었다. 지옥의 고수와 싸울 때도 이정도의 심장박동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하은은 조심했고 긴장했다. 한편으로 다시 쫒아내지 않을 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 옷이 왜… 꺄아악!”

하은은 뭔가 허전하다는 생각에 허리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자신의 옷이 벗겨져 있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가릴 곳 가리고 있었지만 겉옷과 중간에 적의 공격을 완화시켜주는 의복이 벗겨져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