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1화 (231/269)

제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단전으로부터 폭주하는 기운과 독기가 온몸을 잠식하고 있었다. 간신히 붙잡고 있었지만 하단전이 깨져 버린 것처럼 기운이 몸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해요. 미안…”

하은은 제현을 끌어안으며 지상으로 떨어졌다. 그리고 쉴 새 없이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지상에 착지한 하은은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제현 역시 가부좌를 틀게 만들었고 명문혈에 손을 가져다댔다.

우우웅!

하은의 손을 통해 끝도 없이 기운이 옮겨가고 있었다.

“쿨럭- 소, 소용없다는 걸 알잖아.”

이미 복부를 통해 독기가 퍼지고 있었다. 하단전이 깨진 것이 치명적이었다. 몸의 근간을 유지하는 것이 하단전이다. 그것이 깨진 이상 독기를 막을 수 있는 것은 하은의 기운이었지만 임시방편일 뿐이다. 모든 독을 몰아내기에는 내력이 부족했다. 거기다 복부에 커다란 구멍을 막을 존재는 없었다. 복부를 통해 쏟아지는 피는 그 어떤 피보다 붉었고 애처로웠다.

“모두 공격하라!”

100명 정도의 능력자들이 일제히 기운을 터뜨렸다. 전신을 두들겨 맞는 몬스터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자잘한 기운이 모여 큰 충격을 주고 있었다. 조그만 인간에 의해 당해버린 눈의 상처는 크게 벌어지며 피를 뿌려댔다.

“키에에에!”

쾅! 콰콰쾅! …화르륵, 쩌어억!

작은 상처를 만든 부위가 터지자 그 뒤는 순조로웠다. 마치 땜에 작은 구멍이 땜을 파괴하듯 녀석의 몸의 부위가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전투가 진행되고부터 하늘에는 헬기가 뜨기 시작했다. 능력자들이 속속 모여들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몬스터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앞이 안보여… 앞이!”

제현은 과다 출혈과 독으로 인해 시각이 흐릿해졌다. 곧 세상에 어둠이 내린 것처럼 눈앞이 깜깜해졌다.

“하윤엄마! 하윤아!”

제현은 크게 소리쳤다. 그에 하은은 자신의 노력이 부질없다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실책으로 소중한 존재가 이지경이 되었다는 죄책감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나… 나, 여기 있어요.”

“어, 어디야? 어디!”

꼭!

하은은 제현을 안았다. 눈물이 앞을 가렸지만 내색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흐느낌은 숨길 수 없었던지 제현의 목소리가 곧 평온을 찾았다. 그리고 몸의 떨림도 멈췄다.

“…난 괜찮아. 죄책감도 슬픔도 느끼지 마.”

“아, 아니야.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쿨럭-”

제현은 입에서 다시 피를 토해냈다. 더 이상 몸이 버틸 수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초인적인 정신력으로 죽음을 피하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하은을 달래는 것이다.

“네 탓이 아니야. 그러니 울지도 죄책… 감도 느끼지 마…”

“여, 여보? 여보!”

제현의 숨결이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그에 하은의 목소리는 높아만 져갔다. 그리고 제현의 육신은 점점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청각, 후각이 사라져버렸다. 이제 남은 거라고는 촉각뿐이었다.

“쿨럭- 추, 추하겠지만… 컥- 입 맞춤해줄래?”

“추하다니! 결코 추하지 않아! 제, 제발 죽지 마. 날 두고 죽지 마!”

쪽!

순간 하은은 느꼈다.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제현의 마지막이라고 느꼈다. 때문에 절망어린 하은의 목소리가 세상에 퍼지듯 온 세상을 뒤덮었다. 그리고 길게 제현의 입에 하은은 입술을 맞추었다. 따듯하게 부드럽게…

“…조, 좋아했어. 처… 음… 본… 순… 간부터…….”

그걸 끝으로 제현의 숨결은 끊어졌다. 영혼과 육신의 분리, 기운의 소멸, 생의 마감. 육체를 지탱하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그에 하은의 눈가에는 쉴 새 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으아아아아아!!!!”

하은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제현의 시체를 끌어안은 그녀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했던 존재가 사라졌다. 슬픔은 곧 분노로, 분노는 곧 살기로 바뀌었다. 그 살기는 오직 몬스터에게로 향했다.

“죽일 거야. 용서할 수 없어!”

휘우우웅!

하은의 검이 부르르 떨었다. 주인의 비애와 고통이 전해지듯 검은 울었다. 그리고 세상이 울었다. 지상에서부터 시작된 은빛의 기운은 온 세상을 물들였다. 그 기운의 시작은 하은이었다. 끝도 없이 치솟는 기운! 

“용서할 수 없어!!!!”

팟!

하은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졌다. 마침 지상으로 떨어진 몬스터를 향해 검을 휘두른 하은의 검은 녀석을 베어버렸다. 마치 두부가 썰리듯 잘려나갔다. 지금껏 공격이 먹히지 않던 피부였건만 간단하게 잘려나갔다. 그 후로 하은의 검은 쉴 세 없이 휘둘러졌고 분노의 기운은 잔영을 만들어 냈다.

“죽어! 너 때문에! 너 때문에 죽었어!”

우우우웅!

그녀가 휘두르기 시작한 검의 잔영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허공에 그림을 그리듯 그녀가 휘두른 검로는 그림이 되었다. 그렇게 수십, 수백 조각으로 베어버린 녀석은 비릿한 고기조각을 만들어내고는 명을 달리했다.

고오오오오- 치이잉!

몬스터의 죽음을 뒤로 하고 하은이 휘두른 허공은 커다란 기운이 뭉쳐 있었다. 그러나 그 기운은 쉽사리 사라지지지 않았다. 아니, 뭉쳐졌다. 하나의 기운으로 뭉쳐진 기운은 이상한 공간을 생성했다. 마치,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새하얀 색의 화이트홀을 만들어냈다.

“뭐, 뭐야! 하은을 잡아! 빨려 들어간다!”

뒤늦게 수강과 지부장 광수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지만 화이트홀로 빨려들어 간 하은은 정신을 놓아버렸다. 그리고 화이트홀은 씻은 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그녀는 꿈속에서 제현을 만나고 있었다.

특별한 동행, 부녀대면(父女對面)

꿈에도 그리던 생활이 깨졌다. 행복의 13년이 깨진 하은은 절망했고 분노했다. 처음 1계로 향하던 문처럼 생긴 곳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리고 빌었다. 

‘다시 그를 만날 수 있기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은 그녀가 잘 알았다. 하지만, 희망이라는 것에 기대어 보고 싶었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를 잊을 수 없었다. 지옥에 없다는 것을 알고 반포기 상태로 했던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행동에 하늘도 감동받은 건지 ‘조제현’을 만나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를 사랑할 수 있었다. 아니, 사랑했다. 비록 그가 아버지라는 생각은 끝내 떨쳐 버릴 수 없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가장 사랑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다시는 실수하지 않으리라. 다시는 그를 잃지 않으리라. 나에게 희망이라는 것이 남아 있다면 그와 같은 세상에서 숨을 쉬게 해주소서.’

하은의 생각과 고뇌가 끝날 무렵 눈뜰 수 없을 정도의 빛이 터져 나왔고 이곳에 서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눈을 뜬 순간 그녀는 분노에 휩싸였다.

“더 이상 실수는 없어요!”

적의를 가지며 화를 내는 존재, 참을 생각도 없이 그녀는 허리에 매달려 있던 애검 ‘빙화(氷花)’를 뽑아 들며 신형을 날렸다.

스르릉- 팟!

고요하던 장소는 짧은 발검과 함께 침묵을 깨트렸다.

“뭐? 나를 누구로 보는 거냐! 동대륙, 빙염의 마법사 시그너가 나다! 하찮은 검사 따위가! 블링크(Blink)!”

하은의 기척을 느끼기라도 한 듯이 시그너는 블링크를 사용하며 앞으로 피했다. 당연히 하은은 처음 시그너가 있던 장소의 우측을 베어버리며 사라진 시그너의 기척을 느꼈다.

휘이잉-

“술법사군요. 2계답게 술법에 능해요. 하지만, 그 뿐입니다.”

“네년을 죽여, 이 수모의 대가를 치르리라!”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은과 시그너의 몸에서는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비슷한 속성인지 차가운 기운이 공터를 몰아세웠다.

“후회하게 해주마! 아이스 필드(Ice Field)!”

하은과 시그너는 동시에 움직였다. 지상에 펼쳐진 시그너의 마법은 순식간에 일정한 공간은 얼음지대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대기를 조정하듯 그 범위 내의 공기를 얼리며 하은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살짝 코웃음을 치고는 신형을 날렸다.

“훗!”

아이스 필드를 향해 신형을 날린 하은은 전방의 공간을 가르듯 빙화를 휘두르며 나아갔다. 일검에 바닥은 갈라지며 아이스 필드는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캔슬 당해 버렸다.

“술법의 파훼술 정도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고작 지속형 술법으로 발목 잡힐 리 없습니다.”

하은은 지옥에서 일정한 서열에 들어 있었다. 지옥의 생리에 관심이 없던 관계로 지존의 자리는 차지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오라버니인 ‘조송악’은 지존의 반열에 올라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무위도 상상을 초월했다.

그녀의 무공은 흡혈지존(吸血至尊) 조제현(曺帝鉉)의 진전을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그녀의 무위를 의심할 수 없다. 아무튼, 그녀는 애검에 기운을 몰아넣었다. 무식하게 검의 길이를 늘이는 2계의 존재보다 검신 전체를 감싸는 것에 만족한 그녀는 당황해 하는 시그너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후후후! 다른 건 없나요? 2계의 존재는 기운의 양에 따라 힘을 측정하는 군요!? 그럼 당신은 날 이길 수 없어!”

팟!

하은의 신형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시그너의 후방에 나타났다. 뒤늦게 알아차린 시그너는 마법사라는 자각이 없어진 듯 스테프를 휘두르며 소리쳤다.

“죽어!”

후웅!

“늦어…”

그녀는 이형환위를 펼치며 시그너의 좌측에 나타났다. 그리곤,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검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것이 시그너가 땅에 서 있을 수 있는 마지막이었다. 8서클이라는 이름과는 다르게 고작 1번의 마법을 펼치는 것으로 싸움이 끝나버렸다.

그의 눈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지 부릅떠 있었다. 8서클인 자신이 당한 것이 믿기지 않은 모양이다. 거기다 그 존재가 여자였던 것이 충격인 모양이다. 시린 파란색을 나타내던 로브는 붉게 번지며 뜨거운 김을 모락모락 뿜어냈다.

주르륵-

흘러내리는 피를 보던 하은은 손을 뻗어 마령심법(魔靈心法)의 기운과는 다른 이질적인 기운을 뿜어냈다.

“흡혈마공(吸血魔功)!”

이질적인 기운의 정체는 흡혈마공이었다. 그녀의 손에서 흘러내린 기운은 시그너의 목에서 뿜어진 피를 감싸며 그녀에게 인도했다. 놀랍게도 피는 묽게 변했고, 순식간에 물만 남긴 채 그녀에게 흡수되어 버렸다.

이것이 바로 흡혈마공이다. 상대의 피를 이용해 내공을 갈취하며, 육체를 회복시키는 것은 물론, 공격의 수단이 되기도 하는 지고의 무공이다. 그렇게 피를 갈취하고 있던 그녀의 귀에 느릿하지만, 일정한 보폭의 걸음이 들려왔다.

저벅, 저벅-

너무 조용한 걸음이었지만, 지하 공터에는 더없이 크게 들렸다. 주위의 나무토막처럼 널브러진 두 구의 시신들만이 바람에 흔들리며 그 존재를 대변할 뿐이었다. 그리고 하은은 천천히 그 존재에게 시선을 던졌다.

175~178cm 정도 되어 보이는 키를 가지고 있었다. 자연히 하은의 시선은 약간 올라갔다. 은빛의 눈이 떨어진 것처럼 나부끼는 짧은 머리카락이 보였고, 두 눈은 싸늘하게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와 같은 얇은 선에 연약하게 보이게 만들었지만 표정의 싸늘함이 그를 범접할 수 없게 만들었다. 만들어진 것이 아닌 그 존재 자체가 내뿜는 카리스마에 하은은 약간 몸을 떨어야 했다. 은연중 저 기운에 놀란 것일지도 몰랐다.

저벅, 저벅- 탁!

코앞까지 다가선 존재에 하은은 뒤로 물러서며 경계했다. ‘빙화’를 쥐고 있는 그녀였지만 침을 꼴깍 삼킬 수밖에 없었다. 눈을 씻고 쳐다봐도 빈틈이라고는 없었다. 아니, 모든 곳이 빈틈으로 보였다. 그러나 손을 쓸 수는 없었다.

언제든지 발검할 수 있을 것 같은 검이 허리에 매달려 있었다. 손을 아래로 향하고 있었지만, 은은히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가장 두려운 점은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듯 한 눈빛, 그리고 살짝 굽혀진 무릎이었다. 행동을 보건데 전형적인 고수의 풍모를 갖추고 있었다.

“…넌 누구지?”

가늘게 느껴지지만 범접할 수 없는 미성이 들려왔다. 하은은 흔들리는 눈빛으로 눈앞의 소년을 쳐다봤다. 이곳은 2계다. 그런데 저런 풍모를 지니고 있는 존재에 호기심이 동한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소년의 말을 되받아쳤다.

“당신은 누구죠?”

“내가 먼저 물었다. 너도 검으로 이야기 하고 싶은가?”

소년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긴 하은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쳐다봤다. 붉은 머리에 처참하게 쓰러져 있는 존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짙은 혈향이 느껴졌지만 그녀의 시선은 다른 곳에 있었다.

하단전을 시작으로 정확히 모든 급소를 노린 수법에 놀란 것이다. 어지간한 고수도 해내기 힘든 수법이었기에 그녀는 내심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습니다.”

“호오…? 아까 수법을 잘 봤다. 널 제압하고 그 수법의 출처를 듣겠다. 거짓을 고한다면… 죽음을 피하지 못할게야.”

소년의 말에 하은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수법을 펼쳤다는 것이란 말인가! 그녀가 펼친 것은 순수 흡혈지존의 무공들이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아버지, 사랑하는 존재가 펼쳤던 무공이다. 눈앞의 존재가 의심하고 있다는 생각에 하은은 분노했다.

“…감히, 의심하다니… 용서할 수 없어.”

“문답(問答)은 널 제압하고 하겠다.”

“누가 할 소리! 널 제압해 치욕을 씻겠다!”

소년과 하은은 일정한 거리를 벌리며 검을 들었다. 아름답지만 시린 기운이 천천히 공간에 퍼져나갔다. 짧은 순간 살기가 몰아쳤고, 그것을 시작으로 소년과 하은은 격돌했다.

특별한 동행, 부녀대면(父女對面)

스스슷!

살기가 몰아쳤다. 넓은 공간은 삽시간에 죽음의 기운이 엄습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당하는 기분에 알파와 레나, 프린은 뒤로 물러나며 살기에 대응했다. 서로를 향해 살기를 줄기줄기 뿜는 둘의 모습은 마치 날카로운 검과 같았다.

“…탐색은 끝났다고 생각 되는데?”

움찔!

케실리온의 말에 하은은 살짝 몸을 떨었다. 지금껏 이런 살기는 두 번째 였다. 어린 시절 흐릿하게 느꼈던 살기와 흡사했다. 마치, 넘을 수 없는 벽처럼 살기의 장벽이 앞을 가로막는 것 같았다.

무심하도록 차가운 눈빛이 몸을 훑고 지나가자 눈앞의 소년에게 모든 것을 읽힌 것처럼 두근거렸다. 마치,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한편으로는 두근거렸다. 세차게 두근거리며 펌프질을 해대는 심장은 말했다.

‘싸우고 싶다. 꺾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았다. 이것이 바로 검을 쥐고 걸어가는 무인(武人)의 길이었다. 마음속에서부터 떨려오는, 몸이 떨려오는 묘한 쾌감이 엄습했다. 이것이 바로 호승심이었다.

‘저 존재는 강하다. 하지만, 나도 만만치 않아!’

꾸욱-

하은은 빙화(氷花)의 검신과 손잡이를 이어주는 동선을 세게 쥐며 천천히, 기척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움직였다. 시계방향으로 적의 허점을 파고들이 위해 걸음을 옮겼다. 상대의 흔들림에 검은 출수하리라!

저벅, 저벅-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발꿈치가 땅에 닿지 않는 보법을 구사하는 둘의 모습에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침을 꼴깍 삼키게 만드는 긴박감이 감돌았다. 그렇게 한참을 경계하던 둘은 돌연 우뚝 멈춰 섰다. 그 찰나의 순간 케실리온과 하은의 신형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흡-”

“흡-”

둘은 서로의 기척을 최대한 죽이기 위해 숨을 크게 들이쉬며 호흡을 끊었다. 이것이 강자의 대결이었다. 찰나의 호흡으로 상대에게 혼란을 주는 것이야 말로 검을 잡은 자의 기본 소양이다.

격해지는 몸놀림이 시작되는 순간 케실리온과 하은의 입은 열리지 않았다. 그저 가끔 들려오는 호흡만이 서로의 생존을 알릴뿐이었다.  

팟-

던전의 바닥에 생겨난 타원의 먼지구름이 하늘로 치솟았다. 마치 도너츠 모양의 구름을 연상케 했다. 그것은 서로의 보법이 일치한다는 증거였다. 짧은 움직임과 행동패턴이 일치하자 좀처럼 대결은 장기전으로 양산되어갔다.

“후우…”

카캉- 캉!

카앙- 챙! 가가각가각-

둘의 호흡이 길어지는 순간 다시 격돌했다. 좌우로 움직이며 네 번 정도의 검이 서로의 사혈로 베어갔지만 번번이 막혀 있었다. 서로의 칼날에서는 끝도 없이 노란색의 스파크가 튀며, 격정인 소리를 만들어냈다. 둘의 눈은 허공에 부딪히며 살기를 줄기줄기 뿜어내며 서로를 살폈다.

주르륵!

하은의 이마에서는 한줄기의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고요한 대치상황에서 땀방울이 ‘또르르’굴러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었다. 그 모습에 케실리온은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입을 열었다.

“제법이지만, 느려… 무디단 말이다. 파(破)!!”

쾅, 콰콰쾅!

케실리온의 검신에서는 일말의 기운과 함께 짙은 광채가 뿜어졌다. 내부를 파괴시키는 수법인 ‘만검의 파’라는 초식이었다. 하지만, 외부에서 터진 기운은 하은의 검을 쳐냄과 동시에 큰 폭발을 가중시켰다.

케실리온은 만검을 운용함에 있어서 익숙해져 있었다. 매 초식을 이용하며 응용하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어떤 존재보다도 앞섰다. 하물며 그의 검에는 일말의 주저함도, 망설임도 없었다. 모든 것을 부서트리고 베어버릴 듯 한 검초였다.

‘만검의 파는 단순히 소리를 죽여주는 역할일 뿐…’

케실리온은 검을 찔러 넣으며 생각했다. 한줄기의 섬전(閃電)이 찔러 들어가 듯 마령검은 공간을 가르며 하은의 복부를 향해 찔러 들어갔다.

스아아앙!

폭발음에 묻혀 검이 어디로 찔러 들어가는지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이것은 완벽한 살초였다. 케실리온은 완벽하게 펼쳐낸 응용기에 만족했고, 눈앞의 여자를 찔러버릴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세상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 케실리온의 예상을 깨고 하은은 검을 역수로 쥐기 시작했다.

‘살기(殺氣)! 대단한 수법이다.’

하은은 피부로 느껴지는 따끔한 살기를 느끼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검신에서 들려오는 폭발음에 약간 주춤거리며 당황했지만 그녀는 엄연히 무인이었다. 살기를 최대한 억누른 수법에 긴장하며 검을 역수로 쥐었다.

하체의 중심을 앞으로 쏠리게 함과 동시에 하은의 신형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좌우로 움직이던 하은의 신형은 역수로 쥐어진 빙화를 우측으로 베는 것과 동시에 움직였다. 일말의 긴장감과 흥분, 집중력이 서린 말이 흘러나왔다. 그 단호한 음성에 케실리온은 정신을 번쩍 차렸다.

“살(殺)”

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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