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목소리가 허공에 울리는 것과 동시에 은빛의 기운이 몰아쳤다. 그리고 케실리온의 공격은 무(無)로 돌아갔다. 하지만, 하은의 공격은 더욱 거세어지며 케실리온은 베어버릴 기세로 날아들었다. 하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치 의념을 보내듯 검에 집중했다.
‘이대로 베어버린다!’
하은이 펼쳐낸 검초는 만검(萬劍) 최고의 살인 기술인 살(殺)이었다. 다른 말로는 최고의 초식이었지만 살인 기술이 가장 어울릴 것이다. 상대가 막지 못할 정도의 허초와 변초, 살초가 어우러진 살법이었다.
하은의 표정은 자신감에 차 있었다. 이 검초를 받고도 무사한 이는 없었다. 적어도 지옥 내에서는 무적이다. 아무리 저 상대가 날고 긴다고 한들, 이 검초를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허초에 변초, 살초인가? 가소롭군.”
휘리릿- 캉!
“어, 어떻게!? 믿을 수 없어…”
목을 베어가던 하은의 검은 거짓말처럼 케실리온의 목 앞에 멈춰서 있었다. 상대에게 생체기라도 입혔다면 억울하지도 않으련만 땀도 흘리지 않은 모습이었다. 하은은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혼신의 힘을 다해 펼쳐낸 검초가 고작 어설프게 휘두른 검에 가로막혔던 것이다.
풀석-
하은은 억울함과 허탈감이 감돌자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눈앞의 소년이 누구기에 모든 것을 막아냈으며, 익숙한 움직임과 검법을 펼쳐낸다는 말인가. 누구기에 자신을 이정도로 당황하게 만든단 말인가! 두근거림과 두려움에 하은은 애검인 ‘빙화(氷花)’를 놓아버렸다.
챙그랑-
“졌어… 좋을 대로 해.”
하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케실리온은 검을 앞으로 내밀며 하은의 목에 가져다댔다. 이대로 무인으로서 해줄 수 있는 의무를 행할 샘이다. 강자에 대한 예우를 아는 이에게는 그만한 처우가 필요한 법이다.
“강자에 대한 예우는 지켜주마. 그 전에 그 무공의 출처와 사부가 누군지 말해라.”
케실리온의 행동은 약간 과한 면이 있었다. 무공의 출처와 사부를 말하라는 것은 모든 것을 압도함으로써 상대를 깔보는 행위와 같았다. 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한 하은은 천천히 머리를 들며 케실리온의 눈을 쳐다봤다.
‘나의 무공을 어떻게 배웠는지 알아야겠다.’
케실리온은 의문을 가졌다. 그 검법을 알고 있는 존재는 별로 없다. 알고 있다면 6명 정도일 것이다. 풍운지, 설후, 향향, 하은, 송악, 하윤이 전부였다. 그 중에서 송악을 제외하면 5명으로 줄어든다.
무간지옥에서 무공을 넘기며 당부한 것이 있었다. 설후와 향향에게 본연의 모든 무공을 넘겼다. 만검을 비롯해, 흡혈마공까지 넘기며 하은과 송악에게 전수할 무공까지 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그 존재들이 나타날 리가 없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었다. 자신처럼 환생을 한다면 이해가 되기도 했다. 때문에 케실리온은 무공의 출처와 사부를 물어본 것이다.
“대답여하에 따라 처우가 달라질 것이다. 신중히 답하도록…”
“…….”
무심한 눈동자에 하은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치욕이었다.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하은이었다. 하물며 검으로 이런 치욕을 당한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강자며 군림자였다. 모든 것이 정리되자 하은은 입을 열었다.
“두 명의 어머니를 사부로 두고, 떠나간 아버지의 비급이 바로 나의 무공이다. 구결과 검법은 가르쳐 줄 수 없다.”
“사, 사문을 밝혀라.”
힐끔-
케실리온의 떨리는 목소리에 하은은 다시 시선을 주며 차근차근 입을 열었다.
“만오(萬悟) 26대 문주 조하은… 113년을 살며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한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의 치욕은 받지 않겠다.”
주춤-
케실리온은 떨려왔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이제 더 이상 못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딸이 눈앞에 있다. 그것도 다 자란 모습으로 나타나니 허탈함과 슬픔이 몰아쳤다. 그간 느껴보지 못했던 애틋함이 살아나는 것 같았다.
“서. 설후와 향향은 어떻게 됐느냐…….”
“!!!!”
케실리온의 떨리는 음성이 던전에 울리자 하은의 눈은 커질 대로 커져 버렸다.
특별한 동행, 부녀대면(父女對面)
부녀지애(父女之愛)가 이런 것이었을 까?
무표정하던 얼굴은 미소가 그려졌고, 살기로 들끓던 공간은 애틋함이 피어났다. 검강(劍剛)으로 일렁이던 ‘마령검’과 ‘빙화’는 서로 교차해 있었다.
주르륵-
“저, 정말로 아버지가… 아빠가 맞나요?”
맑은 눈물이 하은의 볼을 타고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미성(美聲)은 한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케실리온은 오른손을 들어 눈물을 닦아주며 머리를 끄덕였다.
“오랜만… 이구나. 나의 딸…….”
케실리온은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지옥을 얻었지만 가족을 얻을 수 없었다. 지키고자 했지만 지킬 수 없었다. 다시 만나며 지킬 존재가 눈앞에 존재하자 케실리온의 마음은 가벼워졌다.
휘이잉!
한줄기의 바람이 스쳐지나가자 케실리온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이마를 살짝 가릴 정도의 은발이 찰랑이자 하은의 눈길은 자연히 머리로 향해 있었다. 어릴 적 보았던 흑발은 온대간데 없고 은발이 자리 잡고 있었다.
더욱이 이목구비가 이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약간 어색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하은의 눈길에 케실리온은 머리를 살짝 만지고는 천천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다른 이와 이야기 할 때와는 다른 말투였다.
“많이 변했지? 기억 속에 존재하는 나와…”
끄덕-
하은은 마음이 진정되는 지 흘러내리던 눈물을 훔치고 머리를 끄덕였다. 외모뿐만 아니라 분위기도 많이 변해 있었다.
“……난 모든 업(業)을 청산했고, 1계로부터 이어온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환생했다. 그리고 약속을 이행하고 있는 중이지.”
케실리온의 긴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하은은 끝까지 경청하고 있었다. 1계에서부터 이어지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모습에 감동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잠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긴 하은을 보며 케실리온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 네 이야기를 듣고 싶구나.”
“저 역시 비슷했어요. 아버지를 찾아다니기 위해 지옥을 헤매며, 끝내 1계로 넘어가 아버지의 흔적을 찾았어요. 하지만, 저의 곁은 떠난 후더군요… 그래도 이렇게 만났으니 전 기뻐요. 저 처음부터 시작해도 될까요?”
“무엇을 시작한다는 말이냐?”
휘이잉-
“모든걸요.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요. 다시 시작하고 싶어요.”
케실리온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떨림은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말도 없이 떠나간 자신의 존재를 미워하지도 않고, 다시 시작하려하고 있었다.
“자격이 없는 건 나로구나. 가족을 버리고 무(武)를 선택했으니… 다시, 나의 가족이 되어 주겠느냐.”
“…흑, 흑. 당연히…”
케실리온은 말없이 흐느끼는 하은을 살짝 안았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떨림과 흐느낌에 마음이 울적해진 케실리온은 향향과 설후에 대해 묻고 싶었지만 가슴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아마 모든 업을 청산하고 다시 환생했을 것이다.
‘나와는 다르게 모든 기억을 잃고… 설후, 향향! 어디에서든 행복하기를 비오.’
케실리온은 눈을 살짝 감으며 하은을 토닥였다. 따뜻한 숨결이 가슴에 퍼지며 마음이 진정되어갔다.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을 무렵,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약간 떨어지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알파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케실리온이, 자신의 주인이 다른 존재를 끌어안고 미소 짓고 있다. 자신이 아닌 타인을 끌어안고 있다. 배신감과 두려움이 교차했다. 혹시 버려지지 않을 까. 두려움이 생겨났다.
‘누구야? 저 존재는 왜, 케실리온님이… 왜!’
알파는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기척을 내며 천천히 케실리온의 곁으로 다가섰다. 흑발의 여자는 약간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케실리온의 곁에서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왜… 누구시죠? 당신은…”
알파는 흑발의 여자를 향해 말했다. 떨리는 음성이었지만 확실히 전해졌다. 가시 돋친 말이었다.
“무례한 말은 그만둬라. 알파.”
알파의 말에 대답하는 것은 케실리온이었다. 심기가 약간 불편한지 살짝 굳어진 표정이었다. 흑발의 여자를 대할 때와는 정반대의 얼굴이었다. 따뜻한 미소도 찾아 볼 수 없다. 간간히 보여주는 미소도 없었다.
“이 아이는 내 딸이다.”
딱딱하게 굳어졌던 알파는 표정이 살짝 풀리는 것을 느꼈다. ‘딸’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케실리온의 과거 속에서 딸이라는 존재는 없었다. 하지만, 그 의문은 쉽게 풀려 버렸다.
“과거, 지옥에서 낳은 딸이다.”
“네…”
케실리온의 말은 진실이었고, 거짓도 없었다. 물론, 알파는 그의 말이라면 모든 것이 진실로 들렸다. 성신이 마신이라고 할지라도 그녀는 진실로 받아들일 것이다. 알파는 괜히 케실리온을 의심했다는 생각에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 아빠.”
“으음?”
케실리온은 옆에서 들려오는 말에 시선을 주었다. 반복해서 말하는 하은의 말에 약간 미소가 지어지기도 했고 어색하기도 했다. 몇 백 년 만에 듣는 말이었기에 어색하기는 충분했다.
“어색해요… 아버지라는 말도, 아빠라는 말도…”
“…어색하면 이름으로 불러도 된다.”
“제현? 헤헤… 어색해요. 역시. 케실리온?”
케실리온의 말에 하은은 배시시 웃으며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과거의 이름에서부터 지금의 이름에 이르기까지 케실리온은 가슴이 아파왔다. 몇 십 년을 찾아 헤매며 불러봤을 이름을 지금에서야 부르는 딸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주위에 있던 이들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케실리온 조차도 별다른 말도 못하게 하는 존재의 등장에 경악한 것이다. 알파와 레나, 프린은 차마 대화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알파는 할 말을 잃었던지 케실리온의 근처를 맴돌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저… 그런데 케실리온님. 저 분의 이름이…”
알파는 하은을 가리키며 말했다. 케실리온의 딸인 만큼 조심스러운 행동을 보이며 눈치를 살폈다.
“조하은. 앞으로 네가 모셔야할 존재다.”
“네? 그럼…”
“그래. 나를 대하듯 하도록.”
케실리온의 간단명료한 말에 알파는 머리가 하얗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비록 딸이라고는 하지만, 모셔할 존재를 바꿔야 한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구세주의 손길이 알파에게 드리웠다.
“흠흠, 케실리온의 수하가 아니에요? 왜 저에게…”
하은은 아버지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 어색한지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말문을 열었다. 약간 어색한 언어였지만 모두가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어휘력이었다.
“2계에 익숙하지 않을 테니 불편함이 뒤따를 것이다. 그것을 알파가 대신 해결해 줄 테니…”
“서, 설마. 제가 귀찮으신가요? 전 케실리온에게 배우고 싶어요. 불편해도 참을 게요.”
케실리온은 하은의 말에 알파에게 내렸던 명을 거두었다. 명령이 철회되자 알파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하은에 대한 것은 정리되어갔고, 알파와 레나, 프린과 이야기를 섞으며 2계에 대해 차츰 알아가는 하은이었다.
서로에 대해 알아가고 있을 시각, 케실리온은 주위를 돌아다니며 유색의 비드를 찾고 있었다. 딱히 알파와 레나, 프린이 필요한 일이 아니었기에 여자들은 여자들 끼리 이야기를 하라는 식으로 내버려 두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역시 없는 건가?”
한참을 둘러보던 케실리온은 에리스의 던전에는 유색의 비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고 아주 수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 하은의 존재였다. 뜻밖에도 하은이 이곳으로 소환됐기 때문이다.
“비드가 없다는 것도 보고는 해야겠지…”
케실리온은 가슴에 달려있는 엠블럼을 떼어내며 기운을 불어넣었다. 곧 주위의 환경이 변하기 시작했다. 아마, 잠시 후면 성녀나 교황이 이 통신을 받을 것이다.
특별한 동행, 부녀대면(父女對面)
달빛이 비치는 좁은 오솔길, 한 소년과 네 소녀가 약간의 거리를 두고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허리에서 덜그렁 거리는 검이 달빛에 반사되어 사이한 기운을 뿜어댔다. 은발의 소년은 무심하도록 무표정한 얼굴을 하며 앞서 걸어갔다.
“후훗! 그렇구나. 언니도 좋아하는 구나.”
네 명의 여자 중 흑발을 한 소녀가 말했다. 그녀는 외모와는 다르게 113살이나 먹은 존재였다. 인간이라면 응당 세월의 법칙에 적용되어 늙어있어야겠지만 그녀는 특별했다.
“아가씨도 참… 제발, 자제해주세요.”
알파가 부끄럽다는 듯이 하은을 향해 눈을 흘겼다. 하지만, 싫지만은 않은지 얼굴을 붉히며 걸어갈 뿐이었다. 어느새 알파와 하은은 언니와 아가씨 정도로 사이가 좋아져 있었다. 알파는 나름대로 주인의 딸이라는 생각에 예의를 차리고 있었고 하은은 나이가 많은 알파를 대접했다.
달빛에 비치는 오솔길을 따라 각가지의 야생 식물이 포진해 있었다. 낮은 덤불에서부터 높게 자라있는 나무까지 솟아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제니어스의 성이 보였다. 정돈되지 않은 영지의 밤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디바인 내추럴(Divine Nature)로 가야한다. 서둘러라.”
앞서 걸어가던 케실리온이 말했다. 드문드문 솟아 있는 나뭇가지가 달빛에 반사되어 가는 길목을 어지럽혔다. 가끔 나뭇가지사이로 비치는 케실리온의 얼굴에는 싫은 표정은 없었다.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것도 하은의 존재 덕분일 것이다.
“디바인 내추럴?”
“예, 아가씨. 주인님께서 속하신 신전입니다.”
“아…”
하은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저 고개만 까닥했다. 지옥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던 케실리온이 누구의 밑에서 일한 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오솔길을 지나 마차가 다니는 길목에 들어서자 방대한 평야가 보이기 시작했다. 디바인 내추럴로 향하는 길목은 언제나 광활했다.
드문드문 솟아 있던 나무가 사라지자 끝도 없이 펼쳐진 초원의 평야가 자리를 잡았다. 한창때의 봄이었기 때문인지 어둠이 자리 잡은 밤에도 향기로운 내음을 뿜어대며 동식물을 자극하고 있었다.
“저기 케실리온 어제 무슨 일 있었어?”
하은의 말에 케실리온은 걸음을 멈췄다. 아무래도 어제 있었던 통신에 대한 이야기 일 것이다. 레나와 프린이 있기 때문에 말하기가 껄끄러웠지만 상관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붉은 색의 사칼렛과 파란색의 쥬얼이 어우러져 무한한 달빛의 기운을 뿜어대고 있었다. 지금껏 던전 안에 있었기에 자연의 바람과 달빛을 느끼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짧게 한숨을 토해낸 케실리온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에서 쉬어야겠군. 알파, 주위를 정리해라.”
“예!”
케실리온의 명에 알파는 주위에 돋아 있는 풀들을 정리하며 다섯 명이 하루 밤을 지세 울 정도의 공간을 만들기 시작했다. 옆에서 하은과 레나, 프린이 조금씩 도왔기 때문에 금방 해결될 수 있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몰려오자 자연히 레나와 프린은 약간 움츠려들었다. 스칼렛의 기운이 강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몇 십 년, 몇 백 년 만에 상승하기 시작한 스칼렛이 거의 절정에 달해 있었다. 몇 년 만 있다면 최고조에 달할 것이다.
“이리로…”
케실리온은 모두 한곳으로 불러들였다. 둥글게 둘러앉은 것을 확인한 케실리온은 기운을 끌어올리며 1서클의 파이어라는 마법을 펼쳤다. 차가운 기운을 몰아내기 위해 펼쳐진 마법인 만큼 주위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하은, 아니… 시온.”
하은의 이름은 2계라는 특성을 살려 시온이라는 이름으로 변경했다. 케실리온의 이름과 최대한 비슷하게 지어졌다. 어떻게 보면 케실리온의 이름에서 따온 것처럼 보였다. 아무튼, 케실리온은 어제 일을 떠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 *
신전의 회의실은 한산했다. 화려하지도 수수하지도 않은 장식이 된 원탁 테이블을 중심으로 가느다란 기둥이 솟아올라 있었다. 여전히 꺼지지 않은 신성한 불꽃이었다. 원탁의 저편에는 순백의 의복을 갖춰 입은 성녀와 교황이 앉아 있었다. 순백의 의복에는 금색의 길로 수놓아져 있는 신전의 엠블럼이 은은한 빛을 토해냈다.
“퍼니쉬 경…”
회의실의 문의 정면에 해당하는 곳의 저편에서 성스럽고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군. 아니, 일주일?”
“그건 아무래도 좋아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순백의 의복이나 하얗고, 빛을 뿜어내는 은발을 하고 있었다. 두 눈 역시 은빛이었다. 회의실 내에서 뿜어지는 신성한 빛에 눈을 찌푸린 케실리온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경, 이리로.”
긴 은발을 하고 있는 성녀가 케실리온을 자리로 이끌었다. 텅 빈 회의실 내의 11번째 자리를 차지한 케실리온은 교황을 쳐다보고는 성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언제 봐도 질리지 않는 신성한 느낌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성녀가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됐죠?”
“에리스의 던전은… 뭔가를 소환하는 장치였다. 그리고 얻었지. 나의 평온을…”
케실리온의 말에 주위의 성력이 눈에 띠게 술렁였다. 성녀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었고 교황은 길게 뻗어 있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만큼 케실리온이 말한 파장은 컸다. 마룡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뭔가… 아무튼 케실리온의 시선은 성녀 크리엘에게 향해 있었다.
“평온… 인가요? 비드를 찾지 못한 것은 유감이군요. 하지만, 많은 성과가 있었어요.”
그녀의 말에 케실리온은 좀처럼 보이지 않던 미소를 띠우고는 성녀의 말을 경청했다.
“란델 서부에 출현한 곤충 형 마물의 퇴치 건으로 인해 란델은 저희 측에 빛이 있습니다. 그걸 이용해 비드를 받을 생각입니다.”
“그… 엡솔루트 실드를 발동한 촉매제를 말하는 건가?”
“예, 저번에도 말했지만 확실한 정보입니다.”
교황은 머리를 끄덕이며 수염을 쓰다듬으며 성녀의 말을 이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동대륙의 왕국에서 보유하고 있는 유색의 비드에 대한 정보나 비드를 회수할 생각이네.”
“애초에 이 동대륙은 신전의 영향권 안이다. 왜 강제로 입수하지 않는 거지? 빛을 만들어 받을 필요는 없을 텐데.”
케실리온의 말에 성녀는 얼굴을 살짝 찌푸렸다. 고운 이마에 드리운 주름에 덩달아 케실리온도 얼굴이 찌푸려졌다.
“저희 신전은 강제란 없습니다. 타협과 요청만이 있을 뿐이죠. 하지만, 시간이 부족합니다. 점점 스칼렛의 기운이 상승하고 있어요. 그 전에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서, 날 이용하겠다는 건가?”
“예, 어떤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은 추기경은 당신뿐입니다. 은연중 느꼈을 텐데요. 1추기경과 2 추기경이라는 두 파벌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그걸 견제 해주세요.”
하하하하!
성녀의 말에 케실리온의 웃음은 회의실 안을 가득 채웠다.
“크하하! 방관할 때는 언제고 이제서 추기경들의 힘을 억제 하겠다? 아무래도 좋아. 난 유색의 비드로 막으면 된다.”
“견제 해주실 건가요? 더 이상 추기경의 힘이 커지는 것은 신전 측에서도 많은 부담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추기경의 힘이 커진다는 이유가 이번 일 때문인가?”
케실리온의 말에 성녀와 교황은 고심하듯 머리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렇다네. 요즘 들어 추기경을 중심으로 크루세이더와 성기사들이 뭉치고 있네. 응당 성녀와 교황인 나를 중심으로 움직여야 할 존재들이 추기경들의 힘에 의해 움직이고 있네.”
“타당한 이유는?”
“서부관할, 고독(蠱毒)의 벌민(Vermin)경이 움직였네. 그는 제 2추기경을 옹호하며 힘을 실어주고 있어. 저번, 회의 때 보지 않았나. 너무 노골적이야.”
교황의 말에 케실리온은 머리를 끄덕였다. 확실히 건방진 녀석이었다. 케실리온의 시선은 교황의 머리위에서 성녀의 얼굴로 향했다. 언제고 떨어질듯 걸려있는 눈망울은 약간 떨리고 있었다.
“퍼니쉬경. 도와주세요. 저희의 힘이 되어주세요. 믿을 수 있는 존재는… 당신뿐이에요”
“…….”
“유색의 비드를 얻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할 생각이에요. 그것을 경이 맡아 주세요. 꼭 중앙 신전에 들려주실 거라 믿겠어요.”
“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순간. 난 신전을 떠난다.”
그렇게 케실리온의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에 미소를 띠운 케실리온은 손을 뻗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시온(하은의 2계이름으로 사용합니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붉게 타오르는 스칼렛을 쳐다봤다.
특별한 동행, 부녀대면(父女對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