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청취와 새벽의 음율이 세상을 밝히고 있었다. 케실리온은 아직도 새근새근 자고 있는 시온을 내려다보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잡티 한 점 없는 뽀얀 얼굴위로 시온의 미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난감하군.’
케실리온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시온을 내려다 봤다. 새벽 수련시간이었다. 요즘 들어 기초수련부터 시작해 모든 것이 비정상적이었기에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마치 땀을 잔뜩 흘리고 샤워를 하지 않은 상태라고 해야 할까? 몸에 누적된 탁기를 제거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대신 아가씨를…”
알파가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케실리온의 마음을 짐작했다는 듯이 말하는 그녀는 봄에 피어나는 꽃처럼 생글생글한 미소를 띠우며 말했다. 마침 알파가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케실리온은 조심스럽게 일어나 알파와 자리를 바꾸었다.
“알파…”
수련을 하기 위해 몸을 틀던 케실리온은 약간 멈칫하며 알파에게 입을 열었다. 아직 새벽이었기에 레나와 프린이 서로 뒤엉켜 뒹굴고 있는 모습도 보였지만 아무런 내색하지 않은 케실리온은 오직 알파에게 조용히 말했다.
“…….”
“시온이 원하는 일이라면 들어줘라. …나의 과오로 인해 그 아이의 인생을 망쳤다.”
“분명 아가씨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왜 내가 시온의 말이라면 반박하지 않는 줄 알고 있나? 지옥의 부인들이 부탁한 것은 아무것도 이루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행동이 속죄라면 속죄. 난 그 아이의 아비가 될 자격이 없는… 존재다.”
케실리온의 씁쓸한 말을 듣고 있던 알파는 자신의 심장이 뜯어지는 듯 아파왔다. 쓸쓸하게 뒤돌아 어디론가 사라지는 케실리온의 뒷모습은 여전히 당당했고, 위용어린 모습이었지만 약간 축 처진 느낌이 들었다.
휘이잉!
평야에 한줄기 바람이 스쳐지나가자 주위의 풀들은 ‘사사사’거리는 소리를 내며 케실리온의 심정을 대변했다. 그리고 케실리온의 신형은 평야에서 씻은 듯이 사라졌다.
차르륵-
케실리온이 나타난 장소는 평야와는 거리가 떨어진 산속이었다. 풍류마신보에 의해 먼 곳까지 단숨에 도착한 케실리온은 검을 뽑아들며 눈을 살며시 감았다.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기 위해 펼쳐진 검무는 세차게 주위를 베어나갔다.
‘난 그 아이가 원하는 것이라면 모두 들어줄 것이다. 이건 스스로의 약속!’
검무가 계속 될수록 마음은 차분해졌다. 살며시 눈을 뜬 케실리온의 주위에는 거칠게 나뒹구는 나무 조각이며 풀, 그리고 거친 숨결이 남아 있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마음의 뜨거움에 자신도 모르게 절제가 되지 않은 모양이다.
“크르르-”
에리스의 던전과 가까운 산이었기 때문인지 몬스터들이 넘쳐났다. 검무에 빠져 주위를 살피지 않았기에 어느새 몬스터들이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거친 숨결의 정체는 몬스터들이었다. 누런 이빨 사이로 흘러내리는 끈적이는 액체는 땅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었다.
모두 야수형 몬스터였다. 맹수인 호랑이를 비롯해, 늑대, 심지어 쥐까지 모여 있었다. 모두 서로를 향해 으르렁 거리고 있었지만 좀처럼 앞으로 나서는 몬스터는 없었다. 녀석들은 채 가시지 않은 달을 향해 울부짖고 있었다.
끄저저적!
녀석들의 몸이 기이한 각도로 틀리며 상체가 하늘로 치솟고 있었다. 이족보행이다. 녀석들의 차디찬 살기는 케실리온에게 향해 있었다.
“고작… 동물의 피에 반응해 변한 건가!?”
케실리온은 이상한 점을 눈치 챌 수 있었다. 각기 다른 몬스터들이 집단으로 움직일 리가 없다. 거기다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조직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지만 뒤를 추적하는 느낌도 꺼림칙했다.
“크와왕!”
“누가 보내서 왔나? 레딕이냐? 추기경?”
“크아앙!”
녀석들은 케실리온의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이 소리를 지르며 주위를 감싸며 포위했다. 케실리온은 녀석들이 짐승에서 누군가의 피를 받아 저렇게 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짓을 벌일 자는 몇 명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그것이 과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이곳을 지나치며 보이지 않던 몬스터가 있다는 것은 어딘가 이상했다. 우연히 이곳에 있다고 할지라도 뭔가 이상했다. 녀석들의 행동을 주시하던 케실리온은 한 녀석이 거칠게 투레질 치며 허공을 향해 날아오르자 검을 들었다.
척-
“훗! 역시 과한 생각이었군. 지능도 없는 네놈들이 뒤를 쫓을 리 없지!”
케실리온은 피식 웃음을 터드리며 신형을 날렸다. 역시 과한 생각이었다. 요즘 신경이 무뎌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 케실리온은 무심(無心)을 유지하기 위해 마음을 다 잡으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무살(霧殺)”
츄아악!
안개속에서 펼쳐지는 혈전이었다. ‘무살’이라는 이름처럼 허공으로 뛰어올랐던 녀석들은 죽음마저 느끼지 못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이것은 케실리온이 가지고 있는 최고의 절기였다. 만검 1장 4초에 해당하는 살(殺)을 보완해 만들었지만 어떠한 변초도 없는 수법이었다.
깔끔하게 베어지는 몬스터들의 육신은 허공에 떠 있었다. 마치, 세상이 정지한 것처럼 멈춰서 있었다. 잠시 후 케실리온이 마령검을 살짝 사선으로 긋고 난 후 착검을 하자 허공에는 붉은 피가 수를 놓기 시작했다.
촤아아악!
비명도 반항도 없었다. 녀석들은 케실리온의 검에 의해 도륙당한 것뿐이었다. 어떤 고통도 없다는 듯이 여전히 살기등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놈들의 더러운 피로 나의 기분을 풀었다……, 심법은 돌아가서 해야겠군.”
주위는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더러운 피 냄새에 몰려드는 산의 포식자들은 강자의 피를 취하기 위해 모여들었다. 케실리온의 눈치를 살피며 모여든 몬스터들은 곧 케실리온이 사라지자 남은 시체를 향해 모여들었다.
우걱우걱- 까드득!
순식간에 죽은 몬스터들의 시체는 사라져버렸다. 이것이 양육강식의 법칙이다.
“케실리온! 어디 갔다 오셨어요? 아… 피 냄새.”
“…….”
케실리온이 돌아오자 시온이 다가섰지만 몸에서 풍기는 혈향에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허공에서 뿜어진 피가 몸에 배인 모양이다. 잠시 스스로 몸의 냄새를 맞아본 케실리온은 손을 살짝 휘저었다.
파앗!
클린(Clean)마법이었다. 순식간에 청결해진 모습에 모두 놀란 눈빛이었다. 좀처럼 잘 사용하지 않는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이따금씩 사용되는 마법이었기에 놀라는 표정도 이해가 갔다.
“케실리온님, 오늘내로 가까운 영지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제니어스인가?”
“아닙니다. 저희가 이동하는 경로가 서쪽에 치우쳐져 있어 제니어스를 지나쳐 다음 영지에 도착할 것입니다.”
알파의 말에 케실리온은 머리를 끄덕이며 마법을 준비했다. 대외적으로 알려진 모습은 지금의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폴리모프 마법으로 모습을 가리고 다녔기 때문에 변해 있는 게 좋을 것이다. 그 모습에 시온은 알파를 향해 물었다.
“알파 언니,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아, 아가씨… 언니라니. 지금 주인님께서는 폴리모프 마법을 위해 이미지하고 계신 겁니다.”
시온은 그게 무슨 마법인지 몰라 입을 앙다물었다. 모르면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알파! 검을 보관해라.”
폴리모프를 한다면 검을 지니기 불편했기에 알파에게 맡긴 것이다. 그 모습에 옆에 있던 시온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무인에게 있어서 검은 대단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넘겨줄 정도의 신뢰감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시온은 알게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진작 알파의 마음을 눈치 채고 있었지만 검을 줄 정도의 신뢰가 있는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약간 경계심도 들었다.
“폴리모프(Polymorph)!”
파아앗!
케실리온의 몸에서 강한 빛이 뿜어졌다. 그리고 빛 사이로 비치는 형체는 조금씩 줄어들며 기이한 소리는 울려 퍼졌다. 뼈가 부서지며, 강제로 압축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콰드득-
“위험하지 않나요?”
“괜찮습니다. 아가씨. 후훗…”
시온의 물음에 알파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잠시 후 빛이 사라지자 케실리온의 모습은 완벽하게 소년의 모습으로 변했다.
130cm 정도의 키에 야들야들한 살결(?)과 중성적인 이미지의 얼굴이 나타났다. 몸집도 작아졌기 때문에 시온이나, 알파의 품에 딱 들어갈 정도의 모습이었다. 시온과 알파는 성인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이가 본다면 누나, 언니로 보일 정도였다.
“슬슬 출발하지…”
목소리도 중성적이었다. 가느다란 목소리였다. 하지만, 무표정한 얼굴이 약간 카리스마(?)있게 보이게 만들었다. 그 모습에 시온은 엷게 미소를 지으며 케실리온의 곁으로 다가갔다. 바로 옆에서 걷고 있었기 때문에 누나와 동생, 혹은 언니와 동생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뭐야… 혼자만 케실리온 곁에 서고!”
“…….”
뒤에서 투덜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레나와 프린이었다. 약간 부러운 느낌도 드는 것인지 볼을 부풀리며 알파의 곁에서 애꿎은 흙을 발로 차며 프린에게 하소연하고 있었다.
“저런 모습의 케실리온님도 보기 좋네요.”
“흥!”
알파는 케실리온의 검을 가슴에 품고 레나에게 말했다. 그에 삐졌다는 듯이 콧방귀를 뀐 레나는 앞서 걸어가는 케실리온과 시온을 흘겨봤다. 하지만, 레나도 그렇게 싫지는 않은지 군 말없이 다음 행선지를 향해 걸어갈 뿐이다.
특별한 동행, 부녀대면(父女對面)
란델 제국의 수도 미스텔(Mistel)로 향하는 마차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동서남의 지배자 3대 공작을 더불어 그 하위에 있는 영주들까지 대거 참석하는 회의였다. 그들은 동대륙을 지배하는 테라스 제국에 관한 일에 대해 대국정 회의를 통해 해결하기 위해 모인 것이다.
귀족들의 움직임은 일주일 가까이 이어졌고, 대륙력 1911년 4월 25일에 이르러서야 모든 귀족이 황궁에 도착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마차는 역시 코리안 공작가의 마차였다. 그리고 3명의 공작 역시 황성에 도착했고, 국정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다.
4월 25일이 지난 26일 대국정 회의는 시작됐다. 황성의 회의실에는 적막감과 고요함이 감돌았다. 직사각형의 테이블 위에는 수많은 문장의 엠블럼(Emblem)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황제와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는 3대 공작의 문양이었다.
엠블럼은 각 가문의 상징과도 같다. 코리안 공작가의 엠블럼은 붉은 색과 파란색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둥근 모양이었고, 류드릭 가문의 문장은 포효하고 있는 늑대의 모습이었다. 또한, 카르멘의 문양은 푸른색 장미가 그려져 있었다.
그로부터 귀족 계급 순으로 나열되어 있는 엠블럼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었다. 모두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가운데 문앞을 지키고 있던 시종장의 커다란 외침에 귀족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대륙의 지배자 에반 드 란델 황제폐하께서 드십니다.”
우렁찬 시종장의 목소리에 모두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일제히 황제에 대한 예의를 취하며 부복했다. 이것은 황제에 대한 예의이며 충성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황제는 천천히 손을 올리며 입을 열었다.
“서대륙의 지배자인 나 에반 드 란델이 그대들의 충성을 받아들이노라!”
황제의 말이 끝나자 귀족들은 일제히 착석했다. 황제는 매와 매의 날카로운 발톱이 그려진 새 모양의 엠블럼을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자리에 앉았다.
“경들도 알 것이오. 요즘 테라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말이오.”
“폐하! 근 1년간 테라스의 움직임은 변함이 없사옵니다.”
에반 황제의 말에 카이룬이 대꾸했다. 그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침착했고, 위엄이 흘러넘쳤다. 또한, 카이룬 공작의 편에 서 있는 귀족들이 그에 호응했다.
“맞사옵니다. 폐하! 테라스의 움직임은 변함이 없사옵니다.”
카이룬을 옹호하는 자들은 모두 중립파의 귀족들이었다. 아직 황제파와 귀족파간의 세력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그저 중립파의 귀족들의 말에 가끔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다.
“허- 경들은 지금껏 뭘 했단 말이오! 카논 공작… 그대가 한마디 하시오.”
“예. 폐하. 모쪼록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카논 공작은 황제의 말이 떨어지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귀족들을 쳐다본 카논 공작은 손을 높이 들며 탁자를 내려쳤다.
쾅!
“동쪽의 국경선을 지키는 자가 누구라고 생각하나. 바로 나 카논 폰 코리안! 나다. 그대들의 알량한 말보다 몸이 먼저 움직이는 자가 누구인가! 바로 나다. 테라스의 움직임이 변함이 없어!?”
카논 공작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얼마나 흥분했던지 꽉쥐어진 주먹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그 모습에 많은 귀족들은 침묵을 지켰다. 카논 공작의 무위가 ‘그랜드 소드 마스터’에 등극했다는 것을 모르는 귀족은 아무도 없었다.
“테라스는 본 제국을 넘보고 있다. 1년간의 움직임과 서대륙으로 파견되어 추살된 세작들의 모습을 보고도 모르겠나!? 이렇게 탁상공론을 할 정도로 우린 느긋하지 않다. 지금도 테라스의 군대는 국경에 모여들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카논 공작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자리에 앉았다. 그 말에 모두 충격에 빠진 듯했다. 잠시 후 황제파 귀족들의 앞 다투어 입을 모았다.
“폐하, 본 국에서도 군사를 집결시켜야 하옵니다!”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에반 황제는 동요하기 시작하는 귀족들의 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카논 공작에 의해 원하는 대로 흐름이 흘러가기 시작한 것이다.
“조용히 하라! 카논 공작의 말처럼 우린 너무 안일한 대처를 했다. 언제 넘을지 모르는 테라스의 군대를 보고 두려움에 떨기보다. 군대를 모아 전쟁을 벌이는 것이 더 큰 힘과 용기가 되어 줄 것이야! 그리고 본 제국은 그랜드 소드 마스터가 두 명이다. 그들은 나의 힘이며 제국의 힘이다. 누가 우릴 막을 수 있겠는가!”
“와아아아!”
귀족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잠시 후 황제는 탁자를 한번 내려친 후 주위를 둘러봤다.
쾅!
“본 제국은 서대륙이라는 속박을 떠나. 동대륙을 제패할 것이다. 본 제국의 영원한 숙적. 테라스를 지도에서 없앨 것이야!”
에반 황제의 말에 모두 들뜬 마음과 전율에 침묵을 지켰다. 그때, 가만히 있던 귀족파 귀족 크롬이 입을 열었다.
“폐하! 라디안 왕국과 하멜 왕국은 어찌할 것입니까. 본 제국이 테라스를 칠때 뒤를 노리면 어찌할 것이 옵니까!”
“크롬 공작… 짐이 그걸 생각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것이오!?”
“으음… 아니옵니다. 폐하! 어찌 그런 생각을 하겠사옵니까.”
크롬 공작은 급히 황제에게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크롬 공작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에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황제에게 향했다.
“짐은 지저스 교에서 파견되는 사절단을 맞이할 것이오. 서대륙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는 지저스 교라면 라디안과 하멜을 견제하기에 충분할 터. 지저스와의 친분을 내세워 명분을 만들 것이오.”
완벽하게 보여 지는 황제의 발언에 많은 귀족들은 의자에서 일어나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황제파와 귀족파, 중립파의 귀족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입을 모아 외쳤다.
“모든 일은 폐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황제폐하 만세!”
“란델 제국 만세!”
그날 황제로부터 비롯된 많은 사안과 일들이 차근차근 진행되어갔다. 그리고 황성에 모인 귀족들은 지저스 교에서 파견될 사절단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이 일을 시작으로 란델 제국과 테라스 제국은 전시 체제를 비롯한 국경을 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날 밤 황성에 마련된 귀족들을 위한 여래개의 별채 중. 카이룬 폰 류드릭이 머무는 별채에는 은밀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황제가 주관하는 파티가 몇 분 남지 않았지만, 그들은 상관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쾅-
“벌민(Vermin)! 조용히 있으라 했을 텐데…”
황성 별채 내에서 큰 소음이 터져 나왔다. 카이룬의 침실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 굉음에도 누구도 감히 그곳에 발걸음 할 수 없었다. 은연중 풍기는 기운이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러, 러그님. 죄송합니다.”
벌민이라고 불린 사내의 외모는 추악했다. 황성의 회의실에도 참여해 있었으며, 카이룬을 옹호하는 등 많은 행동을 보인자였다. 더욱이 귀족파의 귀족으로써 중립파의 카이룬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세작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의 별칭은 고독(蠱毒)의 벌민(Vermin)으로 지저스교의 제 6 추기경으로 카이룬 공작에게는 수하에 해당하는 자였다. 지금 추기경회는 두 개의 파벌로 나누어지는 데 제 1 추기경과 제 2 추기경으로 파벌이 나누어진다.
“요즘 잡종 같은 놈이 너무 설쳐. 감히…….”
“잡종이라고 하시면…”
벌민의 말에 카이룬은 웨어울프의 눈으로 추악한 그의 몸을 쳐다보며 으르렁 거렸다. 제 2 추기경인 만월(滿月)의 러그(Rough), 즉 카이룬은 달의 종족으로써 웨어울프에 해당하는 종족이었다. 그는 전투와 살육을 즐기는 자였다. 그만큼 그는 피에 굶주려 있었다.
“크르르… 그림자족에서 뱀파이어족으로 변한 잡종. 신월(新月)의 크래센트(Crescent)! 레딕이라고 불리는 놈을 말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벌민이여…”
“죄, 죄송합니다. 러그님”
카이룬 공작은 점점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컨트롤하며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미 눈동자는 웨어울프의 눈으로 변해버렸지만 차츰 인간의 눈동자로 돌아왔다. 좌우로 벌어졌던 동공도 제자리를 찾아갔다.
“벌민, 왜 서부에 벌레들을 풀었지? 나의 명도 없이 독단적으로 움직이다니. 반항인가?”
“바, 반항이라니요. 이 벌민. 러그님의 충실한 수하이옵니다.”
“잔꾀 부리지 말고 왜 움직였느냐.”
카이룬 공작은 벌민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요즘 들어 다른 추기경들의 행동도 마음에 걸렸다. 자신에게 등을 돌려 크리센트, 즉 레딕에게로 향하는 그들의 행동에 괴씸함과 분노가 자리 잡았다.
“그것이… 라디안과 하멜의 영역을 확실하게 나누기 위해서였습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요즘 다른 추기경들의 움직임을…”
“으음… 확실히. 레딕 그 잡종에게 달라붙는 녀석들이 생기고 있지.”
“라디안을 견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라디안 측의 추기경들이 레딕에게로 돌아서고 있으니 견재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벌민은 숨을 고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저번 원탁회의에서 봤듯이 파벌은 확실히 나뉘었습니다. 얼마 전까지 갈팡질팡하던 매혹(魅惑)의 루즈(Rouge)와 미풍(微風)의 베인(Vain) 등 라디안 왕국의 모든 세력이 크리센트에게로 돌아섰습니다.”
“그럼 세력이 4대 4 파벌로 나누어졌군. 란델에서 두 명, 라디안에서 세 명. 딱 맞아.”
카이룬의 말에 벌민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잠시 후 목을 가다듬던 벌민이 다시 입을 여는 순간 카이룬의 얼굴이 굳어졌다.
“흠흠. 실상 균형이 맞춰진 것은 제 11추기경이었던 흑예(黑예)의 섀도우(Shadow)의 죽음으로 저희 측 파벌의 죽음으로…”
“닥쳐라!”
카이룬은 붉어진 얼굴을 구기며 거친 숨결을 토해냈다. 끈적이는 살기에 벌민은 몸을 떨어야 했고 사나운 눈빛에 몸을 사렸다.
“후… 그게 다 레딕 때문이다. 감히 비어있던 12번째 자리를 근본도 모르는 놈에게 주다니. 처단의 퍼니쉬… 요주의 인물이야.”
“예! 그는 실상 어떤 파벌에 속해있지 않은 존재로 반드시 우리 쪽으로 포섭해야 할 존재입니다.”
“차후에 생각하고, 슬슬 파티에 참석이나 하지. 레딕 녀석에게 약점 잡힐 수는 없지. 잘도 크롬을 조종하며 견제하고 있군. 더욱이 마왕의 편에 설 줄이야.”
“마왕의 편에 섰으니 더욱더 퍼니쉬를 끌어들여야합니다. 그는 북쪽의 마왕을 이긴 존재니까요.”
순간 별채에는 광기에 휩싸인 두 명이 눈을 번쩍였지만 삽시간에 광기는 사라지고 황성으로 향하는 두 귀족만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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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족보 작품삽화에 등록되어 있습니다.
아직 수정중입니다. 다음에 완성된 족보를 볼 수 있을 듯
특별한 동행, 부녀대면(父女對面)
7시부터 시작된 강행군은 오후 6시가 되어서야 다음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곳 역시 다른 영지와 비슷했다. 돌로 쌓아 올린 성벽과 해자가 있었고 성을 지키는 경비병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가끔 용병들이 의뢰를 수행하기 위해 상인들과 움직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남부의 영지가 그렇듯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위험지역인 만큼 긴장감이 흐르는 장소였다. 아무튼 케실리온의 일행들은 성문을 향해 걸어갔다.
장시간 움직였기 때문에 옷의 곳곳에 먼지가 쌓여 있었다. 약간 남루한 모습으로 비춰졌지만 각자의 몸에서 흐르는 기세는 어떤 존재보다도 뛰어났다.
“정지!”
해자를 지나 성문 쪽으로 다가서자 기사들에 비해 가볍고 조잡해 보이는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병사들이 앞으로 나서며 창을 겨누며 말했다.
“신분증을 제시하시오.”
창을 겨눈 두 명의 병사 중 한명이 앞으로 나서며 영지로 들어가기 전의 절차를 제시했다. 워낙 전쟁이 잦은 남부였기 때문에 이런 절차는 평민, 귀족을 막논 하고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가끔 말썽을 부리는 귀족도 있었지만 타 영지인 만큼 절차를 거쳐야했다.
“감히 누구에게…”
스륵!
알파의 행동에 케실리온은 살며시 그녀의 소매를 잡아챘다. 말썽을 일으키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소매 춤에 넣어두었던 용병패를 꺼낸 케실리온은 앞으로 내밀었다.
“C등급 이름 케실리온… 출생지 코리안 공작령.”
“지나가도 되겠나?”
케실리온의 반말이 거슬리는 지 녀석은 얼굴을 살짝 구기더니 머리를 끄덕였다. 하지만, 뒤이어 걸어 들어오던 알파, 시온들은 창 앞에 가로막혔다. 그 모습에 케실리온은 살짝 짜증이 일어났지만 꾹 참고 있었다.
“지나가도 된다고 했을 텐데?”
“물론, 신분이 증면된 존재만 지나갈 수 있지. 널 제외한다면 누구도 증명되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여는 녀석은 더러운 눈으로 알파와 시온의 몸을 쳐다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에 케실리온의 몸에서는 가는 살기가 뿜어졌다. 하지만 살기를 억누르며 가슴에 붙어 있는 엠블럼을 떼어 내며 앞으로 내밀었다.
“내 앞을 막지마라. 난 지저스교의 12성좌를 차지하고 있는 퍼니쉬라는 코드네임을 사용하고 있는 지저스의 검이다.”
“지, 지저스의 검!”
케실리온이 내민 역십자가를 쳐다보고 있던 녀석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지만 잠시 후 경외에 찬 표정으로 바뀌었다.
서대륙에서 지저스교에 대한 의미는 상당했다. 지저스는 신중의 신이며 세상을 창조하고 처음 강힘한 곳이 바로 서대륙의 디바인 내추럴(Divine Nature)이었다. 그리고 귀족들도 지저스교의 신자들이었다.
또한, 지저스의 검이라면 귀족들 사이에는 큰 명예와 영예를 뜻했기에 귀족들 사이에서도 조심스러운 이름이었다. 서대륙에서 딱 11명만 있는 지저스의 검이다. 1년 전의 일만 하더라고 그 위용은 충분했다.
11번째 검인 흑예의 섀도우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한 많은 존재들이 지저스교에 애도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새로운 검인 12번째는 은발과 은안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었다.
“으, 은발과 은안!”
두 명의 경비병중 하나가 케실리온의 머리카락과 눈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 둘은 절을 하듯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지저스의 검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짜증나는 군. 가자!”
케실리온은 오들오들 떨고 있는 두 경비병을 지나치며 영지의 내부로 들어갔다. 뒤에서 들리는 경비병의 말에 케실리온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자비를 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지저스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경비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영지 내부로 들어선 케실리온은 가까운 여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까의 일도 있었지만 장시간 움직였기 때문에 모두의 얼굴은 불쾌감이 떠올라 있었다.
짤랑-
‘바람이 머무는 곳’이라는 이름의 여관에 도착하자 알파가 앞으로 나섰다. 아까처럼 케실리온을 찬양하는 족속들의 모습이 보기 싫기도 했지만 괜히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케실리온은 뒤로 물러났다.
“어서오세요! 식당, 여관을 겸업하고 있습니다. 아- 당연히 욕탕도 있습니다.”
철저하게 단련된 영업용 미소와 멘트가 울려 퍼졌다. 여관의 카운터를 지키고 있는 풍성한 외모의 아주머니가 알파와 케실리온들을 맞이했다. 이 여관의 아줌마는 눈치도 빠른지 레나와 프린을 보며 ‘욕탕’도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음- 이틀 정도 머무를 생각입니다.”
“아하! 총 다섯 분이군요. 호호! 저희 ‘바람이 머무는 곳’은 1인실, 2인실, 3인실로 이루어진 여관으로 방은 어떻게…”
알파는 여관주인의 말에 케실리온에게 시선을 주었다. 당연히 결정권을 가진 자는 케실리온이었기 때문이다.
“으음… 1인실 하나, 2인실 둘이 좋겠군.”
“그렇게 해주세요.”
알파는 살짝 미소를 띠우며 여관주인에게 말했다. 잠시 후 1인실 하나와 2인실 두 개의 키를 꺼내들며 알파에게 건넸다.
“숙박과 식사가지 총 15실버입니다. 물론, 욕탕도 쓰실 생각이죠?”
“예.”
여관 주인의 씀씀이에 알파는 살짝 미소를 지었고 배정 받은 방으로 향했다. 이 여관은 총 3층으로 이루어진 중소규모의 여관이었다. 배정 받은 방이 모두 2층에 있었기 때문에 모두 2층으로 향했다.
“1인실은 당연히 아가씨께서…”
“응? 내가 왜 1인실이야?‘
“주인님께서 아가씨와 같은 방을 쓰게 할 수는…”
알파의 말에 시온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당연하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알파의 말에 시온은 살짝 기분 나빠졌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 케실리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틀렸다. 알파! 시온은 2인실을 사용한다.”
“…….”
순간 알파의 표정이 굳어졌다. 케실리온의 말이 큰 충격으로 다가온 모양이다. 지금까지 알파는 언제나 케실리온의 곁에 있었다. 응당 케실리온의 곁에 있을 줄 알았던 그녀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내가 1인실이다. 그렇게 알고 있도록.”
케실리온은 알파의 손에 있던 1인실 키를 가지고 배정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주위는 약간의 침묵이 흘렀지만 레나의 말에 다들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쿡! 지금 욕탕으로 가자. 지금이 아니면 여자들이 사용 못 한데!”
레나의 말이 효과적이었던지 알파와 시온은 군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방을 둘러본 여자들은 여관 옆에 있는 욕실로 향했다. 약간 밀패 된 공간이었기 때문에 안심하고 욕탕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모락모락-
뜨거운 열기가 욕탕에 퍼져있었다. 영지에 비해 잘 만들어진 욕탕은 갓 데워진 물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각자의 원통을 선택한 그녀들은 입속에 들어갔다. 뜨거운 물이 피부로 스며드는 것처럼 일말의 피로가 풀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언니, 알파 언니. 케실리온이 좋아?”
시온은 조용한 분위기를 털어내기 위해 알파에게 질문을 던졌다. 모두들 관심 있는 이야기였던지 알파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알파는 물의 온도 때문인지 얼굴이 붉어져있었다. 다행히 수증기 때문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했지만 시온은 은은하게 미소를 흘렸다.
“당연합니다. 수하로써 주인님을 좋아합니다.”
“진짜? 수하로써 좋아한다?”
“예! 다, 당연합니다.”
알파는 시온의 말에 내심 가슴이 떨려왔지만 태연하게 받아쳤다. 알파의 모습에 모두 김빠졌다는 듯이 욕탕에 축 늘어져버렸다. 순간 장난기가 발동한 것인지 시온이 살며시 물에서 빠져나오며 알파에게 다가섰다.
머릿속이 복잡해진 알파는 시온이 다가오는 것도 느끼지 못한 채 멍하니 케실리온을 떠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