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크 레이디(Dark Lady), 레나 칼리고
똑똑!
“레일 단장, 일이 틀어졌습니다.”
“뭐라고!? 분명 흔적을 지웠을 텐데?”
급히 문을 열고 들어온 기사의 말에 레일이라고 불린 기사 단장은 흥분한 표정으로 도리질 쳤다. 영지 내의 흔적은 넓게 포진되어 있으며 모든 흔적을 지웠다. 그란 영지의 기사들이 일을 잘못 처리했을 리가 없었다.
“일 처리를 어떻게 한 거야!”
“…죄송합니다.”
“단원들과 병사들은 영주성으로 집결시켜! 이번 사건은 함구에 붙인다. 영지의 위신이 걸린 일이야.”
레일 단장의 눈치를 보던 기사는 집무실의 책상에 멍하니 앉아있는 주군을 쳐다봤다. 아직도 고치지 못한 것인지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주군께서는…”
“젠장! 일이 틀어졌다. 어떻게 해서든, 저 소녀를 그들과 만나게 해서는 안 돼! 이곳은 나에게 맞기고 단원들을… 루퍼드 부탁한다.”
“알겠습니다.”
레일 단장은 문을 열고 사라지는 루퍼드를 쳐다봤다. 지금껏 영지를 수호하며 주군을 보좌해왔던 기사단의 부단장이다. 그 누구보다도 신임할 수 있는 자였기에 레일은 집무실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레나라고 했던가?”
“…….”
“미안하지만, 그들과 만나게 할 수 없네. 난 주군을 위해서…”
레일은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기사도에 어긋나는 짓을 했기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모양이다. 아무런 말도 없이 자리에 서 있던 레나는 천천히 레일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레일은 약간 흠칫 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들에게 피해 입힐 생각은 없어… 헤어질 것을 각오하고 살아왔으니까.”
케실리온들과 움직이며 보여주었던 활달한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보랏빛 눈동자는 멍하니 변해 있었다. 아마, 그녀는 오늘의 일을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것이 충격이다.
“그 마족과는 무슨 관계지?”
“관계…? 추악하고 더러운 세계에서 구해준 은인… 하지만 더 추악한 세계로 인도한자.”
레나는 1년이 되어가는 조잡한 기억의 파편을 떠올렸다. 멸시 받으며, 추악한 세계의 단편이 떠오르자 흐릿했던 눈동자는 생기가 넘쳐흐르는 것 같았다.
퍽!
지천에 널려 있는 돌에 사이로 한 소녀가 이마를 부여잡으며 피를 흘리고 있었다. 보랏빛 머리카락, 보라색 눈. 모든 것이 이질적으로 보이는 소녀였다. 너덜너덜한 옷자락에 때 국물이 진하게 번져있는 소녀였다.
“괴물! 마을에서 꺼져!”
“꺼져라!”
한 마을인 것 같았다. 란델 제국의 서쪽의 이름 없는 마을이었다. 제국과 왕국의 경계선인 디바인 내추럴(Divine Nature)과도 멀리 떨어진 장소였으며 다른 영지와도 상당히 떨어진 낙후된 지역이었다.
산골에 위치한 이 화전민들의 마을이다. 누구보다도 어려운 생활을 하는 곳인 만큼 언제나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려야 하는 곳이었으며, 각종몬스터의 위협에 숨을 죽여 하는 곳이다. 대국인 란델 제국의 광명에 비해 초라한 곳이었다.
“이놈들!”
“윽! 도망가자!”
화전촌의 아이들은 지래 겁을 먹고 도망가기에 바빴다. 소녀의 어머니의 등장에 혼비백산 한 것이다.
“나의 아이, 레나…”
“엄마… 왜 날 괴물로 낳으셨나요?”
흠칫!
“넌 괴물이 아니란다. 그냥, 그냥 특별한 존재란다.”
“엄마도 특별한가요?”
“그래, 네 아빠처럼 넌 특별하단다. 보랏빛 머리카락은 그 상징이야.”
“난 아빠가 없잖아요…”
레나의 말에 인자하게 웃음을 짓던 여인은 표정을 굳혔다. 언뜻 슬퍼 보이는 눈빛이었지만 애써 감정을 다잡으며 레나를 집으로 이끌었다. 마을만큼이나 초라한 집이었지만 두 모녀는 어떤 곳보다 행복의 장소였다. 바람을 막아주는 곳, 안전한 곳, 유일하게 안식을 취할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집이다.
땡땡땡!
“모, 몬스터!”
집으로 들어가려던 여인은 마을입구에서 들리는 종소리에 겁먹을 표정을 하며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마을 사람들 역시 겁을 먹고 집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가는 모습이 곳곳에 비춰졌다. 이따금씩 마을의 남자들이 농기구를 들거나 조잡하게 만들어진 죽창으로 대항하기에 바빴다.
오크 30마리였다. 녹색의 피부에 좌우로 튀어나온 송곳니가 인상적인 몬스터였다. 뭉개진 코는 어떤 모습보다도 추악한 괴물의 모습이다. 하지만, 마을의 남자들은 겁먹은 표정을 지으며 30마리의 오크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피골이 상접한 인간과 전투와 살육에 익숙한 몬스터의 대결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차가운 대지에 몸을 누이고 나서야 몬스터들은 식량을 잡아끌며 유유히 사라졌다. 이건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몰살이 아닌 것이 다행이었다.
“어, 엄마! 무서워요.”
“괜찮아. 분명… 괜찮을 거야.”
쾅쾅!
오크의 재앙이 사라진지 꽤나 오래됐지만 모녀에게는 다른 시련이 남아 있었다. 마을의 질시와 분노를 고스란히 그 가족에게 뿜어졌다.
“마족 계집! 당장 이 마을을 떠나!”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소리를 질렀다. 마을 사람들의 말처럼 레나의 아빠는 하급마족이었으며, 엄마는 인간이다. 즉, 레나는 반마족이다. 재앙과 저주의 상징인 마족! 그런 모녀를 마을에서 살 수 있었던 것도 기적에 가까웠다. 하지만, 마을의 대다수가 몰살당한 마당에 두 모녀를 이곳에 살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오크에게 사용하던 무기를 고쳐 쥐며 두 모녀에게 겨누었다.
쾅-
안락하던 집은 사람들의 발길질에 무너졌고 레나의 엄마는 마을 사람들의 창에 죽었다. 그리고 레나는 마을에서 쫓겨났다. 당연히 그녀는 홀로 산에서 나갈 수밖에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사람들을 만났지만 그것은 노예상인들이었다.
수많은 노예들의 틈에서 어디론가 흘러갈 뿐이었다. 그리고 레나는 이 세상을 저주했고, 또 저주했다. 엄마를 빼앗아간 마을을 저주했으며, 이렇게 태어나게 한 아빠를 저주했다. 그 순간 그녀의 앞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파멸시킬 것만 같은 마족이 나타났다.
[아름다워… 그 눈빛. 약하다는 것을 한탄하는 몸짓.]
보랏빛 머리카락의 존재의 등장에 레나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동질적인 느낌과 이질적인 느낌이 동시에 드는 존재, 자연히 머리가 숙여지는 절대자의 등장에 레나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너의 목소리에 난 이곳에 왔다. 서쪽의 마왕이자 추악하고 더러운 자의 아버지. 키메라 킹 아케인 칼리고.]
서쪽의 마왕이자, 키메라 킹이자! ‘샤프모어 칼리고’의 아들이 바로 아케인 칼리고다. 그는 세상의 추악함과 분노, 저주스러운 한탄에 부름을 받아 중간계에 강림했다. 하지만, 장시간 있을 수 없는지 약간 힘들어하는 표정을 지었다.
[너의 소원은? 나를 불러낸 아이여.]
“……내가 살던 마을을… 없애줘. 엄마를 죽인 그곳, 엄마를 아프게 한 그곳. 나를 이곳으로 내몰게 한 그곳. 흔적도 없이…”
[이루어질 것이다. 넌 나의 딸로 다시 태어나 추악한 세상을 바꿀 것이다. 세상의 문이 열리기 전… 나의 수하는 널 찾아 갈 것이다. 다크 레이디, 레나 칼리고…]
팟!
서쪽의 마왕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가 있었다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레나의 마음 한 구석이 아파왔다는 것이 그것을 증명한 뿐이었다. 그리고 레나는 하염없이 기다렸다. 세상으로 팔려나갈 날을… 그의 수하라고 불리는 자가 올 날을… 그리고 그녀는 삶의 활력소를 찾았다. 케실리온이라는 존재를…….
“그는 서쪽 마왕의 수하… 날 인도할 자.”
레나는 서쪽 마왕과의 계약을 후회했다. 케실리온이라는 존재를 만나면서 즐거웠고 삶의 활력소를 얻었다. 하지만, 후회할 수도, 거부할 수도 없는 마왕의 존재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
레나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어둡게 내려깔린 세상에 후회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쾅! 콰콰쾅!
“무, 무슨!?”
기사단장 레일은 갑자기 들려오는 폭발음에 긴장했다. 집무실의 내벽까지 금이 갈 정도의 파괴력에 놀란 것이다. 분명 굉음의 장소는 영주성 입구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급히 창가에 다가선 레일은 입구에서 벌어지는 일에 입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 인간이 아니야… 어찌 저런!”
레일은 순식간에 영주성의 성문을 날려버리는 은발의 존재에 넋을 놓았다. 인간으로써, 저런 수법은 있을 수 없었다. 그 뒤를 따르는 2명의 여인은 차갑게 냉기를 풍기며 가로막는 병사들을 날려버렸다.
다크 레이디(Dark Lady), 레나 칼리고
쾅!
영주성의 정문이 부서졌다. 주위로 비산하는 쇳조각과 나뭇조각은 애처롭게 땅에 흩뿌려졌다. 그란(Gran)의 문이 부서짐과 동시에 많은 병력이 주위를 둘러쌌다. 영지의 자치대와 기사들이 앞을 가로막으며 살기를 뿌려댔다.
“더 이상의 접근은 불허한다.”
은빛의 풀 플레이트 아머와 검은색으로 수 놓여 있는 망토가 바람을 따라 흔들렸다. 그와 비슷한 갑옷을 착용하고 있는 기사들이 도열해 있었다.
숨 막히도록 차가운 눈빛을 흘기는 케실리온의 표정에는 옅은 감탄과 흥미로 가득 차 있었다. 납치범들 치고는 잘 정렬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 모습만큼이나 그란 영주의 모습이 보고 싶어졌다.
“불허한 다라…….”
“없애 버릴까요?”
케실리온의 짧은 말에 알파가 앞으로 나서며 중얼거렸다. 그 모습은 얼마나 차가운 비수로 꽂혔던지 주위에 있던 기사들은 흠칫 거렸다. 하지만, 알파의 외모에 긴장을 푼 것인지 처음과는 다르게 느긋한 표정이었다.
스윽-
케실리온은 알파에게 명령을 내리기보다 뒤로 물러서라는 듯이 손을 번쩍 들었다. 130cm 정도 밖에 되지 않은 소년이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이 약간 우스꽝스러웠지만 이곳에 집결해 있는 그 누구도 비웃지 않았다.
“누가 누구를 납치하던 상관하지 않는다.”
“그럼 돌아가라!”
케실리온은 웃는 얼굴로 앞에 있는 기사에게 외쳤다. 그 말에 풀 플레이트 갑옷은 약간의 소음을 내며 앞으로 나섰다. 거칠게 도리질 치는 소리에 케실리온의 표정은 굳어졌다.
“하지만… 그 점이 나의 기분을 망쳤다. 나의 앞에서 납치했다는 것. 그 하나 만으로도 너흰 끝이다.”
주춤-
케실리온의 거침없는 말에 앞으로 나섰던 기사는 약간 주춤거렸다. 눈빛과 몸에서 뿜어지는 기운에 동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말하나 하나에 의지가 전해졌다.
“그란 기사단의 부단장, 루퍼드다. 처음에도 말했지만 그 누구도 이곳을 지나갈 수 없다.”
“대단한 자신감이군.”
그란 기사단의 부단장이라고 스스로 밝힌 루퍼드는 은색 머리카락의 소년을 쳐다봤다.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없는 공포심이 유발됐다. 거기다 어린 외모와는 다르게 안정되어 있었고 자신감이 넘쳐났다.
루퍼드는 그 자신감이 넘치는 소년의 기세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지만 영지의 위신이 걸린 일이었다. 또한, 주군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곳을 사수해야 했다.
“이곳을 넘고자 하는 자.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쿠쿠쿡, 지금 나랑 기사놀이 하자는 말인가!?”
씨익!
케실리온은 루퍼드의 말에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은색 갑옷이 거칠게 흔들리는 꼴로 그런 말을 내뱉으니 웃기지 않을 리가 없었다. 케실리온은 줄기줄기 뿌리는 살기를 거두어드리며 한걸음 앞으로 나섰다.
“나의 권태로움을 없애준 보답이다. 처단(處斷)의 퍼니쉬(Punish)! 네가 지키고자 하는 곳을 짓밟으며 비웃을 존재. 약하다는 것을 한탄하라!”
케실리온은 알파에게 마령검을 받았다. 마령검의 길이가 1미터를 조금 넘는 것을 생각하면 검을 쥐고 있는 케실리온의 모습이 약간 우스꽝스러웠다. 130센미터의 키에 100센티미터의 검을 잡고 있다고 생각해보라. 아마 웃길 것이다.
“……쳐라!!”
루퍼드는 천천히 접근하는 케실리온과 3명의 여자들을 보며 급히 소리쳤다. 약간 주춤거리던 기사들과 병사들은 칼과 창을 앞세우며 케실리온에게 달려들었다.
척!
“…….”
말없이 검을 고쳐 쥔 케실리온은 돌진하는 기사들과 병사들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자세였다. 검의 길이에 약간 주춤거릴 것으로 예상했던 모습과는 달랐다. 자신의 키만 한 검을 쥔 모습은 어딘가 이상했지만 또 다르게 보면 대단했다.
“마음껏…….”
케실리온은 옆에 있던 시온과 알파, 프린에게 시선을 주며 중얼거렸다. 끝까지 말을 맺지 않았지만 달려드는 적을 처리해도 된다는 뜻이었다. 이미 검을 쥐고 있는 시온은 케실리온의 오른쪽에 서 있었고 알파는 왼쪽을 향해 섰다.
“우아아아!”
병사들의 외침이 시발점이 되었다. 잠자코 있던 케실리온은 그 자리에서 씻은 듯이 사라졌고 프린은 케실리온의 자리를 대신하며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리고 주위로 몰아치는 핑크빛 물결에 병사들은 머리를 움켜쥐며 몸을 비틀었다.
“마인더, 적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마인더라는 정령의 외관은 많이 변해 있었다. 처음 케실리온의 앞에 섰을 때 보다 명확한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만큼 프린이 성장했다는 증거였다.
프린 만큼처럼 핑크빛 머리카락과 선홍빛 눈을 가진 마인더의 머리에는 마녀가 쓰는 고깔모자를 뒤집어쓰고 있었고 어딘가 맹하면서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한, 외모는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었다. 오른손에 쥐어져 있는 초승달 모양의 지팡이는 신비롭게 비춰졌다.
끄덕-
모자를 눌러쓴 마인더라는 정령은 프린의 명에 따라 머리를 끄덕이며 지팡이를 가슴으로 모았다. 그 순간 하늘에는 핑크빛 빛이 쏟아지며 일정 공간의 적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선사하기 시작했다.
“크아아아!”
무시무시한 정신계 정령마법이었다. 단순하게 느껴지던 정신계 정령이 이런 결과를 낳자 알파도 놀라운 눈으로 프린을 흘깃 쳐다보며 적을 쓸어 넘겼다.
창!
“크으으… 이 정도라니!”
케실리온의 검을 가로막은 루퍼드는 침음 성을 터뜨리며 재차 검을 비틀었다. 공격할 틈이 없었다. 주위에서는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쓰러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왔다. 3명의 여자를 보며 비웃던 루퍼드는 자신을 자책했다.
“어린 나이게 이 정도의 검술이라니!”
“설마 네 녀석이 잘나서 나의 검을 막았다고 생각하는 건가?”
케실리온은 루퍼드의 말을 받아쳤다. 경악하던 루퍼드는 케실리온의 말에 방어만 하던 자세를 바꾸며 검을 찔러 넣었다. 살을 주고 뼈를 깎을 모양이었다. 자기 자신도 당하면서 상대의 목숨을 취하는 동귀어진의 수법이다.
챙!
“장난하는 건가? 아까의 각오는 어디 갔지?”
“날 농락하는 건가……. 그런 것이란 말이냐! 난 기사다.”
루퍼드는 은발의 소년이 자신을 농락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방금 전의 수법은 자신이 목숨을 걸고 펼친 수법이었다. 검이 풀 플레이트 아머를 뚫고 들어오는 것을 감수하면서 까지 펼친 수법이다.
동작이 크면 갑옷의 빈틈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감수하면서 펼친 수법을 간단하게 막혔다는 것은 자존심과 기사로써 치욕으로 다가왔다.
“기사가 힘을 주나? 귀족들이란… 명예, 명예 거리면서 정작 강자 앞에서는 비굴해지지. 안 그런가?”
“기사를… 귀족을 모욕하지마라. 네 놈을 죽여 치욕을 씻겠다.”
루퍼드의 말에 케실리온의 표정은 싸늘해졌다. 천진하며, 장난기 어린 표정은 사리진지 오래였다. 표정이 처음으로 돌아가자 루퍼드의 표정도 굳어졌다. 너무나 싸늘한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실력도 없는 벌레가……. 모욕은 약자에게 주어지는 단어가 아니다. 네놈이 지껄인 말이 나에게 모욕으로 다가왔단 말이다!”
“…….”
“너희 같은 배부른 돼지들이 죽음을 아느냐!!”
케실리온은 백번, 천 번…… 아니, 만 번은 죽어봤을 것이다. 그의 앞에서 죽음을 운운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누구도 그의 앞에서 죽음을 운운할 수는 없다. 그는 죽음도 약함도, 강함도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지존(至尊)이다.
“네놈의 더러운 피로 치욕을 씻겠다.”
그 말과 동시에 케실리온의 검은 바람처럼, 어둠을 가르며 루퍼드의 갑옷을 향해 날아갔다. 정확히 심장이 있는 장소였다. 명치보다는 한 뼘 위, 오른쪽 어깨에서부터 한 뼘 왼쪽으로…….
……왼쪽 어깨에서부터 반 뼘 오른쪽에 있는 그곳을 향해 날아갔다.
“거, 검이!?”
스르릉!
케실리온의 검은 루퍼드의 롱 소드를 긁으며 정확히 심장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키도 50센티미터 이상 작았지만, 스피드도 매우 느렸지만 그는 케실리온의 검을 막을 수 없었다.
우그극- 푹!
“억! ……어, 어떻게!?”
두꺼운 풀 플레이트 갑옷은 처음부터 종이로 만들어져 있었던 것처럼 케실리온의 검을 막을 수 없었다. 명검 중의 명검, 마검 중의 마검! 마령검은 수천, 수만의 피를 뭍은 지고의 검이다. 그 검을 막을 수 있는 검은 세상에 몇 없을 것이다.
“이것이 강함이다…….”
케실리온의 말이 끝나자 녀석은 입과 눈, 귀에서 피를 토해냈다. 내장이 파괴되면서 각혈이 눈, 코, 입, 귀 등으로 역류한 것이다. 처참하게 무너지는 루퍼드의 모습은 참담했다.
“수천, 수만의 피로 검을 손질한… 무위를 키워온 나! 나의 앞에서 죽음을 운운하지마라.”
촤악!
케실리온의 검이 심장에서 뽑혀 나왔다. 뽑는 순간 피분수가 쳤지만 케실리온의 주위에는 이미 기(氣)의 막이 펼쳐져 더러운 피를 막았다. 밤공기가 서늘했던지 루퍼드의 상흔(傷痕)에는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단번에 절명했기에 루퍼드의 눈은 부릅떠져 있었고 눈가에는 고통과 비참함 등 알 수없는 감정에 피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미 주위가 정리 된 것인지 시온과 알파, 프린이 케실리온의 곁에 섰다.
“케실리온님, 정리가 끝났습니다.”
“가지…….”
케실리온의 씁쓸하고도 단백한 말에 시온과 알파는 주위에 펼쳐져 있는 지옥도와는 다르게 웃고 있었다. 하지만, 프린은 약간 침울하면서도 우울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피로 물들었어.”
“응? 뭐라고 했지. 프린.”
“아니. 손이 더러워 져서…….”
프린은 애써 케실리온의 말을 얼버무리며 뒤를 따랐다. 프린의 눈동자에 비친 검은 하늘에 떠 있는 두 개의 달이 비춰졌다. 아침과 빛을 상징하는 쥬얼과 밤과 어둠을 상징하는 스칼렛이 빛을 뿜어대고 있었다.
오늘 따라 유난히 붉은 스칼렛이 핏빛으로 비춰졌다. 역겨운 혈향과 식어가는 시체들은 말 없이 죽음을 스스로 애도했다.
다크 레이디(Dark Lady), 레나 칼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