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란 기사단(Gran Knights)의 기사단장 레일은 멍한 표정으로 영주성의 내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5층 높이의 성에서 내려다보니 모든 것이 보였다. 가장 신임하는 루퍼드의 죽음과 기사단과 병사들의 전멸이 눈에 들어오는 순간 루퍼드는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붉은 길이 펼쳐졌고 은발의 소년은 영주성의 가로수와 정원을 지나 성내부로 다가서고 있었다. 바람만큼이나 거침이 없는 소년, 소녀의 모습에 레일은 멍하니 있는 영주의 얼굴을 쳐다봤다.
“그란 영주님…….
“…….”
다시 들려오지 않을 대답이라는 것을 레일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마족의 사술에 걸려 이지를 제압당했기 때문이다.
“어째서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이것이 몰락의 길을 걷고 있는 그란의 미래란 말입니까. 그란의 주인이시여…….”
그란 영지는 3대에 걸쳐 몰락의 길을 걸어오고 있다. 남부의 실세라고 불리 우는 류드릭 가문을 향해 반발과 불만을 토로한 그란은 철저하게 농락당했고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그란은 백작의 작위를 가지고 있었으며 중앙귀족의 실세중의 실세였다.
권력은 배부른 자의 탐욕을 불러오는 결과였다고 해야 할까? 3대 공작가문으로 불리는 류드릭 가문을 향해 도전장을 내민 그란 백작가는 철저하게 유린당했고 몰락의 길을 걸었다. 찬란하던 백작가의 이름은 2단계 하향된 남작의 작위로 강등 당했다.
또한, 무력과 물력을 대부분 류드릭 가문에서 가져가벼렸다. 그것은 란델 제국의 실세라고 불리는 류드릭 가문의 힘이었으며, 반항하는 가문은 몰락시켜버리겠다는 무언의 힘이었다. 그 후로 그란 영지는 남부 지방에서나 이름을 떨치는 하급귀족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유지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마족에게 제압당해 버린 그란 영주와 납치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며 은발의 소년에게 유린당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정확히는 은발의 소년과 흑발, 청발, 핑크빛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에게 유린당할 처지에 이르렀다.
“크흐흑……”
레일은 비통함에 피로 얼룩진 눈물을 흘렸다. 눈의 모세혈관이 파혈된 것인지 붉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의 심정은 억울함과 비통함이 어려 있었다. 기껏 영지의 발전을 꽤하며 가문을 일으켜 세우고 있건만 마족의 침입에 이렇게 다시 몰락의 길을 걷게 될 줄 몰랐던 것이다.
“영주님…… 어찌해야 한단 말입니까. 수십 년간 일궈온 영지와 영지민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그란 영주의 이름은 ‘아사룬 그란’이었다. 선조의 유지를 이어 남작가의 오명을 씻고 백작가로 약진하기 위해 지금껏 영지를 키워온 자였다. 여색을 피하며, 배부른 돼지가 되지 않기 위해 물욕을 금했다.
그 어떤 영지의 영주보다 수수했으며 오직 영지와 영지민을 위해 살아온 귀족 중의 귀족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비통한 일이 벌어졌으니 충직한 기사인 그가 피눈물을 어찌 흘리지 않을 리가 있으랴…… 기사단장 레일은 진정한 기사였다.
“……레나라고 했던가? 레이디에게는 못할 짓을 했구려. 사죄 받지 못할 죄를 지었소.”
“…….”
레나는 말없이 그를 쳐다봤다. 피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이었지만 어떤 자보다 충직한 모습이었다. 영주의 곁에 서서 호위를 서듯 자리를 잡고 있는 그는 검을 뽑기 위해 허리에 걸려 있는 검집을 움켜쥐었다.
스르릉-
“비록 기사도에 어긋난 짓을 했다고 하나, 난 기사요. 영주의 검이다. 기사의 맹세를 잊지 않는 한. 영주님을 위한 검이 되겠다.”
쾅!
레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집무실의 문과 벽이 무너져 내렸다. 5층 꼭대기에는 자욱한 연기가 창문의 틈사이로 뿜어져 나왔다.
“네놈이 영주인가?”
도도하고 시린 은안이 레일에게 쏟아졌다. 무심하도록 시린 그의 목소리에 주변의 공기가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난 영주의 검! 그란 나이츠의 기사단장 레일이다. 비록 몹쓸 짓을 했다고 하나…….”
“그, 그만! 더 이상 말하지 마세요.”
레일 단장의 말을 끊은 레나가 케실리온의 앞을 가로막았다. 레나는 속으로 많은 생각과 고뇌가 스쳐지나갔다. 피눈물을 흘리며 영지와 영지민을 생각하는 레일이 갸륵하면서도 섬뜩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 때문에 벌어졌다는 생각에 눈앞이 이슬에 가려졌다.
“케실리온… 네가 생각하는 일로 이곳에 있는 게 아니야.”
“……무슨 소리지? 앞길을 가로막는 벌레들을 봤다. 납치당한 것이 아니라면 뭐지?”
평소보다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케실리온의 모습에 레나는 가슴이 쓰라려왔다. 노예시장에서 봤던 모습과 겹쳐지면서 아릿한 느낌이 들었다.
“노예시장…… 기억나지?”
심장에서 느껴지는 쓰라린 느낌을 참으며 레나가 입을 열었다. 노예시장, 그 누구보다 케실리온이 잘 알고 있다. 누구 때문에 그곳에 팔려갔으며, 코리안 공작가와 이곳에서 있을 수 있는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
“나를 샀으며 나를 양녀로 들였기 때문이야.”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끄덕-
레나는 약간 몸을 떨었지만 머리를 끄덕였다. 케실리온은 겉으로 레나를 무시하며 귀찮아했지만 처음으로 따뜻하게 이야기를 건네줬던 존재였다. 마음 속 깊은 곳에 호감을 감쳐두고 있었기에 레나의 말에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그건 이유가 되지 못한다. 왜 정식으로 요청하지 않았나. 독을 쓰면서 까지 널 납치해갔다. 설사 그것이 납치라고 하지 않더라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케실리온의 말에 레나의 표정이 굳어졌다. 케실리온의 말은 어떤 것도 흠잡을 것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이야기가 되지 않았다. 독과 일단의 집단을 통해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그것은 명백한 납치였기 때문이다.
“아, 아니야…….”
“됐소. 레이디 레나. 비굴하게 구걸은 하지 않겠소. 나를 끝으로 모든 것을 눈감아 주시오. 나의 지시였소. 이유는 말하지 못하겠으나 나의 지시에 나의 의지로 그녀를 납치했소.”
애써 부정하는 레나를 향해 머리를 약간 숙인 레일 단장은 당당하게 영주의 앞에서며 케실리온을 향해 말했다. 이미 죽음을 초연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그 때문에 그는 당당했으며 기백이 넘쳤다.
“많은 수하들과 영지의 힘이 사라졌소. 나를 끝으로…… 그대의 치욕을 푸시오.”
레일은 케실리온의 앞에 서며 무릎을 꿇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온과 알파도 놀랄 정도의 당당함이었다.
지금껏 그 누구도 케실리온을 향해 저렇게 당당한 요구를 한 자가 있던가! 돼지처럼 비굴하게 혹은 어리석게 깔보던 자 뿐이었다. 제니어스처럼 예외적인 존재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그를 두려워했으며 뭣도 모르게 깔봤다.
“너의 목숨이 그렇게 귀한가? 나의 분노를 풀 정도로…….”
“나의 목숨으로 되지 않는 다면, 그 어떤 것도 내어줄 수 없소이다. 나의 목숨도 영지도, 영주님도……. 죽더라도 막을 것이오. 약하더라도 막을 것이오.”
“우습군. 그딴 소리는 힘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지키고 싶다고? 막고 싶다고? 약한 주제에 그딴 소리를 하다니 건방지군.”
케실리온은 레일을 향해 차갑게 소리쳤다. 저런 녀석은 짜증났다. 힘도 없으며 쥐뿔도 믿을게 없으면서 저런 소리를 하는 녀석은 짜증났다. 강자 앞에 굴복하지 않는 녀석은 무지했으며, 짜증나고 귀찮았다.
“지켜? 넌 그저 애써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힘 앞에 굴복하는 것을…… 힘도 없는 것들이 그런 소리를 하지. 주제도 모르고 지킨다고 지껄이는 놈들이 제일 짜증난다.”
“…….”
케실리온의 말에 녀석은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곧 침착한 얼굴로 입을 다시 열었다.
“그렇기에 인간이요. 기사인 것이다. 지킬 것이 있을 때야 말로 가장 용감하며, 강하다.”
“크하하하! 재밌어……. 약한 것은 죄다. 무수한 깨달은 말해주고 있다. 약한 것은 죄다. 강함은 곧 법이다. 더 이상의 문답은 무의미 하다. 꽤 괜찮은 놈이었다만, 건방진 그 입을 저주하라.”
케실리온은 자신이 깨달은 것을 중얼거리며 일갈을 터뜨렸다. 공간이 터질 듯 살기를 내뿜는 케실리온은 천천히 마령검을 들어올렸다.
“그, 그만……. 케실리온! 납치당한 것은 나야. 하지만, 네가 나설 이유는 없어. 이건 내가 원한 일이니까. 그러니…… 떠나줘.”
멈칫-
케실리온은 레나의 말에 마령검을 집어든 손을 멈칫 거리며 허공에 멈춰 세웠다. 갑자기 심장이 쑤시며 왠지 모를 감정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검사(劍士), 무인(武人)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감정이다. 오직 검을 갈망하고 다음 경지를 향한 욕망과 적을 쓰러트릴 살심, 살기만 있으면 충분하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자 역시 케실리온이다.
마음을 죽이는 훈련은 마음의 검을 날카롭게 하며 상승을 향해 갈망하는 의지만이 남게 만들었다. 사치스러운 감정들을 죽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케실리온은 가슴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의미모를 감정에 마령검을 회수했다.
“제발… 이곳에서 떠나줘.”
“…….”
휙-
케실리온은 마령검을 회수하는 즉시 알파를 향해 검을 던졌다. 갑작스럽게 검이 허공으로 날아오르자 알파는 당황했지만 익숙한 표정과 익숙한 동작으로 마령검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하지만, 검에서부터 들려오는 애잔한 검명은 알파마저 침울하게 만들었다.
“시온, 알파, 프린…… 가자!”
“으음…….”
“케실리온님의 뜻대로.”
“…….”
케실리온의 말을 이어 차례대로 시온, 알파, 프린 순으로 침음성과 짧은 대답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프린은 아카데미에서부터 친구인 레나가 남는 것을 보며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으로 쳐다 볼 뿐 일체 말도 하지 않았다. 애써 등을 돌리며 떠나가는 케실리온을 보지 않겠다는 듯이 부르르 떨어대고 있는 레나의 가녀린 어깨를 쳐다 볼 뿐이다.
“레나……? 우린 언제나 친구지?”
“으응. 친구…… 흑, 흐흑.”
프린은 집무실을 나서며 레나를 향해 들릴 듯 말 듯 한 말을 하고 케실리온의 뒤를 따랐다. 간간히 들려오는 레나의 말과 흐느낌으로 프린은 찹찹한 마음에 사로잡혔다. 평소 그녀와 자주 놀았던 레나가 정면에서 봤다면 놀라운 모습일 테지만, 레나는 등을 돌리며 울고 있었다.
“프린! 그곳에 남을 건가?”
“아니…….”
케실리온의 말에 프린은 짧게 대답하며 집무실에서 멀어져갔다. 지독하게도 시린 밤하늘이었다.
저벅, 저벅-
그렇게 케실리온과 시온, 알파, 프린의 발자국 소리는 영주성에서 완전히 멀어졌다.
“흑, 흐흑…….”
“왜 그러신 겁니까.”
“…어차피 가야할 길이니까. 그럴 바에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면 좋잖아요.”
레일은 레나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한 표정을 지었다. 막상 휘몰아치는 차가운 밤바람에 몸을 움츠리며 감사의 인사를 건넨 레일은 망토를 벗어 레나의 몸에 둘러줬다. 여전히 흐느끼는 레나의 모습에 연민과 안타까움, 그리고 마족에 대한 분노가 물씬 풍겨났다.
“……그대의 말처럼 약한 것은 죄인 것 같소. 저 가녀린 소녀의 슬픔을 없애지 못하는 무능한 기사인 내가 부끄럽소이다.”
케실리온의 살기로 인해 금이 가버린 창문을 통해 붉게 타오르고 있는 쌍월의 달인 스칼렛을 쳐다봤다. 오늘 밤은 어떤 밤보다도 힘겹고 살 떨리는 밤이었다. 그리고 붉게 타오르는 스칼렛의 달이, 애처롭게 붉은 달에 대항하는 쥬얼이 슬프게 보였다. 마치 레나의 슬픔을 알고 있다는 듯이……
……케실리온은 영주성에서 물어지며 하늘의 쌍월을 쳐다봤다. 오늘 밤처럼 쓸쓸하게 내리쬐는 달은 없을 것이다. 아직도 애처롭게 눈물을 흘리며 앞을 가로막던 레나의 모습이 아른 거렸다. 왠지 짜증나면서도 힘이 빠지는 모습이었다.
“……저, 케실리온님. 괜찮으십니까?”
“흠, 뭘 말하는 거지.”
“레나 말입니다. 그대로 두고 와도 되는 건지.”
“자기 의지로 남아 있는 것을… 내 알바가 아니겠지. 오늘 여관에서 머무르고 내일 바로 이곳을 뜬다.”
케실리온의 말에 알파는 머리를 숙이며 시온의 곁에 섰다. 더 이상 케실리온을 자극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레나와 이름 모를 기사 때문에 심란한 표정을 짓고 있는 케실리온의 모습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시온과 알파의 마음을 콕콕 쑤시기도 했다. 기사와 케실리온의 대화를 통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케실리온에게 난 뭐지? 소중한 존재 일까?’
‘케실리온님에게 난 짐인가?’
시온과 알파는 각각 생각하며 뒤를 따랐다. 생각이 깊어질수록 심장이 쿵쾅거렸고 칼로 찌를 듯이 가슴이 아파왔다. 이 감정을 뭘 로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이 하늘에 떠 있는 쌍월의 달을 올려다봤다.
다크 레이디(Dark Lady), 레나 칼리고
똑똑!
“준비가 끝났습니다.”
문밖에서 알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벽의 공기만큼이나 상큼한 목소리였지만 케실리온에게는 어떤 느낌도 들지 않았다. 일말의 동요도 없는 눈빛으로 문을 주시하던 케실리온은 침대에서 일어나며 문을 향해 걸어갔다.
저벅저벅-
무거운 발걸음만큼이나 마음도 무거웠다. 보통 새벽시간에는 명상과 운기조식을 통해 머리를 맑게 하고 몸을 최상으로 만들었겠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요즘 들어 수련을 하면 머리가 아파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어제 레나의 행동에 심적 동요를 일었다.
“불편함은 없으셨습니까?”
“뭐… 불편함은 없었다.”
알파의 물음에 케실리온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던 알파의 표정도 괜히 굳어졌다. 케실리온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은연중 느낀 것이다. 그렇게 케실리온을 1층으로 이끈 알파는 시온과 프린이 기다리고 있는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어제 선불로 주었던 돈이 있었기에 식사와 목욕은 옵션이었다. 잘 차려진 식탁을 보며 얼굴을 구긴 케실리온은 시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아침으로 먹기에는 과하다고 생각되지 않나? 그것도 육류로.”
“에이… 깐깐하게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앉아.”
시온은 왼쪽 눈을 찡긋 거리며 옆에 빈자리를 가리키며 케실리온에게 손짓했다. 아마 케실리온의 불편한 심기를 풀어주려고 한 모양이다. 아무튼, 케실리온이 자리에 앉자 옆에 있던 알파도 케실리온의 곁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오리고기와 기본적으로 나오는 빵과 스프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케실리온은 시온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오리고기를 한입 베어 물었다. 입가에 묻어나는 기름기가 거슬렸지만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그렇게 조용한 식사를 마친 케실리온은 시온을 시작으로 의자에 앉아 있는 3명을 차례대로 쳐다봤다. 한명, 한명 눈동자를 마주치면서 둘러본 케실리온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부터 쉬지 않고 디바인 내추럴로 향한다.”
갑작스러운 케실리온의 말에 알파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쉬지 않고 가겠다니요.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상당합니다. 초행이신 시온님과 프린이 불편할…….”
“그만!”
케실리온은 조리 있게 말하고 있는 알파의 말을 자르며 테이블을 살짝 내려쳤다. 테이블이 약간 흔들리며 주위는 다시 조용해졌다.
“그 문제라면 신경 쓸 필요가 없을 텐데?”
“아가씨는 그렇다 치더라도 프린은……”
케실리온의 말에 알파가 다시 한 번 나섰다. 은안이 번뜩였지만 알파는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둘러봤다. 다행히 여관주인은 꾸벅꾸벅 졸고 있었기에 안심한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프린은 인간입니다. 고작 11살, 나이에 비해 강하지만 어린애입니다. 너무 먼 거리…….”
“언제부터 나의 말에 토를 단 거지? 알파…… 나랑 맞먹자는 뜻인가?”
“그, 그건…… 죄송합니다.”
케실리온은 싸늘한 말에 알파는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숙였다. 알파는 케실리온의 살기보다 무심하도록 차가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에 심장이 터질듯 한 느낌을 받았다.
언제나 자신에게 만큼은 차갑지만 따뜻한 표정을 짓고 있던 케실리온인 만큼, 그 충격은 대단히 컸다. 머리를 푹 숙인 알파를 쳐다보던 시온마저도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너의 뜻은 알겠지만 더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다. 유색의 비드를 찾는 것이 궁극의 목표다. 그걸 잊지 마라 알파.”
“알겠습니다.”
케실리온의 말에 알파는 조용히 말했다. 어깨가 처지는 모습을 보였지만 겉으로 내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케실리온도 알파의 풀죽은 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입맛은 안 맞았지만 배도 부르니 슬슬 출발하자.”
조용히 케실리온의 말을 듣고 있던 시온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활기차게 말했다. 애써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노력이 가상했다. 잠시 주춤거리던 알파도 억지웃음을 지으며 일어났다.
애초부터 짐은 없었기에 준비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간단하게 육포와 같은 것을 여관에서 산 일행들은 여관을 나서며 그란 영지의 반대쪽 입구로 걸어갔다. 새벽이었기 때문인지 영지내부는 조용했다.
안개가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이었다. 막 태양이 떠오르는 시간이었기 때문에 케실리온은 조용한 기분을 만끽하며 영지를 나섰다. 등 뒤로 커다란 영주성이 눈에 들어왔다. 창문이 깨진 영주성 5층 쪽에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케실리온은 무시했다.
“가자…….”
바람에 나부끼는 은발을 쓸어 넘긴 케실리온은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 디바인 내추럴을 향해! 유색의 비드를 얻기 위해! 약 900년간 이어온 약속을 위해…….